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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들’을 제조하는 프랑스 대학
‘꼭두각시들’을 제조하는 프랑스 대학
  • 알랭 가리구 | 파리 낭테르 대학 정치학 교수
  • 승인 2017.08.3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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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이 휘청거리고 있다. 대학과 대학생과 대학교수는 넘쳐나지만, 더 이상 대학은 지성의 전당도 아니고 변혁의 실험실도 아니며, 배움의 터전 또한 아니다. 그저 대학이라는 껍데기만 걸친 채, 그 안에서는 온갖 반칙과 탈법의 역겨움이 진동하고 있다. 자격미달의 대학 경영진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고, 교수들은 자신의 생존만을 위한 실적 쌓기에 골몰하며, 학생들은 고단한 취업전선에서 무력하기만 하다. 교육부가 최근 10여 개 비리·부실대학의 정리를 발표했지만, 대학이 당면한 문제의 심각성은 단순히 경영 회계상의 수치에만 있지 않다. 본지가 대학의 본질과 가치를 다시 따져보는 것은, 이미 우리가 잃어버린 지 오래된 대학의 원형을 되살리기 위해서다. (편집자 주)

 

▲ 마니에르 드 부아 N104

대학이 난파 위기에 놓여있다. 대학을 진학하려는 학생들은 많고, 교직원들은 과로로 지쳐있으나, 교육당국은 교육의 질을 운운하며 비용 줄이기에만 몰두하고 있다. 전형적인 관료주의의 모습이다. 고전극에서 흔히 보는 꼭두각시 인형인 위뷔 왕(<맥베스> 등을 비롯한 고전극을 패러디한 극에서 큰 옷을 입고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하는 인형 - 편집자 주)의 어리석음이 대학에 만연해 있다.

대학 교육에는 돈이 많이 든다. 당연히 비용을 줄이려는 시도를 하지 않겠는가? 신자유주의적 국가는 이런 문제에 대한 주요해결책으로 정원감축을 제시한다. 이는 사회적 선별(나름의 규정에 따라 대상자를 선별하는 것)과 별반 다름없다.


1968년의 5월 혁명이 부분적으로는, 대학정원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 겁먹은 정부가 내놓은 비용절감 대책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나, 1986년에 드바케 법안(1)에 반대하는 대규모시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잊어버린 것 같다.


정부가 내놓았던 계획안들이 거부됐다고 해서 변한 것은 없다. 대학은 여전히 초미의 관심 대상이다. 사실 정부는 대학에서 경제적으로 적합한 광맥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대학 공무원의 숫자, 그들이 시위를 벌이거나 결집할 힘이 약하다는 사실, 대학의 첫 2년 과정이 ‘학업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확인되는 비효율성 - 학업실패가 대학보다는 진로설정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바칼로레아와 관련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 등에서 정부는 대학의 비용절감 가능성을 발견한다. 또한 대학은 ‘실업에 대한 사회적 치유’라는 내세우기 힘든 기능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 광맥이 되고 있다.


이런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해, 관리와 주판만 돌리는 프랑스 행정당국은 정치적 결정과 여러 위험에서 벗어날 비결을 찾아냈는데, 즉 ‘포스트-바칼로레아 입학허가(APB, admission post-bac)’라는 해법이 바로 그것이다. 전형적인 관료주의 신조어인 APB라는 약자 뒤에 과연 무엇이 숨어있을까? 모든 고교졸업자에 대해 국가는 원칙적으로 대학진학을 보장하지만, 반드시 학생이 원하는 길로 진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름동안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대학진학제안들은, 거의 카프카의 소설처럼 혼란스럽고 앞뒤가 맞지 않는 리스트를 보여준다. 언론은 병목현상을 강조하면서 다시 한 번 이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많은 고교졸업생들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의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고, 이른바 ‘상승세’를 타고 있는 계열이나 학과에는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측량기사가 되고 싶은가? 아마 당신은 상업관련 전문기술자격증(BTS)을 따게 될 것이다.


원하는 대로의 선택은 불가능하고, 그저 양적 기준이 활개를 친다. 운 좋게 선택된 학생들은 추첨에 따라 몇몇 계열에 진학할 것이고, 고등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던 학생들이 제외될 위험도 있다. 결국 돈에 의해서 사회적 선별이 이뤄지는 셈이다. 누가 프랑스 저쪽 끝 반대편으로 공부하러 갈 수 있겠는가 말이다. 적성에 맞춰 학업을 선택하지 못하고 실패는 계속된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 미래 경제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등교육 장관 프레데리크 비달(Frédérique Vidal)은 ‘거대한 혼란’의 부당함을 강조했고(<프랑스 엥테르>, 2017년 7월 17일), 에두아르 필립(Edouard Philippe) 총리는 추첨의 ‘절대적 부조리(不條理)’에 분개했다(2017년 7월 4일 성명). 이런 각성은, 단지 긴축과 반계몽주의가 결합하는 분야의 정책실패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신자유주의 국가가 설정해놓은 목표에 부합하도록 국가가 재편돼가는 전조로 여겨질 수도 있다. 금융시장 또는 유럽위원회 같은 국제기구에 좌우되는 국가들은 국민의 반발을 사지 않으면서 비용을 절감해야만 한다. 모든 분야에서 비용을 절감하는 예산삭감 정책이 시행된다. 많은 경비가 들어가는 중요분야, 즉 교육과 군대, 투자, 사회 부담금 등의 예산은 확실하게 더 감축된다. 경영자 이데올로기는 이런 조치에 ‘합리성’이라는 포장을 더해준다. 가장 교조적인 자유주의자들이 국가에 부여한 최소한의 역할도 국가가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한술 더 떠 국가는 (여전히) 민영화할 수 없는 부분에서 절약을 하고, 체중을 줄이라고 권유받는다. 모든 국가들이 같은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 마당에 프랑스의 대학정책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결과들이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는 분권화된 교육기관에 예산통제 원칙을 연동시켰다. 2007년에 제정된 대학의 자유와 책임에 관한 법(LRU)(2) 덕택에 각 교육기관들은 기관장(총장)을 중심으로 하는 집행부가 경영자율권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이 보유한 수단(장소, 인력 등)과 학생 수에 비례해 할당받은 예산에 맞춰 입학인원을 정한다.(3) 물론 비용절감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국가라는 눈 먼 조정자가, 독립적이고 서로 경쟁하는 관료들에게 임무를 위임한 상태에서, 어떻게 각 대학의 비용절감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까?


대학은 각자 이익을 지키려 하기 때문에, 종종 다른 평범한 기관들처럼 행동한다. 예산감독을 받는 대학들은 맬서스주의자(인구가 느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체로 소심하다. 학과들(교육과정들)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 내려져 있다면, 교수들의 선거로 인해 생겨난 내적 균형 때문에, 어느 정도 좋은 평가를 받은 학과들(과정들)은 인적·물적 자원의 재(再)할당을 거부할 우려가 크다. 또 학생 수가 감소하는 학과(또는 과정)의 멤버들도 비슷하다. 이들 역시 교원정원과 행정자원을 보존하려고 하고, 학생 수가 증가하는 이웃 학과에 자신들의 인적·물적 수단을 이전하려고 하지 않는다.


게다가, 학생에게까지 발표된 정원의 정확한 수치 뒤에는 상당한 모호함이 숨겨져 있다. 대형 강의실의 경우를 살펴보면 충분할 것이다. 학기 초에는 가득 차 있다가 대규모 학생 이탈이 일어나고 그 후에도 점진적으로 학생이 줄어든다. 이처럼 많은 학생들이 한꺼번에 수업을 포기하는 이유는 1학년 학생들이 대형 강의를 많이 듣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대형 강의실의 선택이 일종의 추세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예전에는 ‘서류상’으로 등록한 학생들이 시험을 보러 오지 않았을 경우에만, ‘실제’ 학생과 ‘서류상의’ 학생을 구별할 수 있었다. 10여 년 전에는 두 번째 시험이 있었을 때 극소수의 학생이 참가했고, 그래서 그 유용성을 문제 삼을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모든 학생들이 시험을 본다. 예전에 비해 확연히 달라진 현상으로, 이에 대해서 교수들은 회의적이다. 등록을 해야 사회보조금을 받을 조건이 충족되는 것처럼 시험을 봐야 장학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백지답안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이것이 잠재적으로 학업능력이 진보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되는대로 마구 써놓은 답안지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1학년들의 점수를 체크해 보면 상대적으로 꾸준히 낮게 나온다. 절반 정도가 20점 만점에 0~5점이다. 몇몇 대학들은 백지답안지에 0점을 주지 말라고 교수들에게 권고한다. 0점을 받은 학생들에 대해서는 정부가 보조금을 더 이상 지불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지시에 대해 분개하거나 조롱하는 의미에서 채점자들은 0.25점이나 0.1점을 줌으로써 자신들의 반대의견을 표현한다. 채점자들이 훼방을 놓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행정적으로 허가를 이미 받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국가의 관료적 관행과 계획경제의 이해관계에 맞춰진 통계수치를 자랑하는 소비에트 연방 시대의 관행을 비교해볼 수 있다. 자체조절기능을 갖춘 시장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것이 없다. 대학의 교육공급은 정말 어떤 수치를 근거로 한 것일까? 대부분 명목상에 불과한 초기의 정원일까? 아니면 학업포기를 미리 계산한 후에 수정한 정원일까?
추첨제와 더불어 불공정성의 부조리가 두 배 커진다. 법학공부를 하기를 원하는 젊은이들에게 멀리 떨어진 대학에서 일본어 공부를 하게 하는 시장의 난폭함을 이해하게 해준다는 사실에서 이 시스템의 유용성을 찾아내야 하는 것일까? 젊은이들이 그런 시스템에 굴복할지도 확신할 수 없고, 굴복한다 해도, 그들의 국가와 그들 자신이 더 나아진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이 비정상적인 경영은, 어느 정도 존재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교육기관들과 대학의 질을 저하시키고 있다. 경영문화는 과다성장으로 가는 경쟁 때문에, ‘대학 및 교육기관 공동체(Comue)’ 처럼 서류상으로 존재하는 집단화를 유도하고 있다.


경영 ‘혁명’은 전통적 대학을 관리하던 예전의 고급관리들을 희생시키고 총장이나 기관장의 권한을 키워놓았다. 대학교원이라는 직업은 강의와 연구를 균등하게 연결시켜 정의했던 1984년 이래 엄청나게 변했다. 물론 어떤 교원들은, 법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이 두 가지 업무에 행정 기능이 더해진다고 단언하거나 믿는다. 하지만 대학의 경영을 교원들에게 의존한다는 것은 사실상 그들의 지위를 박탈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는 경영자의 업무가 아니라 평범한 비서직이다. 예를 들어 교원들은 답안지의 익명성 원칙을 위배한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한 채 전산으로 학점을 입력해야 한다. 몇몇 교원들이 거부하고, 특히 소송을 걸겠다고 위협하자, 이 조치는 폐기됐다. 긴축정책은 대학으로 하여금 행정인력을 최소한으로 제한했다. 그 결과 학기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시험기간에는 행정력이 단절되기 때문에 교육을 희생시켜야 했다. 평가가 배움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교수들이 과중한 업무를 피해가면서 더 많은 교육을 담당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자신들의 의견을 말할 기회도 갖지 못하고, 미리 예고 받지도 못한 몇몇 교수들은 그들의 강의가 ‘상호부조’하는 식으로 변해있음을 알게 됐다. 어떻게 알게 됐을까? 학생들이 갑자기 몰려들거나 이상한 강의시간대를 확인하면서 알게 됐다. ‘상호부조’라는 이 매력적인 단어는 여러 학과에 공통되는 강의를 지칭하는데 사용된다. 관료적 관점에서 교수가 직접 진행하는 강의의 학생 수를 늘려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학생 100명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강의하는 교수는 500명 앞에서도 강의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상호부조가 대단히 다른 교과과정을 섞어놓는 경우, 교수들은 그런 관료적 관점을 공유하기 어렵다. 상관없다고 생각해서 그들에게 의견도 묻지 않는다. 그리고 예방조치로, 시험으로 인해 발생되는 추가업무를 덜어줌으로써 교수들이 항의할 이유를 없애버린다. 아마 그들은 똑같은 강의 하나를 위해 여러 가지 방식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시험답안지는 의학공부를 시작할 때 보는 기본지식에 관한 시험이나 TV 퀴즈게임에서와 같이 다지 선다형(QCM)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험이 대학의 수준을 개선시킬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또한 온라인 강의, 즉 전통적인 대면 강좌를 대체할 수 있는 온라인 오픈강좌(MOOC)에서도 미래의 경제 광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몇몇 강좌는 인터넷으로 전국 어디에서나 실시될 수 있고, 다원주의를 보호하는 문제도 강좌투어를 통해 해결될 것이다. 그리고 대면강의를 없애라는 1968년 5월의 오래된 요구사항이 실현될 것이다.


새로 개편된 석사과정처럼 합법적으로 결정된 과정이 요구하는 업무와 새로운 역할을 맡다보면 교수들의 연구 시간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벌써 오래전부터 승진이 연구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는 그들의 임무가 아니었던 행정임무와 책임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에서, 멋이나 환상 혹은 열정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연구를 계속하겠는가?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 학술잡지에 논문을 싣지 않는다고 해서 어느 교수가 아쉬워할 것인가?


지난 세기의 마지막 50년 동안, 프랑스 대학이 수많은 세대와 사회 개방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 비약의 순간에 프랑스 대학이 극복해야했던 더 큰 도전을 우리가 생각해보면, 이상한 체념과도 같은 무력감 앞에서 우리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글·알랭 가리구Alain Garrigou
파리 낭테르 대학 정치학 교수, <1940년부터 현재까지의 프랑스 정치>(라데쿠베르트, 파리, 2017년)의 저자

번역·고광식
파리 8대학 언어학박사로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다. <르몽드 세계사 3> 등의 역서가 있다.


(1) 당시 고등교육 및 연구개발 담당 장관의 이름을 딴 드바케(Devaquet) 법안은 대학에게 자율성과 대입 학생선발권을 부여할 목적으로 제출됐다.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대대적인 반대운동이 일어났고,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시위 참가자인 말리크 우세킨(Malik Oussekine)이 사망하면서 정부는 이 계획을 포기했다.
(2) 크리스틴 무슬랭, <대학들의 격렬한 경쟁>, 시앙스포 출판부, 파리, 2017년 참조.
(3) 크리스텔 제랑, “통합·폐지, 엑스-마르세유 대학의 세계 순위 집착증”,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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