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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봄 영화제: ㅡ광기의 장막을 찢고 서글픈 영혼들을 구원해내는 음악의 위령제
이봄 영화제: ㅡ광기의 장막을 찢고 서글픈 영혼들을 구원해내는 음악의 위령제
  • 남유랑(영화평론가)
  • 승인 2018.07.11 1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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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서구사회가 자랑해온 문명이란 위업은 전쟁의 피바람 앞에 철저히 바스러졌다. 이리저리 부수어지고 갈라진 틈새론 다만 악마적 광기만이 스멀스멀 배어나고 있을 따름이다. 허나 스스로의 정신이 비정상적인 것에 오염됐음을 시인한단 건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어서, 대개는 자신의 무너짐을 인정하는 대신 새어나오는 부정감정을 은근슬쩍 투여할만한 대상을 구비하는 교묘한 논리적 도구를 동원하는 편을 택하곤 했다는 게 좀 더 옳을 해설일 테다. 그 도구 중에서도 가장 잔혹했던 건 이른바 유럽 전역에 상주하며 질서를 어지럽히는 하등족속을 청소함으로써 순수성과 정의를 바로세우겠단 선언이었다. 논리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야만의 조작이었고, 이성적 판단이라는 허위의 가면 뒤에 숨은 철저한 기만의 전략이었던 셈이다. 그 어처구니없는 일이 버젓이 자행되는 믿기 어려운 현장이 곧 영화 <피아니스트>의 무대다.
 
표독스런 표정을 계속해서 유지하다보면 어느새 얼굴의 인상 그 자체가 차갑게 굳어진다. 뿐만은 아니다. 이처럼 서늘한 눈길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는 타자의 일그러진 얼굴 역시도 일정한 방식으로 굳어지게 될 것임은 물론이다. 지속적으로 분노, 증오, 두려움 등속의 감정에 사로잡히고 매몰되다 보면 그런 어두운 성질들이 어느덧 부자연스러운 상태를 넘어서 일상화된 정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될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단단한 가름막을 겉으로 둘러치고 있다 한들, 속아지에서부터 광기에 의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감각을 아무래도 무시할 순 없다. 이러한 불안정의 감각은 특별히 의식적인 개인들에겐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역사의 지면에 일고 있는 적대와 전쟁의 돌풍을 벗어날 수 없는 이상 자신 역시 쉽사리 멈출 수 없는 폭주기관차에 탑승한 승객의 형국임을 부정할 순 없을 테지만, 적어도 이 기관차의 별칭이 괴물임을 알고 있는 그들에게 있어 정말 두려운 건 자칫 불편함의 감각에마저 무뎌짐으로써 광기에 완전히 동화돼버리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담 도대체 무엇이면 무시무시한 동일시의 메커니즘을 막아낼 수 있을까. 달리 번역해보건대 혹 무엇이면 두터운 기만의 논리를 찢고서 불안정하게 메아리치는 내면의 진실에까지 가닿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적어도 한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만 하리라는 점만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아무리 이성과 합리의 이름을 빌려 짓누르거나 삼키려고 해도, 미처 다 소화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어야 하겠다는 사실 말이다. 그것이 슈필만이 그리고 그 이름의 다른 번역어라고 말해봄직한 예술이 끝끝내 비극적 참상 가운데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라고 할 터이다. 
 
동포를 버린 부역자는 물론, 총과 칼을 들고 일선에서 움직이는 레지스탕스도, 심지어는 적군의 간부조차도 끝까지 그의 생명을 보호하려 애쓴다. 공격에도 방어에도 쓸모없는 예술의 무가치함을 이들이 구태여 옹호해야만 했던 건, 바로 예술이야말로 이성으로 포장한 광기의 장막을 꿰뚫고 영혼의 깊은 곳을 터치할만한 에너지를 머금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개별 존재의 경계를, 민족의 경계를, 나아가 시간과 공간의 경계들마저 가로지를 수 있는 예술의 힘은 이를테면 간단없는 바람에 이리저리 떠밀리면서도 한편으론 내심 악마적 전염병으로부터 구원받길 간곡히 바랐던 모든 이들의 구겨지고 서글픈 자화상을 능히 어루만질 수 있을만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슈필만에게 자신들의 영혼을 대속해주길 부탁했던 셈이다. 마침내 피아노에 앉게 된 그의 연주에 묻어나는 슬픔과 기쁨의 묘한 공존은, 단지 죽음으로부터의 귀환이 안겨다주는 개인적 서정에 그치기보다는, 모든 응어리진 영혼들을 불러 위무하고 구원의 길로 견인하겠노라는 제의적 의미에서 말미암는다고 보는 편이 한결 더 옳을 터이다.  
 
재개봉일: 7월 31일(화) 저녁 7시
장소 : 이봄씨어터 (신사역 가로수길_문의 : 070-8233-4321)
 
글 : 남유랑
평론가.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 당선 및 2017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현재 남병수라는 이름으로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논문이나 에세이 등속의 영역들과 구별되는 지점에서 '과연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무엇을 감당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에 답하려고 늘 고민하는 중에 있다. 이를테면 비평의 비평다움 내지는 비평의 고유한 위치에 대한 문제설정이 삶의 중요한 화두인 셈이다. 더불어서, 정치철학적 거대담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구원과 새로운 유형의 혁명을 호명해낼 가능조건으로서의 예술에 관하여 치열하게 사유하는 노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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