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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거나 해방하거나 - ‘장산범’은 아무도 해치지 않았다.
욕망하거나 해방하거나 - ‘장산범’은 아무도 해치지 않았다.
  • 신영빈
  • 승인 2018.02.05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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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단 한번만이라도 다시 만났으면 하는 사람. 볼 수 없다면 목소리만이라도 들었으면 하는 사람. 영화 <장산범>은 너무나도 그립지만, 가슴에만 묻어둔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목소리를 따라하는 전설 속 귀신 ‘장산범’을 이용했다. 부산 일대에서 전해 내려오는 실제 괴담을 빌려, 더욱 현실에 가까운 생생한 몰입을 돕는다. 장산범은 아무 목소리나 따라하지 않는다. 청자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그 사람’ 목소리로, 계속 들을 수밖에 없는 간절한 이야기를 속삭인다.
 
공포 없는 공포영화
 
<장산범>이 공포영화인 이유는 ‘장산범’ 때문이 아니다. 극중 인물들 간의 살해와 위협으로 공포감을 조성하지만, 정작 ‘장산범’은 이들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는다. 모습도 드러내지 않는데다가, 목소리도 모른다. 그저 우리가 아는 친숙한 ‘그 사람’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관객이 공포를 느끼는 대상은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장산범이 아니라, 간절히 듣고 싶은 ‘그 사람’에 대한 애절한 욕망이다. 여느 공포영화와 다르게 <장산범>은 관객 내면 심리에 공포를 심었다. 그냥 애써 잊어버리면 되는 외적 공포와는 차원이 다르게 치밀하다.
 
사랑하는 내 아이. 실종된지도 벌써 6년이나 지났지만, 매일 밤 꿈에 찾아오는 그리운 내 아들. 영화에서는 아들 ‘준서’를 잃어버린 엄마 ‘희연’의 애절한 심경을 담았다. 경찰에 수차례 도움을 청했지만, 여전히 수사는 진전이 없다. 아이가 사라진 마지막 순간을 함께 있었던 할머니는 치매 환자다. 할머니의 정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지만, 남편 ‘민호’는 이제 그만 아이를 포기하자며 체념한다. 공권력도 가족도, 어디 하나 믿을 구석 없는 희연의 모습에서 관객은 절망스럽고 불안한 정서를 느낀다. 애써 괜찮은 척 준서를 가슴에 묻고 지내는 희연에게 어느 날, 준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엄마! 나 여기 있어”
 
욕망을 따라, 동굴 깊은 곳으로
 
<장산범>은 ‘욕망’이라는 감정에 관객의 주체성을 투영한다. 주인공으로 보이는 희연은,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집착으로 극중 긴장을 심화시키고 결국 영화 마지막에는 장산동굴 깊은 곳으로 종적을 감추고 만다. 관객은 좀처럼 주인공의 행동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희연이 장산의 깊은 동굴 안에서, 서울에서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행위는 무척 감정적이다. 그녀는 목소리를 따라해 사람을 홀리는 장산범의 존재를 알고서도, 준서 목소리를 따라 동굴로 들어간다. 아들 목소리를 듣고 싶은 욕망에 눈이 멀었다.
 
동굴은 욕망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다. 영화에서는 무섭고 오싹하게만 그려졌지만, 극중 인물들에게는 가장 듣고 싶은 것을 속삭여주는 욕망의 공간이다. 이 공간은 무척 깊고 어두워서, 시각에 의존할 수도 없다. 이성적 판단이 강한 욕망을 따라가지 못하면, 욕망하는 실체를 확인하고자 더 깊은 동굴로 들어가야만 한다.
 
해충덫을 따라서
 
극중에는 수차례 해충덫이 등장한다. 빛을 따라가는 해충의 특성을 이용한 전기 해충덫 말이다. 이 덫은 사람이 잘 찾지 않는 반여동 장산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욕망을 따르다가 생을 마감하는 인간의 무상함을 시각적으로 암시한다. 타닥타닥! 해충이 전기 코일에 타죽는 거센 소리가 들린다. 코일의 빛에 빠르게 그리고 가깝게 다가가는 해충이 가장 먼저 죽는다. 빛에 대한 욕망의 정도에 따라, 해충은 이 덫에서 죽을 수도 도망칠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장산동굴도 그렇다. 극중 인물들은 동굴을 대하는 태도에서 차이를 보인다. 깊은 욕망에 사로잡힌 자일수록, 더 깊은 동굴로 발을 들인다.
 
가령 먼저 동굴을 찾았던 이들을 보자. 강아지 ‘또띠’를 찾던 아이들은 또띠 소리를 듣고 동굴 앞까지 다가갔지만, 으스스한 기운에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났다. 반면 할머니는 동굴로 떠난 이후 극중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그녀는 죽은 언니와 오빠 목소리를 듣고 동굴로 향한다. 치매를 앓고 있는 그녀였지만, 망자에 대한 기억은 또렷했다. 진짜 언니와 오빠가 아닌 환청임을 상기했지만, 거울을 통해 계속 속삭이는 언니와 오빠 목소리를 결국 이겨내지 못한다.  스크린에서 확인할 수 있는 동굴의 깊이로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과거의 가족에 대한 애정은 그녀를 동굴 깊은 곳으로 이끌었고 결국 사라졌다.
 
희연은 절망적인 상황만큼이나 강한 욕망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된다. 여느 한국영화가 그렇듯 ‘모성애’를 각별하게 부각한 측면이 여기서 드러난다. 반면 아빠 민호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준서의 목소리를 거짓으로 판단하고 동굴에서 도망친다. 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그 역시도 준서를 찾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동굴에서 이성의 끈을 놓을 정도의 욕망은 아니었다.
 
흥미로운 것은, 동굴을 탈출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민호에게 희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점이다. 준서를 찾으러 동굴로 돌아간 희연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미련 없이 보내주었기 때문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준서 목소리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희연에게 싫증이 났기 때문이었을까. 민호는 결국 동굴을 빠져나와 구조된다. 할머니도, 준서도, 희연도, 그에게 더는 이성을 능가하는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가 생존하는 장면은, 관객에게 안도감을 주기보다 왠지 모를 씁쓸함과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욕망에 눈먼 사람들
 
장산범은 누구도 해치지 않았다. 정확히는, 사람을 해치는 장면이 전혀 연출되지 않았다. 오히려 애써 잊고 지낸 숨겨둔 욕망을 끄집어내, 유사하게나마 이뤄주는 구원자적 존재로 표현된다. 절대로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죽은 가족들이, 잃어버린 아이가, 반려견이,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고 착각하게 해준다. 분명 그들을 꿈에서라도 다시 만나고 싶어서, 그리운 목소리 한 번만이라도 다시 들어보고 싶어서 간절히 바랐던 이들도 있을 것이다. 영혼과 육신을 내놓아서라도 말이다. 영영 준서 목소리 한번 못 듣고,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가는 희연의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희연은 동굴 속으로 돌아가서, 침침해진 눈을 비비며 준서 목소리를 내는 여자아이를 꼭 끌어안는다. 희연에게는 그 여자아이가 준서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리던 준서 목소리를 듣고, 슬픔과 죄책감을 털어내고 싶었을 뿐이다. 욕망이 응어리져 답답하게 틀어막은 가슴에 조금이나마 숨통을 열고, 드넓은 공간으로 욕망을 분출해야 했다. 그녀에게 동굴은 해방의 공간이지만, 바깥은 오히려 더 슬픈 욕망이 계속 응어리지는 가슴 아픈 공간이다. 그녀는 어쩔 도리 없이, 스스로 해방의 길을 선택했다. 그녀의 동굴 밖 삶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힘든지 잘 알고 있는 관객들은, 그녀의 선택을 나무라지 못한다.
 
욕망은 어쩌면 그 자체로 공포다. ‘무자’로 표현되는 극중 공포의 대상이 거울을 통해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거울은 ‘나’를 비춘다. 나의 겉모습은 물론이고 표정, 감정이 모두 드러난다. 기쁨과 슬픔, 외로움과 절망, 체념과 안타까움. 모든 감정이 거울을 통해 드러나고 욕망하는 대상을 투영한다. 희연은 거울을 볼 때마다 ‘준서를 그리워하는’ 희연이 보인다. 거울로 가득한 동굴의 모습은 욕망을 폭발시키는 일종의 장치다. 무녀는 희연에게 “아무도 믿지 말라”고 경고했고, 희연은 정말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기 욕망만을 굳게 믿었다.
 
감독은 장산범 괴담과 동굴이라는 공간을 적절히 조화해 공포영화를 표방했지만, 동시에 현실의 관객들에게 ‘내가 욕망하는 존재’를 돌아볼 수 있도록 은근한 메시지를 던진다. 거울에 비친 당신의 모습은 어떠한가. 누가 당신을 동굴로 인도하고 있는가. 순전히 그것만을 굳게 믿을 자신이 있는가를 묻고 있다. 일상에 억눌려 표출되지 못하던 욕망. 그 욕망을 따라서라면 당신은 동굴의 어디까지 따라 들어갈 수 있는지, 영화 <장산범>을 통해 내면에서 오는 공포를 상상할 수 있다. 내면에서 밀려 넘치는 욕망이 현실로 재현될 때, 영화의 막이 내린 뒤에도 공포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공포는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다.
 
 
글: 신영빈
사진 찍고 글 쓰는 공학도다. 생각을 차분하게 표현하고 싶은데, 언변에 소질이 없어서 글을 쓴다. 인권과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다. 동물권 이슈에도 기웃거리고 있다. 채식의 의의에 공감하지만, 애석하게도 고기를 좋아한다. 누구보다도 가비지테리언을 출중하게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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