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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차이의 효과, 혹은 홍상수의 여자: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클레어의 카메라>
[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차이의 효과, 혹은 홍상수의 여자: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클레어의 카메라>
  • 안숭범 | 영화평론가
  • 승인 2018.07.23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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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절의 홍상수와 그 바깥


직설적으로 말하면, 홍상수 영화의 전언을 논리화하는 작업은 그리 생산성있는 시도가 아니다. 구조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영화 속 이미지, 명확하게 해명되지 않는 사실 관계, 서사적 맥락에 수렴되지 않고 서로에게서 부유하는 사소한 사건들은 해석학적 관심을 무력화시지 않던가. 그러니까, 홍상수의 영화는 가능한 답변과 물음들로 구성되는 보편적 진술들의 체계에서 미끄러진다. 그렇게 보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홍상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날 것의 욕망에 저당 잡힌 인물의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좇아가는 일이었다. 비루한 인물의 종잡을 수 없는 동선을 직관과 주관으로 더듬어보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그의 신작 영화는 이전에 올라 본 봉우리처럼 다가오지만, 다시 익숙한 난맥상이 되는 신비로 나아가곤 했다.  

홍상수 영화에 대한 비평을 쓰려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한 변명을 좀 더 하려 한다. 사실 영화에 대한 어떤 훌륭한 글도 영화에 대해 불충분하다. 어떤 비평문을 완벽에 가깝다고 느낀다면, 해당 글의 ‘자기 완결성’이 주는 착시효과일 공산이 크다. 하물며 홍상수의 영화라면, 앞에서 언급한 이유들로 비평의 한계를 더 분명하게 확인시킨다. 그래서 이 글은 홍상수 영화를 더듬기 위해 개발된 가능한 한 방식을 따라가고자 한다. 

홍상수 영화의 심연에 이르기 위해 준설된 몇 가지 우회로가 있다. 우회로의 표지를 키워드로 읽어내면 ‘상호텍스트성’, ‘일상성’, ‘속물성’, ‘자기반영성’, ‘댄디즘’, ‘전복과 해체’, ‘반복과 차이’, ‘하이퍼리얼리즘’, ‘미니멀리즘’ 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홍상수 영화의 개성을 즉흥적 대사, 우연적 상황들이 빚어낸 불확정성의 스토리텔링에서 찾는다면, ‘반복과 차이’라는 키워드가 특히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홍상수는 반복을 통한 차이의 효과를 때론 진지하게, 때론 짓궂게 활용한다. 그런 어떤 순간에 누임 자가 통제가 불가능한 비루한 욕망과 충동이 서로 부딪치고 교유하는 순간들을 만나곤 한다. 

재차 강조하면 그간 홍상수 영화는 반복을 통한 차이의 효과로 구축된 구성물이었다. 예컨대 홍상수 영화는 전작들의 스토리텔링을 대차대조의 대상으로 상기시키는 순간이 비일비재하다. 개별 영화 안에서도 반복의 표지가 매우 뚜렷한 편이다. 유사한 상황 하에서 다시 등장하는 대사, 같은 배우가 연기한 미묘하게 다른 캐릭터, 다른 사연으로 재편되었음에도 앞의 에피소드를 재연하는 듯한 인물 구도, 다른 상황에서 다시 등장하는 공간 배경이나 사물, 말끔하게 매듭지어지지 않고 병렬되는 유사 사건들은 홍상수 영화만의 뉘앙스를 선사하곤 했다.

흥미로운 건, 그러한 ‘반복’의 느낌이 뚜렷해지는 순간에 홍상수의 인물들 안에서의 긴장이 배가된다는 사실이다. 이때의 긴장을 더 세밀히 해명하기 위해 르네 지라르가 제시한 욕망의 삼각형에 따라 ‘욕망하는 남자-속내가 불분명한 여자-(욕망하는 남자에 대해) 우월한 위치에 놓인 다른 남자’ 구도의 경과에 주목해야 한다. 홍상수 필모그래피의 절반은 거의 이 구도 내에서 변주를 거듭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우월한 위치에 놓인 다른 남자’는 ‘욕망하는 남자’가 소유하고 싶으나 현재로서는 지니지 못한 것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여자를 취하는 데 유리한 사회적 지위나 도덕적 입장은 이에 속한다. 그 때문에 ‘욕망하는 남자’는 ‘우월한 위치에 놓인 다른 남자’를 의식하며 동물적인 질투감과 모방 욕망에 이끌려 속물화된다.

그렇다면 이때의 모방욕망은 주체가 자발적으로 전유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매개자(‘우월한 위치에 놓인 다른 남자’), 혹은 그의 배경을 이루는 특정한 조건을 통해 파생・발명된 면이 있기 때문이다.(1) 이처럼 감지할 수도 없고 통제되지도 않는 욕망의 허구적 속성은 일상성을 다루는 홍상수의 영화의 역설을 드러내곤 했다. 홍상수 영화는 속물적 인간들의 지리멸렬한 현실을 다루면서도 그들의 형이상학적 욕망이 환유적으로 운동하는 과정을 매만지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막을 환기시키는 ‘욕망하는 남자-속내가 불분명한 여자-우월한 위치에 놓인 다른 남자’ 구도를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생각나는 대로 예거하면, <생활의 발견>의 ‘경수-선영-선영 남편’, <오!수정>의 ‘재훈-수정-영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문호-선화-현준’,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경남-고순-천수’, <옥희의 영화>의 ‘진구-옥희-송교수’, <하하하>의 ‘문경-성옥-정호’ 등을 들 수 있다. 앞에서 이미 밝힌 대로, ‘욕망하는 남자’와 ‘우월한 위치에 놓인 남자’는 서로를 향한 차별화의 경쟁에 투신하는 중 모방의 폭력에 물들게 되고 급기야 서로의 비참한 속물성을 끄집어내는 ‘스캔들’에 휘말린다. 그러다가 ‘속내가 불분명한 여자’를 서로에게서 금지함으로써 이중적인 욕망에 포로가 되기도 한다.(2) 결과적으로 그들 사이의 관계망은 표면적인 갈등의 집인 동시에 사실관계 이면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욕망의 흐름이 지나는 통로다. 단언컨대 긴 시간 홍상수의 작가적 실험은 이 같은 삼각관계를 최소공약수로 취해왔다. 

그런데 인물구도의 측면에서만 보면 <옥희의 영화>를 기점으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하 ‘<해원>’) 등에서는 각별한 차이가 생겨난다. 이들 영화의 인물구도를 앞에서 제시한 욕망의 삼각형 모델에 견줘 보면 ‘욕망하는 남자’의 서사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축소된 사실이 확인된다. <해원>에 국한해 보면 해원이 영화의 주동인물로 기능하면서, 젊은 여자의 꿈과 현실 사이의 미묘한 낙차가 부각되고, 성준(‘욕망하는 남자’)은 그 사이에 기입된 중요 인물로 대상화된다. 결국 이 영화는 해원, 곧 ‘속내가 불분명한 여자’의 내면에 포착되고 반사된 인물과 사건에 관한 혼몽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영화적 설정은 희미하게나마 <옥희의 영화>에서부터 시도된 것이다. 옥희와 해원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이성관계의 예측불가능성에 고통받는다는 점에서 동질적이다. 그리고 그들은 희망하는 삶의 형태로부터 예기치 않게 미끄러져가는 현실을 진중하게 성찰하는 주체다. 

그런데 최근 김민희를 주연으로 한 몇몇 영화에서는 인물구도 면에서의 또 다른 차이가 두드러진다. 그 중에서도 <클레어의 카메라>(이하 ‘<클레어>’)는 ‘속내가 불분명한 여자’와 ‘(상대적으로) 속내가 분명한 여자’가 ‘욕망의 잔여가 남은 남자’와 식어가는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이후에 다루겠지만 경쟁대상자로서 매개자의 존재는 특이한 위치에서 발견된다. 흥미로운 건, 이들 간의 관계망을 부유하는 기묘한 시선이 인물화 된다는 것이다. <클레어> 속 클레어는 적확하게 그 지점의 ‘발명’을 확인시킨다.

어쩌면 해원과 클레어의 서사적 지위와 역할에 대한 탐색은 홍상수 영화의 최근 10여년을 돌아보는 유의미한 방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들은 존재 자체로 반복을 통한 차이의 효과이면서 욕망하는 남자를 중심으로 한 기존 영화들과 대조할 때, 차이 이상의 차이를 상상하게 하는 특별한 해석적 관문이다. 이 글이 그 관문을 통과해보는 체험이 되었으면 좋겠다. 

해원의 일기장을 다녀간 고독

해원의 일기장에 적힌 말들을 추측하기 전에 옥희가 만든 영화에 포착된 사람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두 영화 속에서 그녀들의 ‘성찰’ 방식이 갈라지는 지점을 확인하자는 의미다. 예컨대 옥희는 유사한 공간에서 일정한 시차를 두고 두 명의 애인을 사귀었고, 두 애인은 각각 ‘욕망하는 남자’,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놓인 다른 남자’의 성격을 갖는다. 옥희는 그들과의 연애를 대차대조하는 영화를 찍는데, 4장으로 구성된 <옥희의 영화>의 마지막 장은 바로 그 ‘영화 속 영화’의 성격을 갖는다. 옥희는 그 영화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친절히 설명한다. “많은 일이 반복되면서, 또 어떤 차이를 가지는 이 인생이라는 게 뭔지는 끝내 알 수 없겠지만 제 손으로 두 그림을 붙여놓고 보고 싶었습니다.” 이 대사는 허구적 인물인 옥희의 영화 전략이면서 옥희를 주동인물로 내세운 홍상수의 영화 전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반면 <해원>의 주인공 해원은 영화를 찍지 않고 일기를 쓴다. 일기를 쓰는 행위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이고 자각적인 성찰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해원은 엎드려 자는 중에 현실과 분명하게 유리되지 않는 꿈을 꾼다. 추측대로 꿈 속 내용은 현실에서 갈등하는 해원의 내적 진실을 파편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기록에 가까운 일기체 영상으론 다 해명되지 않는 인물의 ‘고독’을 꿈 장면이 재차 부연・보완해 준다. 옥희의 현실과 영화 사이의 거리나 해원의 일기와 꿈 사이의 거리는, 그 경계가 불분명할 정도로 가깝다. 다만 해원은 고독한 사색의 과정과 이중구속의 상황에 압착당한 심정을 좀 더 숨기지 않는다.

좀 더 나아가면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 홍상수의 기존 영화 인물과 비교했을 때 해원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위해 더 투명해지려는 여자이고 그럴수록 주변의 남자들로부터 불투명한 존재가 된다. 이 같은 역설적 긴장은 해원을 두고 길항하는 두 남자의 속내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해원과 불륜관계에 있는 성준의 눈에 그녀는 풋내기 제자 재홍에게 마음도 없이 몸을 준 여자다. 숨겨야 할 자신과의 스캔들을 부주의하게 흘리고 다니는 여자이기도 하다. 재홍의 눈에 그녀는 유부남 스승에 이끌리는 등 과도하게 자유분방하고, 연애관계의 매듭을 명확히 맺고 끊지 못하는 옛 애인이다. 이처럼 그녀는 스스로 투명해지려 하지만, 가장 가까운 관계망 안에서 그녀는 더욱 더 ‘속내가 불분명한 여자’, 곧 불투명한 ‘유사연인’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홍상수 영화에서 ‘유사연인’ 관계는 불가해한 원심력을 가진 개인의 욕망과 사회 제도권의 윤리적 구심력이 충돌하는 점이지대를 가감없이 관찰하게 한다. 사실상 홍상수 영화 속 남녀가 교감하는 방식을 보면, 일반적인 연인 관계라고 보기엔 무리가 따른다. 대개는 술을 매개로 정서적 친밀감을 충분히 나누지 않은 상태에서 섹스 단계로 진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사회의 윤리적 규준에서 벗어나는 복수의 ‘불륜’ 관계가 여러 형태로 전시된다. 

<해원>도 전작들에서 반복되어 왔던 ‘유사연인’ 관계를 중심으로 한 미니멀한 플롯이 특징이다. 다만, ‘속내가 불분명한 여자’가 욕망의 주체, 고독의 주체로 나아가면서 기묘한 차이가 생성된다. 홍상수의 초기 작품일수록 ‘자기 최면’에 가까운 과잉의 욕망에 이끌려 유사한 시공간을 순환하는 남자들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때 여자들은 그들의 동선을 향해 속내를 감추며 거리를 좁혀 왔다. 주목할 것은, 술자리와 여관을 거친 후에도 여자는 남자와 미묘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그런 방식으로 그들은 ‘유사연인’ 관계를 이루곤 했다. 

그런데 해원은 꿈과 현실을 오가며 그녀 스스로 동일한 공간이 순환하는 듯한 착시효과를 만들어낸다. 이때의 순환은 남루한 현실과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꿈 사이의 관념적 전회(轉回)이기도 하고, 기억과 기억을 자가 해명하려는 욕망 사이의 진자운동이기도 하다. 분명한 건, 과잉의 욕망에 이끌려 해원을 찾는 남자들이 그녀의 공간에 틈입한 다른 시간대의 사건들이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기치 않게 흘러가는 현실을 진지하게 성찰하려는 해원에게 실존적 조건으로서 고독의 다면성을 깨우친다. 그렇게 보면, 이 영화는 특이하게도 해원의 동선을 간섭하는 남자들을 통해 ‘반복을 통한 차이의 효과’를 노린다고 할 수 있겠다. 해원의 고독과 번민은 그 효과 중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좀 더 영화 내부의 정보들을 판독해보기로 하자. 영화가 시작되면 해원의 엄마는 “사는 건 죽어가는 거야”라는 말을 툭 내뱉고, ‘자유로워지기 위해’라는 단서를 달고 외국으로 떠난다. 엄마와 해원의 관계에 대한 정보를 규합해볼 때, 모녀관계에서 해원은 ‘유사 딸’처럼 어색하게 뱉어진 존재다. 반면 성준은 죽음 이후에 자식, 영화, 자신에 대한 기억은 남을 거라고 말하는 인물이다. 해원에게 그는 엄마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존재양식으로 비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지지하는 또 다른 정보도 언급할 수 있다. 성준은 그녀의 엄마와 달리 시간에 대해, 또 쌓인 시간의 결과로 오는 현실 안에서 끊임없이 얽매이는 인물이다. 

이처럼 성준과 엄마 사이에서 각기 다른 형태의 고독을 경험 중인 해원은 (아마도) 꿈속에서 중원을 만난다. 그때 그녀는 다면적인 고독으로부터 모종의 출구를 만난 것처럼 약간의 안도감을 얻는다. 일기장의 언어를 꿈의 내용이 얼마나 초과했는지를 묻는다면, 그 ‘안도감의 크기’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사연인’이자 ‘유사 딸’에 불과한 해원은 결국 자기 고독을 초월할 방도를 찾지 못한다. 그녀가 도서관에서 잠들기 전에 읽은 책 <죽어가는 자의 고독>은, 오히려 그녀에게 중원이 등장하는 꿈을 불러내고야 만 현실, 곧 헤어날 수 없는 고독의 굴레를 환기시킨다. 

해원이 배회하던 남한산성은 등장인물들의 대사에 의해 저마다의 시간을 이끌고 그곳을 다녀간 익명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이 품었던 하고많은 고독의 다른 양태를 생각하게 한다. 그 연장선에서 볼 때, 노을과 안개를 배경으로 남한산성 벤치에서 울먹이던 성준의 뒷모습은 해원이 만난 자기 고독의 다른 표정일지도 모르겠다. 그 표정을 해원의 마음으로 지켜본 관객이라면, 그도 애써 외면해 온 자기 고독과 잠시 해후할 수 있을 것이다.

클레어의 카메라를 다녀간 사태

그간 홍상수는 자기반영성(reflexivity)의 영화를 만들어 왔고, 속물적 욕망이 부딪치고 교환되는 자리로 우리를 밀어 넣곤 했다. 술잔을 쥔 인물들은 정제되지 않은 충동이 묻은 서로의 대사에 먼저 취했다.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은 영화 밖 홍상수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을 상기시켰다. 아무도 합의한 바 없지만, 아마도 우리 중 많은 수는 최근 홍상수 영화를 보며 김민희와 그녀가 연기한 인물을 연결시켜 의미화하기도 했을 것이다. 김민희와 영화 속 그녀가 서로의 페르소나가 되는 장면들을 즐긴 것이다. 바꿔 말해 관객의 허구적 상상 안에서 김민희는 영화 속 배역을 텍스트 바깥에서도 살곤 했을 것이다. 중요한 건 텍스트의 경계에 점착된 ‘김민희/김민희가 연기한 여자‘가 기묘한 혼종적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홍상수가 심미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클레어>에 이르러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단지 추측이었던 어떤 것이 확신이 되었다. 그 추측이란 이런 것이다. ‘지금 홍상수는 영화 안팎에서 자신의 연애사를 자의적으로 소비하는 우리에게 모종의 답장을 쓰고 있지는 않는가’. 그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쇼트, 어떤 대사는 매우 솔직한 토로이거나 의뭉스러운 변명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는 우리 중 누군가에게 ‘과연!’과 ‘과연?’ 사이의 착시감을 건네면서 교란의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초창기 그의 영화는 ‘욕망하는 남자’로 쓴 자율적 일기, 반성문, 낙서, 편지였다. 그렇다면 최근 그의 영화들은 ‘속내가 불분명한 여자’를 앞세워 우리가 그의 연애사에 보낸 시끌벅적한 시선을 점검하는 것처럼 보인다. 절반쯤은 타율적인 일기이자 반성문이며 기승전결이 없는 낙서이자 누군가에겐 판독조차 안 될 편지(답장)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판단은 욕망의 삼각형 모델의 변주를 통해서도 확인 가능하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이후 홍상수는 욕망하는 남자에 대해 우월한 위치에 놓인 다른 남자를 충분한 분량으로 등장시키지 않고 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만큼은 욕망하는 남자의 내면에 매개자가 희미하게 등장하거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클레어>는 그 변화를 가장 적실하게 드러내 보인다. 소완수는 이미 칸을 밟은 영화감독이고 한 여자를 두고 더 우월한 위치에 놓인 다른 남자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완수는 모방욕망의 형이상학적 메커니즘에 종속되어 있다기보다는 자기로부터 직선으로 뻗는 연애 감정을 추스르려는 남자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곁에 속내가 분명한 여자 남양혜(영화사 대표)와 속내가 불분명한 여자 전만희(양혜의 부하 직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두 여자에 대한 욕망은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하기 애매하다. 그는 그녀들을 향하던 자기 욕망의 잔여와 싸우는 남자에 가깝다. 

다시 말하지만, <옥희의 영화> 이후 상당수의 홍상수 영화처럼 <클레어>도 속내가 불분명한 여자 만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녀는 완수, 양혜와의 어긋난 관계를 가장 적극적으로 통찰해가는 주체이며 그 통찰의 과정이 <클레어> 스토리텔링의 기본 골격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런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방욕망은 양혜로부터 돌출한다. 만희와 완수에게 자기 입장을 정확히 표명하는 그녀는 만희를 매개자 삼아 경쟁적 모방욕망의 메커니즘을 밟는다. 추측컨대 완수는 만희와 어색한 하룻밤을 보낸 후 그녀를 향한 감정에 혼란을 느끼는 중이고 오랜 시간 연애해 왔던 양혜에게는 헤어지자는 말과 함께 혼란했던 감정을 정돈하는 중이다. 요컨대 <클레어>는 홍상수 인물구도의 클리셰인 욕망의 삼각형 모델을 가장 기이하게 비튼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클레어>는 이상한 균형감을 가진 영화이기도 하다. 이러한 느낌에 논리를 부여하려면, 카메라를 들고 완수, 양혜, 만희 사이를 오가는 클레어의 상징적 역할, 혹은 서사적 기능을 검토해야 한다. 그녀는 영화감독 친구를 따라 칸에 온 프랑스 여자다. 우선적으로 그녀는 긴장감을 상실한 삼각관계의 바깥에서 틈입해 그 모든 사태를 정서적으로 반사해 보이는 거울이다. 세 인물의 내면을 향해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감정들을 관조하고 기록하고 반응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의 직업은 교사인데, 꾸준히 시를 써왔고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닐 정도로 사진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다. 과잉의 의미부여를 하자면, 도덕적 계몽의 주체(교사)로 살아오면서도 예술적 영감의 세계와 이웃해 살아온 여자인 셈이다.

제목이 말해주듯, 클레어가 들고 다니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매우 중요한 상징적 장치처럼 느껴진다. 그녀의 서사적 기능을 정확하게 대변하는 오브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 카메라는 프레이밍된 찰나의 세계를 곧바로 객관화시켜 오래 음미할 수 있는 이미지로 변환시키는 역능이다. 주관적 순간의 객관적 대상화를 이끌어내는 마술이다. 유념할 것은, 이 카메라가 광학적 리얼리즘의 세계 이상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해석에 근거를 찾기 위해서는 클레어가 찍은 사진들을 천천히 음미해 봐야 할 것 같다. 다시 말하건대 클레어는 만희, 완수, 양혜의 영화에 관한 일과 연애 감정이 얽힌 세계 바깥에서 틈입한 존재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사회 바깥에서 들어온 인물이기도 하다. 클레어는 칸에 와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옥상에 있던 만희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사진에 담는다. 클레어의 사진에 대한 신념을 경유해 말하면, 만희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이해하게 되는 신비를 경험한 셈이다. 이후 한 카페에서 완수를 처음 만나 휴지기가 긴 어색한 대화를 나눈 후, 어느 식당에 이르러 양혜, 완수에게 자신의 사진에 대한 신념을 들려준다. 양혜와 완수는 각각 영화를 파는 사람이자 만드는 사람이면서 만희를 배척한 사람, 만희에게 실수를 한 사람이다. 그때 클레어는 “내가 당신을 사진 찍은 후에는 당신은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거든요.”라고 말한다. 사진에 담긴 사람을 오래 쳐다보면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이러한 클레어의 신념은 얼마든지 중층적인 해석을 허락한다. 그러나 홍상수의 저의에 충실하고자 할수록 그 두 사람(완수, 양혜)이 만희를 제대로, 오래 쳐다보지 못한 것 아니냐는 반문으로 들린다. 만희를 전혀 다른 의미로 만나게 되는 기적에 이르지 못한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그 반문, 혹은 문제제기 이후 클레어는 아침에 찍은 만희의 사진을 완수와 양혜에게 직접 보여준다. 양혜는 그 사진에서 당장 칸을 떠나라며 해고했던 부하직원을 보고, 완수는 술에 취해 하룻밤을 보낸 젊은 여자를 본다(이 사실은 양혜의 대사를 통해 전달된다). 클레어로 하여금 보자마자 셔터를 누르게 만들었던 아름다운 만희는 그 뜻밖의 순간에 완수, 양혜에게 되돌아온다. 그들이 머무는 영화의 도시 칸에, 그리고 완수와 양혜 가까이에 만희는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이후 쇼트에서 홍상수는 클레어의 사진 속에 담긴 만희의 모습을 영화 밖 우리에게도 또렷하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그녀의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며 편견을 벗어야 할 사람들 중엔 영화 밖 우리도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이 쇼트에 이르러 홍상수는 ‘김민희/만희’를 통해, 혹은 ‘김민희/만희’를 위해 좀 더 직설적인 답장이거나 변명을 시도 중임을 들킨다.  

바로 그 다음 신에서 클레어는 바닷가에서 홀로 고독을 음미하고 있는 만희를 우연히 다시 만나 또 한 번의 사진을 찍고 정식으로 인사를 한다. 클레어가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은 실재의 자국으로서 ‘사진적 순간’이면서 자기반영성에 충일했던 홍상수 영화의 ‘영화적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자기 영화와 관계맺고 있는 우리에게 스캔들을 값싸게 소비하는 사람들과 다른 태도를 간곡히 요청하는 홍상수만의 제스처가 거기 있는 것이다. 

영화 후반에는 어느 건물 옥상 테라스에서 외국인의 호의를 받아주는 만희가 등장한다. 이후 우리는 칸의 키 작은 집들과 고풍스러운 골목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그때 그녀를 발견한 점잖은 차림의 완수가 프레임 내로 들어온다. 그는 그녀에게 영혼이 예쁘다는 둥의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핫팬츠를 빌미 삼아 “너 싸구려 호기심 얻고 싶어? 왜 싸구려 욕망의 대상이 되려고 해? 뭘 홀리려고 하지 말고 뭘 팔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살아.”라고 말한다. 이 폭력의 언어에는 ‘투사(projection)’이거나 신경증적 방어기제인 ‘합리화( rationalization)’의 흔적이 얹혀있다. 자기 욕망의 잔여에 시달리던 완수는 클레어를 처음 만난 날, 어느 도서관에서 그녀의 환심을 사려 한 적 있다(아마도!). 마그리트 뒤라스의 책를 뽑아 클레어에게 프랑스어로 읽어 달라 하던 제스처에서 수컷의 헤픈 연애감정이 감지되는 것이다. 그런 완수가 만희에게 ‘싸구려’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녀와의 하룻밤 이후 찾아온 복잡한 감정의 책임을 만희에게 돌리려는 것으로밖에 읽을 수 없다. 

그 같은 완수의 왜곡된 무의식에 헛헛함을 느낀 관객이라면, 그는 만희의 면면에 다른 감정과 해석이 필요함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순간 클레어는 완수의 말에 상처입은 만희의 뒷모습을 조용히 사진에 담는다. 그건 타자를 받아들이는 클레어만의 익숙하고 심미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만희는 그녀를 되돌아보며 “사진 찍지 마세요”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 대사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굴절시킬 수 있는 ‘모든’ 시선에 대한 확실한 감정표현이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에서 방금 클레어가 담은 만희의 뒷모습 사진은 우리에게 끝내 가시화되지 않는다. 우리도 클레어처럼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봤고, 그에 합당한 감정과 해석을 이미 내린 상황이다. 홍상수는 완수와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우리가 만희의 뒷모습을 인화했으리라 믿고 있다. <클레어>는 그 ‘믿음’에 의지해 나아가는 영화다.

같은 의미화에 도착하는 익숙한 다른 경로도 있다. <클레어>는 기존 홍상수 영화처럼 반복을 통한 차이의 효과를 노리고 그 중심에 만희의 동선과 클레어의 카메라가 있다. 단적인 예로 영화 초반 양혜가 만희에게 해고를 통보하는 카페 공간은 이후 두 번 더 반복된다. 완수를 만나 함께 동행하게 된 클레어는 별 의미없이 그 공간을 스쳐 지나간 적 있다. 영화 막판에는 서로 공감의 공동체를 이룬 만희와 클레어가 의도적으로 그 카페를 다시 찾는다. 카페 앞 인도에 누워있는 개를 처음 봤을 때, 만희는 양혜를 곁에 두고 ‘참 착하다’라고 읊조리며 개의 머리를 어루만진다. 이후 신에서 그 개를 처음 본 클레어는 완수를 세워 두고 ‘참 예쁘다’라 말하며 개의 옆구리를 쓸어본다. 그렇게 두 인물이 같은 공간에서 유사한 행동, 다른 말을 뱉었기에 개가 사라진 카페를 다시 방문한(우리에게는 그 카페 공간의 세 번째 반복) 두 인물의 대화는 ‘참 예쁘다’와 ‘참 착하다’ 사이의 의미론적 낙차를 가늠해보는 순간이 된다. 이때 클레어(혹은 ‘클레어의 카메라’)는 의미심장한 힌트를 베푼다.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을 아주 천천히 다시 쳐다보는 겁니다.” 

<클레어>가 반복을 통한 차이의 효과로 축조된 구조물이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완수는 우리에게 ‘예쁘다’와 ‘헤프다’ 사이의 간격을 반복해서 찾게 한다. 양혜는 ‘순수’와 ‘정직’ 사이의 거리를 거듭거듭 생각하게 한다. 양혜가 연애의 지속과 일의 지속 사이에 압착 당한 것은 자기가 뱉은 말의 무게에 눌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만희는 앞에서 언급한 ‘간격’과 ‘거리’에 대한 유사 고민을 예술(영화 만들기)과 상품(영화 팔기) 사이에서도 해왔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지금은 하룻밤의 스캔들과 하룻밤만의 해고 사이에 이중구속된 상태다. 좀 더 멀리서 조망하면 완수는 사적인 연애감정과 공적인 일(영화 만들기) 사이를 항상 두리번거려 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클레어>의 세계에서 반복되는 것은 역설의 상황을 벗어날 수 없는 인물들이 서로에게서 미끄러지는 과정이다. 

그들 사이를 부유하는 시선주체로서 클레어(의 카메라)는 역설의 간격과 거리를 활보하는 사유기계다. 우리 중 누군가는 클레어처럼 저만의 카메라를 들고서 홍상수와 김민희를 한데 묶는 현실의 정보와 그들이 영화를 통해 빚은 감흥을 끊임없이 ‘연결/분리’시켜봤을 것이다. 클레어의 폴라로이드 사진에 흔적으로 담긴 실재의 자국은 홍상수가 규제 밖에 있다. 거기엔 홍상수의 입장과 홍상수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입장이 암시되어 있을 뿐이다.  

사실 <클레어>가 홍상수의 답장이거나 변명인 이유는 영화 초반 대사를 통해서도 충분히 암시되었던 바다. 오프닝신이 지나가자마자 플래시포워드 신이 들이닥친다. 만희가 해고당한 내막을 모르는 만희의 회사 후배는 “팀장님 왜 회사 그만두셨어요?”라고 묻는다. 그리고는 조급한 속도로 다시 플래시백 신이 따라 붙는다. 그 신에서 양혜는 “순수하다고 꼭 정직한 건 아니더라. (중략) 오늘 여기서 끝내자”라고 말하며 만희를 칸에서, 그리고 완수에게서  추방한다. 만희가 양혜에게 “제가 부정직하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되묻긴 했지만, 그 질문은 보이지 않는 벽을 넘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부정직하다고 내쳐진 만희를 클레어의 카메라로 다시 해명해보려는 기획으로 요약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클레어>는 만희를 영화 바깥으로, 완수와의 관계 바깥으로 내친 후, 지금부터의 상황을 함께 감당해보자는 제안이다. 그런데 그녀의 내쳐짐을 다시 예술과 사랑 바깥으로의 퇴출로 번안해내고 보면, 현실의 김민희와 영화 속 만희가 처한 현실이 접합되는 신비의 순간들을 외면하기 어렵게 된다. 이 즈음에서 클레어의 카메라가 만희를 천천히 쳐다볼 줄 알았고, 그녀가  다른 의미로 비약하는 결정적 찰나를 찾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자기 예술과 사랑을 지켜보는 이에게 보내는 홍상수의 솔직한 답장이거나 불충분한 변명이다. 

솔직하거나, 변명하거나

<클레어>에서 완수가 등장하는 마지막 신은 매우 짧게 지나간다. 그가 머무는 호텔 창밖으로 전차가 지나가는 신. 완수는 술에 취한 뒷모습을 내보이며 그 창문 앞에 엎어져 있다. 주관적인 인상을 말하면, 이미 절반쯤 쓰러진 그의 뒷모습에서 솔직한 감독일 수는 있으나 정직한 감독으로서의 삶은 지나가버린 이의 심경이 읽혔다. 바로 그 다음 신에서 만희는 클레어가 보는 중에 분홍색 천을 가위로 갈기갈기 찢는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다시 상처 입은 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모습‘들’에 감춰진 의미에 관해 엄격한 교사처럼 도덕 판단을 할 것인지, 자유분방한 예술가의 입장에서 미추 판단을 할 것인지는 우리 각자의 몫이다. 교사이자 예술가였던 클레어의 그들을 향한 시선을 되뇌건대, 완전한 중립이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클레어>는 만희가 머물러 온 자리에서 시작해 만희가 사라질 자리에서 끝난다. 영화는 닥쳐올 부재의 자리에 대한 응시를 요청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 시작과 끝에 비발디의 ‘사계’ 겨울 2악장이 반복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 즉 차이의 효과를 노리는 <클레어>의 마지막 반복이 음악으로 전달될 때 홍상수의 농담 같은 진담이 들렸다. ‘인생 별 것 없다. 자기에게 솔직해야 한다’는. “우리 사람되기는 힘들어도 괴물되지는 말자”던 <생활의 발견> 속 경수가 칸에 초청된 완수와 한 인물이라면, 그는 성공한 것일까.  
이 의문에 답을 내놓기 전에 <클레어>에 등장하는 또 다른 대사, 완수의 제자이면서 자기 영화로 칸을 찾은 또 다른 감독의 말에 공감할 수 있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누군 성숙해서 영화 만드나요. 솔직해야죠. 살면서 솔직해야 영화도 솔직한데” <클레어>는 이 대사에 대한 입장에 따라 홍상수의 기막힌 답장이거나, 구차한 변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여자를 앞세운 홍상수의 영화가 아직까지는 이채롭게 느껴진다. 그녀들의 즉흥과 충동이 빚은 자기반영성의 세계에 여전히 심미적인 신비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민희가 등장하는 여섯 번째 영화도 몹시 궁금하다. 확률 높은 예측을 하자면, 그 영화도 반복을 통한 차이의 효과로 가득할 것이고, 욕망의 삼각형 모델은 더 기이하게 변주될 것이다. 그와 그녀는 술을 마실 것이고, 누군가는 ‘유사 연인’이 될 것이며. 속물적인 누군가는 헛웃음을 불러일으킬 것이지만, 방금 웃은 자의 현실로 되돌아가는 질문을 남길 것이다. 이 고유한 홍상수의 영화세계만큼은 이후에도 지지할 용의가 있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홍상수가 현실을 이기지 못하는 영화의 순간들을 잘 부축해내길 바란다.  
 
(1) 이를 르네 지라르는 “경쟁자가 대상을 욕망하기 때문에 욕망주체는 그 대상을 욕망한다”고 정리한 바 있다. 르네 지르라, 김진식・박무호 역, 『폭력과 성스러움』, 민음사, 2012, p.218.
(2) 르네 지라르, 김진식 역,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문학과지성사, 2005, p.31.

 
※ 이 글은 「거기 그 고독, 반복을 통한 차이의 효과: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영화평론』 26호, 2014)에 실린 글을 바탕으로 재작성된 것이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네이버 영화

글: 안숭범

영화평론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인.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문화콘텐츠 기획 및 인문학적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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