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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메갈-이후’를 봐야 할 때
이제 ‘메갈-이후’를 봐야 할 때
  • 손희정
  • 승인 2016.09.30 1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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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최근 우리사회의 민감한 이슈로 떠오른 메갈리아 문제에 대해, 여성학자 손희정 씨와 권김현영 씨의 글 2편과 독자 정혁 씨의 글을 게재합니다. 이는 본지 9월호에 게재된 ‘뭐, 메갈리안이 페미니스트라고?’(필자 이영희)에 대한 반론 내지 다른 관점의 글들로서, 독자 여러분에게 사고의 깊이와 너비를 한층 확장시켜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본지가 예민한 주제인 메갈리아 문제를 다룬 것은 우리 사회의 억압구조 속에서 불거진 핫이슈를 흥미 위주의 일회성이 아니라, 보다 진지한 성찰적 담론의 화두로 끌어오기 위함입니다. 본지는 지속적으로 여성 뿐 아니라, 우리사회에 소외되고 배제된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관련 글들을 게재해왔습니다. 필자와 의견이 비슷하시든 다르시든, 독자 여러분의 다채롭고 건강한 피드백을 기대합니다. - 편집자 주 


 
▲ <유리에 비친 여자>, 2016-권재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지난 달 메갈리아(이하 메갈)를 “최악의 넷 커뮤니티”라고 명명하는 글을 게재했다. 이 글은 이미 수없이 반복된 논의를 그저 되새김질하고 있을 뿐이기에, 그에 대해 반박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대신 우리는 좀 더 유의미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2016년 10월 현재, ‘남초’ 인터넷 커뮤니티에 모여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유희로 즐겼던 이들이 머물러 있는 자리와, ‘여초’ 인터넷 커뮤니티에 모여 그 혐오발화를 ‘미러링’ 했던 이들이 도달한 자리는 과연 어디인가? 일베는 여전히 일베이고, 오유조차 일베가 되고 있는 이 시점에, 메갈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기실 메갈은 페미니즘의 또 다른 이름으로 프로-페미니스트 대중 속으로 스며들어가 ‘포스트-메갈’ 시대를 열고 있다. 일베가 퇴행의 공간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때, 메갈은 스스로의 힘으로 여행과 모험을 시작했다.

혐오, 주체화와 타자화의 동학

우선 우리는 ‘포스트-메갈’ 주체의 탄생에 대해서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메갈리아가 세계를 망친다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집중하는 것은 ‘혐오’라는 정서다. 우리는 혐오를 단 하나의 국면으로 단순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혐오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감정'이기 전에, 한 인간이 이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감정이다. 깨끗하고 단정한 신체적 경계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감정인 것이다. 우리는 건강과 안녕 등을 위협하는 어떤 대상들을 혐오하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다. 몸에서 나온 분비물이나 썩은 냄새 등에 대한 혐오 등이 한 예다. 이때 혐오의 감정은 본능적으로 ‘불쾌’를 감지한 생명체가 그 불쾌로부터 비롯되는 위험을 피하라고 스스로에게 보내는 경고다.
또 한편으로 혐오는,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회화되고, 그렇게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감정이다. 예컨대 우리는 육체적으로 완전히 합일됐던 어머니와의 관계를 극복하고 그로부터 분리되어 사회적 언어를 학습해야 한다. 이때 ‘어머니’는 최초의 혐오 대상으로 구성되며, 이러한  ‘사회화'는 사회가 요청하는 가치들을 내면화하는 과정을 포함한다.(1)
이렇게 개인의 신체적 안전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기본적인 감정인 혐오는, 마찬가지로 집단의 안전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감정으로도 확장된다. 그런 상황 속에서 관습적인 정체성을 견고하게 지킴으로써 이득을 얻는 사람들 및 그 사람들에게 복무함으로써 ‘낙수효과'를 누리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은 집단적 정체성을 교란하는 소수자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고 배제한다. 타자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성별이원제’에 기반한 이성애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이 혐오의 대상으로 구성되고 ‘사회적 타자'가 되는 것이 적절한 예 중 하나일 것이다.(2)
따라서 혐오는 개인적/사회적으로 강력한 주체화의 동학인 동시에 타자화의 감정이다. 이것은 ‘나와 다른 것’을 타자로 구성함으로써 주체가 되는 과정을 추동하는 정서다.
한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자, 주류인 자, 즉 이미 사회적 주체로 선 자는 이 혐오를 내면화하고 실천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사회를 조절/조정하기 위해 ‘타자화’에 집중하게 된다. 이 타자화에서 비롯된 ‘여성혐오'가 여성젠더의 사회적 소외로 이어지는 것은 이로 설명할 수 있다. 결국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물리적 폭력을 증가시키고, 제도적 차별을 자연스럽게 만들며 그렇게 여성 젠더를 실존적 위기로 내몬다.
반면, 메갈리아 등에서 인터넷 언어를 경유해서 ‘남성혐오'를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오히려 강력한 주체화의 동학에 가깝다. 이는 지금까지 온/오프라인 공간에서 제대로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했던 여성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그렇게 여성들은 비로소 자신의 언어를 통해 ‘주체'가 되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감정'으로서의 ‘남성혐오'는 인정하지만,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남성혐오'는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성들의 일상적인 경험으로부터 촉발된 남성에 대한 어떤 혐오의 감정은 남성을 폭력이나 제도적 차별로 내몰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의 효과는 타자화에 집중된 것이라기보다는 주체화에 집중된 것인 셈이다.

메갈리아 이후의  페미니즘

물론 여성혐오와 싸우는 감정이 또다시 혐오임을 염려하는 것은 당연하다.(3) 그러나 이 염려는 여성과 남성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동등한 주체라는 가정 하에서만 유효하다. 여성이 남성에 대한 혐오를 통해 남성을 사회적 장으로부터 배제하고 있다는 평가는 성급하다. 이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주체가 아니고, 이제 여성들은 이 주체화의 과정을 ‘다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주체화의 과정으로부터 페미니스트들이 등장하고 있다.
메갈의 미러링이 열어준 장을 통해서 주체가 되기 시작한 여성들은 정체성의 정치에 집중했다. 그 정치가 놀라운 파급력을 가지고 가시화됐던 것이 ‘강남역 10번 출구’라는 추모의 장이다.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구호가 보여줬던 것처럼 여성들은 한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을 여성 자신의 문제로 ‘동일시=정체화’했다. 물론 이런 추모와 저항의 물결을 보고도 수심 가득한 이들은 염려의 목소리를 지우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중산층-원주민-비장애인-이성애자-시스젠더 여성”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배타적인 ‘피해자주의’가 아니냐며 말이다. 그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예컨대 ‘이주여성’의 죽음이었다면, 여성 대중의 움직임이 그처럼 폭발적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불어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강남역 10번 출구’라는 계기가 만들어 내고 있는 또 다른 액티비즘의 흐름들이다. 해소된 것이나 다름없는 메갈리아를 붙들고 여전히 징징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지 않는 것은, 포스트-메갈의 주체들이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는가이며, 그들 중 일부가 어떤 활동들을 조직하고 그 운동의 의제들을 어떻게 확장시키고 있는가다.
나는 며칠 전 ‘2016 여성회의’에 참여해서 포스트-메갈 액티비스트들을 만났다. 이들은 강남역 10번 출구, 부산페미네트워크, 불꽃페미액션, 리벤지포르노아웃, 페미당당, 페미디아 등 다양한 조직을 결성하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조직의 성격도 자율적인 개인들의 느슨한 연대에서부터, 정당 창당을 목표로 하는 그룹, 협동조합의 형태로 자본주의라는 물적 토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그룹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관심이 활동의 중요한 추동력이었지만, 김포공항 청소노동자 투쟁에 연대하는 등 노동문제에도 눈길을 돌리고 있었고, 각종 세미나를 통해 문제의식을 확장하려는 노력 역시 함께 하고 있었다.
당신들이 걱정하는 그 ‘혐오세력’이 얼마나 다양하게 분화되어 확장되고 있는지, 그런 이들이 도달해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에 시선을 돌린다면, 넷상을 떠돌고 있는 워마드 식 혐오 발화의 몇 가지 예 를 붙들고 부들부들 떠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스스로 질문하게 될 것이다. ‘피해자주의’에 빠져있는 것은 오히려 일베류와, 그들의 혐오에 ‘남성불안’이라는 면죄부를 부여하고 있는 이들이다.

페미니즘에 남겨진 과제 중 하나

이제 메갈은 실체라기보다는 상징적 개념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위에서 소개한 젊은 세대의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은 “메갈리안 미러링에 동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상관없이 우리가 메갈리아의 영향 아래에서 등장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기실 페미니즘 앞에 놓인 풀기 어려운 과제는 이것이다. 액티비즘이 메갈리안 미러링과 선을 그으면서 다양한 운동으로 분화가 되고 있다고 해서, 이런 주체들이 등장할 수 있도록 견인하는 에너지이자 계기가 되었던 메갈리아, 그리고 워마드를 쉽게 버리고 가도 괜찮을까하는 것. 이 질문은 현실에서 페미니스트 액티비즘이 워마드와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살펴본 것처럼 포스트-메갈 주체는 다양하게 분화되고 있으며, 거기에는 우리가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입장들과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포스트-메갈 주체들이 내부의 차이를 넘어, 서로 연대할 수 있느냐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예컨대 액티비스트들을 ‘꿘충’이라고 부르는 주체와 워마드식 미러링을 비판하는 주체 사이에 연대는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사유해야 하는 이유는 실제로 메갈리아와 워마드에서 활동했던 여성 네티즌들이 명예훼손과 모욕죄 등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소송을 당하거나 경찰의 수사 대상이 되면서 인터넷상에서의 시민권을 박탈당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워마드의 활동 역시 대단히 위축되었다. 일베 80만과 워마드 2~3만이라는 숫자상의 비교만 보더라도 사실 두 집단의 ‘동일 비교’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워마드 활동에 대해서는 이미 공권력과 민간이 합세해 치열한 역공을 펼치고 있다. 그렇게 고소‧고발 당한 메갈리아와 워마드는 넷으로부터 완전히 축출됐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넥슨 성우 계약해지 사태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역공과의 싸움은 실제로 생계와 생존을 건 싸움이라 넷상에서의 시민권 문제에만 한정되지도 않는다.
나는 ‘오래된 페미니스트’로서, 포스트-메갈 지형에서 페미니스트로 거듭난 여성주체들이 (특히) 워마드와 선을 그으면서 ‘진정한(=오래된 페미인 나와 연대할 수 있는) 페미니스트’로 거듭나는 것은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쉽게 생각해 왔다. 그러나 현실에서 과격한 방법론을 통해 각성의 계기를 만들고 더불어서 다양한 공론장을 열어젖힌 당사자들은, 한국 사회는 물론 페미니스트 액티비즘으로 부터도 미끄러지고 있다. (게다가 현실적인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그렇다면 나는 (혹은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워마드를 도구화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물론 워마드는 자신의 운동을 계속하고 있지만, 그 운동이 지속되려면 그 역시 페미니즘 내부의 차이를 고려한 연대가 필요하다.
페미니즘에 던져진 과제는 “워마드는 당연히 페미니스트 전사다, 그러나 그 방법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식의 손쉬운 단정이 아니라, 이 시기를 열어낸 자들인 그들과 어떻게 소통하고 연대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공론장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다양한 매체들에서 메갈리아를 둘러싼 논쟁을 다루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론장이 갖추어야 할 균형 감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양쪽 입장의 목소리를 ‘똑같이’ 듣는 것은 아닐 터다. 균형 감각이란 이미 기울어진 판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을 바탕으로 갖추어지는 것이다. 그런 성찰을 각 매체에 요청하고 싶다.  


글·손희정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페미니스트. <문화/과학>, <여/성이론> 편집위원.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 중. 공저로 <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 <10대의 섹스, 유쾌한 섹슈얼리티> 등이 있고, 역서로 <여성괴물>, <호러영화> 등이 있다.


(1) 이 과정에 대해서는 쥘리아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서민원 역, 동문선, 2001 참고.
(2) 기본적 정서이자 사회적 정서로서의 혐오에 대해서는 마사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조계원 역, 민음사, 2015 참고.
(3) 이런 염려에 대해서는 손희정, 「혐오의 시대 - 2015년, 혐오는 어떻게 문제적 정동이 되었는가」, 『여/성이론』 34호, 2015 참고.
(4) 이 문제의식은 ‘2016 여성회의’에서 만난 포스트-메갈 주체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조금 더 구체화되었다. 그들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어, 우선은 그 이름들을 괄호 안에 넣는다.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질문을 던짐으로써 어떤 한계를 직면하게 해준 그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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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
손희정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