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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갈리아의 거울에 비춘 세상
메갈리아의 거울에 비춘 세상
  • 권김현영
  • 승인 2016.09.30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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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과 여1>, 2016 - 권재원

메갈리아(이하 메갈)가 탄생한 것은 작년 5월 메르스 사태를 전후해서였지만, 메갈에 대한 입장이 전방위로 요구된 것은 올해 7월에 있었던 티셔츠 사건 이후였다. 티셔츠 사건이란, 대단히 많은 맥락이 있지만 혹시나 모를 독자를 위해 아주 간단하게만 정리하면, 게임회사 넥슨에 고용된 한 성우가 “소녀에게 왕자는 필요 없다”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었는데, 그  이유로 유저들의 항의가 쇄도하자 계약을 종료(당)한 사건이다. “소녀에게 왕자는 필요없다”니…. 처음엔 너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성 유저들이 게임 속에 등장하는 8~13세 소녀들에게 빈유니 거유니 하는 설정값을 매겨가며 왕자님 놀이를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니 이 문구의 현재적 의미가 비로소 이해됐다. 참고로 티셔츠를 입은 성우는 8세의 티나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된 것은 문구가 아니었다. 티셔츠를 구입한 행위 자체였다. 그 티셔츠는 <메갈리아4> 페이지를 삭제한 페이스북에 항의하기 위한 법정 소송 비용 모금을 목적으로 판매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메갈을 옹호하냐 아니냐”가 논쟁의 중심으로 들어온 것이다. 메갈은 여자 일베에 불과한 또 다른 혐오세력이라고 보는 이들이 있고, 여성혐오 세상에 맞선 유일한 당사자 집단으로서의 의미를 읽어내는 이들이 있다. 메갈의 전략인 미러링의 의미를 분석하는 논문만 벌써 10편 이상 나왔다. 미러링의 의미와 효과, 한계 등에 대한 분석 작업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이 글에서 나는 “미러링이 정치적으로 올바른가”라는 질문을 역사적으로 되묻고자 했다. 즉, 메갈리아에 결여됐다고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이란 대체 무엇이며, 무엇이 정치적 올바름을 결정하는가?

‘정치적 올바름’의 조건
 
이런 이야기들은 좀 더 나중에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메갈이 극단적인 페미니즘이라고 하도 욕을 먹으니, 지난 시절에 대한 고백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1990년대의 영페미니스트들은 종종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았다. 이성애에 대한 미러링으로 “개돼지만도 못한 헤테로”라는 농담을 즐겨한 적도 있고, 결혼을 원하는 남자친구에게 출산하지 않겠다는 걸 약속하는 의미에서 “정관수술을 하라”고 했다며 자랑스러워 한 적도 있었고, “고추말리기”라는 제목의 페미니스트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학교 전체에 여성의 보지를 형상화한 작품을 빨래 널 듯 전시한 적도 있고, 남성중심사회가 선호하는 미인이 되려면 죽기보다 힘들다는 메시지를 전할 요량으로 학교의 나무에 미인대회 복장을 한 귀신 마네킹을 매달기도 했다. 법망을 피해간 강간범의 차에 스프레이 칠을 하거나, 동네에 출몰하는 성기노출공격범을 잡기 위해 임의의 현상수배를 걸어 공권력을 사칭한 적도 있다. 
우리는 과격했고, 극단적이었고, 종종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활동들이 반달리즘이나 남성혐오라고 취급당한 적은 없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하는 이야기에 귀기울여주는 사회가 있었다는, 그런 감각이 남아있다. 새로운 그룹이 등장했다고 주목해주고, 재미있어하기도 하고 불편해하기도 하고 긴장하기도 했던 그런 분위기를 말이다. 
영페미니스트들은 우리 사회의 오래된 습관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을 가진 세력으로 이해됐고, 말의 구체적인 본새를 따져 묻기 보다는 문제제기의 맥락이 좀 더 중시됐고, 그러한 조건 속에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감각을 서로 만들어가는 순간들이 있었다. 문제제기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우리 사회를 더 낫게 만들 수 있다는 설득이 가능하기만 하면 무엇인가가 바뀔 거라는 생각이 들던 시기였다. 1990년대의 영페미니스트들이 했던 활동과 내용들은 대체로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제제기였다”고 이해됐다. 이것은 당시 우리가 했던 말이나 행동들이 온건하고 윤리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올바름을 ‘맥락적으로’ 이해하고자 했고, 앞으로 지켜가야 할 가치지향이라고 생각하는 ‘사회’가 있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혐오의 배경

하지만 IMF가 터졌다. 고개 숙인 아버지가 연일 구제금융시대의 대표적인 슬픈 자화상으로 등장해서 모든 동정심이 집중되던 바로 그때, 유통업과 금융업에서 일하던 30만 명의 여성들이 정리해고 됐다. 노동시장 유연화의 타격을 가장 먼저 받은 것도 취업전선에 막 뛰어든 여성들이었다. 이 모든 게 법제도적인 차원에서 성차별과 젠더기반 폭력이 금지되고, 고용평등과 성주류화가 국가적 의제로 채택되자마자 생긴 일이었다. 1998년 8월에는 자본가와 정규직 남성노동자들이 공모해 식당 여성노동자들을 집단 해고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우연적이고 단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시장에서는 고용형태를 바꿔가며 법망을 피해 노골적으로 여성들을 차별했다. 하지만 시장에 대한 규제는 거의 불가능했고, 여학생들은 민간기업에서 더욱 거세지는 성차별을 피해 9급, 7급 공무원 시험으로 몰려갔다. 1998년 5월 순천 철도 기능직 시험의 합격선은 100.5점이었다. 군가산점을 받지 않는 한 여성들은 시험에서 만점을 받아도 합격할 수 없었다. 이에 여성과 장애인 5명이 공무담임권 위반으로 군가산점 위헌소송을 했고, 1999년 12월 헌법재판소에서 군가산점 제도를 위헌이라고 판결한다. 이후 모두 알다시피 15여년간 인터넷에서 매일같이 젠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인터넷 상에 여초 커뮤니티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여초 커뮤니티들은 폐쇄적으로 운영된 경향이 있는데, 일부 남성들이 여초 커뮤니티 게시물을 무단으로 남초 커뮤니티에 가져가 여성혐오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하곤 했기 때문이다. 남성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말하는 즐거움을 안 여성들은 남성이 몰래 가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더 많은 방어벽을 만들어내야 했다. 하지만 남성들의 공간에는 그런 방어벽은 필요 없었다. 알아서 침묵해주거나, 아니면 맥락에 맞게 놀 줄 알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미러링과 아카이빙, 
이데올로기에서 담론으로

하지만 메갈이 등장하면서 남초 커뮤니티의 안온함은 사라졌다. 메갈의 무기는 여성혐오적 발화들을 수집해서 상연하고 그것을 고스란히 되돌려주는 미러링에만 있지 않다. 여성혐오발화를 수집해놓는 ‘아카이빙(Archiving)’ 또한 대단히 위협적이다. 아카이빙은 굳이 혐오발화를 수행하지 않아도 효과적으로 여성혐오 발화행위를 줄일 수 있는 전략이었다. 남초 커뮤니티에서 이루어진 여성혐오 발화를 박제하여 다른 독자들과 돌려보는 것만으로도 여성혐오 담론이 생산해내고 있는 진리효과는 반감되기 때문이다. 발화된 말의 사회적인 의미를 재구성하고 맥락상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 이런 과정을 쾌락으로 향유하는 데 매우 익숙한 메갈들에게 “너희들은 메퇘지”라고 부르며 혐오의 대상으로 삼아봤자, 이들은 산속을 뛰어다니는 귀여운 새끼 멧돼지떼 사진을 가져와 함께 키득거리는 것으로 응수한다. 
메갈은 이데올로기로서의 여성혐오를 작동하게 만드는 구조적 권력을 그들의 호명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효과적으로 무화시켰고, 여성혐오 발화들을 금지하거나 사과하라는 요청을 하기보다는 아카이빙과 미러링을 통해 여성혐오 발화들의 위치를 이동시켰다. 이로써 메갈은 여성혐오를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담론투쟁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나는 이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인터넷 상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여성혐오 현상들은 성차별주의라는 신념을 일관되게 실천하는 주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역차별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에 의해 주로 생산됐기 때문이다. 
즉, 여성혐오의 기저에 깔린 이데올로기가 성차별주의였다면 성평등주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차별금지 혹은 처벌을 통해 우리 사회가 더욱 정치적으로 올바른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설득을 하는 길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혐오가 일종의 담론적 실천이라면 이러한 발화들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발화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발화가 가능한 조건과 맥락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미러링과 아카이빙처럼 원래의 맥락을 비틀고 분리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상황주의(Situationism)’적 전략은 여성혐오의 조건을 변화시킨다. “된장녀라고 말하지 마, 김치녀는 없어”라고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말해봤자, 정치적 올바름 따위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세상에서 이런 주장이 먹혀들어갈리 만무하다.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울수록 더 많은 ‘○○녀’들이 등장했고, 마음의 성역이라고 생각되는 어린 소녀들마저 로린이(로리타+어린이)라는 이름의 이미지로 양각됐고, 드디어 맘충(蟲)마저 등장하고 있던 판이었다. 
이 여성혐오자들은 자신들이 된장녀, 김치녀 여성을 혐오하는 이유는 자신들을 무시하는 여성들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심지어는 성차별주의가 나쁘다고도 생각하지만 지금 차별받는 것은 오히려 남성들이라고 믿는다. 이들에게 여성혐오는 이데올로기적 실천이라기보다는 조야해진 남성의 위치를 조롱하고 평가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로서 호명된 여성소비자를 향한 대항폭력에 가까운 일이다. 
다시 말해, 여성혐오는 각 개별 여성들의 행동을 단죄하거나 평가하는 현상으로서 확산됐지 일관된 이데올로기적 태도로서 추구된 것은 아니었다. 소라넷 몰카, 리벤지 포르노, 데이트폭력 등의 범죄 사실들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여자가 나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여자를 폭행하고 살해하는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이 역차별 당하고 있다는 의식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그러니, 여성혐오와 싸우는 이들에게 정치적 올바름은 무기라기보다는 족쇄에 가깝다. 전략으로서의 정치적 올바름은 이미 실패를 거듭해왔다. 사회가 전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치적 올바름이 전략으로서 아무런 쓸모를 가지고 있지 않은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메갈리아의 거울이 비추는 세상이다.  


글·권김현영 
<남성성과 젠더>, <성의 정치 성의 권리> 등 여러 편의 공저가 있고, 성공회대를 비롯해, 여러 대학에서 여성학을 가르치고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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