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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제, 물신의 연중행사
한국 축제, 물신의 연중행사
  • 임도연/대학생
  • 승인 2010.09.03 2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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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에세이]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탈의 경험을 주고 그로써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는 ‘축제’는, 그 기원부터 아주 오래됐다. 인류의 문화만큼 긴 시간을 거쳐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축제는 일탈과 제의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다. J. G. 프레이저의 저작 <황금가지>(The Golden Gough·1922)에는 왕 시해 의식에서 비롯된 환락과 희열의 축제 기원 형태가 담겨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8월호에서 자크 드니는 ‘물신이 된 한여름밤의 꿈, 축제’라는 기사를 통해 점점 물신화하는 프랑스 축제의 위기를 담았다. 프랑스 문화를 기본 바탕으로 하는 <르 디플로>를 읽다보면 때때로 문화적인 차이로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만나게 되는데, 이 기사에서는 ‘문화 예외성 정책’이 그랬다. ‘문화 부문에서 세계무역기구(WTO)의 시장 개방 요구에 반대하는 프랑스의 문화정책’(1)은 한국과는 다른, 예술에 대한 프랑스의 남다른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자크 드니는 경제적인 한계 속에서 축제가 지닌 본연의 성격이 변질돼가는 현실을 지적한다. 기획자들은 축제를 유지할 수 있는 재정 지원자를 결코 무시할 수 없으며, 잠재적 관객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흥행이 보장되는 문화를 생산해낼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 대학 축제의 흥행이 각 동아리나 학생들이 보여주는 문화 공연이 아니라, 얼마나 유명한 대형급 아이돌 가수를 불러오는지에서 판가름 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두 한데 어우러진다’는 글자 그대로 축제인 ‘대동제’(大同際)의 의미는 이미 퇴색한 지 오래다. 지원금이 줄어들수록 축제는 존립 위기를 겪게 된다. 축제는 이렇게 마케팅과 예술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다. 축제라는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와 상품가치 효과를 기대하는 지원자가 있는 한 이 문제는 지속적이며 변증법적이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인생이란 아름다움을 음미할 때 비로소 살 만한 가치가 있게 된다”고 말했다. 예술이라는 것은 단지 감각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사람들의 정신을 한껏 고양시키는 것으로, 우리 삶에서 매우 가치 있는 것이다. 한 사회의 문화적 풍요도는 그 사회 구성원들의 질적인 만족도를 결정한다. 예술이라는 것은 생산과 제작, 그리고 창조의 이미지가 강하다. 이런 특성은 축제에서 잘 드러난다. 축제를 통해 펼쳐지는 그 사회의 문화 향연은 또다시 새로운 문화적 창조를 불러낸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기사를 읽으면서 내가 가장 크게 느낀 것은 기본적으로 한국과 프랑스는 문화에 대한 논의점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문화적 예외’가 축제 태동의 동의어와 다름없이 여겨지는 프랑스, 반면 우리의 축제는 어떠한가. 한국에서는 1년 365일 중 300일이 훨씬 넘는 날 동안 축제가 벌어진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한반도의 어느 구석에서 지금도 벌어지는 축제의 대부분은 지방자치를 유지하기 위한 소비적이고 의례적인 행사다. 음식, 전통, 음악, 문화, 약재 등을 테마로 한 축제의 기본 콘텐츠는 독특한 것을 찾아보기 어렵고, 그마저도 인기 있는 테마를 좇아 자주 변화한다. 이름 있는 축제와 기획에 편중된 예산 구조, 획일화하는 특성 없는 콘텐츠, 오로지 지역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한국 축제에서는 ‘문화 향유층을 넓힌다’는 허울 좋은 의도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 축제는 물신의 위기에 처한 문화를 말할 것도 없이 애초 물신 구조 위에 형성된 문화인 것이다.

그나마 축제를 통해 예술의 다양성과 인본주의적 가치를 논하는 프랑스는 아름답다. 이들은 축제의 위기 앞에 예술 후원자와의 유대, 민간 후원자 찾기 등 고유한 예술적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대안을 모색한다. 나는 우리나라의 문화 수준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자본과 정치권력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축제를 바라보며 우려와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사회, 인본주의적인 관점에서 축제의 예술적·사회적 소명을 잊지 않으려는 사회, 이벤트보다 일상의 문화적 환희를 꿈꾸는 프랑스의 높은 문화 의식이 부러운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비영리 문화대안 공간인 ‘쌈지 스페이스’나 다문화와 문화 다양성을 실험하는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의 예술실험단체 ‘스페이스 리트머스’처럼 의미 있는 시도를 하는 예술가가 있다. 그런데 이런 문화는 아직 우리 사회에선 대부분 ‘마이너 문화’로 인식되고 있다. 우리 사회 마이너들의 이런 문화적 시도들은 바로 프랑스의 축제가 가진 초기의 목적과 같다. 문화를 통한 사회 통합의 의지인 것이다. 재즈 축제 감독자 르메트르의 “제작과 창작 활동을 자극하고, 소외 계층을 대상으로 한 음악 활동, 다시 말해 공공서비스와 관련한 임무를 확대하고 있다. 예술적 모험이 필요한 축제는 지속적인 지원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에서, 프랑스인이 가지고 있는 축제의 기본 목적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다.

한 사회를 인식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은 그 사회의 문화를 알게 하는 척도가 된다. 얼기설기 얽힌 견해를 통해 우리는 그 사회의 전체적인 면모를 어느 정도 관망해볼 수 있다. 우리 축제는 아직 예술적 목적보다는 사회적·경제적 목적이 뚜렷하다. 예술과 문화는 강력한 힘을 지녔다. 예술은 가장 덜 폭력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공감시키고 그들을 이끌어내며, 때로 이것은 사회를 통합시키기도 한다. 얼마나 멋진 능력인가. 성숙한 축제문화를 키워낸 프랑스는 위기 앞에서 이제 새로운 모델을 모색하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도 본질적이고 심도 있는 문화적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때다. 거대한 자본주의의 천박한 물신 앞에서 버텨볼 문화적 신념이 생겨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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