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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후예 자처하는 칼라시족
소수 설움 벗고 싶은 판타지의 족보학
알렉산더 후예 자처하는 칼라시족
소수 설움 벗고 싶은 판타지의 족보학
  • 니콜라 오트망
  • 승인 2010.05.10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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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국경지대에 있는 칼라시인들은 혼돈스러운 역사의 재해석을 상징의 열쇠로 삼아 장난을 치고 있다.

 파키스탄을 탐험 중인 서양인이라면, 아프가니스탄 국경에 인접한 힌두쿠시 산악지대의 막다른 곳에 위치한 치트랄 계곡 관광이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다. 관광객이 이 기막힌 풍광 안에 자리잡은 칼라시(Kalash) 주민 마을을 방문한다면, 이들은 알렉산더대왕이 긴 페르시아 정복을 끝낸 뒤 니사(1) 마을에 들렀을 때, 이상하게도 그곳 주민이 고국의 디오니소스 제례의식(2)과 똑같은 제례의식을 거행하는 것을 보고 느낀 바로 그 감정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다신론자인 칼라시 사람들은 종교의식 때 포도주를 사용하고 여성의 히잡 착용을 거부하며, 주변의 특정 세력이나 환경에서 자신을 구분짓는다. 이들이 거주하는 세 계곡 중 하나인 붐부렛 계곡에는 그리스어 간판이 내걸린 거대한 3층짜리 신축 건물, 칼라사두르가 있다. 이 건물 안에는 학교, 보건소, 심지어 이오니아 건축 양식으로 조각된 기둥이 떠받치는 박물관도 있다.

 깊은 계곡 속 그리스식 3층 건물

 

▲ <무제>, 2009-장샤를 블레
파키스탄 북부 페샤와르에서 유학하는 청년 자렌 칸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칼라시인이 3만 명에 달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파키스탄을 부패시킨 졸렬한 이슬람의 탄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무슬림으로 개종했다. 칸은 계곡 중앙에 새로 들어선 이슬람 사원을 가리키며 “현재 우리는 3천 명에 불과하다”며 한탄했다.

 

이런 주장과 함께 알렉산더대왕의 모습이 대두되고 있다. 칸은 “몇 해 전 사람들이 붐부렛의 한 동굴에서 알렉산더대왕의 얼굴이 새겨진 금화를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사라질 위기에 처한 전통의 파수꾼인 옛 칼라시인이 마케도니아의 정복자 모습을 언급하는 일은 없지만, 젊은이들은 칼라사두르가 아이들에게 전통을 다시 가르칠 수 있게 배려한 것을 강조하며, 알렉산더대왕이 이 지역을 방문했을 가능성을 언급한다.

칼라사두르에 있는 작품은 30년째 그리스 비정부기구인 ‘그릭 볼런티어’에서 일하는 그리스 마니아, 아타나시스 레루니스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거의 20년째 이역만리의 이 계곡에 그리스의 교수와 의사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이들은 2001년 그리스 외무부의 협력 프로그램인 ‘헬레닉 에드’에서 거액의 지원을 받았다. 2005년 4월에는 그리스와 파키스탄이 양국 간 ‘문화적 관계’를 토대로 상호협력 협약을 체결했다. 최근 많은 칼라시 학생이 국비 장학생으로 그리스 유학을 떠났다.

‘헬레닉 에드’가 자금 지원을 얼마나 했는지 밝히길 거부하고 있지만, 20년 이상 영국의 비정부기구인 ‘힌두쿠시 보존협회’를 이끌고 있는 모린 라인은 그리스인이 분명 ‘수백만 루피’를 뿌렸다고 주장했다.(3) 대부분의 이런 ‘협력’ 관계는 인류학자 애리언의 저서를 통해 정당화됐다.(4)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알렉산더대왕과 그의 수하 장수들이(기원전 329년) 현 힌두쿠시 지역인 파로파미수스를 거쳐갔다”고 썼다. 애리언은 심지어 터무니없는 이론까지 동원해가며, 칼라시인은 그리스가 페르시아제국의 국경지대로 보낸 이오니아나 시리아 죄수의 후손이라는 주장까지 폈다.

 혈연관계 흔적은 없다

하지만 칼라시인과 알렉산더대왕, 혹은 당시 그리스 군대의 후손 사이에 입증된 관계는 아무것도 없다. 힌두쿠시 지역은 알렉산더대왕이 정복한 박트리아(중앙아시아 고대국가)의 사트라피(페르시아제국에서 총독이 관할하는 주)에 편입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지난 30년 동안, 이 문제에 대해 가장 명확한 연구 실적을 낸 민속학자 우구스토 카코파르도(5)는 구전되는 칼라시 전설과 신화 속에서 알렉산더대왕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인물을 추적했지만 아무런 실마리도 찾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언어에서도 칼라시어인 칼라시아몬과 그리스어 사이엔 아무 연관성이 없다.

카코파르도는 지난 20년 동안 칼라시인의 신화와 이들의 역사를 추적했다. 그는 주로 서양의 기행문(마르코 폴로를 비롯한 영국 탐험가의 기행문)과 문학 속에 등장하는 신화를 참고했다.(6) 카코파르도의 작업이 기대보다 좋은 성과를 거둔 것은 수세기 전부터 현지 무슬림 통치자가 신화를 자신의 정체성을 내비치는 표식처럼 관리해왔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바다흐샨주의 통치자들은 <코란>에서(7) 알렉산더대왕을 지칭하는 줄카르냉(Zulqarnain), 즉 “두 개의 뿔을 지닌 통치자”를 언급하며, 스스로를 줄카르냉이라 불렀다. 또 카코파르도는 파키스탄의 훈자와 스왓 지역의 옛 통치자들에게서 이런 이야기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통치자들이 알렉산더대왕을 언급한 이유 중 하나는 알렉산더대왕과의 뜻밖의 ‘형제 관계’를 빌미로, 새로운 파키스탄의 정복자인 영국 정부와 제휴관계를 맺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흐샨 통치자들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2세기가 지난 후, 알렉산더대왕의 전설은 재등장한다. 심리학자 니코스 카람파리키스는 최근 자신의 저서에서(8) 현대 그리스의 정체성 확립에 알렉산더대왕이 많이 등장한다고 밝혔다. 그리스에서 알렉산더대왕이 재등장한 시점(대략 20년 전)은 힌두쿠시 지역에서 그가 재등장한 시점과 비슷하다. 예컨대 이런 새로운 현상이 대두된 것은 앙숙관계인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공화국 간의 충돌 때문이다. 1991년 독립한 옛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유엔의 공식 명칭)과 그리스는 자신들의 유산의 정체성을 놓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마케도니아 공화국은 고대 유적에서 마케도니아가 알바니아와 불가리아 등 인근 국가와 구별되는 상징을 발굴했다. 하지만 그리스는 외교석상에서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국명 사용을 여전히 거부하며, 마케도니아가 고대 그리스의 시조인 마케도니아 지방을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한다며 비난한다. 1992년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더대왕의 아버지 필립 2세의 마케도니아 무덤에서 1977년 발견한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상징 베르기나(Vergina)의 태양 모양 문장을 마케도니아 국기에 새겨넣으며 그리스 당국의 분노를 샀다. 그리스가 항의하자, 마케도니아 공화국은 1995년 국기에서 이 문양을 뺐다. 하지만 마케도니아는 이에 개의치 않고 2007년 수도 ‘스코페 공항’의 이름을 ‘알렉산더대왕 공항’으로 개명했다.

 그리스-마케도니아의 역사 왜곡

이런 과열 경쟁 속에서 양국은 당연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완해줄 정당성을 찾기 위해 자신들의 ‘후손 국가’라고 믿는 이들 나라로 떠났다. 최근 그리스가 칼라시 지원 프로그램에 자금을 지원한 것은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최근 그리스에서는 칼라시를 다룬 다큐멘터리와 영화, 그리고 서적이 수십 종 쏟아져나왔다. 한편 마케도니아인은 주저하지 않고 알렉산더의 진정한 후손은 힌두쿠시의 또 다른 계곡인 훈자 지역에 거주한다고 주장한다. 2008년 7월 소코페에 초대된 훈자의 왕자 가잔파르 알리 칸과 공주 라니 아티카는 “고국 마케도니아에 돌아와 영광이다”라는 소감을 전했다.(9)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카람파리키스는 “이들이 분명 ‘전치’(Déplacement·감정전이를 일컫는 심리학 용어)의 심리학을 들먹이는 것 같다”며 비웃었다.

 ‘힌두쿠시 보존협회’의 모린 라인은 매년 강제 이슬람 개종에 맞서 투쟁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삿거리를 찾는 수십 명의 기자에게서 이들의 정보를 요청받는다고 했다. 문명인과 야만인의(10) 세상을 구분지으려는 지능적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알렉산더대왕의 ‘후손’은 그들의 정체성이 민족적이든 종교적이든 서구와 동질화된 정체성을 추구하는 지지자들의 웹사이트 기사 안에서 다시 번창하고 있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알렉산더>(2004)가 알렉산더대왕과 전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를 연관지으려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한 ‘국가의 지도자’의 아들들인 이들이 끝내지 못한 자신의 아버지의 중동 정복을 이어갔기 때문일 것이다.(11)

카코파르도는 실제로 칼라시인이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고대 동방의 신 디오니소스를 숭배하는 사람들과 유사한 제례의식을 진행하는 것을 볼 때, 이들이 적어도 일신교를 계승한 인도유럽어족의 이교도 문화를 대표하는 힌두쿠시 지역에 거주하는 마지막 남은 소중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이렇듯 ‘정체성의 환상’과 변형된 민족 환상이 종종 자신들만의 멋진 이야기를 꾸며내거나 예기치 않은 지적인 만남을 연출해낸다. ‘문명의 충돌’을 기록한 헌팅턴과 디오니스소스의 만남은 분명 꽤 놀라운 연출이었다.

글•니콜라 오트망 Nicolas Autheman
국제관계 컨설턴트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각주>
(1) 현 아프가니스탄 잘랄라바드로 추정, 디오니소스에 대한 숭배 때문에 붙은 이름.
(2) 애리언,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원정> 5권, Minuit, 파리, 1984.
(3) 수천 달러에 해당.
(4) 애리언, 같은 책 4권.
(5) Augusto S. Cacopardo와 Alberto Cacopardo, <Gates of Peristan>, Rome, Istituto Italiano per l’Africa, L’Oriente, 2001.
(6) 루디야드 키플링, <왕이 되려던 사나이, 1888년>. 이 책은 1975년 존 휴스턴 주연으로 영화화됐다.
(7) <코란>, 17장, 83, 84, 85절.
(8) Nikos Kalampalikis, <그리스인과 알렉산더대왕의 신화: 마케도니아와의 상징적 마찰에 대한 심리연구>, Harmattan, 파리, 2007.
(9) ‘훈자의 로열패밀리 마케도니아 방문’, <마케도니아 데일리>, 2008년 7월 12일.
(10) 츠베탕 토도로프(Tzvetan Todorov),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야만인들에 대한 공포>, Laffont, 파리, 2008.
(11) 기원전 324년 고대 바빌로니아 전투 때, 알렉산더대왕은 페르시아인을 동화하기 위해 그들에게 군대의 최고위직을 맡겼지만 그의 휘하에 있던 장수들은 오피스(Opis)에서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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