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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의 ‘영혼’은 어디로 귀환했을까
윤이상의 ‘영혼’은 어디로 귀환했을까
  • 윤신향 | 베를린예술대 객원연구원
  • 승인 2018.05.3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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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이상 (윤이상평화재단 제공)

지난 2월 23일은 아마 한국과 독일의 교류사에서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오랜 세월 독일에 거주했던 윤이상의 유해(遺骸)단지가 세상 바깥으로 나와, 고향 통영으로 돌아가기 위한 채비를 하는 날이었다. 1995년 11월 3일 타계하신 지 23년, 타국생활 39년을 합하면 62년 만의 귀향이다. 이날 오전 11시, 유난히 추운 주기(週期)였으나 귀향하는 고인을 배웅이라도 하듯, 모처럼 따스한 햇살이 고개를 내밀었다. 한국 측 공무원들과 그를 존경하던 교민들, 국제 윤이상협회 관련자들, 그리고 유해를 인수하는 고인의 딸과 통영 국제음악제 대표가 참석했다. 

 

유해의 이장은 우선적으로 유족의 일이기는 하지만, 고인의 경우에는 국가적·문화적으로 몇 가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윤이상은 1969년 고국에서 추방된 후 1971년 독일 국적을 취득했고, 독일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으며, 베를린시의 명예시민으로 추대받았다. 즉, 마음은 고국에 있었으나 외양적으로는 독일 옷을 입은 분이셨다. 그래서 유해의 이장은 베를린과 통영 사이, 독일과 한국 사이의 새로운 교량이 놓이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유해의 이장은 특히 윤이상과 생전 교분을 나눴던 노년의 교민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곳에 뼈를 묻게 될 이들에게 윤이상 유해의 이장은 고향이란 무엇인가 새삼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됐을 것이다. 베를린으로 재이주한 필자에게도 감회가 교차했다. 윤이상의 음악이 과연 독일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노파심도 있다. 그의 작품은 그의 독일 동료 작곡가들의 작품들에 비해 미국은 물론이고 독일과 유럽에서 잘 연주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유해의 이장은 그에게 ‘제2의 고향’이었던 베를린, 그리고 이곳 친구들과의 이별을 상징한다. 고국은 윤이상의 육체를 낳았지만 독일은 120여 곡의 작품을 낳았다. 한국에서 탄생한 작품까지 모두 150여 곡이지만, 그를 국제적 작곡가로 만든 것은 독일에서 탄생한 작품들이다. 윤이상은 1959년부터 1963년까지 프라이부르크와 쾰른에 거주한 시기를 제외하면, 베를린에 약 30년 동안 거주했다. 그는 1964년 포드재단의 작곡가 레지던스에 초청돼 독일로 합류한 가족을 이끌고 쾰른에서 베를린으로 다시 돌아왔다. 1965년 작곡된 첫 음악극 <류퉁의 꿈>이 베를린예술원에서 초연되고, 1966년 도나우에슁엔에서 초연된 <예악>은 윤이상을 국제적인 반열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는 다음 해인 1967년, 어처구니없는 첫 번째 ‘귀향’을 하게 된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독일 유학생들을 간첩단으로 내몬 이른바 ‘동백림사건’으로 11년 만에 고국으로, 고국의 감옥으로 돌아간 것이다. 감옥의 병상에서 “베를린으로 돌아가고 싶다”던 그는 국제적인 구명운동을 통해 극적으로 베를린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베를린은 그에게 새로운 고향이 됐다. 
 
윤이상의 유골은 고향으로 돌아간 반면, 그의 손자국이 남아 있는 자필악보나 유고(遺稿)는 아직 베를린의 모 은행 창고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작곡가의 육필(肉筆)은 육체노동의 흔적인 동시에 정신노동의 흔적이기도 하다. 육필을 모시는 일은 작곡가의 유해를 모시는 일 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이 윤이상이 타계한 지 22년이 지난 오늘까지 여전히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윤 선생님의 유고가 하루속히 세상 바깥으로 나와, 후학들과 연구자들에게 개방돼야 한다. 독일과 한국의 연구기관이 협력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윤이상의 자취는 그가 재직했던 베를린 예술대학 아카이브에도 남아 있다. 그리고 독일에는 당연히 그의 음악 유산이 남아 있다.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부지 앤 호크 출판사, 상당한 음반을 소유하고 있는 국제 윤이상협회도 베를린에 있다. 독일어로 된 그의 작품해설문을 비롯해, 그간의 주요 연구물들과 비평문이 한국어, 영어, 또는 다른 언어로도 번역돼, 세계 연주가들이 그의 작품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유해란 육신이 마지막으로 남긴 자취다. 이 자취는 작곡자가 약 25년 동안 창작했던 자택의 ‘미래’를 남겼다. 이 자택은 윤이상 평화재단이 지난 2008년 문체부의 지원을 받아 매입했으나 그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며 버려져 있었다. 내가 윤이상의 자택을 처음 방문한 것은 2009년 여름, 윤이상과 박영희 비교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베를린을 들렀을 때였다. 마침 개관을 위해 한창 보수 중이었다. 그리고 자택은 2011년 가을, 국제 윤이상협회의 주관으로 작은 규모로나마 개관됐다. 약 1년가량 음악회와 강연회가 열렸다. 
 
그러나 2012년 겨울, 급기야 하우스가 폐쇄되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봐야 했다. 독일 측은 버려진 자택에 무관심했고, 한국 측은 그의 이름 석 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당시, 베를린 시는 곳곳에 분단의 상징인 장벽을 기억하기 위해 윤이상 자택을 버려진 모습 그대로 두었다. 그렇게 버려진 윤이상의 자택은 바로 잊힌, ‘보이지 않는 장벽’이라는 것이었다. 1980년대에 이곳에 거주한 그가 조국통일을 기원하면서 북한을 왕래했던 사실이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자택을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만든 셈이었다.  
 
유해의 이장은 남남갈등의 조짐을 보이기도 했다. 통영 국제음악제 개막식이 열린 3월 29일, 음악당 뒤편 윤이상의 새 묘지에서는 추모행사가 열렸고, 시내 한편에서는 유해의 이장을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그런 가운데 ‘귀향’이라는 주제의 통영 국제음악제 개막식 날에는 <광주여 영원히>가 울려 퍼지고, <율리시스의 귀향>이라는 음악극이 공연됐다. 분단의 상황에서 윤이상의 이름은 앞으로도 반쪽이 돼 있을 것이며, 그에 대한 기념사업은 정치적 지형에 따라서 요동칠 것이다. 남과 북의 정상이 회담을 하고, 민족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시점에서 통영과 광주가 윤이상과 정율성 교류음악회를 연다는 소식은 우선 긍정적인 시도로 보인다. 
 
광주 출신으로 중국에서 삶을 마감한 정율성의 음악은 통영 출신으로 독일에서 삶을 마감한 윤이상의 그것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탄생했다. 그런데 바로 이들의 다른 디아스포라적 삶이 분단한국을 표지하는 지점 아닐까? 한국판 오디세이의 귀향이 영호남 지역이 화합하는 계기가 되고, 독일에 남겨진 그의 자취들이 미래의 문화유산으로 되살아났으면 한다. 
 
윤이상의 귀향은 약 25년 전, <예악>을 들은 이후 그의 음악의 ‘유령’을 떠나지 못한 연구자에게도 과제를 주었다. 한국인이 윤이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독일인이 그를 바라보는 시각은 현저하게 다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고 같아야 할 이유도 없다. 독일에는 한국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윤이상의 발자취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그가 한때 거주했던 프라이부르크와 쾰른에서의 그의 자취도 더듬어 보려고 한다. 프라이부르크는 윤이상이 친구 철학자 귄터 프로이덴베르크를 만난 곳이다. 프로이덴베르크 교수는 그가 외국인 학생을 위해 개최한 국제 세미나에서 윤이상을 만난 것을 계기로, 한국연대를 결성해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윤이상의 자취는 한인사회에도 남아 있다. 해외 범민련 의장으로 민주화 운동을 하셨던 자취, 한인교회와 교류한 자취가 그것이다. 
 
유해에 이어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고 새겨진 묘비도 베를린을 떠나 통영행 배를 탔다. 그러고 나니 윤이상의 클라도우 자택의 미래가 더 귀하게 다가온다. 미망인 이수자 여사에 의하면, 윤 선생님이 원래 이 터에 있던 ‘별장’을 구입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971년이었다고 한다. 가족과 따로 떨어져, 작품에 몰두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작업 중이던 오페라 <심청>(1972)의 간주곡에 기초해 대관현악곡 <차원>(1971)을 탄생시켰다. 관현악곡에 유일하게 오르간이 편성된 작품이다. 이 해에 독일 국적도 취득하셨다. 오페라 <심청>이 다음 해에 올림픽 개막음악회에 오른 뒤, 그 별장 터에 정식으로 주택을 지어 1975년 1월에 입주하셨다. 이 여사는 ‘우리의 고향이 된 클라도우’라고 적고 있다. 이 집 정원에는 한반도 모양의 연못이 있다. 이 연못에서 물고기가 맘껏 뛰어놀고, 남북의 젊은이들이 함께 곡을 연주하고 ‘장벽의 길’을 함께 걷는 그런 미래를 그려 본다.
 
윤이상의 귀향을 계기로 통영과 베를린, 한국과 독일 사이에 놓이게 될 새로운 가교가 남과 북 사이에도 놓이게 되기를 희망한다. 작년 여름, 윤이상의 무덤에 뿌리내린 통영의 동백나무가 선생님의 유해와 함께 돌아가지 못하고 지난 4월 16일 ‘졸지에’ 클라도우 윤하우스 정원으로 옮겨 심어졌다. 그가 귀향하는 대신, 고향의 나무가 그의 창작혼이 서린 이곳에 가교를 놓은 셈이다. 그의 ‘음악 나무’도 과연 이곳의 습한 기운을 이겨 내고 생명과 평화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될까. 
 
작년 봄, 한 통영시민이 탄생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그의 음악이 그에게는 가끔 통영에 서식하는 호랑지빠귀 새의 울음소리 같이 들린다고 했다. 밤에만 우는 이 새소리는 천천히, 고요히 우는 신비스러움이 있다. 윤이상의 ‘영혼’은 어디로 귀향했을까. 이제 반대로, 고향 땅의 따뜻한 산기슭에서, 고독하게 잠들었던 베를린의 차디찬 땅을 그리워하고 계실까. 이곳에서 들으시던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추억하실까.  
 
 
글·윤신향 yunshy64@gmail.com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음악학·철학·독문학 석사과정을 수료한 후, 2001년 쾰른 대학교에서 음악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를린 예술대학교 ‘망명과 전후 문화연구소’의 객원연구원으로 체류한 이후 라이프치히대, 훔볼트대 등에서 음악학과 융합젠더 관련 연구 및 강의를 해 왔으며, 현재 아시아 문화전당 방문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윤이상. 경계선상의 음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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