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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신성한 사슴’을 둘러싼 인간 구원과 실존의 가능성 모색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신성한 사슴’을 둘러싼 인간 구원과 실존의 가능성 모색
  • 안치용(영화평론가)
  • 승인 2018.07.08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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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킬링 디어>

영화 <킬링 디어>의 원제는 ‘신성한 사슴 죽이기(The KILLING of a SACRED DEER)’다. 배급사에서 많은 고민을 거쳐 결정했을 테지만, 직관적으로는 ‘신성한 사슴 죽이기’도 한국 개봉작의 제목으로 나쁘지 않아 보인다. ‘죽임’과 ‘사슴’이 중요 키워드이지만 동시에 영화의 배경을 꽉 채운 건 모종의 신성(神聖)이기 때문이다.

천체물리학의 발견을 비유적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 우주에서 우리가 ‘아는’ 물질의 비중은 약 4%에 불과하다. 지구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과 별로 구성된 은하들, 그리고 은하 사이에 넓게 분포한 가스 등을 모두 합친 게 우리 우주의 4%다. 우리가 ‘모르는’ 혹은 ‘볼 수 없는’ 물질 외 구성요소를 천체물리학자들은 편의상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라고 부른다. ‘암흑(DARK)’이란 말은 간단히 ‘모른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된다. 은하를 구성하는 기본 반죽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암흑물질의 총량은 물질의 5배 이상에 달한다. 영화 <킬링 디어>에서 ‘신성(神聖)’은 이 영화의 암흑물질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응당 ‘사슴’과 ‘죽임’이 ‘물질’이 되겠다. 지금 <킬링 디어>에서 사슴과 죽임만 보고 나온 사람은 영화의 태반을 보지 못한 셈이 된다고 이야기하는 중이다.

분명히 할 것은 모든 영화가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영화에서는 ‘물질’만이 보인다. 그러나 <킬링 디어>는 보이는 물질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을 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와 닿지 않는 영화이며, 물질만 보는 관객에겐 재미없는 영화일 수 있다. 물질 너머를 보는 관객에겐 “기이하고 매혹적이며 불안한 올해의 영화”(The Telegraph), “완벽한 작품”(The Independent)이란 해외 언론의 평에 어쩌면 동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신화소(神話素) 찾아내기

 

<킬링 디어>는 제70회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이다. 영화배급사의 설명을 인용하면, “성공한 외과 의사 스티븐과 그에게 다가온 소년 마틴, 미스터리한 그와 친밀해지면서 스티븐과 그의 아내의 이상적인 삶이 완벽하게 무너지는 내용을 담은 미스터리 복수 스릴러”이다.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인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희곡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Iphigeneia he en Aulidi)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1973년 그리스 출생이다.

란티모스 감독은 “거대한 딜레마에 직면했을 때, 극단적 상황에 처한 인간의 본능을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감독이 말한 ‘거대한 딜레마’는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와 영화 <킬링 디어>에서 모두 목격된다.

먼저 에우리피데스의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시대배경은 트로이전쟁기로, 이피게네이아는 트로이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의 장녀이다. 이 비극, 혹은 신화에서 핵심적인 인물은 트로이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을 이끈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다. 아울리스 섬에서 출전 준비를 마친 그리스 함대는 출항에 필요한 바람이 멎은 탓에 위기에 봉착한다.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예언가에게 위기의 원인을 묻자, 여신 아르테미스가 가장 아끼는 사슴을 과거에 아가멤논이 사냥하여 죽인 것에 여신이 노기를 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는다. 아르테미스의 화를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이어진 질문에 자신의 딸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한다는 신탁을 듣게 된다.

현실이라면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신화적 상황에서 아가멤논은 자기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한다. 신화에서 아르테미스는 제물로 바쳐져 죽기 직전의 이피게네이아를 사슴으로 바꿔치기하는데, 여기서 아가멤논의 ‘사슴 죽이기’는 이중의 의미를 갖게 된다. 즉 자신은 딸을 죽이지만, 사슴이라는 등가의 보상으로 속죄하는 셈이 된다. 동시에 사슴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인식과는 무관하게 딸을 죽이는 일만은 모면하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아마도 자연스럽게 성경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요청으로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 하지만, 결행 직전에 하느님이 양을 보내줘서 자식 살해를 모면한 유명한 구약성서의 이야기와 이피게네이아의 이야기는 비슷한 외양을 취하지만 다른 내용, 다른 결말로 이어진다.

아가멤논은 객관적 사실과 무관하게 실제로 딸을 죽인 반면 아브라함은 그러한 참담한 비극을 모면한다. 다른 그리스 비극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Iphigeneia he en Taurois)>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피게네이아의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실제 죽음과 무관하게 이피게네이아는 아버지에게 살해당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렇다면 아가멤논은 딸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아가멤논은 기나긴 트로이전쟁에 승리하고 금의환향하지만, 이피게네이아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아내인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살해당한다. (실제로는 죽지 않았지만) 딸을 죽인 죗값으로 자신도 죽임을 당한 것이다. 피의 역사는 이어져 클리타임네스트라 역시 아들인 오레스테스의 손에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아버지는 딸을 죽이고, 아내는 딸을 죽인 남편을 죽이고, 아들은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죽이는 구조이다.

그 모든 시작은 사슴의 죽음이었다. 한 번은 아르테미스의 사슴, 또 한 번은 사슴으로 변한 이피게네이아. 죽은 두 사슴은 신성한 존재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아르테미스의 사슴은 여신의 사슴이기에 그 언명 자체로, 이피게네이아는 아무런 죄 없이 대의를 위해 무결하게 죽어감으로써 신성해진다. ‘신성한 사슴 죽이기’가 아가멤논 가문 연쇄비극의 시발점이다.

아브라함에서는 아들 대신 하느님이 준비한 숫양을 죽임으로서 그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될 것”이란 축복을 받는다. 하느님이 준비하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찬가지로 신성하다고 볼 수 있는 양을 죽임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전개된 결과는 아가멤논의 ‘신성한 사슴 죽이기’와 너무 달랐다.

 

 

신성의 문제

 

그러나 <킬링 디어>는 감독이나 각본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리스 신화의 신화소보다는 신성과 구원이란 기독교의 형이상학을 더 부각시킨다. 치명적인 비밀을 숨긴 외과의사 ‘스티븐’(콜린 파렐), 남편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아내 ‘안나’(니콜 키드먼), ‘스티븐’의 가족에게 다가온 미스터리한 소년 ‘마틴’(배리 케오건) 외에 스티븐과 안나의 딸과 아들까지 5명이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여기서 본원적 대립구도를 형성하는 건 스티븐과 마틴이다.

마틴이 수술 중 과실로 자신의 아버지를 죽게 한 스티븐의 ‘죄’를 물어 스티븐의 가족에게 사지마비 등과 같은 치명적 병을 내리고 가족을 구하려면 그 중 한 명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장면은 신탁을 전하는 고대 그리스의 예언가를 방불케 한다. 또한 신성한 사슴과 이피게네이아를 연상시킨다는 측면에서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의 플롯과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킬링 디어>는 매개자를 통해 의도적 오해가 누출되는 그리스 비극보다는 직접적 소통과 해명(혹은 복종)을 요구하는 아브라함과 하느님의 이야기와 더 유사하다. 배리 케오건이 연기한 마틴은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연상시킨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정의를 논하고 직접 진노하는 기독교 구약의 하느님은 인간의 아들을 희생시킴으로써 삶을 구원받는 신약의 하느님으로 옮아간다.

가장 세속적인 방식으로 압도적인 신성을 연기한 케오건의 연기는 압권으로, 아무리 칭찬해도 과하지 않아 보인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전작 <랍스터>에서도 란티모스 감독과 호흡을 맞춘 콜린 파렐 또한 신성에 맞선 인성과 구원의 문제를 전혀 새로운 문법으로 힘 있게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를 짊어진 보편적 인간의 모습을 가장 기독교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실감나게 표현했다. 결국 “죄의 값은 사망”(로마서)이지만, 인간의 아들의 희생을 통해 인간은 삶을 살아갈 기회를 부여받는다. 물론 그것이 최종적 구원인지는 현실에서도 영화에서도 불확실하다.

인간의 아들의 희생을 통해 원죄와 구원의 문제에 직면케 한다는 기독교의 형이상학을 영화적으로 구현하는 표현의 디테일은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많이 참조됐다. 특히 영화 끝부분에서 ‘인간의 아들’을 희생물로 고르는 장면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신탁을 스릴러물로 형상화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죄 있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죄 없는 이를 희생시키는 희생의 문법은 고대 그리스 비극이나 기독교에서 공통적이다. 서양문화의 두 원류는 ‘신성한 사슴 죽이기’라는 가장 감각적인 현대 스릴러물에서 예기치 않게 합류한다.

신성이 아닌 인간 자체의 이해는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리스 비극에서 주인공은 과오를 저질러 불행한 결말을 맞게 되지만 그 과오는 주인공의 사적인 잘못이나 인간적인 결함과는 무관하고 오히려 운명에 의해 저지르게 된다는 특징을 보인다. 아가멤논의 인생 막장에서 극적으로 드러나듯 당연히 구원도 없다. 반면 기독교에서 신의 형상을 닮게 만들어진 인간은 에덴동산의 원죄부터 시작해서 끊임없이 인간적인 과오를 저지른다.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항상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킬링 디어>의 결말은 그리스적 결말일까, 아니면 기독교적 결말일까.

 

 

<킬링 디어>는 란티모스 감독의 전작 <랍스터>의 첫 장면 만큼이나 인상적인 첫 장면으로 시작한다. 슈베르트와 바흐의 클래식 등 음악 또한 영화와 잘 어우러져 눈과 귀를 동시에 만족시켜 준다. 간헐적 불협화음은 협화(協和)하지 않는 세상을 후면에서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었다. 영화는 신성과 신화소를 다루다보니 종종 극영화의 기존 문법을 따르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우화적 설정이라고 해도 좋고 메타적 구성이라고 해도 무방하나 그러한 파괴가 없었다면 이 영화에서 드러난 것과 같은 독자적인 성취는 없었을 것이다. <랍스터>와는 완전히 다른 결이기는 하지만 전작부터 이어진 영화적인 압축과 생략, 비약은 불가피했다. 란티모스 감독이 영화계에 분명한 족적을 남기고 있는 중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7월 12일 개봉한다.  

 

글·안치용

지속가능성과 CSR에 관심이 많다.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편집인이다. 한국CSR연구소장, 지속가능바람협동조합 이사장,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한다. 대학생/청소년들과 지속가능 분야에서 교류하고 토론하며 작은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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