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호 구매하기
사도-마조히즘에 젖은 ‘그들’이 다시 움직인다
사도-마조히즘에 젖은 ‘그들’이 다시 움직인다
  • 성일권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한국어판 발행인
  • 승인 2017.10.31 16: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마니에르 드 부아 N 137

촛불 시민혁명 1주년이 지난 지금, 한동안 잠잠했던 우리 사회의 전문 마녀사냥꾼들이 먹잇감을 찾아 배회하고 있다. 사회 곳곳에 덕지덕지 붙은 적폐의 이끼들이 하나씩 벗겨질 때마다 음습한 서식지에 똬리를 튼 ‘어둠의 세력’의 단말마적 고통의 몸부림이 커지고, 그럴수록 이들과 오랜 동맹 관계를 맺은 ‘그들’의 촉수도 더욱 독기를 뿜는다. <조선일보>의 논설위원을 지낸 김대중, 류근일과 <월간조선> 사장 출신 조갑제가 그들이다. 

이들 3인방은 독재정권 시절부터 민주화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친북·좌파·반미세력의 척결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논객들이다. 그들의 사상검증 작업으로 인해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수많은 민주세력들이 친북세력이나 빨갱이로 몰렸고, 광주민주화운동까지도 ‘북측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의 난(亂)’으로 뒤바뀌었고, 심지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조차도 그 배후세력이 ‘종북’으로 돼 있다.

항상 오른쪽으로 기운 그들의 펜촉은 이 땅의 민주화 세력을 후벼 파는 독촉일 뿐이다.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부터 이른바 ‘용공좌빨’ 사냥에 나선 비슷한 연령의 그들은 정년 퇴임 등을 이유로 자신들이 노골적으로 지지한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등장 이후엔 한동안 휴지기를 가졌다가 얼마 전에 다시 무대 전면에 차례로 등장했다. 한동안 휴식을 취한 탓인지 ‘인식’의 파고가 훨씬 거세졌고, 글발 역시 더욱 강하고, 매서워졌다.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 등 특정 정치인들에 치중했던 그들의 공격대상은 이제 남북관계와 한미관계, 개혁문제 등 거대 담론 문제로 확대 발전했다. 물론 조갑제는 박정희 신봉자답게 박근혜의 추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박정희 미화와 좌파 척결운동에 노욕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3인방의 결론은 예나 지금이나 ‘기·승·전·종북’의 색깔론 제기다. 평화와 인권, 약자 배려, 사회개혁 등은 애초부터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물론, 그들의 뒤를 이어 보수언론들의 후배 논객들이 뒤질세라 흑백논리와 색깔론 제기의 묘기를 보이고 있지만, 아직 이들 선배의 실력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흔히 이 세상의 모든 권력을 비판하는 것이 언론인의 사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논객들이 너도나도 신성불가침한 언론의 이름으로, 특정 정파의 시각을 갖고서 ‘언론의 언어’가 아닌 ‘정치의 언어’를 구사한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오늘날 신문의 위기가 그것을 말해준다. 돌아온 ‘삼총사’의 활동상을 잠깐 보도록 하자. 
 
김대중, 저주의 ‘퇴마사’   

민주정권 집권기 내내,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상검증 전문가로 명성을 날린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은 자신이 그토록 반겼던 극우 정권인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등장 이후 잠시 잠잠해졌다가, 문 정권 출범 이후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좌익세력이 준동하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못 미더워 퇴장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수호천사를 자처하는 그의 시각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계자’인 현 집권세력이 추진하는 적폐청산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그는 얼마 전 이런 글을 썼다. 
“문재인 정권의 노선과 정책들이 처음에는 ‘적폐’를 겨냥한 것으로 포장되더니 점차 정치보복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의 정부가 공격의 대상인가 싶더니 이명박 정권의 것도 뒤지고 엎고 하는 것을 보니 ‘박근혜 싹 자르기’와 ‘노무현 원수 갚기’라는 ‘적폐’에 올인하는 것 같다.(…) 그뿐 아니다. 전 정권과 관련된 공직자, 언론 경영인, 기업인들을 하나씩 소탕(?)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어느 시절의 ‘삼청교육대’가 연상된다.(…)” (2017.10.24)

군사독재 시절에는 민주화 세력을 좌익으로 내몰고, 민주정권 집권 시에는 내내 종북 타령만 했고, 극우 집권 시에는 그들의 적폐에 눈감았던 김대중이 촛불시민혁명의 민심을 반영한 현 정부의 적폐청산을 위한 노력을 오히려 적폐로 폄훼하는 것은 대단히 음모론적이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박근혜 구속 이후 분열된 옛 집권당의 화려한 부활이다. 그가 문재인 정권에 대해 저주하고, 극우 보수의 부활을 소원할 땐 언론인의 글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퇴마사의 주문(呪文)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는 최근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대표에게 이렇게 훈수했다.

“문재인 정부는 야권분열의 기회를 놓칠세라 거의 매일이다시피 ‘좌파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야당이 아무런 대응 논리도 못 갖추고 매일 즉흥적 논평이나 내놓는 상황을 더는 방치해서는 안 된다.(…) 한국당과 홍 대표는 10개월 후인 내년 6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특히 서울시장 선거에서 다음 정권의 향배를 가를 중요한 승부를 맞게 돼 있다. 서울시장 선거는 다음 대선의 전초전이며 문재인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다. 그 전초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지금 탄핵사태를 둘러싼 보수권의 대립이라는 터널을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는 홍준표 대표에게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의 조건 없는 통합에 나서 문정권의 지지율 하락을 대비하라고 조언까지 한다.  
“문 정부의 과시적이고 물량적인 정책과 좌파 일변도의 정치는 시간이 갈수록 보수층을 불안하게 하고 중도층까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 것이다. 여론조사 지지율이 갈수록 떨어지는 것은 동서고금 정치사의 공통된 현상이다. 더구나 문 정부의 정책이 좌우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북핵의 위협, 한미관계 등 나라의 안위와 국민 생활의 기본을 건드리는 것일수록 보수회귀의 기운은 살아날 것이다.”(2017.8.1.)
사실, 한평생 극우 언론인으로 살아온 김대중의 편향된 시각으로는 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나와 박근혜 정권과 그의 집권당을 반대했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2016년 10월 29일부터 주말마다 촛불시위가 일어나자, 김대중은 <이제 박근혜는 과거다>라는 칼럼에서 “촛불을 꺼라”고 주장하며, 이렇게 쓴 적이 있다. 

“(…) ‘지나간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분노 해소를 위해 귀중한 시간을 ‘촛불’로 지새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야니 탄핵이니 하면서 세월을 보내고 야권은 횡재한 듯 머리를 굴려대는 정치싸움에 몇 개월씩 빠져 있다면 이것은 나라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다. 이제 4차 촛불도 했으니 그만하면 사람들의 분노와 뜻은 하늘에라도 닿았을 것이다.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아니고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이런 김대중의 단순무지함은 천성적인가? <조선일보> 시절 김대중의 같은 부서 상사였던 리영희 선생은 그에 대해 “수습기자 시절부터 아무리 가르쳐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단순한 흑백논리의 싹수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조선일보> 국제부장 시절 후배 김대중을 교육하던 중 언론민주화 운동으로 해고당한 리영희 선생의 회고록을 옮겨본다.(1)

“이 나라에서 어째서 일제시대의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반공을 빙자한 ‘애국자’로 권세와 영달을 누리고 있느냐의 문제에서 그들은 젊은이답게 더욱 괴로워했다. (…) 그런데 서울대학교 졸업의 수재들 중에서 딱 한 젊은이만은 그 모든 것을 끝까지 깨닫지 못했다. (…) 

‘부장님, 베트남 전쟁은 자유진영이 아니라 공산주의 세력을 무찌르려는 것인데, 이런 기사가 나온다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닙니까. 김OO은 흥분해 있었다. 큰 체구에, 둥글고 유달리 흰 얼굴에 눈이 각별히 작어서 더욱 반들거리는 김 군의 손에는 방금 텔레프린터에서 뜯어낸 외신기사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버트란드 러셀, 아인슈타인, 샤르르트 등 세계의 수많은 석학들이 베트남 사태에 대한 미국의 군사개입을 비난하는 성명의 기사였다. (…) 수습 기간을 끝내고 정치부, 문화부 또는 사회부, 경제부 등으로 배치될 때까지 그는 수습을 시작했던 당시의 상태에서 발전하지 못했다.” 

류근일, 비틀기의 대부  

2003년 2월 <조선일보> 주필직을 마지막으로 언론계를 떠난 류근일은 현역시절에 좌파전문 공격수로 명성을 날린 그답게 프리랜서로 바뀐 뒤 비틀어 해석하기에 더욱더 뛰어난 천재성을 발휘한다. 예전보다 훨씬 더 선명한 흑백논리로 무장한 그는 초강경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그가 근래 쓴 칼럼만 해도 ‘다른 나라, 대한민국’(2017.10.26.), ‘위원회 공화국, 꿍꿍이속이 뭔가?’(2017.10.17.) ‘김정은 하나 아웃이면 모두가 해피’(2017.10.3.), ‘오리알 안 되려면 한·미·일 共助밖엔. 한반도 결단의 순간’(2017.9.4.), ‘북핵, 대화로 풀 수 있다는 미신’(2017.08.08.) 등 문장 곳곳에 매카시즘의 전형적 어법이 배여 있다. 최근 들어선 문명사상가로서 한국의 미래를 어지럽히는 진보 좌파정권과 이에 ‘솔깃한 무지한’ 국민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다. 

“국민이 잘 모르는 가운데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로 변모하고 있다. 모두가 알아보는 가운데 진행되는 변모도 물론 있다. 외교·안보 기조의 변화가 그렇다. (…) 문 정부는 ‘늘공(늘 공무원)’을 제치고 운동권 성향의 ‘어공(어쩌다 공무원)’들에게 칼자루를 쥐어줬다. 

이들 운동권 권력은 부처별로 위원회라는 걸 뒀다. 거의 자칭 ‘진보’ 인물들로 채운 위원회다. 과거의 들러리 위원회와는 달리 진보시대 위원회들은 세상을 갈아엎는 실세다. 비판자들은 그래서 “마치 혁명위원회 같다” “국회보다 더 세다” “헌법상 근거가 없다”고 나무란다. (…)

그러나 한국의 진보·노동 운동은 너무 지나치게 이념적으로 굳어졌고, 불법 투쟁, 체제투쟁으로 넘어갔다. 이런 추세가 경찰 등 공권력에까지 미친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 온 대한민국은 간판 내리게 된다. 그 대신 올 것은 직접민주주의? 연방제 분권? 주권(主權)은 아스팔트에 있다? 민중민주주의? 코뮌(commune)주의?(…)” 

한때 ‘철없는 좌파’에서 ‘사려 깊은’ 우파로 전향한 류근일은 근대성·자유·민주·공화·개인·세계시장이 순리인데도 그 반대의 ‘탈레반 근본주의’가 판치고, 대중이 이에 둔감한 채 당장의 공짜 포퓰리즘에만 솔깃해 있는 현실을 한탄한다.(2017.10.26)

류근일은 1957년 말, 서울대 문리대 2학년 시절 교지에 ‘우리의 구상’이라는 글을 기고한 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끌려간 재판장에서 최후진술을 이렇게 밝혔다. 

“오로지 향학열에 불탄 나머지 새로운 이론으로서의 세계관을 갖기 위해서였던 것인데 사회주의관에 대한 그릇된 판단에서 이런 결과를 가져온 데 대해 잘못했다고 생각되며, 나는 아직도 배우는 몸이니 앞으로도 학업을 계속하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의 최후진술대로, 그는 아직도 배우는 중인가? 상식적으로도 ‘당연한’ 노동운동을 보장하면, 우리 사회가 (북한식의) 연방제, 또는 민중민주주의나 코뮌주의로 전락한다고 이해한다면, 그건 아무리 공부해도 깨달음이 없는 아둔패기이다.   
 
조갑제, 박정희 미화의 미장이

“나는 전쟁 중에 피란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내전이면서 국제전이기도 했던 그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9월 21일 유엔총회에서 행한 이 연설은 용공몰이 전문가인 조갑제의 손에 거치면, 대단히 위험한 발언으로 둔갑한다. 조갑제는 <월간조선> 11월호에 문대통령의 사상검증을 호되게 적시한다. “유엔총회장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한국전을 내전과 국제전으로 규정했다. 이는 한국전을 한반도 내의 좌우 대결이 확대된 것으로 해석, 국내 문제에 개입, 국제전으로 만든 책임은 미국에 있다는 식이다. 물론 이는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로 규탄된 김일성의 남침과 마오쩌둥(毛澤東)의 개입에 면죄부(免罪符)를 주려는 억지다. 냉전이 서방 세계의 승리로 끝나고 한국전에 대한 소련과 중국 문서가 공개되면서 내전설은 사라졌는데 한국 대통령에 의해 유엔총회장에서 부활한 것이다.”

더 나아가, 조갑제는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 ‘국가연합 혹은 낮은 단계 연방제 통일 방안을 추구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며, “국가연합은 대한민국 헌법이 국가임을 부정하는 북한 정권을 국가로 인정하는 헌법 위반이고 낮은 단계 연방제는 높은 단계 연방제, 즉 북한 노동당의 규약이 선언한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로 가는 첫 단계”라고 비판했다. 

조갑제는 과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천적이자, 이승만과 박정희의 열렬한 맹신자다. 평생 김대중 대통령의 뒤를 캐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동시에 이승만과 박정희의 영웅신화를 제조해온 그다. 수년 전, <월간조선> 사장에서 물러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조갑제닷컴’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이 땅의 ‘좌파싹쓸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옛 안기부의 비밀기록을 입수할 정도로 정보력이 뛰어난 조갑제의 정보망은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선이 닿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미스터리다. 어떤 경우에는 국정원과 청와대의 정보력을 뺨치는 고급정보를 가지고서 민주화 세력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드러내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미국 CIA나 얻을 수 있는 대북정보를 취급하기도 한다. 조갑제는 최근 들어 자신이 높이 평가하는 박정희 치적과 반공 사상을 버무려, 인식의 지평을 ‘문명사적’으로 넓히고 있다.                                     

그는 ‘한국의 좌익들에게’라는 칼럼에서 “체 게바라의 ‘악의 유산’을 영원히 묻어버리고 박정희를 배워라!”고 질타한다. 
“(…)체 게바라가 세계 젊은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을 때 박정희는 욕을 먹어가면서 국가주도의 실용주의적 근대화 개혁으로 베네수엘라에 한참 뒤떨어졌던 한국을 발전시켰다. 현재 한국은 소득 평등도에서 세계적으로도 가장 우수한 나라인데 평등을 좋아하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 쿠바, 월남, 베네수엘라보다 더 평등하다. (…)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혁명가는 나라를 망치고, 세상의 이치와 인간의 심리를 간파한 박정희는 부국강병에 성공하고 복지와 민주의 토대를 놓았지만 지식인들의 반감(反感)을 사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 게바라는 영원히 묻어버리고 박정희는 영원히 살려야 세계가 편할 것 같다.” (2017.10.23.) 반평생 넘은 언론인 생활 중 박정희 정권 당시에 죽임을 당하고 고문받고 상처받은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해 단 한 번도 취재하거나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당연한 결론의 졸렬함이 밴 글이다. 

3인방을 닮으려는 후계자들의 사도-마조히즘  
 
김대중, 류근일, 조갑제 3인방이 구사하는 흑백논리식 종북몰이와 비틀기식 화법은 보수 논객들에게 글쓰기의 본보기로 작용해, 보수 매체에는 유사한 글들로 넘친다. 
하지만  류근일의 인물평처럼, “인간 김대중은 자기 이외의 다른 스타를 견디지 못하는 쌈쟁이다. 그래서 그런지 언론인 김대중은 자기보다 더 세인의 이목을 끄는 다른 스타, 즉 대통령을 주로 건드리는 것을 주특기로 삼고 있다. (…) 신문 독자들은 언론인 김대중의 최고 권부에 대한 잘 조준된 저격 장면을 바라보며 일종의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적 대리 체험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연출에 대해 언론인 김대중은 자기만이 아는 나르시시스트적 만족감에 스스로 심취해 있는지 모른다.” (김대중 자서전 <직필>(2001)에 대한 류근일의 추천의 글)  

류근일의 김대중 글에 대한 평가지만, 3인방의 모든 글에서 이 같은 사도-마조히즘적 도발이 공통으로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류근일의 속내대로라면, 어쩌면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며, 분석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관점보다는 적개심과 분노가 흥건한 저주(詛呪)의 글쓰기 방식이 그들의 단순한 ‘개인적’ 취향을 만족시키려 구사되고 있는 셈이다. 꽤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 손꼽혀온 이들 3인방은 보수언론들 사이에 가장 닮고 싶은 인물로 주목받아왔다. 

촛불혁명이 일어난 지 1년, 3인방의 ‘화려한’ 등장과 더불어, 차세대 보수 논객으로 각광받는 K, P, J, L, C, 또 다른 K씨(이들의 이름을 이니셜로 표기하는 것은 이들의 명성이 아직 3인방에는 미치지 못한 까닭이다)가 선배들의 뒤를 이어 자신들도 스타덤에 오르고, 독자들에겐 사도-마조히즘의 대리만족을 주고자 철 지난 용공과 종북놀이로 칼럼난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파레시아는 ‘모든 것을 말하기’를 의미하는 그리스어다. 모든 것을 말하기는 아무것이나 다, 선별도 하지 않고 신중을 기하지도 않으며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비겁하거나 수치스러워서 즉각적으로 입 밖에 내지 못하는 것을 과감히 털어놓는 뜻이기도 하다.(2) 아니, 더 간단히 말하면, 진솔하게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것, 거리낌 없이 두려움 없이 말하기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파레시아는 솔직히 말하기, 진실 말하기, 발언의 자유 등으로 말할 수 있다. 고대철학자 이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진정한 파레시아스트는 선동가와는 반대로, 대중이 듣기 좋아하는 의견들만을 들려주는 게 아니라, 의견의 불일치를 만들어내고 대중의 적대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위험을 감수하면서 듣기 거북한 진실을 부르짖는 임무를 담당한다. 

'파레시아스트'의 가면을 쓴 그들이, 자신들만의 욕망이 투사된 사도-마조키즘의 민낯을 드러내며 다시 돌아온다! 그럼에도 ‘그들’에게서 진정한 파레시아스트를 기대해본다. 부질없이 요원한 꿈인 줄 알면서도….  


글·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1) 리영희, <인간만사 새옹지마>, 범우사, p.137~141, 1991.
(2) 미셸 푸코, <담론과 진실>, 동녘, 서문(프레데리크 그로의 글).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정기구독자님이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바랍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시 종이신문 과월호를 발송 드립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