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호 구매하기
당신은 용서하며 살고 있습니까?
당신은 용서하며 살고 있습니까?
  • 온라인뉴스팀
  • 승인 2018.11.20 14: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극 <고향마을> 리뷰
▲ 연극 <고향마을> 스틸컷. 사진 ⓒ 김명집

자공(子貢)이 물었다. 선생님,
한 생(生)이 다하도록 해야 할 게 있다면
그게 뭘까요. 선생은 머뭇거리지도 않고 바로 말했다.
그거? 용서하는 거야.

황지우 <지나가는 자들이여, 잠시 멈추시라> 중

크건 작건 타인으로부터 고통을 받지 않는 삶이 있을까. 일상에서 고통이 불가피하고 어느새 내면화되어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면, ‘용서'라는 단어는 숙명처럼 짊어지고 가야 할 굴레가 된다. 이와 관련된 주제가 문학의 단골 메뉴가 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연극도 마찬가지다. 가해자와 피해자로 양분되는 질곡의 근·현대사 속에서 민초들이 겪은 아픔을 다룬 연극들이 전성기를 누렸던 시절도 있었다.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초엽 문예회관 대극장 개관이래 최대 관객동원 기록을 세웠던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가 대표적 예다. 1894년 갑오동학 농민전쟁을 소재로 조정과 외세로부터 수탈당했던 이들의 애환을 그린 시대극이 당시 폭발적 관심을 끌 수 있었던 이유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드리운 그늘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오늘의 대학로 풍경은 그때와 확연히 다르다. 가볍고 트렌디한 경향이 주류를 이룬지 꽤 되었고, 가진 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제목의 간판마저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관객의 기호가 변하는 것이야 당연지사지만, 웬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지공연 협동조합이 제작한 연극 <고향마을> (소극장 공유, 2018년 11월 9일 ~ 12월 2일)은 확실히 ‘별난’ 작품이며, 줄거리마저 황당하다. 안산에 있는 아파트 단지 '고향마을' - 실제로 있다- 로 영주귀국한 세 명의 할머니, 미옥, 순영, 인숙은 우연히 재회한 국회의원 박상구가 일본과 소련에 빌붙어 자신들과 동포들을 수탈하는데 앞장섰던 조선인 반장이었다고 확신한다. 박의원을 납치한 세 할머니들은 고문을 해서라도 그에게서 자백을 받아내려 한다. 그녀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박상구가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다. 한편 이 상황을 ‘헌법기관에 대한 테러’로 간주한 경찰 지휘부는 경찰 특공대의 진입을 지시한다. 형사들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투항을 완강히 거부하는 할머니들은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이 허무맹랑한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과거사를 돌아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걸리는 것이 있다. 할머니들이 겪은 삶은 해방 직후 전국을 유리걸식한 귀국동포들에 비해 물질적으로 훨씬 나아 보인다. 게다가 이제 살 만큼 사신 분들이니, 과거의 상흔 따위야 희미한 기억 속에 묻힐 때도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극에 몰입하다 보면 얽힌 사연이 간단치 않음을 눈치챌 수 있다. 서로의 주장이 대립하는 가운데 할머니들의 생각마저 각자 달라서, 관객은 결말을 섣불리 예측할 수 없다. 그로 인해 필자가 체험한 것은 탁월한 시나리오와 빼어난 연출, 그리고 까다로운 연기를 소화해낸 배우들이 혼연일체로 빚어낸 옛 친구 - 생소화 효과 -와의 반가운 재회이다. 이는 과거의 낯선 사건을 통해 우리의 현실이 새롭게 다가서는 신기한 경험이기도 하다.

계용묵의 소설 <별을 헨다>에는 1945년 광복 후 해외에서 돌아온 이주민들의 심정을 짐작케하는 단서가 나온다.

만주에서의 생활이 차라리 행복이었다. 노력만 하면 먹고 살기는 걱정이 없었고, 산도 물도 정을 붙이니 이국같지 않았다. 노력도 믿지 않는 고국 - 무슨 일이나 이젠 하는 일이 내 일이다, 힘껏 하자, 정성껏 하자, 마음을 아끼지 않아 오건만 한칸의 집, 한 자리의 일터에조차도 이렇게 정에 등졌다.

보름 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일본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대법원에 의해 원고 승소로 확정 판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언론은 일본과의 외교마찰을 우려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피해자 당사자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은 언론이나 국가권력이 원하는 방식과 격차가 크다. 그 아픈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화해의 제스처가 아니라, 가해자 스스로 피해자가 겪은 비극의 연쇄관계를 이해하고 드러내는 방식이어야 한다. 관객들은 이 당연한 이치가 무시되어 왔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여전히 약자인 할머니들이 "나도 한번 가해자 되어보자"는 억지 푸념에 대해 우스움에 앞서 처연한 감정이 고개를 드는 것이 아닐까.

'진실과 화해' 또는 '과거사 정리' 등 귀에 익은 낱말에서 느껴지듯이, 어두운 과거사에 대한 국가의 수습책은 용서야말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덕목임을 노골적으로 설파해 왔다. 피해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쉬울 리가 없다. 이를 중재해야 할 국가는 피해자가 용서하기 위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않은 채 대리용서를 남발해 왔다. 할머니 미옥의 극 중 대사가 관객들의 폐부를 찌르는 이유는 이러한 현실이 그만큼 답답하기 때문이다.

나도 용서하고 싶어요. 잊고 끝내고 싶어요. 이게 너무 오랫동안 내 인생에 들어붙
어 있었거든요. 빨리 떼버리고 싶은데…… (허 형사를 보며) 형사 양반, 근데요, 근
데 용서라는 게요, (사이) 이게 그 문인가 싶어서 열고 들어가면, 문이 나와요, 그래
서 또 열고 들어가면 또 문이 나와…… 이게 마지막 문이었으면 하는데…… 근데
또 나와. 나가면 딱 언덕이 나오고, 아래 항구가 쫙 있고, 바닷바람 시원하게 불어
오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좁은 극장 통로를 걸어 나오며, 필자는 새삼 베르톨트 브레히트 작 <아르투로 우이의 출세>의 마지막 에필로그에 나오는 대사 - 그것이 기어나온 자궁은 아직도 임신이 가능합니다 -가 떠올랐다. 우리 현대사가 걸어온 못난 행보에 대한 기억은 진정한 청산이 아닌 단절의 길을 걷고 있으며, 그 행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 동안 쌓아온 용서만 해도 납득할 수 없는데, 우리는 어째서 하염없이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일까? 연극 <고향마을>은 진정한 의미의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비극은 언제든지 되풀이될 수 있다는 나지막한 경고로 다가왔다.

배인철, 문화평론가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온라인뉴스팀
온라인뉴스팀 lemonde100@naver.com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