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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껴안은 휴머니스트, 어슐러 르 귄
페미니즘을 껴안은 휴머니스트, 어슐러 르 귄
  • 카트린 뒤푸르 | 작가
  • 승인 2018.04.30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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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디버드>, 2007 - 시몬 베리니

공상과학(Science Fiction, SF)소설은 언제나 시대를 품은 창조물이었다. SF소설은 오랫동안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성차별주의(Sexism), 특히 과학과 문학 집단에서 위세를 떨치던 성차별주의에 목소리를 내왔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1874년이 돼서야 러시아의 여성 수학자 소피야 코발렙스카야(1850~1891)가 독일의 괴팅겐대학교에서 수학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SF 분야에서는 상황이 거의 최악이었다. 여성 작가 어슐러 크로버 르 귄(Ursula Kroeber Le Guin)이 내로라하는 문학상을 받은 것은 1960년대 말에 이르러서였다. 실상 SF 장르에서 여성 작가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10~15%에 불과하다.


『폴렌(Pollen)』(Le Diable Vauvert, 2016)을 쓴 SF작가 조엘 윈트르베르(Joëlle Wintrebert)는 말한다. “20세기 전반, SF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여성 작가와 독자들은 예외적인 존재였다. 이들은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 C. L. 무어처럼 ‘중성적’인 이니셜을 내세우기도 했고, 1940년대에 혼성적인 필명을 사용한 리 브래킷(Leigh Brackett)을 두고 사람들은 ‘남자처럼 글을 쓴다’고들 했다. (…) 즉 여성이 SF작가가 되려면 필명을 쓰는 것이 관례였다.”(1) SF작가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르 귄은 후배 여성 작가들에게 길을 터준 (앞서 언급한) 여성들과 비슷한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르 귄은 독보적으로 그 길을 개척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페미니즘은 그녀가 생각하는 휴머니즘의 한 부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어슐러 크로버 르 귄은 1929년 캘리포니아의 버클리에서 저명한 인류학자 아버지와 작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하버드대학교의 (여자대학인) 레드클리프 칼리지와 뉴욕의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민족학을 공부했다. 르 귄은 오래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11세에 첫 작품을 유명 잡지 <어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Astounding Science Fiction)>에 투고했으나 너무 어린 나이 때문에 거절당하고 만다. 정식으로 책을 출판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무렵이었고, 1969년에 출간한 『어둠의 왼손(The Left Hand of Darkness)』(Ace Books)을 계기로 진정한 유명 작가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 작품으로 르 귄은 최고 권위의 SF 문학상인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수상했다. 

대작 시리즈들을 살펴보면, 먼저 『어스시(Earthsea)』 시리즈(총 5권, Parnassus Press, Atheneum Books, Harcourt, 1968~2001)가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고, 『서부 해안 연대기(Annals of the Western Shore)』 3부작(Harcourt, 2004~2007), 『날고양이들(Catwings)』(Scholastic, 1988) 외에도 20여 권의 장편소설, 150여 편의 중단편소설, 6권의 시집, 에세이집, 동화책이 있다. 스펙터클한 하드 SF(과학적 합리성과 정확성을 중요시하는 SF 장르-역주)에서 몽상적 판타지를 넘나드는 작품세계를 통해 놀라울 정도로 풍부한 예술 감각을 보여준 르 귄은 다섯 번의 휴고상, 여섯 번의 네뷸러상, 열아홉 번의 로커스상을 수상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냈다. 

미국의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특히 히피문화, 평화주의, 생태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시민권 운동, 성의 혁명, 그리고 페미니즘이 대두된 ‘반문화’의 시대였다. 베티 프리단은 1963년 『여성의 신비』(2)를 발표함으로써 미국에 다시 한 번 페미니즘의 물결을 일으켰고, 1966년에는 전미여성기구(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NOW)를 창설한다. 이 해는 르 귄의 ‘헤인 우주 시리즈(Hainish Cycle)’ 제1권인 『로캐넌의 세계(Rocannon’s World)』(Acebooks, 1966)가 최초로 성공을 거둔 해이기도 하다. 이 작품으로 말미암아 SF와 페미니즘이 하나로 합쳐지는데, 『올림피아 호텔(Hôtel Olympia)』(Alire, 2014)의 저자인 엘리사벳 보나르버그의 말마따나 이보다 더 논리적인 결합은 있을 수 없다. “첫째, SF의 조상은 유토피아이며, 페미니즘이 다른 사회를 상상하게 하듯이 SF도 다른 사회를 꿈꾸게 한다. 둘째, SF는 규범 문학과는 다르게, 창조적인 관점에서 여성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SF 안에서 신화적 거리를 되찾음으로써 여성 저자들과 여성 독자들은, 규범 문학이 부정해버리기 일쑤인 영웅적 기록에 마음껏 접근할 수 있게 됐다.”(3)

SF와 페미니즘의 접목, 성별과 인종이 사라지다
 
르 귄은 SF와 페미니즘의 접목에 물꼬를 트고 그 물줄기를 키워나갔으며, 이에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그 위에서 노닐었던 선구자들 중 한 명이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Humain.e.s, trop humain.e.s)』(Actusf, 2017)의 저자인 잔 아 데바(Jeanne-A Debats)는 “나는 작품을 쓰면서 르 귄에게서 배운 젠더 문제를 지지했다. 르 귄은 권력의 전복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서로 권력을 공유할 것을 제안하는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었다.”(4) 

『어둠의 왼손』에서 등장인물들은 한 달에 한 번 호르몬에 의해 무작위로 여성과 남성으로 바뀌는 때를 제외하곤 성별의 구분이 없다(소설의 배경인 게센 행성에는 사람들이 남녀 양성을 모두 갖는 소메르 시기와, 한 달에 한 번 양성이 분리되는 케메르 시기가 있다-역주). 

“당신이 게센 행성 사람을 만난다면, 양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당연시되는 일을 할 수 없을뿐더러, 그런 행동은 무례하게 여겨진다. 여기서 당연시되는 일이란 남자와 여자에게 각각 역할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동성 혹은 이성의 다른 사람들과 할 수 있는 상호작용, 또는 관례적인 상호작용에 따라 각자 맡은 역할을 한다는 사고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게센 행성에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사회 성적(Sociosexuel)인 관계방식이 자리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그런 관계방식을 누릴 수 없고, 이웃들을 남자로도 여자로도 보지 않는다. 우리로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가장 먼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 1970년대가 밝아올 무렵 이 발언은 젠더의 구분을 넘어서는 포스트젠더(postgender) 운동의 태동과, 1970년에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이 『성의 변증법(The Dialectic of Sex)』에서 그 개념을 구체화한 급진적 페미니즘을 예견한 것이었다. 

이런 반문화의 주역인 르 귄은 작품에서 젠더뿐 아니라, 굉장히 예민한 사안인 인종 문제를 다룬다. 예를 들어 『어둠의 왼손』의 주인공 겐리 아이는 흑인이지만 독자는 소설 중반에 가서야, 그것도 아주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은 불온한 기도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주류 백인 독자들을 겨냥해 내가 나서서 꾸민 음모였다. 소설의 주인공에게 검은 피부를 선사하고, 독자들이 그것을 확실히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한마디도 하지 말 것.” 르 귄은 에세이집 『밤의 언어 Language of the Night』(G.P. Putnam’s Sons, 1979)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남녀평등교육법(Women’s Educational Equity Act)이 가결된 1974년에 르 귄은 『빼앗긴 자들(The Dispossessed)』(Harper & Row, 1974)을 출간한다. 여기서 르 귄은 우리 사회와 판에 박은 듯 닮은 성차별이 존재하는 사회와, 평등을 당연시하는 사회를 대립시키면서 비판적인 페미니스트를 전면에 내세운다. 

“남성이 하는 일과 여성이 하는 일에 진짜 어떤 구별도 없나요?”
“그래요, 없어요. 굳이 구별이 있어야 한다면, 그건 형식적인 노동의 배분일 뿐이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자신의 관심사, 재능, 능력에 따라 일을 선택하죠. 거기서 성별이 뭐가 중요합니까?”
“남성은 육체적으로 더 힘이 세죠.” 키모에 박사는 전문가다운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다. 
“그래요. 그리고 남성은 대개 몸집도 더 크죠. (…) 하지만 여성들은 더 오래 일합니다. 저는 여성만큼 끈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키모에 박사는 그 대답이 못마땅한 듯 빤히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여성이, 그러니까 섬세함을 잃고, 남성이 힘을 잃는다고 해서 여성이 당신과 동등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물리학이나 수학처럼 지적 능력이 필요한 분야에서 말이에요. 당신 수준을 여성들에 맞춰 한없이 낮추겠다고 할 순 없겠죠?”

이방인을 통해 관습을 바꾸는 훈련

르 귄은 여기서 몽테스키외가 『페르시아인의 편지』(동양에서 온 이방인의 시선을 통해 프랑스 사회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소설)에서 했던 식으로 우리의 고정관념을 바꾼다. 그녀는 이방인의 시선을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타인은 당신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다. 이 존재는 당신과 성별이 다르거나 소득, 말투, 옷 입는 스타일, 행동 방식에 의해, 피부색 혹은 다리나 머리 개수로도 구분된다. 달리 말해 성별의 이방인, 사회적 이방인, 문화적 이방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종적 이방인이 존재할 수 있다.”

동시대 작가들인 패멀라 사전트(Pamela Sargent), 조애나 러스(Joanna Russ), 때로는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에게서는 페미니즘이 유일한 축일 수 있지만, 르 귄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르 귄보다 10년 아래인 마거릿 애트우드 역시 하버드대학교의 레드클리프 칼리지를 다녔고, 1985년에는 페미니즘을 다룬 화제작 『시녀 이야기(The Handmaid's Tale)』(McClelland and Stewart, 1985)를 출간했다. 이 작품은 애트우드에게 명성을 안겨줬으며, 최근 TV 시리즈로 다시 제작됐다. 이 작품이 그리는 디스토피아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여성들은 ‘아내, 하녀, 시녀’의 세 계급으로 나뉘는데, 시녀의 역할은 바로 아이를 낳는 일이다. 르 귄의 글쓰기는 굉장히 전복적이긴 하지만, 페미니즘만을 중점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녀의 글쓰기는 무엇보다 무정부주의자의 심장과 도교적 영혼, 민족학자의 교육정신을 지녔으며, 정치적으로는 미국의 신 급진좌파에 가깝다. 그녀의 작품들은 인간의 조건과 인간의 방황에 집중함으로써 사회과학을 가장 중점적으로 다룬다. 그녀의 작품은 보다 내밀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문학이다. 이런 점은 『어스시』의 주인공 게드가 잘 보여주는데, 게드는 머리 없는 곰의 모습을 한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쉼 없이 쫓고 쫓긴다. 

작가로서의 긴 여정의 끝자락에서 볼 때 SF를 페미니즘화하고, 또 SF에 페미니즘을 도입한 사람은 비단 르 귄만이 아니다. 그녀는 다른 작가들(왜냐하면 당시엔 필립 K. 딕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기 때문에)과 더불어 SF를 성인 연령대로 끌어올렸다. 그녀는 SF의 인류학적, 사회학적, 생태학적 접근을 시도했다. 예를 들어 『빼앗긴 자들』에서 우라스 행성은 생태학적 디스토피아를 상징하는 반면, 아나레스 행성은 생태학적 유토피아의 상징으로 그려진다. 

라탈랑트(L’Atalante, 『서부해안 연대기』의 프랑스어판 출판사)의 편집장인 미레유 리발랑은 “르 귄은 기존과는 다른 인간관계를 상상함으로써 사회적 규범들을 휘저어놓는 능력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문학에서 인간관계들을 실험해본 것이다”(5)라고 확신한다. 르 귄 자신도 『밤의 언어』에서 이를 명확히 밝혔다. “신화와 전설의 고대 원형, 혹은 과학과 기술의 고대 원형을 통해, 아마도 인간의 삶이 있는 대로, 그리고 살아 있을 수 있는 대로, 또한 살아 있어야만 하는 대로 인간의 삶에 대해 사회학자와 마찬가지로 적절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사회학자는 보다 직선적으로 말한다).”

이처럼 르 귄은 대개 미국의 위대한 작가들에게서 두드러지는 단순하고도 강력한 호흡으로 작품을 써 내려갔다. 그녀는 산문작가이기 이전에 시인이었던 찰스 부코스키처럼 무엇보다 시인이며, 언어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네뷸러상은 매년 미국의 가장 참신한 SF와 판타지 작품을 쓴 작가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2002년 네뷸러상 심사 위원회는 ‘데이먼 나이트 기념 그랜드마스터상(Damon Knight Memorial Grand Master)’ 수상자로 르 귄을 지목했다. 그녀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너무 늦어버렸다. 

어슐러 르 귄이, 지난 2018년 1월 22일 88세를 일기로 타계했기 때문이다.  


글·카트린 뒤푸르 Catherine Dufour 
SF 및 판타지 소설 작가. 주요 작품으로 『불멸의 맛(Le Goût de l'immortalité)』(Mnémos, 2005) 등이 있다.

번역·조민영
서울대 불문학과 석사 졸업.


(1) Joëlle Wintrebert, ‘SF et sexisme(SF와 성차별주의)’, 유토피아 관련 컨퍼런스, 낭트, 2000년 10월, www.noosfere.org에서 해당 문헌을 읽을 수 있음.
(2) Betty Friedan, 『The Feminine Mystique』, W. W. Norton and Co., New York, 1963.
(3) Élisabeth Vonarburg, ‘La science-fiction et les héroïnes de la modernité(SF와 근대성을 지닌 여주인공들’, in ‘Les femmes et la société nouvelle(여성과 새로운 사회)’, <Philosophiques>, vol. 21, n° 2, 몬트리올, 1994년 가을.
(4) Lloyd Chéry, ‘Ce que la science-fiction et la fantasy doivent à Ursula K. Le Guin(SF와 판타지 소설이 어슐러 K. 르 귄에게 빚진 것)’, <Le Point>, Paris, 2018년 1월 24일.
(5)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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