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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 타임! 진보의 '마태복음', 버나드 쇼를 읽자
쇼 타임! 진보의 '마태복음', 버나드 쇼를 읽자
  • 정승일
  • 승인 2018.02.14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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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일 박사의 버나드 쇼의 <쇼에게 세상을 묻다> 서평!

 

 

 


우물쭈물하다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아일랜드 출신으로 20세기 초중반에 영국에서 활동한 버나드 쇼. 그에 대해 21세기를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아마도 TV 광고에도 나왔던 "우물쭈물하다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이 문장은 "살 만큼 살다 보면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로 옮기는 게 맞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편집자)라는 촌철살인 묘비명과, 현대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이 "우리가 결혼하면 당신의 뛰어난 두뇌와 나의 미모를 닮은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라며 청혼하자 "나의 못생긴 외모와 당신의 텅 빈 머리가 결합된 아기가 나올 것이요"라고 답변하여 던컨을 당황케 했다 하는 그의 독설 정도일 것이다.

버나드 쇼에 대해 딱히 아는 게 없기로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극작가인 그가 1925년에 <피그말리온>(김소임 옮김, 열린책들 펴냄)이라는 작품으 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작품을 읽어본 적도 없고, 내 주위에서 그의 작품을 놓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 아마도 그의 문학 작품들이 한국인의 문학적 취향에 별로 맞지 않는 게 아닌가 하고 막연하게 추측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나드 쇼는 나에게 언젠가 한번 탐구해야 할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복지 국가와 사회민주주의에 관심을 가진 나 같은 사람에게 그는 사상사적으로 획을 긋는 인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19세기 말 영국에서 웹 부부와 함께 페이비언 협회를 창립하여 페이비언 사회주의(정확하게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그가 주창한 개혁적 사회주의는 이웃 나라 독일의 베른슈타인과 스웨덴의 비그포르스 같은 사회민주주의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 주제에 관하여 그의 책이나 글을 우리말로 읽는 것은 그간 불가능했다. 아마도 <페이비언 사회주의>(버나드 쇼 외 지음, 고세훈 옮김, 아카넷 펴냄)에 실린 두 편의 글이 유일한 예외가 아닐까 싶다. 이런 점에서 <쇼에게 세상을 묻다 : 모르면 당하는 정치적인 모든 것>(김일기·김지연 옮김, 뗀데데로 펴냄)이 최근 번역 출간된 것은 우리에게 획기적인 사건이다.

 

파블로프, '개' 취급을 받다

650 쪽에 이르는 이 책은 1944년, 쇼가 여든 여덟이 되었을 때 작정하고 써내려간 책이라고 하는데,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총총했던 그의 정신 상태를 보여준다. 책의 내용은 다종다양한 세상만사에 관한 그의 정치 강연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다. 책의 영어 제목은 "Everybody's Political What's What?"이라고 하는데, 정말로 책 제목 그대로이다. 부동산 문제에서 시작하여 아동 교육과 금융 위기, 사회 보험과 복지 국가, 국유화와 정부 부패, 세계 대전과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 스탈린주의 소련과 사회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철부지 영국 노동당에 이르기까지 수십 가지 주제를 종횡무진으로 다룬다.

이렇게 수십 가지 주제를 모두 다루다 보면 겉만 번지르르한 이야기로 가득 찬 책이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다. 주제 하나하나를 다루는 버나드 쇼의 솜씨와 깊이, 그 지혜와 지식이 남다르다. 예컨대 은행과 보험 회사 등 금융 시장의 역사와 1930년대의 금융 위기 및 인플레이션에 대한 그의 분석과 지식은 놀랄 정도이다.

이런 것도 있다. 예컨대 파블로프에 관한 그의 글을 보자. 버나드 쇼는 "파블로프는 과학자인 척하는 얼간이들의 왕자였다"(357쪽)라며, 그의 전매특허인 독설을 퍼붓는다. 대학 시절 잠시 자연과학을 전공한 나는 처음에 '극작가인 버나드 쇼가 생물학자인 파블로프에 대해 뭘 안다고 함부로…'라고 생각하며 읽어 나갔다. 그런데 웬걸,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의 탁견에 무릎을 치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어보니 버나드 쇼는 파블로프와 관련된 모든 주요 저작들을 이미 다 꼼꼼히 읽고 이해하고 소화했으며, 그래서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 이론에 얼마나 많은 허풍과 허점이 있는지 지적할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버나드 쇼는 각종 질병에 대한 예방 접종을 밀어붙이는 의사협회와 정부에 반대하는 논지를 펼친다. 처음에는 황당했으나 읽어갈수록 그의 논지에 설득되어 갔다. 그의 논지는 마치 최근 이 땅에서 벌어진 조류독감과 돼지·소 구제역 사태에 대하여 수의사들과 정부가 수천만 마리의 닭과 오리, 돼지와 소들에 대한 대량 학살을 공식 명령한 것에 대하여 '자연의 원리에 반하는 멍청한 행위'라고 비판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밖에도 버나드 쇼는 오늘날 의사들과 자연과학자들의 실험과 통계에 얼마나 많은 조작(실험조작과 통계조작)과 맹신이 담겨있는지도 통렬하게 지적한다. (실은 요즘에는 경제학자 등 사회과학자들도 이런 통계 조작을 다반사로 저지른다). 파블로프와 의사협회, 자연과학자들의 맹신에 대한 비판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20세기가 낳은 몇 명 안 되는 천재였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참고로 나는 천재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 것을 싫어하며, 더구나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뭘 모르는 멍청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신을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공공연히 떠벌리며 살았던 버나드 쇼 앞에서는 그야말로 '인정, 당신이 이겼소, 항복!'이라고 외치는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 부자 쇼, 토지 국유화와 부자 증세를 말하다

이 책에서 버나드 쇼는 자신이 젊은 시절부터 이미 극작가로 명성을 날리며 저작권료로 큰 돈을 번 부자이며, 더구나 상속받은 땅까지 있다고 밝힌다. 그는 당시 영국 최고의 부자였으며 또한 여러 채의 집과 토지를 보유한 지주였다. 하긴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린 우리나라의 몇몇 진보적 명망가들 역시 버나드 쇼와 마찬가지로 부유하며 다주택 소유자인 경우가 많다. 이들을 이른바 '강남 좌파'라고 부르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강남 좌파 명망가들과 버나드 쇼의 결정적 차이점이 있다면? 쇼는 부자 증세와 함께 토지 국유화, 은행 국유화까지 맹렬하게 요구했다는 점이다. 부자 증세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토지와 은행의 국유화라니?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 아닌가?

그렇다. 버나드 쇼는 한국의 강남 좌파와 달리 진짜 좌파, 즉 빨갱이이다. 이 책의 곳곳에서 버나드 쇼는 자신이 사회주의자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으며 공산주의에도 동조하고 있음을 밝힌다. "나는 이론적으로는 공산주의자이고, 직업은 극작가이지만, 실제 신분은 지주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는 부재지주라고 할 수 있다"(20쪽). 그런데 토지 국유화를 주장하는 그의 글도 그의 다른 글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 토지 국유화를 실현하기 위한 혁명적 대안은 토지가 공공 자산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18세기 프랑스 혁명 때 그랬던 것처럼 즉시 땅을 떠나지 않는 지주들을 참수하거나,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몇 명을 본보기로 삼아 총살하거나, 1917년 러시아에서처럼 집을 빼앗고 돈 줄을 막아 지주들이 알아서 떠나게 만든다. 하지만 프랑스와 러시아의 혁명 정부가 토지를 몰수해서 기껏 한 일이라고는 농민들에게 나누어준 것이 전부였다. 그 농민들 가운데 토지를 잘 활용할 수 있는 농민은 별로 없었다. (…) 경작지의 90퍼센트는 황폐해졌고, 황폐한 토지의 주인은 진흙 바닥에 형편없는 침대와 난로뿐인 오두막에서 비참하게 살았다." (29쪽)

현실의 인간사는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선은 선이요, 악은 악이다'라는 선악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아이러니와 자가당착으로 가득 찬 세상이다. 그리고 현실 속에 내재한 아이러니에 대한 자각은 버나드 쇼 특유의 촌철살인 독설과 유머를 낳는 원천이기도 하다.

1940년대에는 버나드 쇼를 비롯한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대기업의 국유화와 함께 토지국유화를 말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토지 국유화는 지주 계급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과 추방이 아니다. 그는 지주들 역시 인간이고, 새로운 사회가 보살펴야 할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사회주의에 찬성하는 쪽에서는 재산을 몰수당한 사람에게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누구나 굶어죽지 않으려면 당연히 노동해야 한다고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다. (…) 무자비하게 길바닥에 내쫓겨 당장 굶어죽게 생긴 귀족이라면 노동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귀족은 노동하는 법을 모를뿐더러 노동해본 적도 없다. (…) 결국 귀족들은 가난뱅이, 극빈층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내가 꿈꾸는 복지 국가에서는) 가난뱅이로 전락한 귀족들도 나라님에게 가난 구제를 요청할 권리가 있다." (178쪽)

평안북도가 고향이며 고향 마을에서 나름 지주였던 나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1946년에 시행된 제1차 토지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집안은 본래 지주-양반이 아니었으며 기껏해야 소농이었다. 단지 그의 큰 형이 1930년대에 만주 봉천에서 요릿집을 하여 큰 돈을 벌었고, 당시 관례대로 그 돈으로 고향 마을의 농지를 사들인 것이 문제였다. 아버지 가족의 지주 행세는 불과 수년 밖에 지속되지 못했고,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면서 끝장났다. 18세기 프랑스와 20세기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이 북한에서도 일어났고, 아버지의 가족은 토지를 무상 몰수당한 채 쫓겨나 평양시로 가서 수년간 극빈자로 살았다.

어린 시절의 학대받은 경험 때문에 아버지는 지금도 철두철미한 반공주의자이며, 걸핏하면 평양을 폭격해야 한다고 열을 올리는 통에 지금도 나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곤 한다. 아무튼 지주 계급을 무차별적으로 범죄자 취급하여 노숙자로 전락시킨 토지 개혁이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버나드 쇼의 해법은 무엇일까?

"프롤레타리아가 프롤레타리아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지주도 지주일 수밖에 없다. 바로잡아야 할 잘못이 있다면, 프롤레타리아가 가난 때문에 벌을 받는 상황이다. 지주가 부유하기 때문에 벌을 받을 이유는 없다. 따라서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면서) '보상을 하지 않는 것'은 고의적인 동물 학대나 다름없는 잔인한 짓이다." (179쪽)

"작가들에게 일정기간 저작권(사유 재산권)을 인정해주는 것처럼, 지주 계층도 본인과 그 배우자가 편안하게 여생을 살 수 있으며 자녀들이 뻔히 내다보이는 미래에 대비하여 교육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기간을 유예 받을 권리가 있다. 이는 귀족의 식솔들에게 기한분 연금을 (정부가) 주는 방식으로 무리 없이 시행될 수 있다. (…) 가난하게 사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겪는 가난은 날품팔이 노동자가 겪는 가난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 (183쪽)

 

귀족/지주와 부르주아에게 보편적 복지를!

요즘 말로 바꾸자면, 버나드 쇼는 귀족 및 귀족 식솔들에게도 복지 국가의 혜택을 주자고 하는 보편적 복지의 편에 서 있다. 또한 버나드 쇼는 토지 국유화를 주장하되, 무상 몰수가 아니라 유상 몰수를 주장한다. 그런데 즉각적인 반론이 나온다. "복지 국가 하느라 가뜩이나 정부 예산 쓸 곳도 많은데, 불로소득을 취하는 기생충 같은 부동산 소유자들에게 소중한 국가 예산을 쓰는 유상 몰수라니,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라며 소리치는 자칭 진보·좌파들의 항의가 귀에 쟁쟁하다.

그렇지만 버나드 쇼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토지 유상 몰수에 필요한 정부 재원은 토지 소유자들 즉 지주들에 세금을 부과해서 조달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지주들은 스스로의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기 위하여 그들 스스로에게 세금을 부과하여야 한다. 이 얼마나 기막힌 아이러니란 말인가! 버나드 쇼의 지혜로운 꼼수(!)는 아이러니로 가득 찬 세계를 통찰력 있게 파악하는 데서 비롯된다.

사실 국가에서 유상으로 땅을 몰수하는 것은 우리에게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LH공사는 땅을 매입하면서 토지 보상금을 땅 주인들에게 지불한다. 그러면 그 땅주인들은 그 돈으로 주식에 투자하거나 새로운 사업을 한다. 단, 차이가 있다면 LH공사는 그렇게 유상 매입하여 국유화한 토지를 주택지·공단으로 조성한 뒤 다시 분양·매각하는데 반해, 버나드 쇼의 제안은 그 토지를 계속 국공유지로 유지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이 방안을 적용할 경우 LH공사에는 막대한 적자가 누적될 것이다. 버나드 쇼의 제안은 LH공사에서 발생한 그 적자를 땅주인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우리나라의 경우라면 토지분 재산세와 종부세 등)으로 메꾸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지주를 비롯한 상류 부유층의 인생을 가련하게 여긴다. 부유한 자들의 가련한 인생이라니, 이 얼마나 기막힌 아이러니란 말인가! 그러면서, 그는 부자들의 '비참한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도 사회(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 지주 계층이 기생적인 삶에서 벗어나 보다 나은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지루하게 괴롭히며 무의미한 상류 사회의 일상에 매여 있다. (…) 문명화된 인간보다는 차라리 개에게 어울리는 삶이라 하겠다.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노동법이 제정되면서 빈곤 계층의 가난과 예속 상태는 개선되고 있지만, 아무도 부자들의 비참한 삶을 고려하지 않는다. 부자들은 그렇게 지루한 향락을 지속하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간주될 뿐이다. 딱한 인생들 같으니라고!" (185쪽)

버나드 쇼는 지주, 귀족과 부르주아 등 부자들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사회(민주)주의의 원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부자들이 프롤레타리아 이웃과 마찬가지로 평일에는 노동을 해야 하는 시대가 머지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부자들은 지금처럼 여가를 누리지 못할 텐데, 부자들의 불로소득이 무슨 소용일까. (…) 백만장자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을 비롯해서 여러 백만장자들이 누리던 불로소득을 사회에 환원한다면, 당신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이들의 노동 시간을 몇 시간씩 줄일 수 있습니다." (185쪽)

 

아이들에게는 자유방임보다 성경 말씀이 더 낫다?

아이러니로 가득 찬 버나드 쇼의 지혜로운 꼼수(!)는 이 뿐만이 아니다. 이 책 내용의 거의 3분의 1 가량은 아이들과 청소년 교육에 관한 것이다. 버나드 쇼는 이미 열 살 때 학교를 때려치웠고 독학으로 (요즘말로 하면 '자기주도형 학습'을 통해) 방대한 지식을 쌓았다. 그의 학교 교육, 특히 부유층이 누리는 사립학교에 대한 비판은 신랄하다.

"사립 예비학교(초등학교), 사립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온 우리네 지배층은 오늘날 일반 (서민)계층과 다를 바 없는 무식한 존재가 되었고, 가장 무지한 사람들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 예술적, 과학적 탐구마저 경멸하고 혐오하게 되었다. (…) 모름지기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 일자무식일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은 '가방 끈 긴'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 세력을 무학무식(無學無識)의 반문화적 집단으로 간주해야만 한다." (260쪽)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대안교육 운동에도 흔히 나타나는) 방목형의 자유방임 교육을 무조건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나이 어린 어린이들에게는 우화적인 이야기들도 필요하며, 때론 성경 구절을 들먹이면서 '너 나쁜 짓하면 하늘에서 벼락이 내린다' '말 안 들으면, 호랑이가 잡아간다' 같은 공포심 유발성 협박(?)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 역시 일곱 살 난 딸아이를 키우며 절감했듯이 어린아이에게는 '착한 일 많이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가져다준다'는 말도 교육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그에 반해 서구의 68세대나 우리나라의 포스트모던 좌파들은 이런 생각을 지극히 혐오한다.)

그렇지만 열두 살 된 어린이에게까지 그런 우화를 사용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무의미하며, 그 때부터는 버나드 쇼가 요구하듯이 비판적이고 과학적이며 인문학적 정서로 풍부한 세상사 공부가 진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문제는 분별력이다. 때와 장소에 따라, 사람의 연령에 적용되는 지혜와 원칙이 다르다.

"어린아이든 성인이든, 어디까지 지도와 강제를 필요로 하고, 얼마만큼 자유롭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놔둬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아이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즉 문명화된 삶에 적응하기 위해 배워야 할 것과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혼자 힘으로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그렇지만 사냥꾼이이나 양치기 혹은 동물 조련사가 개를 훈련하는 것처럼 아이들을 훈련한다면, 아이들은 현 상태 그대로의 문명을 효과적으로 대리하고 고집스럽게 방어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일류 보수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이들이 발전을 주도하거나 옹호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엇이든 옳다'는 믿음에 길들여진 훌륭한 시민은 '무엇이든 잘못'으로 보는 파렴치한 보헤미안만큼이나 대단히 골치 아픈 존재다. 이 양극단 사이에서 적정선을 결정할 수 있는 절대적 행동 규범은 존재하지 않는다." (288쪽)

바로 이 점이다. 버나드 쇼의 이 책에는 절대적인 선악 이분법도 없고, 절대적인 행동 규범도 없다. 그는 마치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며, 따라서 무엇이 진리인지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며, 때론 교회 목사들과 완강한 보수주의자들의 지혜도 사회주의 개혁가들과 포스트모던 시민운동가들의 지혜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겨져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심지어 버나드 쇼는 정치적 자유와 예술인의 자유를 소중한 가치로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초석이자 국민주권의 원천인 '1인 1표' 원리조차 신랄하게 비판한다. 의회민주주의와 1인 1표 원리에 입각한 여성 투표권 등에 대한 그의 비판은 어이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1인 1표와 여성 참정권 등이 어떻게 20세기 초중반 영국 현실 속에서는 보수주의 세력의 힘을 더욱 강고하게 하는 아이러니를 낳는지에 대한 그의 지적을 읽고 있노라면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또 다시 '인정, 당신 말이 옳소, 항복~!'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그는 '1인 1표'라는 절차적·형식적 자유권보다 중요한 것을 강조한다. 이를테면 가난한 자들에게 그것보다 소중한 것은 '1인 1실'이 보장되는 주택 복지이다. 또한 개인의 사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국가가 보장하지 않는 한, '사생활 침해'에 열을 내며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목소리는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437쪽)

 

국유화와 사회주의가 지상낙원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의 진보·좌파들은 국유화와 사회주의를 열심히 내세운다. 버나드 쇼는 시종일관 국유화와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고 그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렇지만 버나드 쇼는 민간 기업이 국가 소유로 바뀌면 오히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득세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1940년대의 현실에서 국유화와 사회주의를 실행에 옮긴 것은 소련만이 아니다. 독일 히틀러의 나치스(나치당의 정식 명칭은 민족사회주의노동자당이다)와 무솔리니가 이끈 이탈리아의 파시스트(파시즘 역시 국가사회주의운동이었다) 역시 국유화와 사회주의를 공식적으로 내걸었다. 그리고 나치와 파시스트들은 유태인으로 대표되는 금융 자본주의를 척결하는 반자본주의 혁명도 주장했다.

토지 국유화가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전유물은 아니다. 조선 시대에도 공식적으로 모든 토지는 정부, 즉 왕의 소유였다. 영국의 튜더 왕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 시대와 튜더 왕조 시대가 서민들의 지상 낙원이었던 것은 아니다.

국가는 철도나 우체국을 국유화하여 운영하면서 고가의 요금을 부과함으로써 서민들을 착취할 수도 있다. 높은 요금을 부과하면서도 투자에는 게으르고, 그리하여 국민들의 원성을 사는 국영 철도와 우체국의 모습은 21세기 한국의 모습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버나드 쇼가 살던 시대의 영국에서도 그런 일이 다반사였으며, 그것은 '차라리 이럴 바에는 민영화시켜 버리자'라는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사실 국유 철도도 얼마든지 정확하고 효율적이며 수익성이 좋을 수 있다. 교통부 장관이 그렇게 할 의지만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재무부(우리의 시장 만능주의 기획재정부)에서 간섭하고 좌지우지하면 국유 철도는 국영사업의 안 좋은 사례가 되고, 그야말로 손쉽게 망가져 버릴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내막을 잘 모른다. 철도 시스템이 엉망인 것만 보고, 정부가 운영해서 그렇다고 결론지어 버린다. 그래서 철도 국유화를 지향하는 사회주의도 덩달아 안 좋게 본다." (451쪽)

 

쇼 타임! 진보의 '마태복음', 버나드 쇼를 읽자

버나드 쇼는 "사람들은 아무리 사회주의 국가라 하더라도, 그 국가가 무시하고 타락한 정치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단순하고 이기적인 금권 정치가 판을 칠 때보다 훨씬 더 위험해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고 경고한다. 쇼의 이 책은 사회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영국 노동당의 지도자들,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혁명을 일으켜 놓고는 정작 그들의 삶을 망가뜨린 소련의 스탈린 체제에 대한 독설과 경고가 가득하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에는 절대적인 선악 이분법도 없고 절대적인 행동 규범도 없다. 쇼에게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며, 따라서 무엇이 진리인지는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크게 보면 사회민주주의의 지혜가 올바르지만,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지혜도 그만큼 소중하다. 어떤 시점, 어떤 사안에서 어떤 지혜가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관해 알려주는 철의 법칙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방법은 있다. 기독교 신자들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구절들을 늘 읽으면서 삶의 지혜를 풍부하게 얻듯이, 자본주의 사회를 개혁하고 새 세상을 꿈꾸는 자라면 마땅히 버나드 쇼의 이런 책을 복음서처럼 늘 가까이 끼고 읽는 것이다. 그 구절구절 하나하나를 음미하여 지혜를 얻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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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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