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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인간은 나약하지만 동시에 위대하다 ‘쓰리 빌보드’
[정재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인간은 나약하지만 동시에 위대하다 ‘쓰리 빌보드’
  • 정재형(영화평론가)
  • 승인 2018.03.19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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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의 부활과 종말론적 미국의 구원의식

영화의 처음은 객관적인 시점이다. 안개낀 풍경속에 폐허가 된 빌보드의 모습들이 한 쇼트씩 나열되어 있다. 빌보드의 내용물들은 세월의 풍상에 찢겨 있고 간혹 알 수 없는 글자들과 어린애를 그린 그림이 살짝 드러나 보인다. 멀리서 차가 오고 주인공 밀드레드의 모습이 백 미러안에 잡혀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이 쇼트는 수정의 이미지(crystal image)이고 정지며 박제된 시간이다. 이후 알게 되지만 그녀는 딸의 죽음이후 시간의 덫에 걸려 진행하지 않는 상태고 이 쇼트는 그러한 그녀의 심리적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그녀는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고 그안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녀의 일이 되어 있다. 이러한 복잡한 심리적 상태를 쇼트는 여러 개로 분절하여 표현한다. 차에서 빌보드를 보면서 상념에 잠기고 그 쇼트들은 주관과 객관을 넘나들며 여러 개로 분절되어 있다. 간혹 그녀의 시점 쇼트에 의해 빌보드로 고정되고 그녀의 대단한 결심이 그 다음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광고회사로 향하면서 그 쇼트는 느린 화면으로 재현되어 있다. 그녀는 세상과 전쟁을 치루려는 것이다. 자신을 죽인 딸을 잡지 못하는 경찰에 대해 전쟁선포를 하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이 장면의 음악과 영상은 마치 서부극의 결투장면에 나오는 기법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영화의 오프닝에 나오는 소프라노의 노래는 성스럽고 엄숙함을 준다. 이 장치는 이후 딕슨이 죽은 윌러비서장의 편지를 경찰서에서 읽는 장면에서 반복된다. 성스러운 음악이 의미하는 것은 딕슨이 성스럽게 변해가는 과정을 묘사하는 것이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했고 사적인 응징의 수단으로 폭력을 행사하던 딕슨이 분노를 조절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계기가 바로 이 장면이다. 평소 사랑으로 감쌌던 서장이 죽으면서까지 그에게 사랑의 교훈을 가르쳐주고 떠난 것이다. 음성으로 존재하는 멧세지와 사랑의 복음, 원수를 사랑하라와 같은 교훈성은 그가 예수의 존재와 흡사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는 죽었으나 그는 세 통의 편지를 통해 고통에 처한 인간들에게 희망을 배달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 밀드레드가 혼자 오지만 마지막 장면에 밀드레드는 딕슨과 같이 길을 떠난다. 이 수미쌍관한 구성은 이 영화의 주제에 해당한다. 밀드레드는 부조리한 사회의 공권력에 대항하여 싸움을 걸었으나 그 주체는 개인에서 두 사람으로 늘어났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로 읽게 한다. 게다가 이 영화가 그리고자 하는 주안점은 그 동반자가 자신과 적대적인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딕슨은 분노 그 자체였다. 물론 밀드레드 역시 분노다. 그녀는 딸 강간범을 잡기 위해 서장 이름을 빌보드에 적시함으로써 분노를 적나라하게 표출했다. 이러한 분노표현 방식은 평소 존경 받던 서장의 인품을 깍아내림은 물론 그를 좋아하던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사는 투박하고 매정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녀는 분노에 눈이 멀어 당시 그 이면에 깔린 사랑을 보지 못했다. 
 
▲ 경찰서장은 책임이 없음에도 책임을 지고 책임 있는 국가는 책임지지 않는 현실
 
그런 점은 딕슨에게서도 마찬가지다. 서장이 죽은 이후 광고맨 웰비를 구타하고 지붕에서 떨어뜨린 분노의 표출은 밀드레드의 잔혹함이나 진배 없다. 하지만 죽은 서장은 평소 딕슨을 아꼈고 딕슨을 해고하지 않았다. 그는 딕슨의 속 마음을 읽었던 것이다. 딕슨은 다혈질이긴 하지만 정의로운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전해진 편지의 내용은 바로 그것이다. 분노를 분노로서 잠재우지 못한다는 것은 이 영화를 설명하는 하나의 주제다. 그 주제를 밀드레드와 딕슨 두 명을 통해 보여주는게 한 마디로 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는 밀드레드로 인해 서장이 죽었고 서장의 죽음으로 딕슨이 분노하고 딕슨과 밀드레드가 원수가 되었으나 죽은 서장의 편지로 인해 딕슨은 변화하여 밀드레드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녀 편에 서게 되는 반전의 순환을 이루게 된다.  
 
2. 안에서 밖으로, 나에게서 모두에게로
 
원제를 번역하면 ‘미조리주 에빙 외곽의 세 빌보드’다. 제목은 영화의 주제를 잘 암시한다. 사건의 발생지는 에빙이고 세 빌보드가 존재하는 곳은 에빙의 외곽이다. 영화는 에빙에서 출발하여 외곽으로 확산한다. 밀드레드는 서장이름을 적시하며 에빙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서장이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의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범인은 결국 잡지 못한다. 서장은 책임을 지는 의미로 자살한 셈이다. 이런 양심적인 경찰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의 이미지를 닮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윌러비 서장은 성인(聖人)인 것이다. 남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일은 지구상에서 오직 성인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윌러비는 초월적 존재로 형상화된다. 
 
따라서 윌러비를 고려하면서 현실을 응시할 수는 없다. 그가 얘기한 대로 범인을 잡을 수 없는 상태가 현실의 상태라는게 중요하다. 현실에서 윌러비란 존재는 애초에 생각하면 안된다. 그는 성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올바르고 정의롭고 자신의 목숨을 조절할 수 있다. 반면 인간은 밀드레드고 딕슨이고 보이지 않는 살인범이고 웰비고 등등이다. 이 모든 장삼이사(張三李四)가 현실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왼쪽 뺨을 맞으면 상대방 뺨을 갈기고 더 나아가선 죽이기까지 한다. 그게 인간이다. 밀드레드와 딕슨은 그런 점에서 같은 부류이다. 딸을 죽인 살인범과 그를 잡지 못하는 공권력의 무능에 분노하는 밀드레드나 쿠바 이주민으로 영어도 잘 못하는 열등의식속에서 미국경찰이 되어 온갖 사회부조리에 분노하는 정직한 딕슨은 쌍둥이처럼 닮은꼴이다. 
 
▲ 둘은 대립하지만 부조리한 사회에 대적하는 같은 세력으로 다시 태어난다
 
결함이 많은 것이 기본적으로 인간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복음은 예수의 교훈이며 동시에 감독의 주안점이다. 화상을 입은 딕슨이 자신이 가해한 웰비를 같은 병실에서 만나는 장면이 바로 그 점을 주장하는 근거이다. 
 
밀드레드가 전쟁을 벌인 것은 에빙안이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밀드레드와 딕슨은 에빙외곽을 훨씬 지나 달려간다. 이것은 영화의 또다른 주제다. 예수의 사랑과 사회적 정의, 약자에 대한 사랑은 무한 확장하는 것이다. 자신의 딸의 죽음과 그 근거는 오로지 에빙안의 일이고 그곳을 벗어나면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후반부에 밀드레드는 딕슨이 보고한 또 다른 강간범을 잡고 싶어하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도망친 놈은 딸의 살해범도 강간범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제 내 딸이라는 개인적 의미는 없다. 그건 딕슨 역시 마찬가지다. 신임 경찰서장의 칭찬을 받으며 계속 수사해달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배지를 돌려주고 발길을 돌린다. 그는 더 이상 공권력에 의한 수사만이 진정한 수사가 아님을 안지 오래 되었다. 그에게 이런 자각을 준 것은 다 윌러비 서장의 죽음과 그 유서 덕분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길을 분명히 자각했듯이 딕슨 역시 현실에 안주하는 소시민적 생활인으로서 경찰의 무기력한 삶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큰 깨달음과 실천의 길로 나아간 것이다. 
 
매맞는 여자의 억울함과 딸을 잃었다는 원통함, 죄책감, 억울함의 모든 보상으로서 시작했던 밀드레드의 빌보드광고는 그 모든 정의가 오로지 개인으로서만 의미가 있다면 허망한 것이란 점을 문득 깨우친다. 그녀는 딕슨으로부터 딸의 범인은 아니지만 단지 강간범이라는 점 때문에 그 피해자 딸의 부모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강간당한 딸의 범인을 자신처럼 찿지 못하는 그 부모가 바로 자신과 다름 없다는 불이(不二)사상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영화는 엔딩부에서 위대한 성인의 진리를 설파하며 끝을 맺는다. 인간을 불완전 하지만 언젠가 완전한 상태로 변할 것이라는 위대한 진리말이다. 그게 인종차별과 여성차별로 뒤범벅된 미국의 종말적 지옥도와 맞물려서 상당히 현실적으로 전개된 영화다. 
 
 
글·정재형
동국대교수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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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형(영화평론가)
정재형(영화평론가) info@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