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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영화의 정치학, 텅빈 눈으로 응시한 팍스아메리카나
좀비 영화의 정치학, 텅빈 눈으로 응시한 팍스아메리카나
  • 실베스트르 메닝제
  • 승인 2010.07.12 14:3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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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écial 1] ‘나쁜 장르’의 문화

 


완벽한 침묵이 흐르는 폐허의 도시, 황폐한 거리 곳곳에 자동차가 멈춰 있다. 돌연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세 사람이 나타난다. 먼저 공포에 질린 어린 소녀가 달려오고, 그 뒤를 경찰관과 하녀가 끈질기게 쫓아온다. 그들의 너덜너덜 찢어진 옷에는 피가 말라붙어 검게 변해 있다.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아이를 향해 탐욕스러운 손을 내뻗는다. 그들 입에서는 인간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괴성이 터져나온다.

극도로 전염성이 높은 질병이 퍼진다. 감염되면 사람을 잡아먹게 되고, 희생자를 무는 순간 희생자에게 전염된다. 이 장르의 아버지 조지 로메로 감독이 상상해낸 아이디어는 단순하지만 효과적이다. 최근에도 많은 감독이 이런 아이디어를 다시 활용했다. 잭 스나이더 감독의 리메이크 <시체들의 새벽>(Dawn of the Dead·2004·<새벽의 저주>로 국내 개봉)과 대니 보일 감독의 <28일 후>(2002)는 좀비를 현대 감각에 맞게 연출한 작품인데, 관객 동원에도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좀비들은 베트남전과 더불어 이제 미국이 할 수 있다고 깨닫게 된
모든 폭력과 야만을 무덤 밖으로 끄집어낸다.

로메로 감독은 항상 할리우드 주변인이었고, 시대의 화두가 되는 정치적 담론을 자신의 영화에 넘치지 않게 담아낼 줄 알았다. 그의 영화는 미국에 초점을 맞추고 확실히 좌파적이지만, 결코 교훈을 늘어놓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영화는, 그의 영화에서 영감받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수많은 아류작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의 영화 존재 이유는 흔히 ‘고어’(피·선혈) 효과를 거침없이 보여주는 데 있다.

그의 상징적 3부작은 동일한 내러티브 원칙을 따른다. 인물은 살아 있는 시체, 즉 좀비들에게 포위돼 갇혀 있고, 생존자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증폭된다. 결국 그들 사이의 대립은 그들 공간으로 좀비가 침입하도록 열어주게 된다. 로메로 감독의 좀비는 미국인을 잡아먹는 미국인의 모습을 변형해 반영한 것이다. 좀비는 그의 영화가 제작된 시대의 사회를 관통하는 균열을 중심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을 분열시킨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은 1960년대 미국의 국가적 응집력을 산산조각 부숴버리는 커다란 정신적 외상 세 가지를 심층적으로 연구한 작품이다. 노골적 이미지와 당시로서는 보기 힘들던 유례없는 폭력, 국민을 안심시키려는 당국의 부조리한 발언이 등장하는 가짜 르포를 교차해 만든 영화이다. 일단, 베트남전쟁으로 상처 입고 억압당한 사람들의 귀환이다. 베트남전의 야만성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웅적이고 공정한 이미지를 구가해온 미국의 이미지를 퇴색시켰다. 1968년 신문과 뉴스를 장식한 끔찍한 이미지처럼, 좀비들은 그때부터 미국이 할 수 있다고 깨달은 모든 폭력과 야만을 무덤 밖으로 끄집어낸다.

이 영화가 생생하게 그려내는 또 다른 상처는 인종 갈등이다. 흑인이 시민으로서 권리를 얻기 위해 투쟁하던 때, 영화의 주인공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벤이다. 끔찍한 밤, 벤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지만 영화는 어떤 환상도 허락하지 않는다. 벤은 새벽에 그를 좀비로 생각한 백인 보안관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어 시신은 장작더미 위에 내던져진다.

마지막으로, 좀비가 된 딸이 엄마를 공격하고 아버지를 잡아먹는 상황에서,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권위적 가장이란 인물은, 1960년대를 휩쓴 세대 간 갈등을 반영하고 있다.

10년 후인 1978년 영화 <좀비들>에서 주인공은 미국 소비사회의 새로운 메카라 할 수 있는 쇼핑센터를 피난처로 삼는다. 사회에서 단절돼 바리케이드를 친 그들은 거의 무한대의 자원을 마음대로 약탈하고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들 역시 이곳에 오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좀비의 공허한 시선 아래, 그들의 쾌락주의는 완전히 부조리한 것으로 드러난다. ‘감금’의 동의어인 ‘광적 소비’는 의미가 사라진 기계적 제례가 되고, 서로에게서 완전히 멀어져 고독하게 만든다. 도둑질하는 사람이 쇼핑센터를 공격할 때, 상품에 가장 애착을 느끼는 인물이 총을 발사하고, 약탈자와 좀비의 관심을 끌게 만들어 결국 그들이 숨어 있는 장소로 좀비가 공격해 들어오게 한다.

지하 군사기지에서 전개되는 <살아 있는 시체들의 날>(1985)은 전염병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력한 과학자와 폭력충동을 자제하지 못하는 무능한 군인을 대치시킨다. 이번에는 여자가 주인공이다. 미친 남자 집단과 맞서는, 균형감을 갖춘 유일한 인물로 여성을 그려내면서 이 영화는 심리적 미성숙함, 총기와 남성성 숭배,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혐오증 같은 미국 남성 정체성의 결점을 연구한다. 한 독립적인 여성을 향해 군인들이 내보이는 증오심은 1980년대 미국의 여성해방에 대한 크나큰 반발(1)과 연결된다. 그녀의 남자친구가 좀비에게 물리자 여자는 그의 팔을 잘라버리고 그의 생명을 구한다. 이런 상징적 거세에 대처할 능력이 없는 남자는 결국 좀비 무리에게 기지 입구를 열어주고, 좀비는 과학자와 군인을 탐욕스럽게 먹어치운다.

자신의 미래를 잡아먹는 기계로 변한‘감염자’들은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최종 단계를 충격적으로 재현한다.

현재의 유행은 어떤가? 좀비들, 좀더 일반적으로는 ‘전염’과 ‘식인’ 테마는 2001년 이래 영미 문학과 영화에 대거 재등장했다.(2) 9·11 테러로 경악하고 뒤흔들린 서구 국가는 그때부터, 예전처럼 양대 진영으로 편성돼 있지 않기에 더욱 불가해한, 하지만 통제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테러와 건강 환경, 경제 위협으로 가득 찬 세상과 직면하게 됐다.

이 영화들과 로메로 감독 영화의 1차적 차이는, 이 영화들이 국제적 성격을 부여하면서 더욱 후기 묵시록적 어조를 담아낸다는 것이다. 미학적으로나 사회·문화적 입장에서 다양하지만, 모든 영화가 서구 사회의 피할 수 없는 몰락, 우리가 아는 그대로의 세계 종말을 상상한다. 하지만 이 종말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우주전쟁>(2005)처럼 위협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위협은 내부에서 오며,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 원초적 혼돈으로 퇴보하고 마는 멸망의 이유와 형태는 우리의 근대성을 특징짓는, 점점 더 난폭해지는 ‘자본주의 세계화’라는 전대미문의 현상과 연결된다.

질병과 공포를 확산시키는 것은 ‘교환의 다양화’, ‘이동의 신속성’ 그리고 ‘정보의 순간적 전달’이라는 세계화의 조건이다. 여기에서 그려진 상호 연결되고, 상호 의존적이며 규제가 완화된 ‘글로벌 마을’은 질병과 폭력을 포함한 모든 것이 어떤 장애물도 마주치지 않고 돌아다닐 수 있는 만큼 더욱 취약해 보인다. 재앙이 취하는 다양한 형태에 직면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이야기는, 자본이 각 개인에게 규칙을 강요하고 우리와 함께 사는 시민, 심지어 우리와 가까운 사람까지 잠재적 적이 되는 상황을 보게 만드는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공포에서 그 에너지를 길어온다. 그래서 전염의 첫 번째 결과는 모든 사회적 관계를 파괴하고, 각 개인이 타인의 먹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미국인이 미국인을 게걸스럽게 잡아먹고, 부모가 아이를 잡아먹는 상황이 된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잡아먹는 기계로 변한 살아 있는 시체, 혹은 ‘감염자’들은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궁극적 단계를 충격적으로 재현한다. 각 개인의 ‘잘 이해된 이해관계’의 폭발이 문명을 파괴하게 된다.

이런 재현은 대단히 현대적인 문명의 위기를 연출하는 장점이 있지만, 그런 연출은 재앙의 불가피한 측면을 확인시킬 뿐이다. 세계 멸망 앞에서 맹목적 공포 외의 다른 것, 혹은 사라져버린 질서를 향한 진부한 노스탤지어 이외의 것을 표현해내는 데는 이르지 못한다. 로메로 감독이 사회의 모순을 표면 위로 끌어올리는 바로 그곳에서, 이 이야기들은 그 사회의 파괴에 대한 매혹적인 시선을 던지는 데 만족한다. 그렇게 하면서 그 이야기는 종종 권위가 없으면 인류는 동물로 되돌아가고 만다는, 미국의 문화 정체성에 뿌리내린 확신 속으로 다시 빠져들고 만다.(3)

미국의 엘리트와 가난한 사람이 맺는 관계에 대한 투명한 은유,
<랜드 오브 데드>는 좀비들의 반란으로 끝난다.

 

<28일 후>(대니 보일 감독·영국·2002)의 주인공은 슈퍼마켓을 피난처로 삼는다. 진열대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반짝반짝 빛나는 화려한 색상의 제품은 더 이상 <좀비들>에서처럼 ‘소외’의 동의어가 아니라, ‘위안’과 ‘희망’의 동의어다. 사람들이 기쁨으로 미쳐 날뛰면서 그들의 카트를 빽빽이 채우는 장면은 생존 의지와 소비 욕망을 병행해서 보여준다. 나중에 그들은 좀비만큼이나 위험한 것으로 드러나는 군인과 대치하게 된다. 군인은 특히 여자에게 위험하다. 그러나 적대적이고 자포자기적인 군인의 행동은 <살아 있는 시체들의 날>에서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인간)정신의 군사화의 산물이 아니다. 이 영화는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둘 경우, 사람들은 그들의 손아귀에 떨어지는 모든 여자를 강간하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만족한다.

 

<28주 후>(후안 카를로스 프레스나딜로 감독·영국·2007)는 주인공들이 전염의 집단 책임자가 될 수 있는 상황 직전까지 가면서 이런 시니컬한 논리를 밀어붙인다. 바이러스에 감염됐지만 면역성이 생긴 한 아이를 발견하고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영웅적인 인물들은 그 아이의 유전자로 백신을 개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아이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들의 생명을 희생한 덕택에 아이는 바이러스로 초토화된 영국을 떠날 수 있게 되지만 그 자신이 바로 질병을 확산시키는 장본인이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에펠탑 앞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오는 한 무리의 감염자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

<나는 전설이다>(프란시스 로렌스 감독·미국·2007)는 리처드 매드슨의 동명소설(1954)을 각색한 영화다. 소설의 주인공 로버트 네빌은 대부분의 인간을 뱀파이어로 변하게 만든 전염병에서 자신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 믿는다. 이 재앙으로부터 세계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빠진 그는 뱀파이어들이 낮에 잠자는 동안 그들을 죽이는 데 골몰한다. 결국 뱀파이어들에게 사로잡힌 그는 자신이 동물이라고 생각한 뱀파이어가 새로운 문명을 이룩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냉혹한 아이러니가 폭로된다. 네빌 자신이 바로 순진한 사람을 공포에 몰아넣던 ‘전설적’ 귀신이었다는 것이다.

소설과는 정반대로, 미국의 너그러운 지배를 받는 세계에 대한 향수가 느껴지는 영화 <나는 전설이다>는 뱀파이어들을 언어 기능을 상실한 야수들로 바꿔놓는다. 그리고 문명 몰락을 위협하는 야만적인 무리에 맞서는 마지막 방패로 미국인 주인공을 설정한다. 뛰어난 생물학자로 변신한 네빌은 이제 현대 미국이 그 힘을 맹신하는 과학기술을 동맹군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는 이 재앙에 맞설 수 있는 백신을 세계에 선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인류를 구원하는 ‘전설’이 된다.

2005년, 로메로 감독은 자신의 3부작에 이어 4편을 개봉했다. 이전의 영화와 같은 노선을 따르는 <랜드 오브 데드>는 여전히 미국에 초점을 맞춘다. 이번에는 미국이 재앙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피신처가 되고 성벽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표현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 공동체가 옛날의 질서를 그대로 재생산하기 때문에 멸망한다. 아직까지 제대로 남아 있는 유일한 고층빌딩에 안락하게 자리잡은 부자들이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을 통치하고, 호화로운 건물 안으로 올라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그들을 조종한다. 그들은 마을 경제에 필요한 상품을 얻기 위해 주변을 약탈할 계획을 세운다. 철저히 무장한 용병이 그들이 가는 길에 나타나는 좀비들을 제거하고,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전리품으로 챙겨 다시 출발한다.

미국의 엘리트와 그들이 지배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투명한 은유라고 할 수 있는 <랜드 오브 데드>는 결국 좀비들이 고층빌딩에 난입해 그곳의 주민을 살육하는 반란으로 끝난다. 비록 흥행 수익은 저조했지만, 자기 자신에 충실한 로메로 감독은 지나간 것에 대한 향수와 냉소주의라는 함정을 피하면서 인류는 사회적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유니버설사가 제작한 <랜드 오브 데드>는 할리우드의 제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로메로 감독의 이전 영화보다 더 상투적인 시나리오를 따르고 있다. 상투적이고 놀라움도 별로 없는 이 영화는 곳곳에 서투름이 엿보이고 예전의 좀비 3부작이 현명하게 피해갔던 교훈성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아마 이런 절반의 실패를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로메로 감독은 5번째 작품 <다이어리 오브 데드>를 촬영했고, 프랑스에서는 2008년에 개봉됐다. 이 영화에서 좀비들은 그들의 날카로움과 왕성함을 되찾았다.

글•실베스트르 메닝제 Sylvestre Meininger

번역•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화사>(2006),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각주>
(1) 수잔 랄푸디, <반발, 여성들을 향한 냉전>, Des Femmes, 파리, 1993.
(2) 코맥 매커트니, <길>, Editions de l’Olivier, 파리, 2008. 이 작품에서 후기 묵시록적 세계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단계로까지 퇴보한다. 맥스 브룩스, <세계대전>, Three Rivers Press, 뉴욕, 2007. 세계화의 기능장애를 표현하기 위해 좀비를 이용하는 로메로 감독의 영화와 연결된다.
(3) 드니 뒤클로, <늑대인간 콤플렉스>, 라데쿠베르트, 파리, 2004.  

[박스 기사] 전국을 떨게 하는 공포

죽음의 무도와 관계된 진실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소설·영화·텔레비전과 라디오 드라마, 심지어 만화까지 호러에 속하는 것들은 언제나 두 가지 차원에서 그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순전히 불쾌감의 차원이다. <엑소시스트>(1973)에서 레건이 신부의 얼굴에 구토하거나 십자가로 자위할 때, 혹은 존 프랑켄하이머의 영화 <프라퍼시>(1979)에서 가죽이 다 벗겨진 모습의 끔찍한 괴물이 조종사 머리를 아작아작 씹어댈 때 느끼는 불쾌감과 혐오감. 아마 이런 전술은 예술적 섬세함의 강약을 조절하면서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지만 호러 작품에 항상 등장한다.

하지만 훨씬 더 강력한 또 다른 차원이 있다. 여기에서 호러는 춤, 다시 말해 역동적이면서 일정한 리듬을 타는 탐색에 비유할 수 있다. 이 탐색의 대상은, 독자나 관객인 당신 자신이 살고 있는, 기본적 수준의 장소다. 호러 작품은 우리 생활 속 세련된 가구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호러 작품은 우리가 정성들여 가구를 배치하고 장식해놓은 방을 춤추며 건너가버린다. 방 안에 있는 각각의 가구나 장식은 적당히 기분 좋게 밝은 우리의 사회적 인격- 최소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자- 을 표현하는 것이다. 호러 작품은 다른 장소를 찾는다. 그 장소는 때로는 빅토리아 시대 신사들의 은밀한 소굴 같기도 하고, 스페인 종교재판소의 고문실을 닮기도 한, 하지만 아마 가장 흔하게는 싸늘한 노인이 대충 만들어놓은 낡아빠진 은신처와 비슷하다.

호러 작품은 예술 작품인가? 호러가 앞서 말한 두 번째 차원에서 그 기능을 수행할 때, 호러는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때 호러는 손쉽게 예술 작품 단계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호러는 예술을 초월하는 그 무엇, 예술에 앞서는 그 무엇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나는 ‘공포유발긴장감 지수’라고 부른다. 잘 짜인 호러 이야기는 당신을 인생의 한가운데로 인도하고, 유일하게 당신만 안다고 믿는 방의 비밀 문을 찾게 해줄 것이다.

책과 영화는 매스미디어에 속한다. 그런 이유로 최근 30년간 호러 분야는 공포증보다 더 효과적인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기에 호러(1960~70년대에는 그보다 더 낮은 등급의 호러)의 공포유발긴장감 지수는 전국을 휩쓰는 단계까지 도달했고, 큰 성공을 거둔 책과 영화는 거의 언제나 수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공포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초자연적인 것에 속하기보다는 정치·경제·심리학에 속하는 경우가 더 많은 공포는, 익살스럽게도 가장 훌륭한 호러 작품에 우화- 특히 대부분의 영화감독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보이는 우화- 같은 느낌을 부여한다. 그들은 아주 절망적 상황이 되기 시작하면 어둠을 가득 메우는 괴물들을 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스티븐 킹(Stephen King)의 <죽음의 무도>(Night Shift·1981)에서 발췌.

번역•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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