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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박근혜와 Eva Cassidy의 Over The Rainbow
[안치용의 프롬나드] 박근혜와 Eva Cassidy의 Over The Rainbow
  • 안치용 기자
  • 승인 2017.03.11 20: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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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박근혜와 Eva Cassidy의 Over The Rainbow

 

지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나에게도 스무 살이 있었다. 젊음의 뒤안길인 양 항상 보잘 것 없는 비밀들로 장식된 학생회관 동아리방. 그곳엔 시대에 대한 분노와 제어할 수 없이 넘쳐나는 열정이 무력감에 버무려져 언제나 복작거렸다.

 

내가 20대 초반의 동아리방에서 기억하는 여러 장면 중에는,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꽃다운 당시 내 또래 여학생이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엎드려 울던 모습이 있다. 막 봄이 오려는 시기로 기억된다. 실연처럼 쉬이 연상할 슬픔의 연유가 있었던 게 아니다. 지금 들어보면 어이없을 지도 모를 유행가 가사가 단지 슬퍼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청춘이 슬펐다.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동시에 짙은 안개에 휩싸인 듯 아득하게 느껴지는 서른 살이 나에게 있었다. 테스토스테론으로 적당히 무장한 눈빛에 세상은 세월을 쌓아 가면 성찰과 성숙을 안겨 주리란 기대로 감당할 만한 것이었고 때로 만만하였지만, 동시에 공부해서 클리어해야 할 문법 너머 물자체의 완고함이 종종 나를 좌절케 하였다.

 

이제는 어쩌면 내가 물자체를 소망하는지도 모르겠다. 유치환의 바위처럼. 언제 바다를 처음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설렘이 섞인 망연자실, 그리고 첫 바다의 방대함을 닮은 사랑의 포부를 슬그머니 잊어버린 지 오래다. 내 기억 속의 바다는 항상 원경이다. 양말을 벗은 맨발의 끝을 간질이는 어느 특정한 온도, 특정한 세기의 파도가 소거되어 그저 해안선이 뚜렷한 그런 바다. 인식과 지각 너머 바다의 물자체.

 

우연히 다시 읽게 된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 청소년기에 읽으며 밑줄을 친 문장들을 발견한다. 1979년 2월 20일 출생인 이 책의 모든 페이지가 갈변하여 자기가 지금 존재하는 곳에 완전히 존재할 것이란 밑줄 문장을 더욱 절실한 의미로 만든다. 구불구불한 내 수십 년 전 손가락의 무성의한 줄긋기가 Eva Cassidy의 음악 같다.

 

헤드폰을 낀 채로 책을 읽으며 하루 종일 그녀를 생각했다. 생각에 골몰한 건 아니다. 그냥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아직 떠나야 할 집을 떠나지 못하였고, 그가 돌아갈 옛집에는 TV가 가장 먼저 설치되었다. 개들과 함께 저녁 산책을 나가려는 참에 학원 시간에 맞춰 아들의 이른 저녁이 준비된다. 가장 좋아하는 산책과, 그것보다 더 좋아하는 고기 굽는 냄새 사이에서 방향을 잃고 망설이는 스콜과 걸리버의 모습에 그녀가 오버랩된다.

 

고기 굽는 냄새를 맡고 문밖으로 나서기를 주저하는 걸리버와 스콜. 떠나야 할 때에 관한 지각마저 잃어버려 더 이상 증오의 대상도 아닌, 자신이 저지른 악에 상응하는 자격을 잃어버려 더 이상 악인이 아닌 듯이 보이는, 사리분별의 능력마저 의심받는 금치산자 수준의 그녀. 사회적 자아와 실존적 자아의 극심한 분열에 직면한 그녀를 “자기가 지금 존재하는 곳에 완전히 존재할 것”이란 밑줄 문장 위로 올려놓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나 역시 수 십 년 전에 밑줄 쳐둔 그 문장 위에 꼿꼿하게 허리 펴고 올라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의 ‘존재 위의 직립’은 그의 이야기에 비하면 얘깃거리조차 못 되는 미미하기 그지없는 사안이다. 어쩌면 미약한 형태로나마 나 안에 그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나는 그녀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고, 반면 그녀는 그녀의 자리에 올라, 자신과 주변 그리고 거의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Eva Cassidy의 <Over The Rainbow>를 듣는다. 어떤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일어난 그런 어떤 일의 최선은 아마도 일 자체에서 찾아지지 않을 것이다. “Away above the chimney tops That's where you'll find me” 

 

 

글ㆍ안치용 지속가능성과 CSR에 관심이 많다. 한국CSR연구소장이며,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과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속가능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을 대학생/청소년들과 함께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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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 기자 carmine.draco@gmail.com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