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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닝구’를 입은 프레디 머큐리의 절규
‘난닝구’를 입은 프레디 머큐리의 절규
  • 성일권
  • 승인 2018.12.09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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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보헤미안 랩소디>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난닝구는 러닝셔츠의 잘못된 표현으로, 순화어인 러닝셔츠만을 쓰도록 권하고 있다. 필자와 같은 연배의 남자들에게 난닝구는 무척 익숙하다. 한 여름에 난닝구를 걸친 채 학교를 가고, 동네에서 놀고, 집에서 뒹굴었다. 손빨래도 워낙 쉬워 세수할 때 비누묻혀서 손바닥으로 쓱쓱 비비면 그만이다. 그 시절에는 난닝구는 농부, 노동자, 흔히 마주치는 거리의 행인들이 즐겨 입는 의상이었다. 난닝구는 그야말로 서민의 상징이었다. .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그룹 ‘퀸’의 리드싱어 프레디 머큐리가 절규하며 부른 노래들과 함께 그가 입은 난닝구가 아직 눈에 선하다. 왜 난닝구였을까? 그가 청바지 위에 걸쳐 입은 난닝구는 격렬한 열창과 댄스로 흐른 땀을 훔쳐내는 옷 이상의 의미를 지닌 건 아니었을까? 난닝구 차림의 그가 무대를 종횡무진 휘저으며 열창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단정하고 엄숙한 영국의 사회분위기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듯 한 그의 의미지가 오버랩된다. 퀸이 데뷔한 1973년의 시대상황은 비틀즈가 자유와 해방의 상징인 히피룩을 추구했던 1963년과는 달랐다.
 
1970년대 들어, 유럽 전역에 휘몰아친 68혁명의 잔해가 하나씩 걷어지고, 유럽은 다시 규율과 질서를 회복하면서, 유럽에는 미국 자본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미국의 상업적인 대중문화의 유입이 밀물처럼 진행되었다. 그룹 ‘퀸’의 화려한 등장은 머큐리의 개인적 스타성에 기인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시대의 상황이 그들을 호명(呼名)했다고 봐야 한다.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났으나, 유럽 밖 ‘자본주의 수호자’ 미국의 승리로 끝났고, 유럽 전역이 미국화로 치달은 것은 2차 대전의 패러독스라 할 만하다. 미국 자본주의의 승리로 유럽에서 미처 피어보지도 못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유럽 사회나 현대 사회의 ‘속성’을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해석해보려 했다. 구조주의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기존 질서에 자유와 해방을 내세우며 무력하게 저항하는 허무주의자들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완벽한 이해를 위해 형식과 텍스트를 동원해 무의식까지 해석하려 한 낙관주의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롤랑 바르트는 사회구조의 해석을 위해 패션, 문학, 광고 등 다양한 분야로까지 확장해 기호학적 상징성을 발전시켰으며, 자크 라캉 같은 이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된다"라고 말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4옥타브를 오르내린다는 머큐리의 광폭 음색과 격정적인 공연장의 분위기가 관객들의 가슴을 온통 헤집었지만, 필자의 눈길을 내내 끌었던 것은 머큐리가 청바지에 위에 걸친 하얀 난닝구였다. 당시, 유럽 학계에 유행병처럼 번진 바르트의 기호학과 라캉의 무의식적 구조화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머큐리의 난닝구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한 패션이었고, 또 그의 무의식적 내면에 깊게 자리한 그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큐리가 의식적으로 난닝구를 무대의상으로 고집한 건지, 또는 그의 전속 스타일리스트가 난닝구를 선택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의 시작과 끝부분에서 계속 클로즈업된 그의 난닝구는 단순한 의상소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사실, 필자는 영화도입 부분에서 꽤 오랫동안 노출된 그의 난닝구 패션 탓에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일상의 삶속에 그 궁금증을 성급하게 풀려했다. 영화는 관객들이 기대한대로 그룹 퀸의 구성, 해체, 재결합과정, 머큐리의 개인적인 삶의 고뇌, 그리고 퀸이 열창했던 인기곡들의 공연 무대로 이어지다가, 리드 싱어인 머큐리가 난닝구를 입고서 ‘We are the Champion'을 수십만 관객들과 떼창하는 걸로 막을 내렸다. 어느덧 아쉬움을 남기고서. 필자나 다른 관객들이나 영화에서 채우지 못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미스터리한 개인 서사를 남겨둔 것은 감독의 의도였을까?
 
아니나 다를까? 국내 뿐 아니라 해외 사이트 정보를 뒤져서 국내 언론과 열혈 관객들이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을 보면, 영국 식민지인 인도가 머큐리 부모의 고향이며, 특히 고대 페르시아계 종교로 인도에선 소수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집안출신이다. 영국의 또 다른 식민지인동아프리카 잔지바르에서 관리로 일하던 부친 밑에서 자랐고, 토착 아프리카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는 잔지바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인도 뭄바이 인근의 영국식 기숙학교에서 다녔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그래서 종족, 문화, 종교, 언어 등 모든 것이 복잡하고, 이런 다양한 문화가 뒤엉킨 배경 속에서 머큐리가 영국인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 과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만든 다문화 환경이 그를 기른 자양분이 됐다는 내용이다. 이 정도는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거의 누구든지 알 수 있는 스토리다. 이제, 전설이 되어버린 그룹 퀸의 춤과 노래가 상영시간 내내 화면 가득했고, 그래서 관객들은 감동하고 환호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더욱이 머큐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흥행의 성공은 그룹 퀸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건, 처음으로 그룹 퀸의 진면목을 접한 신세대 젊은이들이건 간에 머큐리와 그룹 퀸을 순식간에 부활시켰다. 백화점과 레스토랑, 할인마트, 카페에 들르면 거의 어김없이 들려오는 음악이 퀸의 노래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엔 늘 미담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제작자의 통찰력이 훌륭했다느니, 등장인물들이 극적이라니, 주인공의 삶이 신비적이라느니, 시나리오가 탄탄하다니, 또는 힘든 세파를 살아가는 기성세대의 옛 향수를 자극했다느니…. 그럼 그 뿐인가?
 
어딘가 허전하지 않은가? 왜 머큐리는 하필이면 전혀 무대의상 같지 않은 난닝구를 입고서 온몸을 흔들고, 전율하면서 포효했을까? 예술사가 아르놀트 하우저에 의하면, 예술과 사회는 따로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내재적 방법과 예술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기성 이론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예술 역시 지식의 한 형태라면, 어떤 지식도 사회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는 이론들을 제시하고, 사회 속의 예술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시대적으로 보면, 머큐리는 전후 미국식 자본주의의 영향 탓에 복지국가의 위기를 맞은 1970년대에 등장했다. 머큐리 노래의 가사들은 그가 뿜어내는 마성의 목소리와 달리, 사회경제적 변화에 맞선 자아정체성의 혼란이 담겨 있다.. 
 
“…엄마, 방금 한 남자를 죽여 버렸어요 그의 머리에다가 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어, 지금 그는 이제 죽었어요. 엄마, 인생이 막 시작됐는데, 지금 내가 다 팽개쳐 버린 거예요. 엄마, 우우우-울려던 건 아니었어요. 만약 내일 이맘때 내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살아계셔요, 계속 살아가셔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 
 
-<보헤미안 랩소디> 가사 일부 1975년부터 1989년까지 14년 동안 보헤미안 랩소디는 한국에서 금지곡이었다. 군부정권의 갑작스런 조치에, Mama, just killed a man이라는 가사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어머니를 호명한 뒤 '한 남자를 죽였다'고 말하는 맥락으로 봐서, 아버지를 죽였다고 판단했다는 설이 돌았다. '부친 살해'가 정권을 불편하게 했을 거라는 짐작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목의 '보헤미안 랩소디'의 보헤미아가 당시 공산국가인 체코였기 때문이었다는 후일담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많은 평론가들은 프레디가 자기 삶 속의 치열한 투쟁을 노래하고 있으며, 그래서 ‘엄마’로 호칭되는 대중에게 자신의 남성성을 살해했다고 고백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머큐리는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하며 미국에 머물렀는데 이 무렵 자신의 동성애 성향에 눈뜨게 된다. 따라서 1975년 이 노래 발표를 통해 사실상 커밍아웃을 한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 그의 성적 정체성을 전제로 한 해석일 뿐이다. 그러나 관객들이 그의 노래 중 특히 이 구절에서 많이 공감하는 것은 단순히 그의 커밍아웃 때문이었을지 의문스럽다. 어쩌면, “엄마, 인생이 막 시작됐는데, 지금 내가 다 팽개쳐 버린 거예요.”의 구절이 당시 시대상황에 절망한 젊은이들의 상처와 아픔을 표현하지 않았을까?
 
영화로 돌아가면 134분이라는 상영시간을 퀸의 노래 22곡이 꽉 채운다. 그러다보니, 머큐리가 자신이 직접 쓴 가사에 담으려 했던 시대상과 사회상이 들어갈 여지가 없어 보인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We will rock you.' 'I was born to love you.'를 비롯해서 그룹의 초기, 중기, 베스트 앨범에서 접했던 여러 노래들이 이야기 곳곳에 울려 퍼진다. 노래의 비중이 워낙 많아 그만큼 배우들이 느꼈을 법한 중압감이 컸을 법 하다. 특히 머큐리 역을 맡은 레미 말렉은 전담 코치를 두면서까지 머큐리의 제스처를 익혔고, 실제로 머큐리 노래의 상당부분을 실제로 불렀다는 얘기도 들린다. 관습과 질서를 온몸으로 거부한 실험적인 밴드였지만, 영화에서 느껴지는 퀸은 오히려 따뜻하다는 느낌이다. 이민자 가정에서 자랐고, 공항 수하물 노동자로 근근이 살아 사회에 강한 불만을 가질 법 했지만, 머큐리는 누구보다도 섬세하고 자기 성찰적 인물로 나온다. 교과서적인 음악영화의 특징이 그러하듯, 주인공은 늘 멋지다. 그러나 영화는 인간승리를 다루는 다큐가 아니다. 영화가 영화답기 위해선 기승전결의 완결미를 추구해야 한다.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밴드의 등장에는 분명히 시대적이며 사회적인 배경이 있다. 상영시간의 대부분을 관객들이 좋아하는 노래들로 채우는 배려가 너무 지나쳐, 왠지 영화가 아닌 다큐를 본 느낌이다. 무대에서 포효하는 머큐리의 난닝구가 자꾸 눈에 어른거린다.
 
글: 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파리 8대학에서 정치사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주요 저서로 『비판 인문학 100년사』, 『소사이어티없는 카페』, 『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 『20세기 사상지도』(공저)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자본주의의 새로운 신화들』,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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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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