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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라는 오래지 않은 언어로 영화읽기를 시작하다
장르라는 오래지 않은 언어로 영화읽기를 시작하다
  • 최주연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기자
  • 승인 2018.03.07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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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장르, 장르의 영화』 서평
 
▲ 매트릭스 (The Matrix, 1999) 장면 中 캡쳐
 
 
영화에도 언어가 있다. 이제는 흔할뿐더러 영향력도 커진 이 대중매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 수백만 곳에서 상영되고 있다. 스크린뿐만 아니라 TV, PC, 스마트폰 등 대중의 접근성이 높은 기계 보급으로 우리는 영화에 더 가까워졌다. 그런데 영화는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감독을 비롯해 연기자, 촬영감독 등 수많은 제작자가 텍스트(영화)를 만들고 관객은 이 과학기술의 총화이자 엄청난 투자가 ‘감행된’ 콘텐츠(2009년에 개봉한 영화 아바타의 제작비는 2900억여 원이었고, 후속편은 1조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를 즐긴다. 여기서 이들 사이에 소통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 소통에는 장르(Genre)라는 ‘영화 언어’가 쓰인다.

장르는 공통된 요소의 영화를 한데 묶어 관객의 영화에 대한 기대와 이해를 유도한다. 한 영화가 개봉했다고 치자. 이 영화의 홍보 포스터는 전체적으로 회색빛을 띠며 사후경직된 것 같은 뻣뻣한 손이 크게 배치돼 있다. 뿐만 아니라 손톱과 손가락이 군데군데 훼손돼 있다. 바닥에는 핏자국처럼 보이는 액체가 떨어져있고 영화 카피는 “당신의 상상력이 조각난다!”라고 적혀있다. 영화 제목 폰트는 적색과 흑색이 사용됐고 어딘가 발톱을 연상시킨다. 자, 당신은 이 영화를 볼 것인가. 영화 포스터에도 장르적 성격이 담겨 있다. 이 요소들로 인해 영화를 일부러 찾는 관객도, 피하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제작자도 장르적 특색을 최대한 노출시키기 위해 밤을 새며 위 포스터는 물론이고,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듯 장르는 영화 제작자와 관객 간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한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10인의 영화평론가가 쓴 영화장르 이론서가 나왔다. 영화 언어 교습서라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 총 12장으로 구성돼 있는 이 책은 판타지장르부터 SF, 코미디, 갱스터, 공포, 로드, 뮤지컬, 예술, 멜로, 역사, 전쟁 등 각 장르의 대표영화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을 예시로 들어가며 섬세하게 전개해 나간다. 각 장마다 저자가 다른데, 각각의 평론가가 자신 있는 장르를 맡아 집필했다. 소개할 책은 『영화의 장르, 장르의 영화』다. (위에 예시를 들었던 영화 포스터는 2005년 봄에 개봉한 <쏘우>였다.)
 
 
장르가 만든 영화세계의 무궁무진함

장르는 쉽게 말해 종류다. 영화를 유형별로 나눈 분류체계를 일컫는 말이다. 『시학』으로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장르의 연원을 언급하기도 했었다. “유는 종에 따라 많은 것들 안에서 공통적인 것”이며, “종은 종차에 의해 유에서 생긴다”라고. 사전적 정의로 장르는 ‘플롯, 등장인물의 유형, 세트, 촬영 기법, 그리고 주제 면에서 바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특징적으로 유사한 영화들의 그룹’을 뜻한다.

19C 말 겨울, ‘움직이는 사진’이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선보여진 이후 영화 장르는 새롭게 발생하고 파생돼 몇 가지 갈래로 나뉘었다. 도태돼 사라진 장르도 있고 전 세계인에게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는 장르도 있다.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장르는 갱스터와 스릴러, 전쟁, 공포 영화 등이며 우리나라에서는 <명량>과 <왕의 남자>와 같은 역사 장르도 인기 있다. 최근에는 현대사회의 병리적 징후와 미래사회의 디스토피아를 상상해 서사를 전개하는 SF영화도 영화광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영화의 장르, 장르의 영화』 4장, 갱스터 장르를 집필한 박우성 평론가는 이 장르의 탄생 배경과 서사공식, 관습적인 도상을 설명한다. 박 평론가는 “1930년대 즈음, 그 당시 갱스터 영화와 연결되는 미국 사회의 이슈는 크게 두 가지다. 금주법과 경제대공황이 그것”이라며 “아메리칸 드림의 붕괴라는 사회사의 문화적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갱스터 영화의 공식과 도상을 영화적으로 매개하는 양식은 하드보일드다. 하드보일드가 비정을 뜻하듯, 이 갱스터 영화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냉담하게 조망된다. 총성과 죽음, 배신이 빈발하더라도 말이다. 저자는 갱스터 영화의 전설인 <스카페이스>(1983)부터 <대부>(1972), 한국 갱스터 영화 <신세계>(2012), 최근작인 <불한당>(2016)까지 시대와 국적을 넘나들며 다양한 각도로 갱스터 장르를 조망했다. 세계관과 사회적 의미는 물론이고 이 장르에서 잘 쓰이는 카메라 시점, 영화 음향 등에 대해서도 짚어낸다.
 
 
평론가, 장르로 영화를 읽어내다

『영화의 장르, 장르의 영화』는 대중에게 익숙한 국내 영화평론가들이 총 열 두개의 장르를 각 장(場)으로 분류해서는 지구상에 있는 대부분의 영화는 모두 풀이할 수 있게끔 구성했다. 여기서도 소통이 발생한다. 평론가와 독자, 영화는 장르라는 영화 언어를 통해 긴밀하게 연결된다.

장르는 약속이다. 제작자, 영화, 관객을 통해 장르는 만들어지며, 영화를 가운데 놓고 제작자와 관객은 소통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영화 제작자에게 있어 장르와 사이클에 따른 체계적인 제작은 관객을 안정적으로 끌어들이고 확보함으로써 상업적 손실을 줄일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 관객에게 장르 범주는 기본적인 작품 분류를 제공해 주는 한편, 새로운 것이 가미된 친숙함이라는 장르 ‘계약’을 통해, 영화표 값을 내면 이전에도 누렸던 경험을 재구매할 수 있도록 보장해준다”고 밝혔다. 이렇듯 장르는 영화 관습이자 변주와 반복을 통해 세공된 영화스타일 그 자체이기 때문에 영화를 공부하고 연구 하려는 자라면 장르 공부는 필수라고 할 수 있겠다. 더군다나 장르 문법만큼 영화에 접근하는 비평 도구도 많지 않다. 이 영화 장르는 캐릭터와 배경, 플롯 구성 등을 통해 공통된 내러티브 문법을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에 관심 있는 자는 이 문법이자 언어, 영화 관습을 학습하고, 영화학교에서도 필수적으로 장르를 수업 커리큘럼에 넣고 교육한다.

관습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자도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영화 장르의 기준은 엄밀하지 않다. 이는 영화 장르가 애초에 체계적으로 범주화된 것이 아니라, 산업적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들을 유사한 갈래로 묶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토록 ‘자의적인’, 기준도 명확하지 않은 구분법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책에서는 “장르적인 식별을 통해서만 그 경계들을 가로지를 수 있기 때문이고, 장르적 관습과 규약을 모르고서는 하나의 텍스트가 무엇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제대로 사고할 수 없다”고 장르 분석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살짝 깨진 안경을 쓰고 있다고 해서 안경을 벗겠는가. 이후에는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텐데.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언어와 사유의 관계에 대해 “언어는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했다.(1) 사유와 언어는 동시에 탄생하고, 사유는 말로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언어를 일종의 ‘지각 대상’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언어 없는 사유는 어딘가 불편해 보이고, 어쩌면 불가능해보이기도 하다. 장르도 마찬가지다. 장르라는 언어를 통해 무궁무진하고 다양한 영화를 체계적으로 사고할 수 있고 일정한 질서 속에서 영화를 더 깊이 잘 읽을 수 있다. 이 책에서도 설명하듯 “좋은 작품은 기존의 관습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것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면서도 자신만의 관점과 상상력을 장르적 관습 안에 녹여낸다. 그 결과 장르는 진화하게 된다.” 언어학습 후 사고가 열린 이후에야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다.
 

세계와 영화, 그 참을 수 없는 끈적임

<매트릭스(1999)>는 관객으로 하여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구조에 대해 의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서 제기된 ‘시뮬라르크’ 개념을 가져와서는 <오즈의 마법사>와 <와일드 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잠자는 숲속의 미녀> 그리고 성경까지 그 내용과 형식을 차용했다. 매트릭스에 갇힌, 진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매트릭스에서 빠져 나온 네오 일행과 AI인 요원들과의 대결구도를 흥미롭게 그려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경 구절을 빈번하게 노출시키면서 ‘인식’에 대한 중요성과 관객의 비판의식을 깨워낸다. 이렇듯 영화는 세계에 영향을 주기도 받기도 하며 상호 교류한다. 영화는 세계와 소통하며 그 끈적거리는 유착관계를 지속한다. 우리는 이 의미심장한 영화와 세계의 관계를 평론을 통해 증명해나간다. 최근에는 영화평론을 읽는 관객도, 쓰려는 관객도 늘어가고 있다. 그리고 장르의 관점에서 영화를 분석하는 것은 아직도 유효하고 유용하다.

장르 문법으로 영화를 해석하는 것은 단지 관습적 독해를 위해서가 아니다.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새로운 장르적 사고에 도달하기 위함이다. 이 책의 서문에서는 “영화 자체는 장르를 넘어선 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장르를 지나가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가장 관습적인 사고 체계를 통해 영화 전반의 이해를 돕는 것, 그것이 『영화의 장르, 장르의 영화』가 추구하는 목적이다.

위 영화 <매트릭스>는 SF장르에 머무르고 있는가. 그것은 당신이 분석하기에 달렸다. 장르로 영화를 독파했는가. 그렇다면 이후에 영화는 당신 마음대로다.
 
 
▲ <영화의 장르, 장르의 영화>, 르몽드 시네마 스쿨 기획, 서곡숙 이호 외 지음
 
 

글·최주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기자

(1) 모리스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문학과지성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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