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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 거스른 지식인의 기교학
촛불혁명 거스른 지식인의 기교학
  • 성일권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17.04.28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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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19대 대선의 가장 큰 성과는 촛불혁명에서 분출된 일반 시민들의 ‘새로운’ 세상 만들기 열망이 이른바 ‘이재명 신드롬’으로 표출된 것이며, 가장 큰 패착은 과거 시류에 영합해온 배반의 지식인들이 유력후보에 대거 몰려들어 촛불혁명의 본질이 퇴색된 일일 것이다. 

 
기득권 정치 체계에 맞선 진보정치의 거센 열풍이 영국의 제레미 코빈과 미국의 버니 샌더스에 이어, 한국사회에도 비록 기득권 정당 소속이긴 하지만 이재명이라는 한 소수파 정치인을 통해 재확인된 것은 한국 진보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민주당’의 대선후보 경선에 나선 이재명 성남시장이 스스로 ‘한국의 샌더스’를 자칭하면서 기본소득제를 비롯해 박근혜‧이재용 구속을 통해 권력과 자본의 야합관계 종식, 재벌체제 해체와 법인세인상, 복지확대, 노동권 강화 등을 강력 주장함으로써 변화를 갈망하는 유권자들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이재명 신드롬’은 그 이상 퍼지지 않았다. 경선결과에 승복한 이재명은 “지금부터 새로운 역사를 향해서 뛰어가자”고 나름대로의 희망을 피력했지만, 유력후보 진영에서는 보수표를 얻기위해 ‘이재명 신드롬’을 지우기에 급급했다. 그 결과, 권력과 자본 간의 야합에 분연히 일어난 촛불시민혁명이 구체제를 전복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은 도무지 끄떡하지 않을 친(親) 재벌 자본주의 체제에 다름 아니다.
 
차기정부 참여가 확실시되는 자문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삼성이나 현대, LG 등 재벌에서 몸을 담았거나, 노골적인 친재벌적 행태를 보였던 이명박‧박근혜 정권 아래에서 개발과 성장이라는 구실 하에 노동탄압적이고 반민주적인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했던 이들이 적지 않다.
 
많은 시민들이 구체제 공안권력의 핍박과 인신 구속을 무릅쓰고 낙담과 분노를 표출했지만, 우리 삶을 무겁게 짓누른 친 재벌 자본주의의 껍데기는 깨지지 않은 채 그대로 석화될 조짐이다. 그 뿐이 아니다. 차기 정부의 정책 자문단에는 그 어느 때보다 관념적이고 문화적이며, 심지어 사변적이고 비판적이며 성찰적인 면모까지 지닌 ‘인문사회학자들’이 대거 포진해, 권력의 매끈한 소프트파워를 지원한다. 어디 그뿐인가? 보수매체 칼럼을 통해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칭찬하며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저주했던 자칭 ‘보수’학자들이나, 이와 반대로 진보매체 칼럼을 통해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두둔하며,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독설을 퍼부었던 자칭 ‘진보’학자들이 이제 한데 모여, 당선자가 된 최고 권력자의 정책 자문단 일원으로서 정권의 성공을 다지기 위한 논리와 철학을 뒷받침하는데 여념이 없다.
 
이번 새 정권에 대해 과거 정권과는 달리, 폭압적인 공포 대신에 심미안적인 기대를 가져도 좋을까? 과거 권위주의적 정권이 국정원, 검찰과 경찰 등 권력기관이나 정부기관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개입하고 반대자를 괴롭혔다면, 새 정부에서는 이에 교훈을 얻어 어쩌면 민주주의의 대의 아래 ‘부드럽고 은밀한’ 설득과 합의의 과정을 중시할지 모른다. 
 
권력과 자본에 은밀하고 위대하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새 정부 자문단의 면면을 보면, 잠시나마 ‘이재명 신드롬’으로 분출된 촛불시민혁명의 대의와 그 정신이 발현되리라고 낙관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지식인들은 역사의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살아있는 권력에 합법성과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른바 ‘부역자의 길’을 자처했다. 독재정권과 권위주의 정권 때의 ‘부역자의 길’과 민주화 이후 정권 때의 ‘부역자의 길’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지향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개인의 출세와 영달이 그들의 목표다. 다만, 권위주의 정권의 부역 지식인들은 스스로 권위주의의 볼모가 돼 시민들과의 소통과 연대 대신에 정치권력 및 자본권력과의 노골적 야합을 시도했다면 민주화 이후 정권의 부역 지식인들은 네트워크적 수평사회의 미덕을 내세우면서 권력과 자본에 ‘은밀하게 위대하게’ 봉사한다. 선배 지식인들에 비해, 후자 지식인들은 독살스러운 자본주의에 봉사하면서도 친재벌적 전염병을 무의식적일 정도로 부드럽게 유포해 그 ‘악행’이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로 은밀하고 위대하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특정집단에 봉사하는 지식인의 유형을 유기적 지식인이라고 말하며, 이를 곧 지식인의 숙명으로 받아들였지만 우리 사회에선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지식인들의 쏠림 현상이 너무 심하다.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지식인들이,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스스로 하수인을 자처하며 권력의 지배논리와 그 정당성을 가공하는데 앞장선다면, 어느 순간 권력자들은 초심의 각오를 잃게 마련이다. 한국사회가 매번 불법과 탈법의 ‘뫼비우스 띠’를 끊지 못하는 것은 학자들이 양심을 뒤로 한 채 권력과 재벌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노동자들을 억누르는 ‘기교(技巧)의 연구’를 수행해온 것과 무관치 않다. 성경책에 버금갈 만큼 많이 팔린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카르텔 금지와 경제정의를 담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노동의 가치를 강조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같은 경제 기본서들은 서재 모퉁이에 내팽개쳐진지 오래다.
 
자본주의는 영악하다. 유연성 없는 원칙을 신봉하는 바람에 환경변화에 적응치 못해 퇴화하거나 자멸을 자초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는 달리, 자본주의는 새로운 환경에 맞춰 ‘새로운 정신’으로 무장한다.  
이를 위해 오래전부터 자본주의는 자신에 대한 외부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심지어 비판세력까지도 포섭한다. 재벌이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학자들이 소속된 대학들에게 수백억짜리 건물들을 앞 다퉈 헌사하고, 교수와 학생들에게 수많은 연구자금과 장학금을 내놓는 행위들을 단순한 기업의 사회적 기부 활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럼으로써 자본주의는 외견상이나마 자신의 무절제함을 스스로 경고하고, 자신에 대한 반대를 무력화하며 생산성과 수익성을 높일 수 있었다. 초기 자본주의의의 자본가들이 막스 베버의 말대로 신교도들이 종교적 삶과 직업에 동시에 충실함으로써 자본의 축적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채택했듯,(1) 자본계급은 역사적‧시대적 고비 때마다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자본주의 새로운 정신’을 찾아 나섰다.  
산업 혁명기인 19세기에 형성된 자본주의 정신의 주요 소유자는 ‘개혁적인’ 부르주아 기업가들이었다. 그들은 절약정신, 개인적 삶의 절도와 가족에 대한 헌신을 지니고, 모험과 사색, 혁신의 모든 능력을 두루 갖추려 나름대로 노력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1, 2차 대전을 거친 1930년대와 1960년대 사이에는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적인 기업의 영웅적 관리자가 자본주의의 정신을 구현하려 했다. 그들의 목표는 소비자 만족과 사회빈곤 극복의 공리를 동시에 실현시키고, 장기적인 계획과 합리적인 조직 관리를 통해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성 지배체제에 반발한 1968년의 지식인, 학생 저항운동은 이 같은 자본주의 정신에 치명타를 날렸다. 그때까지의 자본주의적 정당성은 현실성이 거의 없는, 구태의연하며 권위주의적인 픽션으로 간주됐다. 더 이상 고용안정과 연금수급의 미래가 보장되지 않게 된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에너지가 다시 충분히 지속되고 확장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신이 필요해졌다.  
 
기업들은 생산의 프로세스와 노동조건을 재조정했다. 그 결과, ‘유연’한 노동시스템, 하도급제, 팀워크, 수평식(Flat) 경영과 같은 ‘린(Lean)자본주의’ 또는 ‘포스트 포드주의’ 등의 특성을 도입했다. 이 같은 미세한 변화들은 노동자들의 위협에 대한 자본주의의 단순한 대응이 아니라 경제적인 수익성 위기에 대한 자발적 해결책이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적인 키워드는 ‘네트워크’다. 유연한 네트워크가 시장과 계급 조직 간의 특징이 된 것이다. 이제, 기업의 수평구조와 팀워크, 고객 만족, 그리고 직원들에게 감동을 불어넣는 최고 경영자 또는 조정자의 비전이 주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는다. 이상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이라 함은 하도급 아웃소싱을 통해 경영관련 비용을 줄이고, 인력과 기술적 경험보다는 지식과 정보를 더 중시하는, 이를테면 자생적 조정능력을 갖춘 하나의 단위를 축으로 움직이는 장치를 말한다.   
 
볼판스키와 시아펠로 같은 학자들은 현 자본주의 체제의 새로운 이상적 모델에 대해 개인과 조직의 관계가 노마드식 네트워크의 확장처럼, 가볍고 이동적이며, 타인과 다른 조직과의 차이 및 애매모호함에 관대하고, 인간의 욕망에 현실적이며, 비공식적이고 우호적이고, 소유관계에서는 빌리되 완전히 소유권은 갖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지만,(2) 이는 지나치게 자유적이며 낭만적이다. 1968년 혁명이후 유럽지식인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타협적 인식이며, 이는 국내의 자유주의적인 학자들에게도 자주 발견된다.
 
그러나 현 자본주의체제의 새로운 변화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안정된 직업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고용성 향상을 위해 스스로 ‘개인자본(Personal capital)'을 강화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하고, 급기야 시스템 자체가 인간보다 더 우월한 위치로 의인화해 인간을 인격이 아닌 자본으로 전락시킴으로써 인간성을 말살하게 된다. 촛불시민혁명이 격화된 2016년의 한국사회가 바로 그러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국정농단은 시민분노 분출의 일부일 뿐이고, 실제로는 빈부격차와 차별, 가진 자들의 갑질과 비정규직 확산, 청년실업과 취업난가중, 권력의 감시와 무소불위의 공권력,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블랙리스트, 민주주의의 위기, 그리고 공동체의 위태로운 해체 등이 그 본질적 이유였다. 
 
  따라서 촛불시민혁명으로 분출된 우리사회의 시대정신은 담론이 아닌 비판과 실천을 통해 구현돼야 한다. 우리 사회의 올곧은 발전을 위해선 줏대 없는 지식인들의 ‘기교적 비판’이 아니라, 권력자를 거침없이 비판한 미셸 푸코처럼 진정성을 가진 지식인들의 ‘사회참여적 비판’이 강화돼야 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같은 민주주의 정권 당시에 그 많던 진보적이며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권력 언저리에서 알량한 자리를 보전하거나, 잠시 비판의 펜촉을 뒤로하는 동안, 국가경쟁력과 국제화, 신경제라는 이름아래 규제완화, 구조조정과 해고의 심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비대칭적 갈등, 부동산가격의 급등과 신용불량자의 범람 등이 얼마나 부드럽게 은밀하게 진행됐는지 잘 알지 않은가? 물론 권위주의 정권에서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말이다.   
 
‘이재명 신드롬’은 대선 본선에 오르지 못했지만, 결코 일시적 증후로 끝날 사안이 아니다. 노동의 가치를 중시한 신교도적 자본주의의 중요성을 설파한 막스 베버가 죽은 지 110여년이 지난 지금, 과거 탐욕스러운 권력과 자본이 망가뜨린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는 정의와 공정, 공동체적 연대, 자유 및 진정성 등을 한데 묶는 새로운 비판적 결합을 요구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학자들의 양심에 따른 사유와 비판이 절실한 이때에 새 권력이 취약한 정권의 논리와 정당성을 기워줄 학자들을 호명하고, 학자들 역시 권력의 부스러기를 찾아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은 심히 우려되는 일이다. “참여정부가 삼성정부로 불릴 만큼 재벌친화적이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아직 생생한데도, 새 정권에서 과거 정권의 적폐의 한축이자 뿌리인 재벌 관계자들을 대거 끌어들이고, 심지어 한때 재벌악덕을 비판한 학자들까지 새 정권의 이런 행태를 비판하기 보다는, 정권의 적극적 조력자로서 기교적인 논리를 펴는 것은 촛불시민 혁명의 시대정신을 저버리는 일이다. 
 
우리사회의 시대정신은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새 정권에 대해 더 냉엄하게 감시하고 비판할 때 우리가 그토록 바랐던 시대정신이 구현되는 것이다.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파리 8대학에서 정치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주요 저서로 『비판 인문학 100년사』, 『소사이어티없는 카페』,『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 『20세기 사상지도』(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자본주의의 새로운 신화들』,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등이 있다. 
 
(1)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박성수 역,  문예출판사)  
(2) Luc Boltanski & Eve Chiapello, <Le Nouvel esprit du capitalisme>(1999. Gallimard,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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