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좌파의 욕망, 시민의 욕망에 먼저 말을 걸어라
좌파의 욕망, 시민의 욕망에 먼저 말을 걸어라
  • 한윤형
  • 승인 2010.02.04 16: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집/진보좌파의 길]한국 좌파가 신뢰를 얻으려면

하나의 물음이 있다. 쉽지 않은 물음이. 이 물음은 당신에게 어떤 당위적 과제를 해결하라고, 그러기 위한 방법을 고하라고 한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사회의 구조적 여건에 대한 분석이면서, 그 안에서 그것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주체의 활동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더구나 이 평가는 점수를 매기기 위한 ‘평결’이 아니다. ‘상황이 불리하니 그 정도 했으면 점수를 받을 만하다’는 식의 중간 평가가 허용되지 않는다. 당위의 세계에서 상황은 언제나 타개해야 할 무엇으로만 존재한다. 부조리하지만, 실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겠다는 결심 자체가 부조리한 거다. 그리하여 우리는 언제나 질책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그 질책은 다음의 활동을 구성하기 위한 것, 최선의 선택을 하고 기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어떤 어부를 위한 것이다.
 
전태일의 신화와 리영희의 망치

좌파는 대한민국이 성립하자마자 유토피아의 꿈을 들고 체제 안으로 들어올 권리를 박탈당했다.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꿈은 북쪽 공산주의 정권 지지를 의미했고, 그 욕망의 대가는 죽음이었다. 유토피아주의를 밖에 버려둔 채 대한민국 안으로 들어온 사회주의자도 독재자에게 죽음을 선고받았다. 이승만에게 사형당한 진보당의 조봉암과 박정희에게 사형당한 <민족일보>의 조용수가 그들이었다. 밤은 깜깜했다.

지독한 암흑을 밝히기 위해 한 청년이 자신의 몸을 불태웠다. 1970년, 스물세 살 청년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과 함께 분신 자살했다. 법전에 나온 노동자 권익을 요구하려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뒤의 일이었다. 전태일의 유지는 어머니 이소선이 이어받았다. 이소선은 전태일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달려온, 전태일이 살아생전 만나지 못했던 ‘대학생 친구들’과 함께 노동운동의 길을 개척했다.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은 성모 마리아였고, 전태일의 분신 직후에 장례식장으로 달려온 대학생 장기표는 사도 바울이었다. 그들은 경제성장의 이면에 가려진 피지배자의 고혈을 파헤쳤고, 그것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죄책감을 심어주었다.

전태일의 후계자들이 신화를 만들고 있을 때 한 지식인이 냉전시대의 우상을 망치로 때려부수기 시작했다. 1974년 <전환시대의 논리>와 1977년 <우상과 이성>을 저술한 리영희는 1970년대 대학생들의 ‘사상의 은사’가 되었다. 리영희는 미국과 중국의 해빙 무드라는 시대적 환경에서 절대악으로 규탄되던 현실사회주의 체제, 특히 중국 사회를 이성적 관점에서 재평가하고 자본주의 체제와 비교할 수 있는 대항마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오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중국 사회에 대한 리영희의 판단이 정확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리영희는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정보의 한계 내에서 합리적 비평을 했으며, 분단질서의 맹목에 생각하는 힘을 돌려주려고 했다. 전태일과 리영희, 아래로부터의 신화와 위로부터의 망치는 고통받는 민중에 대한 죄책감과 그것에 조응하는 ‘엘리트 먹물’의 자기희생을 기반으로 하는 한국 좌파의 기본 이미지를 구성하였다.
 
경전과 함께 나타난 신학자들

체제는 결코 전태일과 리영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전태일이 죽은 후에도 청계피복노조는 수배당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리영희 역시 해직과 복직을 반복하고 반공법 위반으로 복역하기도 했다. 1980년대는 체제의 외곽에서 운동하는 그들 조류의 계승이었다. 하지만 하나의 단절이기도 했다. 체제의 정점에 서 있는 대학생들 중 일부가 대학을 반체제 운동의 성지로, 일종의 해방구로 사유하기 시작했다. 체제 밖으로 밀려난 좌파들은 다시 유토피아주의를 찾아낸 것이다. 대학 진학률이 30%가 채 안 되는 시절의 일이다.

청년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은 선배들의 작업을 무시하고 직접 마르크스-레닌의 경전에서 자신의 이론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대학생들은 노동현장에 투신했다. ‘학출(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이 쏟아져나오자 청계피복노조의 이소선조차도 조합주의 혹은 기회주의라고 비판받는 상황이 펼쳐졌다. 민중 혹은 혁명이라는 대의에 복무하는 엘리트의 자기희생이라는 이미지가 훨씬 강화되었다. 학생들이 노동현장에 투신하면서 그들은 민중에 대한 죄책감을 넘어 민중을 지도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소련이 망하고 현실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었다. 이것은 특히 학출 활동가들에게 큰 혼란을 가져왔다. 많은 이들이 운동판을 떠났고, 어떤 이들은 ‘암중모색’ 끝에 보수 정당의 길을 택했다. 어떤 이들은 유토피아를 현존하는 역사에서 미래로 보내며, 또 다른 이들은 다시 한번 유토피아주의를 버리면서 진보 정당을 위한 길을 모색했다. 반면 1987년에 힘을 받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계속 ‘민주노조’의 길을 걸어갔고, 이는 훗날 ‘민주노동당 실험’을 위한 자양분이 된다. 남은 것은 소수의 학출 활동가와 노조 활동으로 노동자를 견인할 수 있다고 믿은 ‘노동자’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은 여전히 한국 좌파의 두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었지만 ‘현실사회주의’라는 ‘외부’의 경쟁자가 사라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자본가 계급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좌파 운동이 가능할 것인지는 불확실했다.
 
민주노동당 실험

‘민주노동당 실험’은 그때까지의 한국 좌파 운동 역량의 총집결이었으며, 우연의 산물이었다. 1997년 김영삼의 ‘노동법 날치기’에 분개한 민주노총 활동가들이 ‘진보 정당’의 필요성에 적극 동의하지 않았다면 민주노동당은 탄생할 수 없었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대중 조직인 민주노총에 기반했으며, 학생운동권의 양대 정파인 민족해방(NL)과 민중민주(PD)를 포괄했다. 물론 이런 기획은 학출 이론가들의 의도이긴 했다. NL은 ‘비판적 지지’의 전통 때문에 처음에는 진보 정당의 필요성에 크게 동의하지 않았지만 김대중 정부에 대한 실망감으로 훗날 민주노동당에 극렬 결합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생긴 정파 간 불균형은 ‘민주노동당 실험’을 실패로 치닫게 하는 큰 요인이 된다.

하지만 NL의 종북주의(잘못된 노선)와 패권주의(잘못된 행태)만이 민주노동당의 문제는 아니었다. 민주노동당은 좀더 본질적인 문제,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실험 내내 그것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중산층이 형성되면서 대중사회가 만들어졌지만 이것은 좌파의 공로가 아니라 ‘군부독재자’의 공로였다. (좌파 버전으로는 ‘민중’의 공로라는 시각도 있지만, 적어도 ‘민중’에겐 그렇게 이해되었다.) 말하자면 한국의 좌파는 서민 생활에 실질적 도움을 준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좌파는 종종 우파에 대해 ‘도덕적 우위’를 무기로 내세웠는데, 그 효과는 차치하더라도 민주당-열린우리당 노선의 순수화·급진화에 다를 바 없었다. 민주노총과의 관계에도 상반되는 의견이 있었지만, 민주노총이란 단체 자체가 ‘정규직 남성’ 노조라는 성 안에 갇혀버리면서 좌파는 ‘사회적 약자’와의 관계망과 그들을 대변한다는 이미지를 상실하게 된다. 민주노총 본연의 한계와 그것을 수수방관한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무능력이 빚어낸 결과였다.

당 활동 자체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의원들의 의정 활동은 수준급이었지만, 부유세 공약이나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같은 ‘성공한’ 구호들의 실천이 지지부진하면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는 점점 떨어지게 된다. 이른바 ‘일심회 사건’은 그러한 대중의 불신에 종지부를 찍었을 따름이다. 2002년 희대의 양강 구도에서도 당당히 100만 표를 얻었던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2007년 대선에서 그에도 미치지 못하며 참패했고, 민주노동당은 분당 수순을 밟는다.
 
활동가의 종언?

좌파의 여건이 좋지 않다는 건 분명하다. 한국 정치의 대립각은 계급이 아니라 지역에 세워져 있고, 지역보다 더 ‘합리화’해봤자 대북정책을 기반으로 한 협소한 친북·반북 이념 논쟁 위에 놓여 있다. 더구나 일찍이 체제 안에서 학살당한 좌파들은 각 영역에서 사회를 운용하는 데 도움을 줄 경력을 쌓을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학생 출신 활동가는 그 ‘경력 없음’을 통해 매도당하고, 노동조합 활동가는 ‘진짜 약자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비난당하는 것이 한국 좌파의 현실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러한 매도와 비난이 보수 정치의 ‘왜곡’이 아닌, 우리의 한계라는 것이다. 경력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주지 못하는 좌파의 무능력과 제 스스로 이념을 생산하지 못하는 우파의 무능력은 ‘변절’이라는 특이한 재생산 메커니즘을 한국 정치에 ‘정착’시켰다. ‘변절’은 정치의 일상적인 등용문이 되었다. 정치 파업의 권리를 판례로 거세당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한 체제의 유도에 의한 일이긴 하지만, 한국의 노동조합은 분명 노동자 중 살 만한 10% 정도만을 대변한다.

이만해도 충분히 암울하건만, 경력에 대한 의구심과 노동자를 규합하지 못하는 정치적 무능력보다 더 크고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그것은 과연 좌파에게 한국 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큰 그림이 있느냐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때 사람들은 ‘박정희 체제 회귀’와 ‘(신자유주의적) 개혁’ 중 후자를 택했다. 지금은 신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열망과 군부독재 시절 고도성장에 대한 향수가 버무려져 있다. 우리는 그들을 향해 혁명을 말할 수도 없고, 실현되지 않을 사민주의를 약속할 수도 없고, 심지어 다른 것도 할 수 없다. 진보 정당들은 민주당과 함께 ‘MB는 나쁜 놈’이라 성토하다가 민중을 위한 이러이러한 정책이 있다고 낱개를 꺼내어 들고 흔든다. 학교 앞에서 학생들을 현혹하는 분식 포장마차 아줌마와 다를 바가 없다. 그나마 학생이 먹고 맛있어한다면 다행이지만, 그들은 선거철에 그런 달짝지근한 음식을 얼굴 앞에 가져다 대는 꼴을 너무나 많이 봐왔다.

진보 정당을 지탱해왔던 활동가들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느냐는 것도 문제다. 진보 정당의 활동이 소기의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그 지속성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물론 ‘활동가의 시대’는 소소한 당원의 자발적 후원과 협력으로 당을 지속하는 당원 민주주의의 패러다임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하지만 활동가가 자신의 삶의 희생에 대한 어떠한 대가도 받지 못하고 퇴장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 <한겨레> 이종근 기자
좌파들은 ‘촛불시민’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자칭 시민계급’과 너무 유리되어 있다. 이 거리감은 너무 현격한 것이라 그들이 촛불을 예찬한다고 해서 줄어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소비자의 욕망’에 기초해 있는 촛불을 무작정 따라다니는 것이 좌파의 길도 아니다. 좌파가 ‘촛불시민’과 말을 섞지 못하고 그저 그들을 따라다닐 때, 좌파는 아직도 촛불에 대해서 타자이다. 분명한 것은 자본주의적 시민의 욕망과 자본주의를 벗어나려는 좌파의 욕망이 대화하고 섞이는 곳에서 좌파는 대중의 신뢰를 얻기 위한 단서를 얻게 되리라는 것이다. 좌파는 자신이 대중과 다르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대중과의 소통을 도모해야 하지 않을까?

 

글•한윤형
안티조선 운동, 민주노동당 당원, 진보신당 당원을 거쳤다. 인터넷 논객으로 활동했고, 저서로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 <뉴라이트 사용후기>, 공저로 <그대는 왜 촛불은 끄셨나요>가 있다. 현재 <안티조선 운동사>(가제)를 저술 중이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한윤형
한윤형 info@ilemonde.com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