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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앙지로부터 날아온 협조문
진앙지로부터 날아온 협조문
  • 박혜경
  • 승인 2016.10.31 16:5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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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의 사전적인 정의다. ‘이혼 : 혼인한 남녀가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결합관계를 해소시키는 일.’  틀렸다. 이혼이란, 혼인한 남녀가 서로를 죽임으로써 그들의 결합관계를 해소시키는 일 또는 그들의 결합관계를 서서히 죽여 나가는 일이다. 죽는다는 것은 아무런 은유도 아니다. 고상한 상징도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사랑은 이제 ‘죽었다’ 따위의.) 죽인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죽인다는 뜻이다. 피를 흘리고 손이 덜덜덜덜 떨리고 열일곱 살 난 여자아이가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리도록 만드는 ‘죽인다’이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애들 장난 같은, 결혼만큼이나 로맨틱한 이혼은 0.01%안팎일 것이다. 보통의 경우는 다양한 요소들이 골고루 섞여 있다. 액션과 서스펜스와 스릴, 공포와 범죄, 추리, 신파, 드라마. 골라먹는 재미 같은 건 없다. 이 모든 장르들은 동시에 오기도 하고 랜덤으로 여러 개가 뒤섞여서 오기도 한다. 

나, 나는 체르니 500번까지 쳤다. 손가락이 짧긴 했지만 굉장히 유연한 관절을 가지고 있어서 낮은 도부터 높은 도까지를 부드럽게 연결했다. 여덟 살 때 일 년 동안 피아노를 배웠다. 아홉 살 때 아버지 사업이 망했다. 아버지가 동업자의 돈을 떼어먹다가 걸렸다. 내 영창피아노에 사정없이 빨간 딱지를 붙이던 집행관에게 똥침을 놓았던 기억이 난다. 축축하고 기분 나쁜 아저씨의 엉덩이는 너무 단단해서 내 손가락이 아팠다. 분명 그 때문에 울었던 것 같다.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것은 단순히 피아노를 배웠다는 의미 그 이상이다. 그 기억 덕분에 나는 스스로를 조금 더 위안할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도 한때 영창피아노가 있던 거실에서 자란 시절이 있었다! 이런 기억은 내 우울에 품위를 더해준다.   

대체로 아버지는 비열한 인간이었다. 무능력할수록 나와 어머니를 더 못살게 굴었다. 자기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해 우리를 버러지 취급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의 사나이였다. 그와 보낸 어린 시절은 나 자신의 불완전함을 매 순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나는 그에게 사랑받을 것이라는, 불가능한 일을 위해 애를 썼다. 그래서 불행했다. 그러긴 했어도 나는 늘 내 일기장 한 쪽에 앨범에서 몰래 꺼낸, 그의 무릎에 앉아 찍은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간직했다. 사진 속의 그는 젊고 강해보였다. 무릎에 앉은 나를 가만 감싸고 있는 크고 잘생긴 손이 나를 안심하고 웃게 만드는 것 같았다. 사진을 찍던 순간이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가 보호하는 세계 안에서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학 졸업 전에 서울에 오게 된 건 행운이었다. 비록 그때 소개받은 직장의 사장이 6개월 동안 급여를 주지 않았지만 기뻤다. 그저 나의 유년, 나의 유년을 지배한 가족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졌다는 것이 신의 은총처럼 느껴졌다. 나는 스물 네 다섯을 거쳐 스물 일곱, 스물 여덟 그리고 서른 살이었다가, 기어이 서른다섯이 됐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어떤 ‘시절’로부터 완벽하게 분리되어 간다고 느꼈다. 나는 뿌리 없는 사람, 아무도 닮지 않고 나의 습관과 버릇을 스스로 만드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다양한 사랑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실패하기 전까지는.    

이 고백을 하기가 너무나 고통스럽다. 차라리 네 방귀 냄새가 정말 짜증스러워, 그쪽의 비듬이 자꾸 내 입에 떨어지니까 한 걸음 물러서 주세요, 따위의 말을 하는 게 덜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해야만 한다. 사랑하는 나의 사람들에게, 나는 피폐해졌습니다.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들다. 힘든데도 기대 이상으로 잘 해내는 내 자신이 더 힘들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나를 좋아했고 내가 끼는 자리는 늘 시끌벅적하고 활기 넘쳤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내게 와서, 내 몸 곳곳에 빠짐없이 충전단자를 꽂고 에너지를 훔쳐가는 걸 상상했다. 거리에서, 일터에서, 집에서, 카페에서, 사람들과 마주치고 난 뒤엔 물리적으로 아팠다. 아프지 않은 날은 내가 나를 아프게 했다. 빨간, 푸른, 청록색의, 깊고 영롱한 멍 자국이 생기면 한없이 평온했다. 처음엔 가볍게 손등의 핏줄을 잡고 비트는 것으로 시작했다. 피부조직 밑에서 퍼지는 아름다운 피멍자국, 하루가 지나면 푸른 물감을 섞은 것처럼 더 짙은 색으로 변했다. 멍이 있는 동안엔 모든 게 좋았다. 왜인지 알 수 없었지만 멍이 사라지면 모든 게 엉망이었다. 마치 신데렐라의 드레스처럼. 더 이상 설레지 않는 연애, 더 이상 긴장되지 않는 상사의 눈초리처럼 삶이 시시했다. 그런 식으로 나는 점점 전문가가 되어갔다. 그러다가 드디어는 더 이상 괴롭힐 수 없을 만큼 멍든 몸을 보면서 응앙응앙 울었다. 나타샤가 보고 싶던 당나귀는 아니었지만 돌아 갈 우리가 없는 망아지처럼. 흙바닥에 얼굴을 묻고 응앙응앙. 

그제야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로부터 멀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바로 그와 맞닿아 있었다. 내 아버지, 내 인생의 몇몇 시절을 처참하게 만든 내 아버지와. 나이가 들고 시간이 지날수록 여전히 나는 그의 그늘 아래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 나는 서 있는 땅이 천둥처럼 뒤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내가 두 발을 구르는 줄 알았던 사람, 그래서 내가 괜찮은 척 하면 땅이 요동치는 건 없던 일이 될 거라고 믿었던 어리석은 사람이다. 무너진 땅이 되었는데도 구조요청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울었다. 나를 이루는 모든 시간들 바로 아래에 겹겹이 쌓인 슬픈 순간들이 있다. 언제 다시 내 온 생을 크게 흔들지 모른다. 정말이지 이 고백을 하기가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러나 나를 멍들게 하는 대신 이 얘기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사랑하는 나의 사람들에게, 나는 당신들이 싫고 웃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내가 댁들 눈치를 보지 않을 거예요. 관심 없는 안부를 묻지 않을 거고 대화 중간의 어색한 공백을 위해 애쓰지도 않을 거예요. 그저 나를 구조하는 일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나의 사람들에게, 나는 피폐해졌습니다.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진원 위에 아프게 금 간 채 서 있는 사람들에게도, 모쪼록 이 밤을 무사히 넘기고 고강도의 지진에도 필요한 만큼만 금가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글·박혜경 
신자유주의 시대의 완벽한 실패자, 누가 물어보면 나답게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그럴 듯하게 대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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