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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진열장 앞에서 아침을’
‘이념의 진열장 앞에서 아침을’
  • 이호 | 영화평론가
  • 승인 2017.09.2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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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박열>
▲ 영화 <박열>
영화 <박열>을 보고 아무 흥미를 느끼지 못했거나 시시하다고 느꼈다면, 당신은 사상(-ism)에 무관심하거나 둔감한 사람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시대와 환경 탓이다. 자본·국가·미디어가 세 개의 머리를 한 채 네 개의 날개로 날고 있는 세상에서 철 지난(?) 이데올로기나 사상, 역사 따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을 구입하는 일은 쉬울지 모르지만! 어쩌면 우리 시대 유일의 ‘총체적 이즘’인 ‘캐피탈리즘’에만 익숙해져 여러 다양한 ‘이즘’을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박열>에는 다양한 사상들이 흥건하다. 이 영화는 단지 인물들만의 대립이 아니라 사상들의 대립으로 서사를 전개한다.

먼저 민족주의(Nationalism) 대 제국주의(Imperialism)

이 대립 코드에 천황제일주의와 만민평등주의가 가세하고, 식민지배자 집단과 일본인이 엮여들며 식민지의 저항자와 후토이 센징(不逞鮮人)이 대립한다. 사실상 박열(이제훈 분)의 아나키즘도 결국은 억압받는 민중과 민족의 것이자 지배자와 권력자에 대항한 것이므로 이 대립구도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문제이기도 하면서 망각과 기억의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일본인들의 침략 이데올로기 역시 민족주의의 일종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식민지의 민족주의로 국한하자. 

그러므로 이 영화의 기조는 민족주의다. 일제강점기를 다루며 반일감정(민족주의)을 환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강제로 조선을 지배하고 착취하던 당대의 역사와 분위기는 첫 장면, 인력거를 끌다가 일본인에게 조센징이라 무시당하며 발길질을 당하는 것에서부터 예고된다. 박열의 시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로 시작되는 이 장면은 민족차별과 계급차별을 전주곡으로 깔고, 이후 간토 대지진의 위기를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극복해 내려는 음모에서는 민족적 감정으로서의 분노를 부채질하며, 이후로 일본 위정자 집단과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 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김인우 분)를 희극적으로 제시하는 데까지 이른다. 현명하게도 모든 일본인을 나쁘게 그리지는 않지만, 영화는 가해자(나쁜 사람)와 피해자(좋은 사람)라는 구도를 내내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괜.찮.다.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1923년 9월 1일의 간토 대지진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이 대거 무차별(사실 무차별은 아니다. 15엔 50전(15원 50전)을 발음하게 해서 조선인을 선별적으로 가려내어 학살하기도 했다!) 학살당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인데, 이는 물론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며 아직도 해결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미즈노는 마지막 장면에서 지바 형무소에 갇힌 박열을 찾아와 말한다. 무기징역으로 감형해 준 진짜 이유는 평생을 감옥에서 살면서 이름을 남기라는 의도였다면서 박열을 비웃으며 감옥의 복도를 걸어나간다. 박열은 너희들이 이대로 무사할 것 같으냐고 사자후를 토하나 그 이후 세계사 속의 일본 역사와 박열의 옥중전향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섬뜩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과연 누가 이긴 것일까? 영화 속에서는 박열이 이긴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역사와 현실을 고려할 때 판단하기 쉽지 않다. 이념(이상주의) 대 현실(생존주의)의 승부. 이념을 쫓아 살 것인가 현실에 순응·복종하며 살 것인가. 

두 번째, 이 영화의 재미는 법치주의 대 냉소주의에도 있다. 

실상 박열이 법정 투쟁에서 천황 제도와 일본 제국주의를 부정하고, 자신의 사상을 선언하고 언표할 수 있었던 기회는 역설적으로 형식적이고 제도적으로나마 일본 법치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물론 그런 재판을 통해 세인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려는 불순한 작태였고, 자신들이 법과 합리적 절차를 중시하는 국가임을 대내외에 현시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지만, 어쨌든 신문과 조서를 꾸미고 재판을 진행하는 과정은 비교적 법리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맞서는 박열의 전략은 무엇이었는가? 결론은 정해졌으나 법적 제도의 합리성과 공정한 절차에 맞서는 박열의 전략은 냉소주의 그 자체였다. 법과 맞서는 냉소주의. 그의 냉소주의는 어디에서 왔는가. 법과 절차를 내세우는 그들의 허위와 모순적 행동을 부정할 수 있는 박열 자신만의 사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상이란 허무주의다. 실존했었던 인물 박열은 예심판사 다테마쓰(立松懷淸, 김준한 분)에게 제5회 신문 조서(대정 13년 2월 3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원래 만물의 존재를 부정함과 동시에, 참을 수 없는 학대 하에 약자로서 인내하며 따르는 것이 저주스러워 모든 것에 대한 반역·복수로써 모든 것을 멸하는 일이 자연에 대한 합리적 행동이라고 믿게 됐다. (…) 그러므로 나는 방법이 정당하지 않더라도, 커다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비상수단을 행해 그들을 멸함과 동시에 자신을 멸하기로 생각해 그 실행에 착수하게까지 됐다. 또한 가능하다면 일본의 권력자 계급뿐 아니라 우주 만물까지도 멸망시키고자 생각했던 것이다.”(김삼웅, <박열 평전>, p. 101, 가람기획, 1996)

그러니까 그는 한편으로 지독한 염세주의였던 것이며, 이 세상 만물에 염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두려운 것이 있을 리 없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비웃는 허무주의자에게 일본과 일본 제국의 법정 따위란 그 어떤 중대성도 없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갓 스물을 넘긴 청년들이 어떻게 저토록 대담하고 용기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을 마련하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생각과 사상을 믿고, 그것을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충실성의 사도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와 정반대로 허무주의자의 냉소주의 때문이었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 (분명 테러리즘을 근간으로 하는) 흑도회, 흑로회, 흑우회, 불령사 등의 단체를 만들어 열혈활동을 했던 그가 이토록 상반된 면모를 가지고 있기에 박열에 대해 판단하기를 유보하게 만든다. 하지만 사람이란 원래 이처럼 다면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 게다가 박열이 신문 조서에서 한 말은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 그의 동지들과 연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최희서 분)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 진술을 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그는 법정 투쟁을 하면서 실로 정말 혁명가다운 사람이 돼가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그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지, 감옥살이를 겪으며 그렇게 돼 간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존재 대 생성.)

실제로 박열의 가장 빛나는 혁명 투쟁가의 모습은 법정 투쟁, 더 정확히 감옥과 법정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에도 있다. 여기서 그는 언론(저널리즘)을 적절히 이용하고, 그들 법적 제도와 절차를 적당히 운용하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감옥에서 혼인하고, 단식투쟁을 하며 자신의 의지와 요구를 관철하는 면모에는 배짱과 명민함이 동시에 엿보인다. 뿐인가. 법을 이용하고 일본 상징망의 꼭짓점인 천황과 황태자를 제거하려는 계획 자체가 이미 상징망의 기제를 정확히 파악한 계획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두 싸움에서도 우리는 승패를 확인할 수 없다.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폭력을 독점한 국가의 합법적 절차와 제도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잘못된 권력과 제도는 인정할 수 없다고 근본적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 싸움 또한 완전히 종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주의 간의 부딪힘은 개인주의 대 연대주의(코뮌주의로서의 Solidarism)이다.

이 대립 구도는 박열 내면의 투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박열과 그의 연인이자 동지인 가네코 후미코와의 대립이다. 영화는 실로 이 대립에서 빛나는 연출을 보여준다. 놓치기 쉽지만 연인(사랑)과 동지(대의로서의 혁명)는 양립하기 어려운 개념이(라고 알려져 있)다. 무슨 말인가. 사랑은 실로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영역, 한 사람의 은밀하고도 내밀한 중핵과 결부된 감정이며 공유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사적 소유와 공산제의 대립 갈등이다. 박열이 처음에 폭탄 구입을 요청했던 김중한(정준원 분)으로부터 폭탄 구매를 철회한 것 역시 신문 조서에 의하면 김중한이 그의 애인 니히야마 하쓰요(윤슬 분)에게 폭탄 구매에 관해 누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폭탄에 대해 신중하게 함구했던 박열은 후미코로부터 뺨을 맞기도 한다. 함께 살을 섞고 살면서 동지로서의 공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예심 판사 다테마쓰에게 진술을 하면서 박열이 후미코의 진술을 확인하려는 것이나 후미코가 박열의 진술을 다테마쓰에게 강요하는 것도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다. 이 구도 또한 흥미롭다. 개인으로서의 박열도 중요하지만, 연인 공동체로서의 두 사람도 하나의 연대이며, 더 나아가 이념과 단체의 회원으로서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자칫 말을 잘못하면 연인을 다치게 하거나 혹은 다른 회원들을 다치게 할 수 있다. 즉 개인 박열과 연인 공동체로서의 박열-후미코, 박열과 후미코를 원자로 하는 이념 집합체가 이들이 놓여 있는 형국이고, 더구나 이들은 진술을 강요받고 있다. 

여기서 영화는 이 미묘함과 복잡함을 아주 잘 봉합한다. 개인주의는 ‘그가 그렇게 말했다면 맞다’는 식의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으로, 자신(들)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는 방식으로 연대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머지 불령사 회원들은 석방되고, 천황과 황태자 폭살 계획은 두 사람이 계획한 것으로 법정 결론이 나고 사형이 선고된다. 이제 개인주의는 배경으로 물러나고, 두 사람 사이의 진한 애정이 남는다. 물론 두 사람의 사랑은 전적으로 사적인 감정만이 아니다. 그들 사이에는 사상과 이념의 일치라는 절대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유일한 끈인가. 실로 이 둘을 묶어주는 연대는 죽음이다. 사랑과 죽음이 결합하면 신파극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사상과 신념이 죽음의 매개라는 형태로 결합해 있기 때문에 신파극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죽음이 사랑의 알리바이가 아니라 신념의 공유로 죽음에 이르는 루트로 사랑이 구성되는 구도. 이 두 사람 간 강도(intensity)의 비밀은 바로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이들 내밀성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공통성으로 결합하고 완성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보는 관점은 뒤집혀야 할지도 모른다. 여타의 많은 이즘들의 등장과 얽힘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구도를 특권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죽음 대 생존주의일 것이다. 목숨을 건 싸움에서 목숨을 내버림으로써 스스로 주인임을 천명함과,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희생해야 하는 노예의 싸움. 이것을 현학적으로 제시하면 라캉이 말한바 소외의 벨(vel)이 형성된다. 식민지의 피지배자로서 노예나 개새끼처럼 살았지만, 목숨을 내던짐으로써 겨우 주인으로 살 수 있었던 사람과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오래오래 잘 살기 위해 노예가 돼야만 하는 생존주의의 담론 투쟁이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생각나는 구도인 것이다.  
 
영화 <박열>은 대단히 치밀하고 정교한 고증을 기초로 실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그리고 당대 아나키스트들, 법정 진행 과정을 잘 세공해냈다. 그러나 영화는 아무 말도 전하지 않는다.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좌악 펼쳐놓고 입맛과 취향대로 너만의 진실을 고르라는 식이다. 영화는 백화점처럼 수많은 이념들의 전시장에 각종 ‘이즘’들을 디스플레이하고는 우리더러 고르기를 권한다. 픽킷업! 골라보시오. 민족주의, 아나키즘, 저항정신, 연인 간 둘만의 내밀한 소통(에로스적 사랑), 지나간 시절의 행동주의와 동지애, 세상에 당당히 도전하는 젊은이들의 당찬 모습 등등. 당신이 좋아 보이는 대로. 혹은 모두 골라도 좋소. 이것은 당신의 선택을 위한 판타스 마고리아이니….   


글·이호 
200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한국문인 인장박물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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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 영화평론가
이호 | 영화평론가 info@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