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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주의, 지구적 위기의 궁극적 처방책”
“인문주의, 지구적 위기의 궁극적 처방책”
  • 성일권 | 발행인
  • 승인 2018.10.31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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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지식인의 만남-알리미 발행인, 조인원 총장 대담

 세르주 알리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이하 르디플로) 프랑스어판 발행인은 “최근의 포퓰리즘적 지도자들의 잇따른 등장과 지구적 위기의 악화는, 투기자본과 부도덕한 정치세력이 저지른 경제위기에서 교훈을 찾지 못한 정치·사회 시스템에 근본적 원인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조인원 경희대 총장은 국내뿐 아니라 국경을 넘는 환경·빈곤·보건·빈부격차 등 지구적 위기의 해결책으로서, 인문주의에 충실한 대학 본연의 역할과 지성인의 귀환, 그리고 시민의식의 함양을 제시했다. 알리미 <르디플로> 프랑스어판 발행인과 조인원 총장은 10월 10일 오후, 경희대 본관 대회의실에서 가진 공개대담에서 ‘문명사적 전환과 지성인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정치, 국제사회, 환경, 대학 등 다양한 분야를 가로지르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특히 대학의 자본화·시장화를 경계해온 알리미 발행인과 인문학 중심의 ‘후마니타스 칼리지’ 출범으로 대학가에 인문주의 교육의 바람을 일으켜온 조인원 총장은 성장일변도의 경제정책이 실종시킨 인문주의의 복원을 한 목소리로 강조했다. 다음은 두 사람 간의 대화를 정리한 것이다. 지면 사정상, 사회자인 성일권 <르디플로> 한국어판 발행인과 신은희 경희대 교수의 발언은 생략한다.

 

■ 조인원 총장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큰 전환의 시대를 맞고 있다. 다른 시대도 늘 위기와 기회가 교차했지만, 우리가 마주한 이 시대는 특별하다. 그 어느 때보다 근원적 성찰과 모색을 필요로 한다. 현대사회에 만연한 ‘순응적 사유’를 넘어 미래를 향한 상상과 성찰의 나래를 펼치는 자리가 됐으면 한다. 처음 내한하신 알리미 발행인을 환영한다.

■ 세르주 알리미 발행인
대학교육의 책임자이신 총장님과 이런 특별한 담론의 자리를 갖게 돼 기쁘다.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 방문은 처음이다. 우리가 흔히 지구촌이라고 표현을 많이 하는데, 지구촌의 몇몇 국가들과는 다르게 펼쳐지는 한국의 낙관적 분위기를 더욱더 기쁘게 여긴다. 며칠 전에 치러진 브라질 대선에서는 극우후보가 당선되고, 여러 유럽 국가들에서도 극단적인 국가주의에 시달리고 있다. 냉전의 마지막 보루로 남았던 한국이 냉전을 넘어서서 새로운 장을 넘기려고 하는 가운데 방문하게 돼 더 기쁘게 생각한다.

 

지구의, 초음속 굉음 같은 구조신호에 응답할 때

■ 조인원 총장
지구적 ‘위기의 국면’을 직시하고, 그 극복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우리는 두 가지 측면의 문제에 주목하고자 한다. 하나는 현상적 측면으로서,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문제다. 또 다른 것은 실존의 문제다. 우리 각자가 세상을 바라보면서 몸소 겪게 되는 문제인 셈이다. 우선 현실의 문제를 짚어보자. 그간 수없이 많이 보도되고 회자되고 논의돼왔지만, 현대사회가 만들어진 이래 나날이 심각성을 더해가는 현안들에 관한 문제다.
핵, 기아, 빈곤, 인권, 환경, 공공보건을 포함한 지속가능한 미래의 조건들이 지구촌 사회의 난제가 되고 있다. 최근 들어선 기후변화가 매우 심각한 사회적 과제, 지구적 난제로 떠올랐다. 유엔이 이를 두고 “초음속 굉음과 같은 구조 신호(Sonic boom SOS)”가 필요하다고 표현할 만큼 기후변화 문제는 우리 삶의 근원적 토대를 뒤흔들고 있다. 모든 생명의 삶의 근원인 땅과 하늘, 바다가 총체적인 위기에 처해 있는 것 같다.
이제, ‘실존의 문제’로 가보자. 이는 위기의 징후를 해소하는 삶의 양식의 문제이자 가치의 문제다. 또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18세기 유럽에서 발흥한 ‘산업혁명’ 이후 세계는 이른바 ‘지구산업문명’, ‘지구소비사회’의 길을 걸어왔다. 결과는 전례 없는 산업화, 도시화였다. 그 과정에서 인류는 ‘더 빠른 성장, ‘더 많은 소비’의 길을 달려왔다. 이처럼 지구적 산업문명의 길은 전례 없는 성장과 팽창, 편익과 풍요를 제공했다. 그러나 우리 삶의 근간은 나날이 그 위험성을 더해만 갔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새로운 삶의 가치와 철학이 절실하다.

■ 알리미 발행인
우리가 직면한 위기의 실체를 짚어보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 원인과 책임을 오인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기후변화만 해도 그렇다. 미국의 이기주의를 지구온난화 등 기후 악몽의 근원으로 지적하는 시각이 적지 않는데, 미국만을 탓할 수는 없다. 미국이 가장 많은 죄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2년 전 기후협약 서명을 했고, 일부 조치들에 대해서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기후협약에서 탈퇴하겠다고 말했다. 기후변화와 관련해서 어떤 압력도 받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사실 내가 태어났을 때를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인구가 지금의 1/2 내지는 1/3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 같은 추세로 인구가 계속 증가한다면, 이 상태로는 살아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아시아의 신흥 중산층 사람들은 미국인 혹은 유럽인 같은 소비욕구가 있다. 자연스러운 욕구다. 그렇게 중산층 인구가 늘어나고, 수십억 명이 유럽인이나 미국인처럼 소비하면서 살아가게 되면, 지구가 견뎌낼 수 있을까? 엄정한 조치가 취해져야만 한다. 탈(脫) 성장을 중시하고, 소비를 감축해 나가야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 교역에 대해서도 재고해 봐야 한다. 더 짧은 유통경로를 추구해서 현지에서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운송단계를 더 줄일 수 있고, 상품들의 수송거리도 단축할 수 있다.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몇 년 전,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이 “지금 우리 집이 불타고 있는데 우리는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다”고 말했는데, 지금이 그런 형국인 셈이다.

■ 조인원 총장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문제다. 기후학자들은 지금 이 시대를 “걷잡을 수 없는 기후변화” “되돌릴 수 없는 기후변화”란 표현과 함께 위기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혹자는 ‘기후변화는 거짓이다’라고 말하지만, 이는 목소리 큰 소수학자들의 견해일 뿐이다. 절대다수의 과학자들은 “기후변화는 현실이고, 특히 산업혁명 이래 우리가 겪고 있는 기후변화의 실체는 사람이 만든 산업문명, 즉 화석연료의 과대한 연소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지적한다. 더 이상의 논쟁은 불필요하며, 오직 필요한 것은 대처다. 반세기가 훌쩍 넘게 무모하고 지루하게 이어진 논쟁은 어느 언론인의 표현처럼, 마치 “불난 집 거실에서 체스를 두고 있는 것”과도 같다.
과학자들은 말한다. 지구평균 기온이 산업화 이전 시기에 비해 1.5~2도 오르면 기후는 ‘열실 지구(Hothouse Earth)’ 또는 ‘찜통 지구’의 길로 들어선다고 한다. 벌써 1도 상승했다. 0.5~1도만 더 오르면 실로 매우 위중한 상태로 접어든다. 지구 기온이 순간 4도, 5도, 6도, 그 이상 가파르게 상승할 수도 있다. 결과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재앙일 것이다. 4~5도 오를 경우 해수면이 10~60미터 치솟는다. 또 해안 도시와 지역 대부분이 물에 잠길 것이다. 또 지구상 거의 모든 생명체가 멸종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혹독한 기온 상승과 가뭄, 들불, 폭우와 함께 대규모 경작지, 농경지, 생태계 파괴도 피해갈 수 없게 될 것이다. 몇몇 예에 불과하지만 이런 자연재해가 우리를 찾아온다면 말 그대로 온 인류의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린다. 긴급 상황에 맞는 담대한 조치가 필요한 때라고 본다.

 

극우적 포퓰리즘에 대학 지성인들의 성찰 필요

■ 알리미 발행인
우리 인류가 총체적인 위기 앞에서 머리를 맞대고서 뭔가 담대한 조치를 고민해야겠지만, 그 위기 속에서 어떠한 교훈을 끌어내지 못하는 듯해 안타깝다. 더욱이 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지 10주년이 됐지만, 여기에서도 국가 간 협력 같은 어떠한 교훈도 얻지 못해 지금의 기후위기를 악화시키는 듯싶다.
국제사회에서 기후 변화 같은 지구적 이슈가 묻히는 것은 개별국가들, 특히 강대국들의 이기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투기자본이 이끈 지역 금융위기가 물신주의적 가치관을 널리 유포하면서 포퓰리즘을 더 가속화했다. 포퓰리즘이라 함은 정치적인 선택, 전체적인 성향, 좀 더 다른 정치적 성향을 언급하는 용어다. 이런 보수적인, 극우적인 성향을 우리는 지금 현재 유럽에서도 볼 수가 있고, 또한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의 예에서도, 남미에서도 이러한 영향을 볼 수가 있다.
지난 10년간 우리가 무엇을 보았는가? 우선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 첫 번째는 위기를 일으킨 그 원인들,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명의 실업자가 양산됐는데도 책임자들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1980년대 미국에서 경제위기가 있었다. 굉장히 심각한 경제위기였지만, 2008년도 경제위기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때 금융위기의 책임자들은 감옥에 갔다. 하지만 2008년도 위기의 주범들을 미국에서도 그렇고,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징계를 받지 않았다. 두 번째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나라별로 봤을 때 어떤 식으로 투표를 하든지 결국엔 달라지는 게 없으며, 늘 정치는 똑같다는 것이다.
우리는 프랑스에서도 그것을 느꼈다. 2012년도에 사회주의 진영에서 대통령이 당선됐지만 보수적인 정책을 취했다. 2015년 그리스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이들이 좌파 후보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지만, 좌파이든 극좌이든 결국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치는 결과가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민주주의 시스템이 지금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결과적으로 경제조치는 늘 똑같은 정책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불만족의 이유는, 처음 우리가 선포한 원칙들, 지켜야 하는 원칙들이 결국 지켜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적인 체제에서 정부는 경제에 지나치게 간섭하면 안 된다는 것이 기본전제인데, 2008년도 경제위기를 보면 그 당시 국가가 적극적으로 경제시스템에 개입을 했고, 그리고 은행과 기업들을 위해 공공지원이 계속해서 펼쳐졌고 결국에는 공공기금이 부자들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사용되는 점이 확인됐다.
경제위기 이후 10년,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위기의 책임자들은 계속해서 권력과 통제권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가 자유경제 체제에서 성스럽다고 말하는 원칙들은 계속 위반돼왔다. 따라서 지금 사람들은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으며, 때문에 극우와 선동주의가 성행하게 된 것이다. 역시 국제협력과 인류평화를 저해하는 극우적 포퓰리즘의 등장을 막기 위해서는, 대학인들의 지성적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고 본다.

■ 조인원 총장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의 대학사회는 지성의 역할과 그 기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 인간적 가치, 사회적 가치, 지구적 가치를 깊이 성찰해야 할 대학이 지성의 품격을 잃고 눈앞의 현실과 세태를 좇아 효율성, 경쟁력만을 중시하는 기관으로 변질되고 있어 안타깝다.
많은 학자, 대학에 비판적인 성찰을 하는 분들이 최근 우려하려 하는 것은 시류의 흐름에 따라 대학 본연의 책무인 진리추구와 삶의 가치 탐색이 소실돼간다는 점이다. 요즘 시중에 나온 『대학의 종언』, 『교육의 종말』, 『영혼 없는 탁월성』이란 책 제목이 이런 점을 잘 말해준다. 시류의 방향은 아시는 것처럼 경쟁적 시장사회, 산업사회에 ‘포획된 대학’을 말한다. 물론 대학은 학생들의 사회진출을 위해 실용학문을 연구하고 가르쳐야 한다. 현대 대학사회에 주어진 중요한 과제인 셈이다.
그러나 그런 기능에 묻혀 대학이 중심을 잃게 되면, 대학은 ‘대학(大學)’ 없는 대학이 된다. 큰 학문의 가치와 의미를 상실한 곳으로 전락하게 된다. 인간과 사회, 자연과 우주의 근원을 살피고, 현대사회, 현대문명의 도전적 과제를 조망하고, 우리가 소망하는 자신과 사회 그리고 세계는 무엇인지, 그런 근원적 과제와 물음을 잊지 않아야 하는 곳이 대학이다.
대학 본연의 가치가 실종된 것은 앞서 알리미 발행인이 지적하셨듯 이 시대의 ‘포퓰리즘’ 출현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포퓰리즘은 두 가지 차원의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본다. 우선 개인 차원에서 보면 자신의 주체적 판단 없이 시류에 편승하는 경향이다. ‘내가 없어진 나’, 즉 나는 없고 대세의 흐름만 남아 있는 자아를 말한다. 일종의 ‘타자화된 자아’라고도 할 수 있겠다. 또 다른 문제는 정치문제다. 정치는 흔히 민의를 수렴해 사회와 국가의 나아갈 길을 밝히고 실천하는 과정이라고 인식된다. 그러나 표심이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정치현실에서는 그 과업은 부차적인 것으로 돌려진다. 셈법과 전술, 전략만이 살아있는 ‘현실정치(Realpolitik)’만이 남게 된다. ‘포퓰리즘’은 이런 정치 현실에서 어쩌면 이미 기약됐던 일일지 모른다.
대학은 개인적·정치적 차원의 문제에 대해, 성찰적 자아와 사회, 세계를 위해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학문의 실용적 가치 외에도 학문의 인간적 가치, 사회적 가치, 지구적 가치를 위해 근본을 되짚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알리미 발행인
현대사회에서 대학 역할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는데, 대학이 추구하는 인문주의적 가치가 점차 물신화하고 이기주의화하는 우리 삶의 정상화에 더욱더 필요하다고 본다. 이 인문주의라는 것은 우리가 비인간적 정치를 바꾸는데 요구되는 철학이자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인문주의라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담론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문주의가 대학에서만 전수되는 담론으로 남아서도 안 된다. 인문주의가 정신적인 가치와 판단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대해서 영향을 미쳐야 한다.
한국, 미국, 영국 등에서는 대학 진학률이 높지만 실제 교과과정이 효율성과 경쟁력만 추구한 나머지, 제한적이며, 탈(脫) 인문적이거나 반(反) 인문적으로 흐른다면, 이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인문주의는 훨씬 더 시민에 가까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지켜봐 온 결과,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교육이라는 것이 시민들의 보편적인 공공재라는 점이다. 보건과 같이 공공재로서 고등교육에서 더욱더 모두에게 접근 가능성이 커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시민의식의 지구적 연대가 세상을 바꿔

■ 조인원 총장
여기에 시민의식을 더 하고 싶다. 나는 이른바 ‘현실정치’가 세상을 바꾸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치는 현실뿐만 아니라 미래를 관리해야 한다. 또 미래에 대한 성찰과 공론의 장이 열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하는 정치는 그렇지 않다. 권력과 집권, 재집권을 위한 셈법의 정치, 경쟁의 정치, 투쟁의 정치에 경도돼 있다.
이런 시대 상황에 맞서 유일하게 현실정치를 견제할 힘은 시민의식, 그리고 시민의식의 지구적 연대라 생각한다. 우리가 원하는 미래의 세상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정치의 가치와 의미를 시민 스스로가 함께 찾아 나서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당연시하는 현실정치는 말 그대로 당연한 것이 아니다.
우리 의식이 변하면 정치도 변한다. 우리 개개인의 책임이 막중하다. 히틀러가 군중 앞에서 선동적인 연설을 하는 이유. 이 시대 정치인들이 정치의 계절에 시장을 누비고 트위터에 매달리는 이유. 이 모두 민심과 시민의식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변화의 원천은 우리 안에 있다. 우리 개개인의 의식, 집단의식, 시민의식에 따라 정치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나와 세계를 위해 ‘학습하는 시민’ ‘성찰하는 시민’ ‘미래를 전망하는 시민’이 미래의 지도력이라고 생각한다.

■ 알리미 발행인
이번 한국방문에서 나는 남북관계 전문가들이나 시민들에게서 낙관적인 미래를 많이 들었다. 불과 1년 전,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고조된 곳에서 시민들의 희망이 넘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구촌의 많은 국가에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은 비극으로 여겨지지만, 한국에선 낙관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이는 트럼프가 전임자들이 하지 못했던 일들을 꼭 이뤄내고 말겠다는 굉장한 집착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란의 경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협정을 체결해 비핵화를 이루어 냈는데, 트럼프가 그것을 파기하기로 결정을 했다.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경우에는 전임자들이 두 한국의 서로 적대적인 상황을 끝내지 못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전임자가 못 했던 일을 해내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있다. 트럼프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굉장히 고양된 인물로 바라보는 까닭에 그런 특징을 살려서 북한과 더욱더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러한 조건에서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길을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다. 한국은 북한과의 관계에서 처음으로 미국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 상황을 맞이했기 때문에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 한국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 본다.

 

남북 평화공존 위해 남한의 시장 근본주의 지양해야

■ 조인원 총장
한반도는 마지막 남은 냉전의 유산이다. 분단 70년이 됐다. 만일 우리가 최근 추진해온 것처럼 평화번영의 길, 평화공존의 길을 함께 열어간다면, 현대 한국정치사에서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사적으로도 그렇다.
트럼프 집권기 동안, 한반도 평화정착의 속도를 내야 한다는 알리미 발행인의 현실적인 인식에 공감한다. 그러나 트럼프는 시대정신과는 분명히 다른 많은 정책을 주도하고 있다. ‘기후변화는 거짓이다.’ ‘화석연료 산업과 군수산업의 중흥에 박차를 가하겠다.’ ‘관세 장벽을 높이겠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치적 기반을 놓고 볼 때 일견 이해되는 부분이 있으나, 이 같은 정치행보는 불행히도 세계사, 문명사적 측면에서 위험하다. 자국도 번성해야 하지만, 타국 및 세계와의 공존 가능성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최근 들어 유엔은 기후변화의 재앙적 현실을 “심연의 끝자락”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다. 미국의 이기주의가 초래할 지구적 차원의 경제위기도 우려스럽다. 관련 국가들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배타적이고 극단적인 자국 이익 추구는 매우 위험할 수밖에 없다.
남북교류가 활성화되면 새로운 산업화의 전진기지가 생겨날 것이다. 북한을 포함해 유라시아 지역을 경제적으로 묶어 공동 개발하는 방안들이 제기되고 있다. 이들 지역에 종전과 같은 산업화 방식이 작동된다면, 경제성장과 산업의 팽창은 이뤄지겠지만 환경과 기후변화는 더 심각한 양상을 띠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런 상황을 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청정에너지 사용을 비롯한 다양한 조치,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이루는 생태문명에 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한반도의 지속가능한 발전모델이 생각돼야 한다고 본다.
특히 남북관계가 좋은 방향으로 무르익어 경제교류가 활성화되고, 만약에 경제가 통합되고 통일로 이어진다면, 그럴 경우에 혹시 북한에 남한식의 시장근본주의가 그대로 이식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역사가 말해주듯이 시장근본주의는 형평과 분배 정의를 실현하지 못했고, 극소수에게 부와 재력이 집중됐다. 부 축적의 이른바 낙수효과도 미진한 것으로 판명됐다. 한반도 미래의 관건은 시민의식이다. 또 변화를 향한 우리의 정치 의지이다. 북유럽 정치경제의 역사적 진화과정이 이를 말해준다. 체제와 주의라는 ‘인위적 구조물’이 사람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더 나은 체제와 이념은 우리 의식과 의지에 달려 있다.

■ 알리미 발행인
나는 조언보다는, 그 전의 다른 국가들의 통일 역학을 참고로 말씀드리고 싶다. 독일이나 베트남 경우를 보면, 서독의 자본주의가 동독에 비해 우세했고, 1989년 통독에도 그 모델을 그대로 적용했다. 그리고 통일독일과는 반대의 예를 베트남 사회주의를 들 수 있겠다. 베트남의 경우 북쪽의 사회주의가 이겼고 남쪽의 자본주의가 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베트남은 이제 자본주의의 발전모델로 가고 있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라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우세하다는 것이다. 지난 20년간 최종 우승자는 자본주의였다.
하지만 유럽의 경우, 사실은 좀 더 엄격하게 말을 하자면 과거 사회주의적인 국가 혹은 구소련 국가들이 자본주의체제로 넘어간 것은 맞지만 지난 몇 년간 온건적인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극단적인 움직임도 있다. 스페인의 새 정치세력인 포데모스, 프랑스의 앙수미즈, 미국의 버니 샌더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본주의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고, 청년들과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이들을 지지하는 기반이 생기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이러한 싸움이 결코 승산 없는 싸움은 아니고 새로운 또 판도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환경을 파괴하는 경제체제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승산이 없고, 현재는 좀 더 자율적이고, 페미니스트적이고, 친환경적인,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경제시스템과 시각이 유럽에서 대두되고 있고,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버니 샌더스와 같이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후보자가 2년 전에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는 것은 대단히 큰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그전까지만 해도 사회주의자 후보자 같은 경우에는 미국에서는 정치판에서 어떠한 승산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앞서 국민들이 어떤 불만을 가지고 있는지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의식을 가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정론은 페이크 뉴스보단 진실의 눈을 보여줘야

■ 조인원 총장
언론은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여서 말하기 조심스럽다. 일반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언론사마다 언론의 사명과 역할을 다르게 규정할지 모르겠으나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통용되는 것은 사실과 정보를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 가운데 정론을 펼친다는 것이 언론의 또 다른 기능일 것이다. 문제는 사실, 정보, 정론을 규정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사실이 뭐지?’라는 물음은 관점과 판단을 필요로 한다. 정보 역시 그렇다고 본다. 보도될 정보의 취사선택은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세계관이 필요하다. 또 그런 가운데 정론을 찾아 나서는 일은 옳고 그름에 대한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를 요청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 뉴턴과 같이 개체주의, 환원주의, 결정론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단선적 인과관계가 만들어진다. A는 B를 야기하고, B는 C를… 이런 인과의 세계를 말한다. 그러나 개체, 혹은 물질이 양면적 속성, 이를테면 물질임과 동시에 파동이라는, 또는 그 이상의 열린 속성을 지닐 수 있다는 관점을 갖게 되면 세상은 전혀 다르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인간적 현상, 마음과 물질이 혼융된 기제가 작동되는 인간의 세계는 기계론적인 사유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래서 사실과 정보, 정론에 관한 철학 정립은 매우 어려운 과제다. 그러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끝없는 논쟁만 할 수는 없겠다. 중요한 문제는 다르게 해석할 여지, 가능성을 항상 열어둔다는 점이다. 기계적, 도식적, 단정적 판단을 잠정 유보하고 그간 인류가 쌓아온 지식과 지혜에 기초해 ‘공감의 지대’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론이 무엇인가? ‘기후변화는 거짓이다’와 ‘기후변화는 인간의 이기적인 산업 활동이 초래한 것이다’라는 두 가지 시각이 상충하는데, 어느 것이 사실일까?

내가 만난 어느 분은 “언론의 입장에선 어느 한 편에 치우치기보다는 중간자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과연 그럴까? 어느 자료에 따르면 과학자 99%가 후자의 입장을 믿는다. 나는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과학과 지식이 쌓아온 공감의 지대에 힘을 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절대의 오류 가능성’에 주목하면서도 ‘지성의 공감’에 무게를 싣는 일이 필요해 보인다.
또 다른 문제는 재정적 기반에 관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언론기관들은, 물론 국영도 있긴 하지만, 대다수가 법적으로는 영리법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영리법인은 경영을 위해 시장논리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경쟁해야 하고, 운영을 위한 재정을 확보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시장의 무게가 크게 다가설 수밖에 없다.
흔히 자본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받는 미국 언론에서는 구조적 속성상 기후변화 같은 민감한 문제의 진실을 담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지난여름 100여 차례가 넘는 들불이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나고, 플로리다의 해수면이 상승하고, 전례 없는 빈도와 강도의 허리케인, 토네이도가 발생해도 좀처럼 이런 현상을 기후변화의 문제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우리가 딛고 있는 생존과 변화의 기반이 무엇인지, 어떤 기제가 작동되는지에 대한 인식과 판단에 따라 사실을 보도해야 한다. 무엇이 중한지에 대한 소신과 철학에 입각해 정론을 펼쳐야 한다. 경영상 이유로 시장이 원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앞서 말한 언론의 소명이 유실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다른 공적 사회기관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안위, 사회와 세계의 안위, 우리 모두의 지속가능한 발전의 미래에 힘을 실어야 한다고 본다.

■ 알리미 발행인
정보의 질이 하락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미디어들이 산업그룹에 속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그룹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미디어를 활용하고, 어쩌면 세뇌적인 정보를 주고 있다. 때로는 페이크 뉴스를 양산하면서 갈등들을 초래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미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환기시키고 싶다. 이라크전 당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한다고 보도가 됐으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미국이 이라크에 개입할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해 주는 기사였다. 그래서 미디어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가 많이 상실됐다.
미디어가 믿을 만한 정보를 제공하는 정보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도널드 트럼프나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같은 사람들은 미디어와 싸움을 벌였다. 미디어의 신뢰도가 타격을 입었다는 것이 증명됐다. 우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는 점점 더 페이크 뉴스에 대항하는 작용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우리는 대기업 그룹에 속해 있지도 않고, 광고수익은 매출액의 1%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매체는 잘 되고 있다. 가입자들과 구독자들의 수도 늘어나고 있고, 다행스럽게도 프랑스와 전 세계적으로 점점 더 수준 있는 높은 양질의 정보를 요구하는 독자들이 많아지고 있으며, 더 책임 있는 높은 수준의 정보를 요구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나 다른 곳이나 마찬가지로 두 가지의 세력이 맞서고 있는 듯하다. 퀄리티는 점점 떨어지고, 서비스만 늘어나고, 산업그룹과 그들이 이익만 대변하는 세력이 있고, 거기에 대항하는 세력이 있다. 이성과 의지와 집결로 이에 대항하고 있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토론·조인원
경희대 총장. 미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정치학 박사. 주요 저서로 『문명충돌 현장을 가다』(2004), 『정치의 미래, 그 이상향을 탐색하다』(2008), 『정치와 정치 그리고 정치』(2012), 『내 안의 미래』(2016), 『지구의 운명: 평화로 가는길』(2018) 등이 있다.

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미국 버클리대 정치학 박사 출신으로 파리 8대학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1992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합류한 뒤 2008년 이그나시오 라모네의 뒤를 이어 발행인 겸 편집인 자리에 올랐다. 신자유주의 문제, 특히 경제와 사회,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 신자유주의가 미치는 영향과 그 폐해를 집중 조명해 왔다.

정리·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파리 8대학에서 정치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주요 저서로 『비판 인문학 100년사』, 『소사이어티없는 카페』,『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 『20세기 사상지도』(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자본주의의 새로운 신화들』,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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