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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미터> - 미친 결말을 위한 보론
<47미터> - 미친 결말을 위한 보론
  • 정아경 | 서울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
  • 승인 2017.09.19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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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결말은 미쳤다!” 라는 카피를 보고 <47미터>를 관람한 사람은 약간의 심심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미쳤다!”라는 말이 주는 기대에 비해 결말은 크게 끔찍하거나 공포스럽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결말에서 소리를 지르는 관객도 거의 없다. 하지만 보통의 공포영화와 아주 조금 다를 뿐인 그 결말이 담고 있는 것은 가상의 공포 그 이상이다. 이른바 “미친 결말”은 영화 밖에 있는 현실의 광기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현실과 영화를 이어주는 열쇠는 상어에 있다.

결말 이전까지 영화는 보통의 공포영화와 다를 바 없이 전개된다. 수영장에서 물장난을 치는 평화로운 모습에서 숙소 밖 멕시코로, 보트를 타고 바다로, 상어체험을 위해 바다 속 5미터 그리고 심해 47미터로 이동하면서 낯익은 휴가는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선 조난이 되어 공포를 조성한다. 또 바다에 들어서면서 영화는 광활한 초록색 바다와 그에 비해 작은 보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멀리까지 어두컴컴한 바다 속과 그에 둘러싸인 작은 주인공들의 신체를 대비시키면서, 가늠하기 어려운 자연의 힘에 비해 인간이 얼마나 작고 연약한 존재인지 부각시켜 긴장감을 유지한다. 47미터에서, 주인공들은 언제 어떻게 위험에 마주치게 될지 알 수 없고 알려진다 해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대비를 통해 드러난다.

 

화면을 통해 암시되는 인간의 한계가 주인공들에게 성큼 피부로 체감되는 순간, 상어는 등장한다. 상어는 리사가 상어체험을 즐기던 중 어두운 바다 속으로 카메라를 떨어뜨렸을 때 입을 벌리고 위협적으로 카메라를 삼키면서 처음 등장한다. 47미터로 추락한 뒤에는 케이트가 통신을 시도했지만 실패했을 때, 이제 구조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느꼈을 때, 상어는 케이트를 위협하고 맹렬하게 추격해서 케이트가 케이지로 들어간 뒤에도 케이지를 물어뜯으려 한다. 또 스쿠버 다이빙을 할 줄 모르는 리사가 케이지 밖으로 나갔을 때, 케이지로 돌아오다가 방향을 잃었을 때 상어는 등장한다. 상어가 상징하는 것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통념과 달리, 오히려 자연에 의해 힘없이 휩쓸려갈 수 있다는 사실과 그 사실을 외면하고 싶은 인간의 두려움이며, 상어가 등장하는 시점들이 이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결말은 보통의 공포영화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마무리된다. 리사는 상어에 물려간 케이트가 살아있다는 통신을 듣고 다친 케이트를 구해서 헤엄쳐 주도적으로 탈출하는 것에 성공한다. 하지만 대망의 탈출극은 리사가 두 번째 산소통을 흡입한 후에 수소 중독으로 일으킨 환각임이 드러난다. 결국 리사는 환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로 해양경찰에 의해 구조되어 수면으로 올라가면서 영화는 끝난다. 카피의 글자 그대로 결말에서 주인공은 미쳤다. 하지만 관객들을 미치게 할 만큼 충격적이라기보다는 으스스한 결말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환각에 등장하는 상어의 역할이다. 이전에 한 마리씩만 등장하던 상어는 리사와 케이트가 환각 속에서 수심 30미터보다 더 위로 헤엄쳐 올라갔을 때 떼를 지어 등장한다. 그 때부터 배에 오르는 순간까지 상어는 리사가 올라가지 못하도록 허벅지를 끈질기게 물어뜯는다. 상어의 눈에 맨손으로 상처를 내고서야 가까스로 배위에 올라온 리사는 뱃머리에 누워 치료를 받으면서 손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와 공기 중으로 흐믈흐물 흩어지는 것을 본다. 곧이어 손의 배경은 하늘에서 바다 속으로 바뀌고 사실 리사는 허벅지가 케이지에 깔린 채로 여전히 47미터에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여기서 상어는 단지 심리적인 억압과 두려움이 아니라, 리사의 신체가 47미터에서 느끼는 수압, 허벅지가 케이지 때문에 느끼는 압력이 환각에서 변형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상어의 두 번째 의미가 인간의 희망에 거스르는 냉엄한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상어는 정복된 줄 알았던 자연이 여전히 정복되지 못하였으며 인간을 언제든지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에 대한 두려움이다. 상어는 또한 인간의 막연한 희망이나 착각을 거슬러 움직이지 않는 현실이다. 이 두 가지는 상어라는 상징물을 통해서, 자연의 두려운 측면이 단순히 심리적이거나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이 가진 힘보다 더 견고한 현실이라는, 이 영화의 주제의식으로 통합되어 드러낸다. 기존의 영화 비평 이론을 통해서도 비슷한 해석을 도출할 수 있다. 로빈 우드가 말했듯이 공포영화가 억압된 소망을 변형시켜 보여주는 “집단적 악몽”이라면 리사의 환각이 탈출하고 싶은 리사의 소망을 반영하듯 영화 47미터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망을 반영한다. 그리고 리사의 환각 속에 있는 상어가 현실을 지시하듯이 47미터에서 나타난 모든 상어도 우리들이 부지불식간에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지시한다.

 

우리의 현실은 47미터 속에 있는 주인공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인들, 특히나 인공물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도시인들은 지구를 마치 인간의 통제 아래에 놓여 있으며 가끔 유희를 위해 자연을 구경할 수 있는 동물원 같은 곳으로 여기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지구가 동물원이라면 우리(Cage)에 갇혀 있는 것은 명백하게 인간이다. 인간이 정복한 영역은 지구의 아주 작은 부분뿐이다. 그 부분을 벗어나면 인간은 자연의 무자비한 위험에 대책 없이 노출된다. 마치 케이지 밖으로 빠져나온 리사와 케이트처럼 말이다. 게다가 우리는 인간 사회 속에서 더 많은 부러움과 힘을 차지하려는 욕망 때문에 폭염, 가뭄, 폭우 그리고 원전 사고와 같은 신호들을 간과하고 더 위험한 상황으로 스스로를 개발시켜가고 있다. 마치 케이트와 리사가 여러 위험 신호와 더 안전한 선택지를 간과하고 상어체험을 감행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위험한 우리(Cage) 안에서 너무나 오랫동안 살아온 우리는 사실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도 않은 채, 위험한 상황을 우리 힘으로 극복해내고 있다는 환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영화의 결말은 미쳤다. 변화의 순간을 감각하지도 못할 만큼 조용히. 마치 우리들처럼. 배가 아니라 케이지이지만 사람이 물 속 깊이 가라앉는 장면은 2014년 4월 16일 이후 한국인들에게 스릴이나 공포보다는 깊은 슬픔과 숙연함을 준다. 만일 우리가 그토록 미쳐있지 않았더라면, 위험신호를 무시하지 않았더라면, 이윤을 끌어 모으는 것 보다 바다에 잠길지도 모르는 생명을 걱정해서 노후한 선박을 처분할 수 있었더라면, 안전수칙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도덕성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을이 불평등한 상황에 있지 않았더라면, 권력자의 흠을 가리는 것 보다 진실을 중요시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더라면 그 날은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크고 작은 자연재해와 사고들은 홀로 격렬하게 우리를 현실로 끌어내리려는 상어와 같다. 왜 나타나야 했는지 거짓 없이 추적한다면 우리를 제 정신으로 돌려놓겠지만 환상과도 같은 잠깐의 이익 때문에 억압하거나 심지어 상처를 낸다면 더 큰 재앙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사진출처: NAVER 영화

 

 

 

 

 

 

 

 

정아경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소리를” -한강, 첫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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