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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얼굴
타인의 얼굴
  • 강훈아 | ‘세월’ 이달의 에세이 당선
  • 승인 2017.04.28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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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전 5시 30분, 집을 나섰다. 첫차를 타야 했다. 어둠이 하늘 끝에 걸려있었다. 노란 나트륨등만이 새벽길을 군데군데 밝혀 놓았다. 724번 버스가 들어왔다. 카드를 찍고 창가 자리에 앉자 졸음이 밀려들었다. 안개 속을 미끄러져 가는 버스는 이따금 정차해 사람을 실을 뿐이었다. 그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각자 자리에 가 앉았다. 다시 모두 꾸벅꾸벅… 같은 시간, 같은 버스, 그리고 같은 목적지. 한 시간여를 달려 모두가 내린 곳은 교외의 도매시장이었다. 해는 떠오르는데 출근길의 발걸음은 여지없이 무거웠다.

아르바이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새벽 도매시장의 고사리 가게. 첫차 타고 가서 막차를 타고 돌아오면 일당 8만 원을 손에 쥘 수 있는 일. 마음이 어두웠으면서도 버티며 일했다. 친구 셋이서 장밋빛 여행을 꿈꾸자 돈이 필요했다.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뒤지고 뒤져 찾아낸 것이 도매시장 고사리 가게였다. 고사리를 씻고, 포장해서, 배달하는 일이었다. 근로계약서도 보험도 없는 단기 아르바이트에, 근무시간이 12시간을 넘고는 했지만, 하루 일당 8만 원에 막차 시간이 지나면 만 오천 원을 더 주었다. 그렇게 모든 돈 70만 원으로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시장은 사람을 끊임없이 그러모은다. 단지 손님뿐만이 아니었다. 빼곡히 들어선 가게의 직원들은 물론, 물건을 공급하는 업자들도 드나든다. 이들을 위한 밥집, 술집, 은행 등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있다. 북적이는 시장의 한쪽, 손님들이 가게 사장과 물건값을 놓고 옥신각신하고 있으면 다른 쪽에서는 업자가 나타나 소리를 질러댄다. 그러면 손님과 사장, 물건과 업자 사이를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아르바이트생은 모두 이곳에 위치한다. 시장의 어느 한쪽에서 이 모든 소동을 맞닥뜨리고 있다. 이들은 일당 아르바이트이기 때문에 단기로 일한다. 대개의 경우 이들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시간이 지나 이들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첫날 일을 하고 친구 한 명이 그만두었다. 친구는 하루 일당으로 침을 맞았다. 삼 일째가 되자 또 한 명이 그만두었다. 다른 일을 찾아보자고 했다. 친구들의 빈자리를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채웠다. 고사리 가게에서 꽤 오래 일을 해 본 친구였다. 그 역시 며칠만 일하고 관두겠노라 했다. 사장은 그가 온 줄도 몰랐다. 그렇게 시장의 한쪽에서 아르바이트생들이 조용히 왔다가 사라졌다. 그들은 대개 다시 오지 않았다. 첫날, 우리는 사장과 저녁을 먹었다. 학교며 공부며 묻던 사장이 말했다. “니네 나중에 성공하면 내 얼굴 잊으면 안된데이” 친구들이 그만뒀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새벽 도매시장으로의 출근길은 착잡했다. 길을 겸한 가게에서 어깨 부딪히며 눈인사 나눴던 이들은 시장의 한쪽에서 조용히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런 우리를 향해 사장은 자신의 얼굴을 기억해 달라고 했다. 그것이 반쯤 농담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우리를 기억하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 8일째 되는 날, 택시비를 포함한 일당 9만 원을 주는 그의 손을 마지막으로 일을 그만두었다. 그는 물었다. ‘자신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 시간이 흘러, 나는 여전히 그를 기억한다. 돈을 건네던 마디 굵고 휘어진 그 손을, 퉁명스러운 그 말을 기억한다. 착잡한 출근길의 끝에 서 있던 그의 모습이 기억한다. 그를 얼굴이나 이름이 아닌 행동으로 기억한다.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정작 기억할 수 있는 얼굴은 몇 없었다.

다시 724번 버스를 잡아타면 도매시장으로 향하는 그들을 만날 수 있겠지만, 나 역시 그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도 타인의 얼굴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을 리는 없다. 머릿속에 새긴 얼굴은 시간이 지나며 희석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얼굴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저 그들과 관계한 이야기를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그 이야기들로 쌓아 올린 눈이며 코, 입일 것이다. 724번 버스의 얼굴들은 착잡하게 쌓아 올린 고단함이었다. 고사리 가게 사장의 얼굴은 한나절 가게 한쪽에 걸터앉아서 던지는 퉁명스러운 말이었다. 그것으로 그들을 기억한다.

이야기가 그들에 대한 기억을 결정한다면, 이야기에 깊이 감응하는 것으로 그들 얼굴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픔이라면 아픔에 관계한 나의 이야기를 통해 타인의 얼굴을 좀더 선연하게 기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새벽 노동에 나서는 첫차 버스의 이야기거나 혹은 짧은 시간같이 했던 아르바이트생들의 이야기였다. 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얼굴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그들과 관계하지 않았던 나의 기억이었다. 결국, 이야기였다. 이 서사들이야말로 개인의 얼굴을 분명하게 기억하는 주춧돌이었다. 여행을 떠난 배가 침몰하고, 3년이 다 되어 뭍으로 올라왔다. 이제, 한 세월이 지나고 나면 이들은 누군가에게 각자의 얼굴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조각난 배, 세월의 속에는 여전히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시간이 지나 하지 못한 일, 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분노로 그들을 기억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 할 일들이 많이 남지는 않았는가?’ 그 이야기로 그들의 얼굴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그들과 관계한 나의 얼굴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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