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승리의 1차 답안지와 새로 받은 문제지
승리의 1차 답안지와 새로 받은 문제지
  • 김훤주
  • 승인 2010.02.04 16:54
  • 댓글 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집/진보좌파의 길] 되돌아본 2008년 사천 총선

강기갑 진정성에 보수 표심 공명, 간발 차 기적
반사이익도 한몫… ‘자력 당선’ 공식 찾아내야

‘정답’은 이미 제출돼 있는지도 모른다. 개인과 조직이 갖고 있는 진정성으로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이 정답이다. 그래서 진정성 자체보다는 ‘무엇으로’, ‘어떻게’에 관심이 쏠리는 것 같기도 하다. 강기갑 국회의원의 지난 2008년 18대 총선 승리를 되짚어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2008년 4월 9일 밤 경남 사천 선거구에서 ‘일개 농민’ 강기갑이 ‘거대 집권당 실세’ 이방호를 178표 차이로 누르고 이겼을 때, 지역에서는 ‘계란이 바위를 깼다’고 할 만큼 충격이었고 이변이었다. 강 의원 쪽에서도 크게 기대하지 못한 결과였을 정도다.

한나라당 이방호와 민주노동당 강기갑의 ‘맞장’은 필연이었다. 이방호 의원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고, 강기갑 의원은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전국구로 국회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한 번만 할 수 있고, 그다음부터는 지역구에 출마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사천 출신으로 농민운동을 벌여온 강 의원의 18대 총선 사천 출마는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수협 회장 출신인 이 의원은 일찌감치 이명박 대통령 편에 섰다. 2007년 8월 한나라당 사무총장이 돼서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오른팔로 대선을 치렀다. 이 의원의 3선을 위한 사천 출마 또한 예정돼 있었던 것이다. 조직과 자금, 지명도 등 모든 부분에서 강 의원은 경쟁 상대인 이 의원에게 처지는 상태였다. 물론 준비를 미리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2008년 선거 당시 선거운동본부 상황실장을 맡았던 이상헌에 따르면, 2006년쯤부터 비례대표인 강 의원이 지역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등 18대 총선 대비를 해왔다.

강 의원은 이듬해인 2007년 초부터 지역에 연락 사무실을 내고 지역 주민을 만나왔다. 그렇지만 조직에서 한나라당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이씨는 “사천의 민주노동당 당원은 2004년 출범 당시 50명, 2008년 선거 당시 250명 수준이었다”며 “마을별 책임자조차 꾸리지 못한 상태에서 선거를 치렀다”고 했다.

이런 강기갑 후보가 이길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당시 선거를 함께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강기갑이라는 상품’이 좋았다고 말한다. 이씨는 “비례대표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전국 농어민과 사천 시민들을 적극 대변한 점이 크게 인정받아 사람들 마음을 얻었다”며 “후보가 바로 경쟁력이었다”고 말했다.

▲ 2008년 12월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농어민대회 참가자들이 강기갑 의원의 가면을 흔들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이런 장점을 갖고 있는 사람은 강기갑 의원 말고도 많지만,  선거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적지 않다. 반면 강 의원은 당선됐다. 왜 그랬을까? 이것에 대해서는 강 의원의 진정성을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씨는 “강 의원이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경남도연맹 의장을 맡고 있을 때 나는 실무자로 일했다”면서 “당시에도 역할을 맡으면 그야말로 온몸을 바쳐 활동했고 국회의원이 돼서도 기르던 소들이 죽어나가는데도 개인 농사를 포기하면 했지 맡은 일을 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고 전했다.

그의 진정성은 다른 보좌관의 말에서도 나타난다. 2008년 4월 18일자 <경남도민일보>에 나오는 얘기다. “눈물이 너무 많다. 어제도 KBS <단박인터뷰>를 했는데 <흙에 살리라> 노래를 부르면서 ‘고향을 버릴까~’라는 구절에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이 부분에서 왜 눈물이 날까’ 하면서. 농업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눈물이 글썽글썽한다. 정말 사심 없이, 진심으로 한다는 게 느껴진다.”(김순이 보좌관)

“상임위에서도 농업·농민 문제가 나오면 종종 눈물을 보인다. 농업 관련 연설을 할 때는 얼마나 절절한지 옆에서 같이 울컥하는 경우가 많다. 일중독 경향이 조금 있는 것 같다. 농부라서 그런지, 천성이 부지런한 탓도 있지만 쉬는 걸 용납 못한다. 의원님은 스스로를 감시하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이미자 보좌관)

이런 진정성이 선거에서 통했다. 지역구가 사천이었기 때문이다. 1953년생인 강 의원은 알려진 대로 사천 출신으로, 71년 사천농고를 나온 뒤 76년 한국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해 농민운동에 들어섰다. 1987년부터 91년까지 경남연합회 회장을 맡았으며 96년에는 사천농민회를 결성하고 대표를 맡았다.

이처럼 완전히 사천 토박이다 보니 강 의원이 가진 장점과 그에 담긴 진정성을 지역 주민들이 그대로 알고 믿었다는 얘기다. 더불어 강 의원은 국회의원이 되고서도 젖소를 기르고 밤나무와 단감나무를 키우는 농민으로 계속 살았으며, 또 국회의원을 그만두면 언제든 전업 농민으로 돌아가겠다고 평생을 지켜온 농업에 애정을 보였다.

이런 진정성이 때로는 다른 지역에서까지 통했다. 강 의원은 2008년 2월 5일 사천시청에서 18대 총선 사천 출마 선언 기자회견을 하면서 “제17대 국회 비례대표 의원으로 전국 농·축·수산업과 농·림·어업인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고 자임했다.

이것이 빈말이 아니었음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입증됐다. 기름 유출로 해코지를 당한 충남 태안 지역 어민들이 제 발로 찾아와 강기갑 선거운동을 벌인 것이다. 태안 유류피해 투쟁위원회 문성호 위원장과 태안참여자치연대 강희권 의장 등이 4월 5일 사천에 찾아와 6일부터 ‘민주노동당 강기갑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보기 드문 일이 일어났다.

상황실장을 지낸 이씨는 “맹세코 사전 기획된 작품이 아니었다. 태안 분들이 자기 돈 들여 와서 자기 돈 들여 선거운동을 했다”며 “이들은 ‘태안 지원 활동을 강기갑 의원보다 열심히 한 의원이 없다’, ‘이런 사람이 국회의원이 안 되면 대한민국 국회는 필요 없다’고 했다”고 전했다.

강 의원은 1976년 뛰어든 농민운동에서도 진정성을 인정받았다. 강 의원의 비례대표 국회의원 자리조차도 4년 전 전농의 ‘농민 정치 세력화’ 결정에 따라 민주노동당에 들어가는 바람에 비롯된 것이니 새삼스러운 것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18대 총선에서 전농의 ‘전략 후보’로 꼽혀 전폭 지지를 받은 것이 얼마나 승리 요인이 됐는지를 따져보는 데서는 검토해볼 측면이 있다.

이씨는 “전농 결정에 따라 사천에 연고가 있는 회원들이 전화를 걸거나 손수 찾아가 강기갑 지지를 부탁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연고가 없는 사람 가운데서도 사천에 와서 선거운동을 거들기도 했는데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은 그들에게는 상대방 돈선거 감시 활동을 맡겼다. 적발 건수는 없지만 감시 활동의 효과가 없었다고 장담은 못한다”고 했다. 돈선거 감시 활동이 돈 살포를 못하게 하는 영향을 끼쳤다는 얘기다.

더욱이 선거 막판 사천에서는 ‘민노당이 당선되면 우리 시는 전국에서 종북 지역 지목, 우리가 친북 지역인으로 지목/ 그건 안 돼(되)지요’라는 민주노동당 비방 문자메시지가 대량 발송되고, 서울의 한 여론조사기관이 강 후보 지지자를 압박하는 전화 조사를 한다는 신고가 잇따르는 등 부정선거 기미가 있었음을 감안하면 터무니없는 얘기는 아니다. 게다가 돈 살포가 적어도 농촌에서만큼은 완전히 뿌리 뽑히지 않았다는 정황이 전국 곳곳에서 포착됐다.

이것이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이 승리한 요인의 전부일까? 만약 그렇다면 민주노동당과 강기갑이 ‘반사이익’ 없이 완전히 자력으로 이긴 셈이니까? 진보 진영으로서는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상대인 한나라당 이방호의 방심과 자만, 그리고 친박연대의 출범으로 실현된 적진 분열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 2월 강 의원이 사천 총선 출마 선언을 했을 때 강 의원이 이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이씨는 “사천이 원래 한나라당 공천만 받으면 뭐든 당선될 정도로 텃세가 심하다”고 했다. 그런데 상대 이방호 후보가 중앙 실세임을 믿고 자만해 지역구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 바람에 총선을 앞두고 지역 주민들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가운데 한나라당 공천과 관련해 문제가 생기면서 상황이 더욱 달라졌다.

이런 정황은 지지율 추이에서도 나타난다. 3월 20일과 24일 실시한 사회동향연구소 여론조사에서 강 후보는 지지율이 30.5%에서 36.3%로 높아진 반면 이 후보는 47.8%에서 42.8%로 낮아졌다. 격차가 6.5%밖에 나지 않는 상황에서도 이 후보는 사태를 낙관했는지 지역구를 떠나 서울 나들이를 멈추지 않았다.

4월 2일자 <경남도민일보> 기사(‘격전지를 가다-사천 ‘한나라-민노 각축’ 전국적 관심’)을 보자. “한나라당 이방호 후보는 이날 서울 가고 없었다. 대신 이 후보의 부인이 지지자들과 함께 장터를 돌며 이 후보에게 힘을 실어줄 것을 호소했다. 지원 유세에 나선 김주일 도의원은 ‘이 후보가 지역에 내려오지 못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지역을 위해 큰 구상을 하는 힘있는 이 후보에게 깨끗한 한 표를 줄 것’을 당부했다.”

이 후보는 선거 막판에야 머리를 숙였다. 유세에서 지역 발전을 위해 힘있는 여당 사무총장인 자기를 지지해달라는 말을 여전히 되풀이하면서도 “중앙에서 나라의 큰일을 하는 바람에 지역에 소홀한 것처럼 보였고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런 가운데 4월 2일 ‘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박사모)이 사천을 찾아  “한나라당 공천 파동과 내분은 전적으로 사무총장인 이방호 후보와 이 후보를 조종한 이들에게 책임이 있다”, “민노당 강기갑 후보가 당선되면 농어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지만 이방호 후보가 당선되면 한나라당이 결딴나고 나라가 결딴난다”면서 사퇴하지 않으면 낙선운동을 하겠다고 을렀다.

박사모를 두고는 평가가 엇갈린다. 기자회견 말고 한 것이 없으니 별 영향이 없었다고 보는 쪽과 ‘친박연대’ 출범 등 전체 상황과 맞물려 돌아가는 형국이었으니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쪽이 있다. 그런데 당락을 가른 표차가 178표밖에 안 된다는 사실에 눈길을 두면 박사모가 이적 행위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하기는 어렵겠다.

정리하자면 이렇게 되지 싶다. 조직과 자금 같은 기반이 튼튼하지 못한데도 사천에서 진보 진영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승리한 원동력은 ‘강기갑이라는 상품’에 있다. 강 의원의 17대 비례대표 시절 농어민 대변 활동이 널리 알려졌고, 특히 평생을 살며 농민운동을 벌여온 고향 사천이 지역구였던 덕분에 강 의원의 진정성이 쉽게 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완전히 대중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상대 후보가 자만하지 않고 지역구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고 지역 주민의 반발 심리가 없거나 한나라당의 적진 분열이 일어나지 않고 박사모의 활동이 없었다고 가정해도 강 의원이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선거는 아니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당락을 가른 아슬아슬한 표차 178표가 이를 웅변한다.

‘당선’이라는 성적표를 받아야 하는 선거에서, 진보 정당이 지역 주민을 사로잡으려면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덜어내야 할까. 2008년 사천 총선은 하나의 ‘정답’이면서, 또한 새로운 ‘물음’의 출발점이었다.

글•김훤주
<경남도민일보> 기자면서 블로그 ‘김주완·김훤주의 지역에서 본 세상’(2kim.tistory.com)을 운영하고 있다. 습지를 인문학적으로 고찰한 <습지와 인간>(2008)을 썼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김훤주
김훤주 info@ilemonde.com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