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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예술의 스노비즘
현대 예술의 스노비즘
  • 다니 로베르 뒤푸르
  • 승인 2010.04.09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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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을 감춘 도착, 그 이름은 현대예술

   매스컴의 집중 세례 속에, 현대예술은 소변기를 전시한 마르셀 뒤샹의 유명한 제스처를 열심히 흉내내고 있다. 하지만 뒤샹이 보여줬던 모든 전복적 풍자의 힘이 이미 퇴색돼버렸음은 까마득히 알지 못한다. 이 예술은 그저 스노비즘과 여기에서 비롯된 상품적 가치로만 정당화된다. 하나같이 극도의 자본주의적 개인주의로 획일화된 현대예술의 요란한 등장 뒤에는 묵묵함을 간직한 진정한 예술가들이 그늘에 가려져 있다. 작품 속에 여전히 진정한 자유의 입김을 불어넣으면서. <<원문 보기>>

 

▲ 앤디 워홀의 <마를린 먼로> 패러디, 2006- 뱅크시
 현대예술은 혁명을 기치로 내건다. 고로 현대예술에 딴죽을 거는 자는 모조리 반동주의자가 되는 셈이다. 뼛속까지 반동인 문자 그대로의 반동주의자가 있다면 자신도 지각하지 못하는 잠재적 성격의 반동주의자도 있는데, 후자를 일컫는 말로 신반동주의자(Neo-Reactionist)가 있다. 이렇듯 현대예술을 표방하는 작품이나 활동에 의구심을 품었다가는 가차없이 반동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이렇다 보니 현대예술 앞에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괜히 비평의 칼날을 들이댔다가 우매한 대중이라느니 전문적 식견이 부족하다느니 하며 문외한 취급을 받기가 십상이다. ‘당신은 반동주의자인가, 혁명주의자인가?’ ‘모더니티의 편인가, 아카데미즘의 편인가?’ 이런 식의 수사법은 아예 처음부터 모든 논쟁의 싹을 잘라버리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런데 이 수사법의 진정한 목적과 동기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은 분명 유용한 연구 과제다. 예술에 관한 몇몇 담론은 물론, 동류의 담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예술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이 방법이 정치적 수사학이라는 광범위한 분야에까지 적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수사법이 예술 분야에서 활용되는 예를 연구함으로써, 정치적 수사법을 이해하는 ‘전범’으로 삼을 수 있다.
 문제의 수사법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분석하기에 앞서, 자유사상의 근간이 된 버나드 맨더빌의 말을 음미해보자. 맨더빌은 <꿀벌의 우화>(1704)에서 “개인의 악(이기주의, 탐욕 등)이 곧 공공의 선”이라 기술했다. 이는 “악으로 생각되는 것이 실은 선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좀더 풀이하자면 “제1차원에서 악인 것도 제2차원에서는 선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까지 확장된다. 이런 식의 담론은 도덕적 측면을 배제한 병리적 측면에서만 봐도 다분히 도착적이다. 문제점(이기주의, 다시 말해 자기애에서 비롯되는 충동과 감정은 흔히 파괴적 폭력성을 띤다)을 해법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에 도덕적 차원에서도 도착적인 담화이기도 하다. 참과 거짓의 경계를 허무는 모호함으로 모든 가치 규준을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악은 선이요, 흑은 백이다.’ 이런 식의 수사법은 모든 비평 논리를 궤멸하는 무기로 작용한다. 자고로 모든 비평은 참과 거짓이 확연히 구분돼야만 가능한 법이다.
 담론의 주체가 상대에게 이면에 뭔가 심오한 제2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믿게 만들려면 누구도 감히 시도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주체는 도발(Provocation)을 행한다. 도발은 어원상 ‘결투 신청’의 의미가 있다. 결국 도발이란 타인에게 나처럼 해볼 테면 해보라며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다. 그런데 도발 행위의 저변에는 당사자가 말하는 것이 금기라는 인식이 전제돼 있다. 그러므로 금기된 것을 말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다. 일단 금기를 인식하면서도 행하는 의도적 도발은 누구도 비난하지 못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상대에게 도전하는 행위에는 이미 상대의 수준이 나처럼 높다고 인정하는 암묵이 내포돼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억압이 도사리는 공공장소와 달리 온갖 콤플렉스를 벗어던진 고매한 정신들만 모이는 이 소수 클럽에서는 금기된 어떤 것도 편하게 얘기할 수 있다는 일종의 현혹과 같다. 
 이런 수사학적 속임수는 개인의 이익이나 금전적 수익과 연계해 상대를 한통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겠지만”이라는 식으로 상대의 암묵적 동조를 얻어낸다.  만일 이의라도 제기했다가는 식자층에서 배제되고, 교양인으로 구성된 소모임에 낄 자격이 없는 문외한으로 취급받는다.
 광고의 본질이기도 한 이런 종류의 현혹술은 오늘날 현대예술에 고스란히 적용된다. 예술마저 이득, 수익, 암묵적 동조 등 관객을 한통속으로 끌어들일 온갖 수단이 난무하는 장으로 변질됐다.
 예술에서 현혹술이 사용되는 예는 흔하다. 요즘 각광받는 아티스트들의 작품만 봐도 금세 알 수 있다. 최근 자기 몸에서 배설된 체액을 테마로 루브르박물관 공연을 기획한 벨기에 출신의 안무가 얀 파브르(Jan Fabre)에게서, 이른바 현대의 ‘미키-안젤로스’(제프 쿤스의 작품 소재인 미키마우스와 미켈란젤로스의 합성어-역자)로 군림하며 거대한 풍선개 연작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제프 쿤스(Jeff Koons)에 이르기까지, 관객을 연루시켜 공모자로 만드는 고릿적 방식은 포스트모던 예술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전략은 ‘제2의 심오한 메시지’를 내세워 꽤나 짭짤한 이익을 수반한다. 이 전략이 이익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이렇다. 1) 온갖 금기를 초월한 도발을 행한다. 2) 이 도발은 다른 어떠한 의미 작용도 낳지 않는다. 3) 도발의 불가해성이 금세 언론에 수많은 기삿거리를 제공한다. 4) 마침내 매스컴 세례가 거센 투기 바람으로 이어진다.

▲ <브루클린>, 2010- 디 디 더 크로스
 1996년에 이르러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예술의 현혹술을 낱낱이 해부한 논문 한 편을 발표한다. ‘제2의 심오한 메시지’를 표방하는 예술가로 추앙받아온 만큼 용단이 필요했던 이 글에서 보드리야르는 “온갖 평범한 것이 예술의 아이로니컬한 제2차원을 운운하며 승화를 주장한다. 하지만 제1차원과 제2차원에서 모두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예술이기는 마찬가지다. 미학적 차원으로 이행한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제2의 힘을 가진 무가치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은 무가치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무가치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무가치하다”(1)고 비판했다.
 보드리야르는 제2의 힘을 가진 무가치성을 예술이 내포한 부정성(Negativity)의 진정한 변질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의 본질인 부정성은 이미 확립된 의미를 탈피해 새로운 의미 추구로 나아가는 힘에서 비롯된다. 예술이란 하나의 담화나 메시지로 환원되지 않는다. 예술은 우리가 아직 모르는 뭔가를 말하며, 아직 규정되지 않은 뭔가를 가시화하는 것이다. 예술은 경험계에 추가되는 그 무엇이다.
 하지만 요즘 현대예술을 보면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단순한 이노베이션 차원으로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이노베이션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한 특징으로, 새로운 욕망을 창출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 이 때문에 단순한 이노베이션과 새로운 의미 추구 사이에 대혼동이 발생한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현대예술이 겪고 있는 문제점이다. 요컨대, 예술시장이 활성될수록 예술 생산에도 일반적 시장 조건이 강요될 가능성이 커진다. 결국 현대예술이 생산해내는 것은 그저 뭔가 기발하고 특이하지만, 모든 잠재적 의미는 결여된 것에 그칠 수밖에 없다.
 정말 혁신적인 예술은 한 세계를 해체해 더 나은 세계를 재구성함으로써 건강한 웃음을 안겨준다. 좀더 자세히 말해 해방을 가능케 하는 웃음이다. 하지만 요즘 현대예술이 선사하는 웃음은 좀더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것은 허무주의적 웃음이다. 모든 도덕 가치를 광적으로 조롱하고, 그 어떤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웃는 웃음이다. 단지 예술은 그것을 예술로 인정해주는 순간의 힘에 의해서만 존재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비판적’ 행위는 진실의 원칙과 허상의 원칙을 구분한다. 이를 구분하려면 언제나 ‘이성의 재판’(2)이 선행돼야 한다. 따라서 재판, 공포정치, 기타 온갖 독재를 피하기 위해서는 모든 종류의 비판적 서열화가 거부되는 것이다. 한낱 배설물 더미에 지나지 않는 것이 예술품으로 승격되는 것도 모두 이런 배경 때문이다. 별 볼 일 없는 것이라도 다른 것들과 동등한 가치만 있다면 금세 예술품 자격이 부여된다. 더구나 ‘표현된 것’과 현실 사이의 완전한 단절, 즉 재현(Representation)을 포기할 때 예술적 가치는 더욱 상승한다. 상징적 거리를 버리고 직접적 방식으로 예술가의 도발적 충동을 표현할 때 작품의 예술적 가치는 한없이 높아진다. 때로는 여기에 상품의 지위를 부여하려는 컬렉터의 충동이 작용하는데, 가장 상징적인 예가 프랑수아 피노(3)다.
 벨기에 예술가 빔 델보예는 인간의 소화관을 재현한 냉소적 작품 <배변기계>(Cloaca·‘배변강’이라는 의미의 이 단어는 소비문화의 대명사인 코카콜라(Coca Cola)와 발음이 유사하다-역자)를 선보였다. 컴퓨터로 조종되는 이 배설기계는 인간의 소화기관과 완벽할 정도로 동일한 기능을 보여준다. 마지막에는 진공 포장된 배설물에 포드나 코카콜라 등을 모사한 로고가 찍혀 개당 약 735유로에 판매된다. 그야말로 예술의 산업화에 대한 기막힌 은유가 아닐 수 없다.
 뭐든 팔 만한 상품으로 만들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런 도착적 성격의 수사학이 어떻게 외설성으로 환원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기껏해야 충동에서나 기인하는 것, 금기된 것을 보여주는 행위가 예술과 돈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고 나면, 개개인은 저마다 시장의 법칙을 내면화함으로써 자유롭게 행동하려 들 것이다. 그런데 시장의 법칙이란 오로지 충동 해소 욕구를 기반으로 한 직접적인 쾌락, 즉 성적 쾌락에만 관심을 두는 법칙이다. 이런 매커니즘을 잘 보여주는 예가 급진적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예술이다.
 무엇이든 예술로 용인하는 현대예술의 너그러움은 결코 건전하지 않다. 왜냐하면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가장 용인하기 힘든 주장마저 허용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잉 민주주의가 정치 분야에서는 폭정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어찌 묵인할 수 있을까.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시작해, 민주주의의 과잉이 독재로 변질된 예는 비일비재하지 않은가.
 결국 우리가 신성화하는 데 동참한 행위는 불성실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진지함이 결여된 이 예술적 행위는 1917년 일반 소변기에 ‘샘’이란 이름을 붙여 최초로 ‘레디메이드’를 선보인 마르셀 뒤샹의 제스처에 힘입어 오랫동안 정당화됐다. 하지만 뒤샹의 시도는 여기서 말하는 불성실한 행위와는 엄연히 구분된다. 뒤샹의 시도는 모든 것에 의문을 품는 고도로 전복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공산품과 예술품의 위상, 미국에서 예술의 의미(4), 오브제와 성, 전시회의 기능에 이르기까지 뒤샹은 모든 것에 의문부호를 찍었다. 1960년대 이후 다수의 예술가들은 레디메이드 기치를 내걸고 뒤샹과 유사한 제스처를 답습했다. 그들이 보여준 예술은 알맹이가 결여된 그저 공허한 복제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예술이 ‘가작화’(as if)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하지만 가작화가 만들어내는 것은 그저 전복의 ‘코미디’(소설가 겸 에세이스트 필리프 뮈레가 사용한 용어-역자)일 뿐이다.
 전복의 ‘코미디’는 현대 공연예술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얀 파브르는 2009년 아비뇽 축제에서 자위와 오르가슴을 소재로 한 <관용의 광란>(L’Orgie de la Tolérance)이란 제목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하지만 이 공연에는 (풍자와 해학의 진수를 담은) 16세기 희곡작가 라블레식의 웃음이 결여된 그로테스크한 심각함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얀 파브르의 공연은 그 공연이 가진 본연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줬다. 그저 모호함을 불러일으키는 제2의 메시지 전략에 기댄 외설적인 공연일 뿐이었다. 요즘은 고전극도 탈콤플렉스를 표방한다. 2009년 6월 베를린 코믹 오페라(KOmische Opera)에서 시연된 <아르미다>는 작곡가 글루크(5)와 사드의 조우의 장이었다! 필리프 키노의 오페라는 <규방 속의 철학>(La Philosophie Dans Le boudoir)에나 나올 법한 무대로 재탄생했다. 배우들이 연방 나체로 돌아다니며 외설스러운 연기를 보여줬다. 연출가 칼릭스토 비에이토는 자신에게 영감을 제공한 과격한 사상을 거리낌없이 전파한다. ‘겸손은 정신을 말살한다’, ‘분노와 증오는 동기를 부여하는 유용한 힘이다’, ‘야수성은 매우 건전하다’, ‘당신이 동성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다’.
 요즘은 고전극마저 이런 사드식의 저속한 이론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이 이론은 전복성을 기치로 내건다. 전복성만이 이런 종류의 예술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근거다. 하지만 전복성은 철저히 자유사상만 견지할 뿐이다. 자유사상에 따르면, 개인의 현실 외에 다른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총체적 사회는 개인 활동의 집합일 뿐이다. 인간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타인과 교류한다. 타아(Alter Ego)는 더 이상 개인이 자기실현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개인의 실현을 방해하는 걸림돌이다. 이러한 ‘자아지상주의적’ 예술과 문명은 개인에게 더 이상 한계란 없다고 은밀히 속삭인다. 이 얼마나 기막힌 전복인가. 자유와 소외(Alienation)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전복이라니.
 그러나 여전히 진정한 예술가도 있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중대 가치인 절대 권력에 대한 욕망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이상을 추구한다. 대표적인 예로 브람 반 벨데, 조란 무지치, 장 뒤뷔페, 폴 레브롤 같은 미술가가 있다. 연극 분야에도 훌륭한 예술가는 많다. <멈춰>(Bleib)에서 개와 조련사의 관계를 통해 현대사회의 잔혹성 문제를 아이로니컬한 방식으로 천착한 미셸 슈바이처나 <섹스아모르>(Sexamor)에서 여성과 남성 사이에 오가는 보이지 않는 힘을 보여준 피에르 뫼니에 등이 대표적 예다. 이들은 모두 독창적이고 난해한 방식을 통해 주류 밖에서 인간의 본질을 은유와 성찰로 엮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런 게 진정한 예술이다. 진정성을 가지고 상상계의 유희와 비평적 시각을 해방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예술의 의무다 .

 

<각주>
(1) 장 보드리야르, ‘예술의 음모’, <리베라시옹>, 파리, 1996년 5월 20일자.
(2) 오드 드 케로스, ‘모던예술, 컨템퍼러리 예술, 불가능한 ‘논쟁’’, <르 데바>, 파리, 제150호.
(3) 2010년 <포브스>가 선정한 프랑스 3대 부호. 현대예술 애호가이며, 유통기업 ‘피노프랭탕르두트’ 회장을 지냈다.
(4) 뒤샹의 친구였던 베아트리스 우드는 “미국이 낳은 유일한 예술작품은 배관과 교량”이라고 기술했다. ‘마르셀’편 참조. Rudolf E. Kuenzli, Francis M. Naumann, <마르셀 뒤샹, 세기의 예술가>, MIT대학 출판사, 캠브리지, 1990.
(5) 극사실성과 자연성을 오페라에 도입한 독일 작곡가 크리스토프 빌발트 글루크(1714~87)를 의미한다.

글•다니 로베르 뒤푸르 Dany-Robert Dufour
파리8대학 철학교수로 국제철학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최근 저서로는 2009년 파리 드노엘 출판사에서 출간된 <변태적 도시, 자유주의와 포르노그래피>(Citéperverse: Libéralisme et Pornographie)가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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