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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의지’, 칸트에 대한 모독
‘선한 의지’, 칸트에 대한 모독
  • 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17.03.02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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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들(이명박 전 대통령·박근혜 대통령)도 선한 의지로 없는 사람과 국민을 위해 좋은 정치를 하려고 했는데 뜻대로 안 됐던 것이다. 누구라도 그 사람의 의지를 선한 의지로 받아들여야 한다. (…) K스포츠·미르재단도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사회적 대기업의 좋은 후원금을 받아 동계올림픽을 잘 치르고 싶었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법과 제도를 따르지 않아 문제가 발생했다.”

대선후보로 나온 안희정 충남지사가 집권 기간 내내, 독선과 아집으로 많은 국민들에게 집중적인 비난을 받은 전·현직 대통령의 실정을 ‘선한 의지’로 받아들인다고 했다가 여론의 집중 포화에 뒤로 물러났으나 그 여파는 쉬이 끝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최후 변론에서 박대통령 변호인 측이 대통령의 선의를 강조하면서, 대통령의 과오가 정치적·도의적 비난을 받을 정도의 사안일 뿐이라면서 탄핵청구 기각을 요구하는 걸 보고, 안지사의 철학적 개념이 차용된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대체 뭘까?  

철학을 전공한 안지사의 ‘선한 의지’는 칸트 도덕철학에서의 의지와 행위 간의 이상적 문제에 관한 정견이지만, 대통령 측의 ‘선의’는 실정법에서의 정념과 불법간의 현실적 문제에 관한 변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들을 허탈하게 만드는 부도덕적인 사건들, 심지어 터무니없고 기상천외한 행각들이 집권 권력과 재벌 간의 야합과 음모 속에서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권력이 위기 모면을 위해 타인에 대한 ‘성역’없는 수사를 외치지만, 자신들의 부도덕에는 ‘성역’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믿고 지킬만한 지침과 표준이 아예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과업이 너무 많아서 무엇이 옳은지를 가늠할 시간이 없어서인가? 아니면 권력의 도덕적 행위 능력자체가 결핍되었기 때문일까? 

칸트 윤리를 흔히 동기의 윤리라고 한다. 즉, 어떤 행위를 도덕적으로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행위의 의도와 동기 또는 행위를 유발한 심성이라는 얘기다. 안희정 지사의 발언은 여기에 방점을 찍었을 성 싶다. 하지만 칸트의 생각으로는, 선한 동기에서 선한 행위가 반드시 유발된다는 점을 전제한다. 칸트가 무엇보다도 진정으로 가치 있게 본 것은, 선한 의지 그 자체가 아니라 선한 의지에 따른 선한 행위의 발현이다. 반면에 선한 행위 없는 선한 의지는 무가치하다. “지옥으로 가는 길에도 선한 의지가 쭉 깔려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칸트는 선한 의지가 있으면 그로부터 선한 행위가 바로 이어져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선한 의지로부터 실제로 선한 행위를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정의와 도덕이 문제되는 이유는 대다수의 국민들이 권력에게서 선한 결과는커녕, 선한 의지조차 도무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의가 기본적으로 국민들의 보편적 이익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결국 권력의 선한 동기와 원칙보다 중요한 것은 선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칸트는 동정심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다. 도덕적 감정, 특히 동정심은 그 자체는 아름답지만 원칙이 없으며, 거짓으로 꾸민 비참한 장면에 대해서, 즉 연출된 장면에 대해서 속을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한 것이다. 물론 동정심은 도덕적 행위를 하는데 있어서 매우 귀중하다. 그러나 동정심이라는 것도 합리성과 서로 견제하면서 발휘돼야 우리에게 더 많은 도덕적 이웃들이 생겨날 수 있다. 부도덕한 권력에 ‘선한 의지’라는 철학적 언어가 더 이상 동정적으로 쓰이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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