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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선악의 경계에서 가면을 쓰다
[이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선악의 경계에서 가면을 쓰다
  • 이 호(영화평론가)
  • 승인 2018.08.2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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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최고의 선이 없이도 살 수 있지만, 

최고의 악과는 살 수 없다.―한스 요나스
 
  선과 악의 문제는 아주 오래된 인류의 기본 판단 범주이다. 이 판단으로 법과 사회가 이루어지고, 종교와 도덕이 수립된다. 현실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일은 매우 어렵지만, 각종 이야기들 속에서는 자명한 것처럼 보여진다. TV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선한 주인공과 악한 반대자는 분명히 구별된다. 일상 생활 속에서 사람들은 도덕적 의미의 ‘선하다’, ‘악하다’라는 표현 대신 ‘좋다’, ‘나쁘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좋다, 나쁘다는 판단주체의 주관적 입장이나 취향을 감안하는 표현이며 판단대상의 유용성에 대한 판단을 함유하고 있는 표현법이다. 시선으로 보기에 좋은 육체를 ‘착한 외모’라 칭하는 용법도 이를 지시한다. 이처럼 대개 우리는 선악의 문제를 유용성에 차원에서 파악하게 되었다. 제대로 작동하거나 좋은 결과를 가져오면 좋은 것(선)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나쁜 것(악)이다. (1)
 
  그렇게 오늘날 선악의 문제에 대해 따지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들이 자의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선악이라는 기준은 지배이데올로기의 도덕적 관념의 지배를 위해 사용되는 장치일 뿐이라고 주장되기에 이른 것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이나 선악을 넘어서와 같은 저작에서 선과 악은 행동 자체에 본질로서 주어지는 자연적 속성이 아니라 사적 이익이나 관심을 관철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구성되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규범적 영향력을 얻게 된 허구라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따라서 오늘날 선악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오래된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려 한다는 의혹을 받기 쉬우며 그다지 환영받기 어려운 문제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선악은 그저 미디어 서사물 속에서만 분명하면 된다. 하지만 서사가 세계상을 반영함과 동시에 세계관을 재생산해내고 있다면 서사 속의 선악관은 좀 더 치밀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헐리우드 영화의 서사물들처럼 명백한 선악의 기준을  작동시키는 영화들도 흔치 않다. 헐리우드 영화는 대개 옛날이야기에서처럼 선인과 악인을 나누고 있으며 그런 서사에 백인․남성중심주의와 미국우월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섞고 있다는 점은 쉽게 수긍할 수 있다. 이 지면에서 다룰 스파이더맨 시리즈 역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는 영화다. 마블 코믹스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고 있듯이 스파이더맨은 헐리우드의 전형적 영웅서사물의 공식을 그대로 따른다. 선한 주인공과 악당의 대치, 선한 영웅의 시련과 극복, 악을 물리치고 평화를 지킨다는 뻔한 룰. 그러나 스파이더맨 만화에서는 없던 미묘한 변화, 선과 악에 대한 통찰이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영화에는 담겨 있다. 
 
  
헐리우드 영웅 서사물의 주인공은 무조건 선의 편에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 주인공은 자명하게 선의 축 혹은 선을 위해 애쓰는 사람(형사, 영웅)이다. 반면, 악인은 처음부터 악인일 뿐, 왜 악인이 되는지, 그 악이 인간관계를 포함한 환경 속이나 내면의 감정들과의 갈등에서 어떻게 자라나고 또 사라지는지에 대해 고찰하지 않는다. 즉 악의 발아와 성장, 변이, 주체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지속적으로 인간 내부의 선과 악의 갈등의 문제를 제기한다.【스파이더맨】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들 내면 상태의 한 계기들을 외화하고 있는 존재들로 읽을 수 있다. 원래부터 악인은 악인일 뿐이라고 설정할 때 악의 퇴치와 악의 퇴치과정에서 보여주는 영웅의 탁월함만이 강조되기 마련이다. 그러나【스파이더맨】시리즈는 악당-괴물들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도의 감정이나 단점에 이끌려 악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수퍼맨은 태양계 밖의 행성 ‘크립톤’에서 온 외부인임에 반해 스파이더맨은 변이를 통해 초능력자가 된다. 배트맨이 유년시절 자신의 부모가 범죄자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심리적 상처를 통해 스스로 배트맨이 되는 반면 스파이더맨은 우연히(!) 초능력자가 된다. 배트맨이 자신의 높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부를 이용해 보조기구를 장착해 영웅이 되는 것이라면 인류의 한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스파이더맨은 수퍼맨과 구별되고, 보조기구들이 아니라 신체적 능력을 소유한다는 점에서는 배트맨과 구별된다. 수퍼맨의 존재위상이 외부인이라면, 배트맨은 자본주의의 여러요소들―자본․과학․기술―을 이용해 보조기구를 장착한 영웅이다. (2)
 
   스파이더맨의 신체변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거미에 물려서 주인공 ‘피터’내부에 유전자 변형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의 내부가 인간이자 거미인 이중적 특징을 소유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인간도 아니고 거미도 아닌 제3의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한에서 ‘피터-스파이더맨’은 그 자체로서 괴물이라고 할 수 있다. 피터는 거미를 통해 전혀 다른 존재, 전혀 다른 배치들 속으로 편입되고 있는 것이다. 수퍼맨이 어떤 경우라도 인간이 될 수 없는 반면, 배트맨이 그 어떤 경우라도 인간일 수밖에 없는 것과 달리 스파이더맨은 ‘거미-인간’이 되는 것이다. 배트맨이 아무리 변장을 하고 각종 무구(武具)를 뒤집어 쓴 채 사회악을 징벌하는 일에 나서더라도 여전히 인간 브루스 웨인인 것과는 다르다. 그것이 바로 스파이더맨이 인간거미(Human Spider)가 아닌, 거미인(spider-man)인 이유이다. 스파이더맨은 바로 인간도 거미도 아닌 위치에서 어떤 임무수행을 통해 인간이자 영웅이 되는 이야기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스파이더맨 1편에서 주인공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는 미드타운 고등학교의 졸업반 학생이다. 피터는 삼촌, 숙모와 함께 살고 있다. 피터는 매우 평범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는 약간의 소심함과 체력적 열세로 못된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거나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소심함과 선량함으로 가득 차 있다. 피터 파커는 선한 심성의 소유자다. 그의 외삼촌과 숙모 역시 가난하지만 선량한 사람들이다. 
 
  
피터는 옆집에 살고 있는 같은 반 친구 메리-제인 왓슨(커스틴 던스트)을 오래전부터 흠모해왔으며, 부잣집 아들이자 파파보이인 노먼과 친구로 지낸다. 노먼의 아버지는 국방부의 수주를 받아 첨단무기를 개발하는 방위산업체의 사장이자 과학자이기도 한 노먼 오스본(월렘 데포)이다. 노먼 오스본은 자신의 무기개발 연구가 국방부로부터 거절되고 더 이상 지원금을 받을 수 없게 되어, 주주들로부터 해임되자 그에 대한 좌절과 분노감에 악당 고블린(goblin)으로 변하게 된다. 
 
  콜롬비아대학교 과학생명공학 연구소에서 견학을 하던 중 피터는 유전자 변형실험체인 거미에게 손등을 물리게 된다. 자세히 설명되지는 않지만 거미에게 전염된 후 피터의 신체에는 유전자 변형이 일어난다. 하룻밤 사이에 피터 파커의 신체 안에서는 유전자의 재배열과 재배치가 이루어지고, 그로써 피터는 수퍼 거미의 능력을 갖게 된다. 시력이 좋아진 것은 물론이며, 벽을 자유자재로 기어오를 수 있고, 손목에서는 거미줄이 발사된다. 보통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민첩하고 탁월한 신체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자신의 신체에 변화가 발생했음을 감지한 피터는 신이 나서 빌딩을 기어오르고,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이 변화는 신체에 국한된 것으로서 피터 자체가 선한 영웅으로 태어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의 내면성 자체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피터의 변화는 신체변화에 국한된다. 연구소의 RNA조작을 통해 만들어진 수퍼 거미에게 물린 피터 신체의 DNA 구조 변화 때문에 피터는 다른 신체적 존재로 변이했다. 그의 신체의 변화는 물리적․신체적 힘의 증가를 가져왔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의 존재변환은 아니다. 신체능력의 증대일 뿐 피터가 전적으로 다른 존재로 변이한 것은 아직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피터는 자신의 증가한 힘을 이용해 경제적 이득을 얻으려 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돈을 탐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동차를 구입하기 위해 경매격투기장에서 스파링 파트너가 되어 3천 달러를 손에 넣으려 한다. 자신의 신체적 능력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격투기 사무실에서는 3분이 되기도 전에 상대를 눕혀 버렸기 때문에 돈을 줄 수 없다며 100달러만 주어 피터를 내쫓으려 한다. 피터가 분노하여 사무실을 나서려는 순간 강도가 들어와 격투기 사무실에서 현금을 강탈한다. 그러나 피터는 자신의 신체능력을 이용해 도망치는 강도를 제지하거나 체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방관하며 강도를 놓아 보낸다. ‘왜 잡지 않았느냐’는 격투기 회사 사장의 말에 피터는 ‘나랑 상관없잖아요’라고 말하며그 사무실에서 당한 일에 대한 미움의 마음으로 범죄를 방관함으로써 복수한다. 그러나 그렇게 놓여난 강도는 건물 밖에서 피터를 기다리고 있던 피터의 숙부를 살해하게 된다. 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상관없다고 여기거나 방관함으로써 복수하려던 피터에게 돌아온 것은 피터에게는 아버지와 다름이 없는 삼촌 벤을 잃는 불행의 증식 혹은 불행의 피드백이었다. 범죄에 대한 방관은 곧 악을 증식시키고 불행을 증가시켰다.
 
  자신이 놓아 보낸 범죄자가 숙부를 살해한 데 분개한 피터는 곧바로 강도를 쫓아가 그를 궁지에 몰아붙이게 되고 강도는 건물에서 떨어져 죽는다. 피터가 죽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분노에 사로잡힌 행동은 다시 그 누군가의 죽음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아무리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법적 절차를 통해 처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피터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범죄자를 잡으려고 하다가 그를 죽음으로 밀어 넣게 된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이 영화는 ‘악을 악으로 갚아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갚으라’는 메시지처럼 이 영화는 정의와 선에 관해 조금 색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즉 많은 헐리우드 서사들이 주인공의 복수를 정당하게 간주하는 반면 이 서사는 주인공의 사적인 복수를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삼촌 벤의 죽음은 피터가 범죄의 인과연쇄와 증식에 관해 인식하는 데 결정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벤 삼촌의 말대로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The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한편, 자신이 개발한 무기를 실험하기 위해 자신의 몸에 약물을 투여한 노먼 오스본은 완전하지 않는 실험약물에 의해 신체적 능력은 증가하지만 자신 내부에 잠재된 폭력성이 외현화 된다. 즉 폭력적인 성향이 통제를 벗어나 그 자신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거울 속의 자신, 즉 노먼 오스본 내면의 선과 악이 갈등을 겪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악한 행동을 하게 되자 점점 악당 고블린으로 변해 간다. 나쁜 일을 할수록 그의 내면 갈등은 사라지고 악의 본성은 더욱 강해져 결국 일상의 노먼 오스본까지도 고블린이 지배하기에 이른다. 노먼 오스본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거울 속의 자기 이미지와 대화하며 갈등하지만 결국은 악이 그를 지배하고 노먼 오스본에서 고블린으로 완전히 변해 버린다.(3) 이로써 고블린-노먼 오스본이 탄생하면서 스파이더맨도 탄생한다. 위험이 자라는 곳에서 구원의 힘도 함께 자라듯 악이 발생하는 곳에 선도 함께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노먼 오스본이 무리해서 실험을 강행하다 초능력을 얻었다면 피터는 우연히 감염되었다. 즉 자기 힘의 강도로 ‘-되기’를 실천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만일 피터-스파이더맨의 ‘되기’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도덕적 능력으로서의 ‘되기’일 것이다. 
 
   노먼 오스본이 소유한 힘의 속성은 공격성과 광란, 자기통제의 불능을 수반한다. 반면 거미의 힘은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에 있다. 힘을 얻은 후 오스본은 자기 회사와 사업확장에 자신의 힘을 사용하면서 그 일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을 폭력적으로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반면, 피터는 약한 자를 도우며 범죄자를 체포하는 일에 자신의 힘을 사용한다. 물론 피터 역시 레슬링을 통해 돈을 버는 일에 사용하려고 했다. 이 때 피터가 차를 사려는 이유는 메리 제인에게 환심을 사려고 했기 때문이다. 즉 남의 시선에 괜찮은 사람이 되려는 욕망, 남에게 자기 자신의 본모습이 아닌 것을 보이려는 욕망, 부의 확장을 통해서 자기의 욕구를 달성하고자 하는 욕망에 잡혀 있었던 셈이다. 만일 피터의 힘이 올바르게 사용될 방향성을 얻지 못했다면 피터는 선한 영웅이 아니라 악당과 전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소유한 힘으로 대중들에게 흥분과 쇼를 보여주고 돈을 마련하는 영웅이라면 차라리 고블린 같은 악당이 되는 편이 정체성의 확실성 면에서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고블린으로 변한 오스본은 이제 회사의 중역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행사장에서 테러를 가하며 쑥대밭을 만들지만 스파이더맨의 저항으로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다. 스파이더맨이 장애물이 되자, 고블린은 스파이더맨을 처치하려고 하기보다는 같은 편으로 만들려고 한다. 고블린은 스파이더맨에게 자신과 스파이더맨은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힘을 가진 존재는 일반인들과는 다른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고 말한다. 특별한 능력을 소유한 존재들은 일반인의 도덕과 선이라는 잣대를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논변을 펼친다. 바로 이 지점이 노먼 오스본이 반사회적 이상성격자(sociopath)라는 점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반사회적 이상성격자는 옳고 그름에 대한 ‘직감’ 즉 외부의 사회적 규칙과는 무관하게 어떤 것을 해선 안 된다는 관념이 없다. 반사회적 성격이상자는 도덕이란 자신의 이익을 철저히 계산하면서 행동하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실천한다. (4)
 
  
물론 그런 생각 자체가 힘을 기반으로 한 특권의식이며 악의 근원은 그런 관점에 있다. 영웅이란 그가 가진 능력 때문에 영웅인 것이지 그의 업적과 성과 때문은 아니라는 생각, 고블린의 생각은 힘의 ‘소유’ 자체에 있지 그 힘의 사용 ‘방향’에 대한 고려가 없다. 자신의 특별한 능력으로 자신의 이익과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이든 무방하며, 그럴 힘이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담론은 매우 비도덕적이고 위험한 생각이며 나치를 포함한 모든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의 근원에 도사린 함정이다.
  그래서 고블린이 그 힘을 사용해 하는 일은 파괴와 복수, 자기 이익의 증대이고, 스파이더맨이 하는 것은 타자를 돕고 위기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는 일이다. 따라서 힘은 그 자체로서는 영웅적 자질일 수는 있지만, 힘 자체로는 영웅이 될 수 없다. 힘은 힘의 크기에 비례해서 힘의 방향성이 정확하고 옳아야 한다. 스파이더맨은 그 힘 때문에 영웅인 것이 아니라 그 힘을 도덕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능력 때문에 영웅이다. 이것이 그가 마지막 장면인 노먼 오스본의 장례식에서 MJ의 사랑을 거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개인적인 사랑보다는 공적인 의무를 택하는 것이다. 한 개인으로서 행복을 누리고 살기에는 그가 가진 힘, 그리고 그 힘을 사용해야 할 의무를 가진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는 것이다. 
 
  고블린은 그 이름의 뜻처럼 못된 악마답게 스파이더맨에게 딜레마 상황을 던져준다. 높은 교각 한 쪽에는 피터가 사랑하는 여인 MJ를 매달아 놓고 다른 한 쪽에는 어린아이들이 타고 있는 케이블카를 매달아 놓는다. 이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한 명을 구할 것이냐, 죄 없는 여러 명의 아이들을 구할 것이냐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으로서 개인성과 공공성 사이의 갈등을 야기시키려는 것이다. 거미-인간이자, 피터-스파이더맨인 존재, 개인이자 사회의 공익요원인 네가 누구인지 선택을 통해 정체성을 스스로 선택하도록 요구하는 문제인 셈이다. 그러나 피터-스파이더맨은 두 가지를 모두 붙는다. 그것은 당연히 스파이더맨에게 엄청난 하중을 선사한다. 공적인 의무 행하는 것과 개인적으로 소중한 사람을 구하는 것, 그것은 우선과 나중의 문제가 아니라 한 주체에게 작용하는 동등한 힘이다. 그 둘을 모두 붙드는 것은 쉽지 않다. 팽팽한 힘의 작용사이에서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은 영웅이기를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거나 개인성을 박탈하려는 것과 같다. 그러니 진정으로 도덕적 영웅이고자 하는 자는 그 둘의 무게를 버틸 줄 알아야 하고, 둘 사이의 충돌 사이에서 발생하는 분열을 간극을 버티며 살아낼 줄 알아야 한다. 개인적인 욕망과 공적인 임무 사이의 팽팽한 긴장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그 긴장을 버티는 일, 그것이 도덕적이고자 하는 주체들에게 요구되는 사항인 것이다.
 
  고블린은 그의 최후 순간에 피터의 선량함에 호소해 피터-스파이더맨을 죽이려 한다. 피터에게 “나는 네게 아버지 같은 존재가 아니냐”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고블린-노먼에게 피터-스파이더맨은 “내 아버지는 벤 파커”라고 말한다. 이것은 육체의 아버지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혈통을 스스로 규정하는 언어적 선언이다. 자신을 스파이더맨으로 태어나도록 이끈 벤 삼촌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선한 영웅으로 살고자 하는 자기선언인 셈이다. 그리고 악이 항상 그 스스로를 찌르고 말듯 고블린 역시 자신이 쏘아 보낸 글라이더의 날에 자신이 찔려 숨을 거둔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스파이더맨은 처음부터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 악과 싸우면서 점점 더 강해지는 속성을 가진다. 그의 도덕적 능력과 신체적 능력은 그가 악과 싸우고, 악의 유혹을 극복하면서 점점 더 강한 능력으로 자라난다. 무엇보다 자신의 능력에 맞는 임무를 발견해 내고 선택함으로써 진정한 도덕적 영웅으로 태어난다는 점은 예사롭지 않다. 이것은 단순히 SF만화적 상상력으로 그려진 초인적 거미인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타자중심적인 임무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선택하고 만들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셈이다. 스파이더맨은 단지 능력으로서 영웅인 것이 아니라, 타자들을 구하는 임무를 스스로 걸머짐으로써 영웅이 되는 것이다. 사실 모든 영웅이란 자기 개인적 욕망에 충실하거나 남과 다른 업적을 통해서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행동동기가 타자중심적인 자기희생을 통해서 자기 극대의 힘을 발휘할 때 그가 바로 영웅이라는 논리가 성립한다. 이처럼 스파이더맨 1편은 그저 어린이 만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우리에게 선의지가 무엇이고, 선은 어떻게 자라날 수 있는지, 선과 악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적어도 은연중에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스파이더맨 2편에서는 개인의 생활과 공적 임무, 2가지 모두를 감당해야 하는 피터-스파이더맨의 분주한 생활로부터 시작한다. 역설적이게도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피터는 생활고에 시달린다. 일상생활인으로서의 피터와 공적인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스파이더맨 두 가지 역할을 감당하기에 너무 힘이 드는 것이다. 피터로서 피자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도중에 범죄자가 발견되면 스파이더맨으로서 그 일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인으로서의 역할과 스파이더맨이라는 역할을 병행해야 한다. 그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나고 집세를 지불하지 못하는 형편이 되며 학교에서도 불성실한 학생으로 몰린다.  그의 조언자인 숙모조차도 경제적 어려움과 죽은 남편 벤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독과 상실감에 휩싸인다. 
 
  영웅의 일상생활은 누추하고, 애처롭다. 두 가지 임무를 모두 감당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는 피곤하다. 그렇게 지치자  거미줄조차 잘 발사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피로와 스트레스로 그의 신체능력이 저하되었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공익요원’으로서의 생활에 회의가 찾아오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스파이더맨의 능력이 그의 신체에 소유된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피터가 스파이더맨이 되기를 스스로 그만두자 더 이상 거미줄이 발사되지 않는다는 점이 그런 해석을 뒷받침 한다. 스파이더맨1편에서는 힘이 먼저 주어졌기 때문에 스파이더맨으로 탄생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서사의 심층적 국면에서, 주어진 힘이 올바로 사용되지 않을 때, 혹은 그 힘을 사용하려는 의지를 상실할 경우 그 힘은 소멸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필요 없는 능력은 주어질 필요가 없고, 사용하지 않는 힘은 더 이상 존재하기를 그치듯 말이다. 그렇다면 스파이더맨의 능력은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스파이더맨으로서 살아가겠다는 의지와 표상으로부터 획득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지쳐 힘이 빠진 피터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받는다. 자신의 문제를 타인에게 의존해 해결하려는 것일까? 정신과 의사의 말은 매우 그럴듯하다. 사실상 영화 속 의사의 말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 그러나 피터는 이 말을 자기합리화의 기제로 사용한다. 자신의 스파이더맨 역할포기를 위한 조언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피터는 그 피곤한 생활, 스파이더맨으로서 살아가기를 멈춘다. 스스로 영웅의 삶을 포기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아간다. 피터는 그 무거운 영웅의 짐을 벗고 그 홀가분함에 유쾌해하며 일상인으로서의 삶에 충실한다. 그런 그를 다시 영웅으로 불러내는 두 가지의 계기가 있다. 하나는 숙모가 영웅에 대한 조언을 들려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심각한 악의 출현이다. 
 
  숙모의 조언은 어린아이에게는 영웅의 모델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쉽게 생각할 때, 어린아이들에게도 영웅이 필요하다는 이 언설은 매우 유치한 만화 속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영웅은 만화책을 읽는 어린아이들에게만 필요한 것일까? 영웅이란 자신이 지향하는 올바른 삶의 방향에서 자신의 이념적 지표가 되어줄 만한 인격적 탁월성을 소유한 표상을 일컫는 말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웅은 거미줄이나 쏘면서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는 영웅일 필요는 없다. 영웅이란 그런 물리적 차원의 초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도덕적 영웅, 우리 삶의 지표가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존재를 말한다. 
 
  따라서 현대사회 속에서 우리에게 영웅이 없다는 것은 비극적인 일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에게는 유명인(celebrity)만이 가득할 뿐 삶의 지표를 제시하는 모델로서의 영웅이 없다. 영웅이 없고, 유명인만이 가득한 시대, 우상(아이돌)은 넘쳐나고 개인적으로 추종할 만한 모델을 발견하기 힘든 시대, 그것이 우리 시대의 한 특징임에는 틀림없다. 익히 알다시피 근대 사회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가치의 상대화로 인해 모든 이들에게 영웅이 될만한 인물 역시 존재하기 힘들다. 우리가 추종하는 사람들은 영웅이 아니라 아마 우리가 가지고 싶은 것을 이미 많이 가진 사람 혹은 특정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이룬 사람일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우리의 영웅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그 모델이 모든 이에게 영웅이라고 인정될 만한 총체적 규범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2편에서 스파이더맨의 안타고니스트는, 따스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1편의 노먼 오스본처럼 무리한 실험의 결과로 기계-인간으로 변해버린 옥타비우스 박사 즉 옥토퍼스다. 괴물로서의 옥토퍼스는 인간도 아니고 기계도 아닌, 인간과 기계가 융합되었고 인간 내면의 악이 표출된 그런 존재다. 이런 점에서 악의 특성이 1편과 크게 다르지 않다. 3편의 샌드맨을 포함해서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악으로 설정된 존재들이 완전한 악의 구현체들이 아니라 원래 따스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들이며, 특정한 환경과 계기들 때문에 악이 된다는 점을 통해 악의 작동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모두 그 악한 행동 속에서도 인간성을 희미하게 간직하고 있으며, 종종 죽음에 이르러서는 인간성을 되찾기도 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 그 스스로 자기의 정체성을 결정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스파이더맨은 인간의 선택가능성과 더불어 악인에게도 희망(자기결정의 기회)이 있음을 보여준다.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선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해야만 할 때가 있다’ 이것은 스파이더맨이 욕망의 윤리에서 의무의 윤리로 전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안에도 영웅적 본성이 있다. 용기와 자기희생으로 만들어진 영웅. 그것이 바로 스파이더맨이다. 그렇다면 스파이더맨은 바로 허구적 서사물에 등장하는 히어로가 아니라 이러한 결단을 내리고 자기 삶과 내면의 배치를 그 악한 길로부터 돌이켜 선한 쪽으로 돌이킴으로써 스스로 자신을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영웅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인 것이다.  
 
  
스파이더맨 3편은 피터와 MJ의 데이트 장면으로 시작한다. 피터는 MJ와 평화롭고 화목한 데이트를 즐긴다. 그런데 홀연히 외부로부터 검은 물질이 떨어진다. 그 물질은 피터와 MJ의 모터사이클 뒤에 슬쩍 달라붙는다. 그 검은 물질은 외계생명체 ‘심비오트’(symbiote)다. 마블 코믹스 만화 원작에서도 그것은 숙주에게 달라붙어서 숙주의 힘을 강화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 괴물들을 만든다. 그것은 심비온트(symbiont, 공생자)라는 영어단어가 말해주듯 우리 안에 함께 있는 그 어두운 내면성, 특정한 계기들 속에서 극대로 활성화될 수 있는 그 무엇의 상징이다. 그 물질이 활성화의 계기를 만나면 치명적인 문제를 발생시킬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가장 행복할 때 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안심하고 나른할 때 보이지 않게 달라붙어 집안으로 숨어든다. 그 검은 물질이란 선과 악에 관한 기독교적 판본을 따라서 말해 보자면 ‘죄를 짓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더 이상 알 수 없는 낯선 본성’(고백록)이라고 말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우리 안에 항상 잠재된 악의 상징일 것이다.  
 
  한편 3편에서의 악당은 샌드맨이다. 그는 교도소에서 탈옥한 죄수로서, 벤삼촌을 죽인 사람이다. 그는 경찰들에게 쫓기다 우연히 방사능 실험장소에 빠져들고 거기서 유전자 재배열을 통해 샌드맨으로 재탄생한다. 그는 피터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확장된 능력으로 현금수송차량을 습격하는 등 돈을 좇는 모습을 보이고 나중에는 검은 스파이더-괴물이 된 브록의 제안을 받고 스파이더맨과 맞선다. 샌드맨은 스파이더맨이 능력을 갖게 되는 과정과 아주 흡사하지만 그가 어떻게 악당이 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선과 악의 문제를 명백히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뒤이어 피터는 삼촌을 죽인 범인이 1편에서 죽었던 그 살인범이 아니라 따로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 소식을 듣자 피터의 마음 속에는 다시 미움과 분노가 자란다. 미움과 분노가 마음 속에서 자랄 때, 그 검은 물질 심비오트는 피터가 잠든 틈을 이용해 피터 파커를 휘감싸기 시작한다. 미움과 분노, 증오가 때때로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고 생의 동력이 되듯, 스파이더맨은 검은 물질에 의해 평소보다 더욱 자신의 힘이 증대된 것을 느낀다. 그런데 피터는 그 증대된 힘을 느끼며 경이로워한다. 그러나 그 힘은 평소 스파이더맨이 사용하는 힘과는 약간 다르다. 그 힘은 그 힘 자체의 사용을 즐거워하는 그런 종류의 힘이다. 자기 멋대로 하는 느낌은 매우 매력적이고 달콤하며 그 힘의 증가는 더불어 자유의 증가를 가져온다. 그것은 악의 현상이다. ‘악 속에는 악을 범하는 자로 하여금 자신이 세계의 주인이라고 느끼게 하는 일종의 자율적 힘 같은 것이 들어있기 때문에 잔혹행위와 파괴행위에서 느끼는 기쁨은 선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늘어나며 그 긴장이 고조될수록 그는 자신의 가치를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다’(5)는 통찰과 일맥상통한다. 
 
  
평소에 억눌렸던 본성을 표출하는 것을 스스로 즐기고, 그 즐거움을 경험하고, 즐거움을 기억하는 피터는 이제 검은 옷을 스스로 꺼내입기 시작한다. 그 검은 옷은 처음에 자기가 스스로 꺼내입고 그 힘을 즐기지만, 점차로 그 옷의 사용자를 지배하고, 나중에는 벗으려 해도 벗어지지 않는다. 일종의 중독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검은 물질은 바로 자신이 달라붙은 숙주에게 강한 힘을 선사하는 반면 동시에 그 힘을 통해 숙주의 악한 본성을 더욱 극대화(maximize)시키는 물질이다. 
 
  그런데도 힘의 증대는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심각한 문제들을 낳을 뿐이다. MJ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그 물질의 심각성은 그 옷을 입고 있지 않을 때조차 피터의 내면을 매우 냉정하고 잔혹한 성격으로 변화시켜간다. 그것은 1편에서 보았듯, 또 다른 상처와 미움과 분노의 연쇄고리를 생성시킨다. 재즈바에서 MJ에게 상처를 주고, 친구 해리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며, 사진기자 브룩에게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입힌다. 
 
  피터는 간신히 그 검은 옷을 교회-성당에서 벗겨내기에 이른다. 그가 그 악한 옷을 교회에서, 성당의 종소리를 통해 떼어낸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점점 더 악해지는 자신을 발견한 피터-스파이더맨은 자기를 반성하며 그 검은 옷을 떼어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신 앞에서 피터를 저주하기 위해 교회에 들른 브록은 오히려 그 장소에서 그 검은 옷을 입게 된다. 이로써 교회, 즉 신성한 장소는 장소 그 자체로 선하고 신성한 곳이 아니라 그 곳을 찾는 존재들이 얼마나 다른 마음자세를 가지고 왔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기능을 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점에서 브룩, 샌드맨, 해리, 심지어 피터까지 온통 미움과 분노에 사로잡힐 때, 한 존재자가 얼마나 악의 유혹을 받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 스파이더맨 서사에서 미움과 분노 자체를 악으로 설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여기서 미움과 분노는 악이라기보다는 개연성 있는 감정들이다. 자신의 삼촌을 죽인 범죄자에게 미움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며, 자신에게 망신을 주고 일자리를 잃게 한 피터를 증오하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이해될 수는 있지만 그런 마음에 사로잡히면 다음 단계인 악인으로 변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그런 마음을 품은 것 자체가 악인이 아니라 악인으로 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된다. 여기서 마음과 행동의 차이를 우리는 보게 된다. 그가 마음을 품은 상태 자체로서는 아직 악인이 아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악한 마음 자체로서가 아니라 악한 행동이 점점 그들을 악인으로, 그리고 완전한 악인으로 만들어 간다는 점은 숙고를 요한다. 
 
  
브록은 스파이더맨에게 당하지 못하자 샌드맨을 찾아가 악의 연합을 꾀한다. 검은 괴물이 된 브록과 샌드맨의 협공에 위기에 빠진 스파이더맨에게 증오에서 돌이킨 친구 해리가 나타나 피터를 돕는다. 해리는 이 싸움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그의 마지막 선택은 선의 편, 친구의 편에 서는 것이었다. 그는 구원받는다. 죽음을 맞는 그의 편안한 표정이 그것을 말해준다. 샌드맨은 딸의 사진을 보면서 절대악으로부터 구원받고, 해리는 스파이더맨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돌이킨다. 미움과 분노가 한 사람을 얼마나 다르게 만드는가는 피터의 친구 해리가 충격으로 일시적 기억상실에 걸렸을 때 변해 버린 해리의 성품을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그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선의 편이 되어 위기에 처한 스파이더맨을 돕는다는 극적 사실을 통해서도 더욱 부각된다. 이처럼 사람은 언제든지 악에 사로잡힐 수 있으나 선에 도달하려면 매번 악과 힘든 싸움을 벌여야만 하는 것이다. 
 
  브록은 검은 옷이 자신을 강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힘에 매료되어 피터가 그 옷으로부터 분리시켜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 옷을 입기 위해 달려들다 죽는다. 이런 점에서 모든 악한 것들은 중독의 메커니즘을 갖는다. 악한 것이 중독이 아니라 중독되는 것 자체가 악이다. 악은 이미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것으로부터 찾아드는 법이다. 따라서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정도의 강한 중독성을 가진 물질이나 행동들은 (담배, 알콜, 마리화나, 필로폰, 폭력과 섹스 등)악으로 분류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피터-스파이더맨은 샌드맨을 용서한다. 샌드맨이 용서를 빌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는 것이다.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먼저라는 숙모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누구나 인간 내면에 상대를 증오하는 마음이 있음을, 그런 마음을 품었던 자신을 먼저 용서하는 마음을 품을 줄 알아야 상대를 용서할 수 있으리라. 남을 미워하는 자는 결국 자신이 미워했던 대상과 똑같아진다는 것, 미움과 증오, 그리고 검은 옷 등 악의 경험을 통해 피터는 한층 더 성숙해진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생각해 보자면 스파이더맨은 마스크를 쓰고 범죄자를 소탕해서 영웅이 아니라 자기 힘에 맞는 삶을 살려는 책임성 때문에 영웅이고, 그래서 스파이더맨은 쁘띠 히어로, 소시민적 영웅의 면모를 갖는다. 그것이 그를 친근한 영웅이게 한다. 타자를 책임지려는 정신, 그것이 그의 정신이다. 스파이더맨이 삶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노동이 그의 생활을 압도하고 그래서 그 자신의 도덕적 투쟁이 의미로 충만하지 못할 때 그는 이기주의로 자기 삶을 살아가는 그저 그런 사람이 되어 버릴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스파이더맨이 자신의 도덕적 결단과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때 그 능력은 쇠퇴한다. 그의 능력은 불변의 것이 아니고 스스로 노력하고 사용할 때 더욱 강화되는 것이다. 도덕적 능력의 용불용설. 이 영화는  악은 선의 부재라는 메시지를 전하려 하지만, 거꾸로 선은 악을 통해서만 설명되고 인식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선은 증오와 시기, 싸움의 토양위에서만 자랄 수 있는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스파이더맨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악의 경험을 통해서만 분별과 지혜를 얻게 된다. 악에 대한 경험만이 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불행이 어쩌면 우리 인간과 사회와 문명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이 선과 악에 관한 어른용 동화인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최근 새로운 스파이더맨 시리즈로 이야기를 계속해가고 있지만 그 기본 패턴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마블 코믹스와 DC코믹스가 자신들의 영웅 주인공을 종합선물세트처럼 모아놓고 이야기를 계속 확장하고 있는 추세이다. 어찌보면 유치한 이야기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지구 사회에 통용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동화처럼 아주 기초적이고 중요한 이야기들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동화는 계속되니까...
 
 
(1) 이런 입장은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정초된다. 에티카에 따르면 “선과 악은 없으며, 좋음bon과 나쁨mauvais이 있다. 좋음은 한 신체가 우리 신체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구성할 때, 그리고 그 신체의 능력의 전체 혹은 부분을 통해 우리 신체의 능력이 증가할 때를 지시한다.” 이로써 스피노자는 선과 악이라는 가치들을 반대하고 존재 양태들의 질적 차이(좋음과 나쁨)를 지지한다. 스피노자는 선악에 대한 사고는 목적인, 자유의지, 신학적 환영의 산물이라고 말하며, 내재적 존재 양태들의 위상학을 초월적 가치들에 관계시키는 도덕으로부터 전복시켜 본성과의 적합성으로 대체한다.
 
(2)‘배트맨’은 나면서부터 영웅이 아니며, 신체적 능력 또한 탁월한 존재가 아니다. 배트맨-브루스 웨인은 자신의 경제적 능력을 이용해 선한 영웅이 되는 셈인데, 이는 경제적인 부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사회질서를 조정하며 악을 구축(驅逐)한다는 부르주아적 가치를 재현하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 자신이 어둠의 세력을 축출하면서도 내면에 어린 시절의 상처와 어두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배트맨의 내면은 훨씬 중층적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과 잭 스나이더 이전의 배트맨 시리즈는 배트맨의 내적 고뇌와 악당의 이중성을 소재적으로만 차용할 뿐 대체로 뻔한 볼거리 위주의 영화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3) 노먼 오스본(Norman Osborn)이라는 작명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Os-born이란,  Os가 Osmium(화학)이라는 단어이므로 그가 화학적으로 태어난 인간이란 뜻이며, 고블린이 화학적인 약물로 인해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No-man(인간이 아니다)가 아니라 Nor-man(인간도 아니다)인 것은 그가 인간도 아니고 인간이 아닌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인간도 아니고 인간이 아닌 것도 아닌 존재, 그것이 바로 ‘괴물’의 정의일 것이다.
 
(4) 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웅진지식하우스, 2007, pp.26-27.
 
(5) 안네마리 피퍼,  선과 악-그 하나의 뿌리를 찾아서, 이끌리오, 2002,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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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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