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인가?

2018-12-31     로랑 보넬리

 

오래전부터 어떤 사회운동도 이렇게나 위정자들에게 걱정을 안겨준 적이 없었다. ‘노란조끼’ 운동의 크기, 지속 기간, 그리고 시위자들의 확고한 태도는 위정자들을 불쾌할 정도로 놀라게 했다. ‘노란조끼’ 운동 참여자들의 정치 관심사·직업·거주지·당파가 모두 이질적이라는 점이 그들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노란조끼’ 운동은 전통적인 정치조직이나 노동조합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침묵의 다수’, 즉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기를 원하고, 투표 외 또 다른 결집행위를 기대하지 않은 다양한 구성원들이 집결한 것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배링턴 무어의 고전서는 약하지만 자발적으로 조직된 이 광범위한 사회운동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설명하는 단초를 제공한다.(1) 1960~1970년 미국에서 있었던 커다란 항의 파동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교수들이 노력했는데, 이 글 역시 그 노력의 한 결과물로 우리의 관점을 변하게 만든다.

예를 들면 “왜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키는가?”와 같은 고전적인 질문을 “왜 더 자주 하지 않는가?”로 대체한다. 무어의 동료들이 반항(저항)의 원인으로 경제적 불평등이나 인종차별을 꼽았을 때, 무어는 이런 요인들은 어떠한 반항도 불러일으키지 않았고 역사 전반에 걸쳐 변함없이 존재해왔다고 반박한다. 그러므로 경제적 불평등이나 인종차별이 반항의 필수요소라면, 이것들과 반항 사이에 인과 관계를 성립시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1848년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의 독일 노동자에 대한 방대한 문헌자료 연구를 통해 무어는 경제적 빈곤층과 인종차별을 당하는 자가 그들에게 불리한 사회‧정치적 질서를 평범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를 찾고 그들을 불리한 위치에 놓은 조건들, 나아가 예외적으로 그 질서를 거부했던 조건을 찾는다. 그가 내린 주된 결론은, 안정은 절대적으로 승리한 지배자들이 허용한 수준의 보상에 기반을 둔다는 것이다. “호혜성의 개념, 또는 부담이나 의무의 평등을 의미하지 않는 용어인 도덕적 의무의 개념 없이는, 인간 사회를 영원한 권력과 속임수가 작동한 결과 외 다른 잣대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무어에게 “암묵적 사회 협약” 파기는 그가 연구하고 있는 분쟁들을 설명해준다. 무어는 종종 이 파기가 이전에 제공된 보상을 재평가하도록 만드는 기술·경제적 변화의 결과라고 강조한다. “원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엘리트층의 일부는 “기생충 같은 존재”로 드러나게 되고 그들은 정당성을 잃게 된다고도 설명한다.

이와 같은 분석이 사실인지 확인하려면, 사회학자 로버트 카스텔의 말을 빌려 “안정성을 뒤흔드는” 현대 노동자계층의 변화만 살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2) 생활조건이 악화되는 것을 경험한 직장인들의 상당수가, ‘노란조끼’ 시위대가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듯, “월말을 간신히 넘기기 위해” 싸워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이런 상황은 국가차원의 보호가 점차 해체되면서 더욱 나빠졌다. 예전의 프랑스에서는 원래 국가가 노동과 자본 사이의 모순을 완화하기 위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저비용으로 전국적으로 접근 가능한 교육, 보건, 교통, 통신, 에너지 등의 양질의 공공서비스 개발은, 적어도 1970년대 후반부터는 노동자에게 불리한 고용조건에서 최저기준을 보장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공공서비스의 이원화가 시행된 이후로 국가 개혁은 꾸준히 진행돼왔다.(3) 지역 대도시와 중소도시 또는 작은 마을에서 병원, 법원, 그리고 대학까지의 거리 차이를 측정할 수 있을까? 수익성과 경쟁력의 논리는 사회‧지역 간 불평등을 줄이려는 목적보다 우선시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공공서비스 사용자는 절망하고, 서비스 기관의 종사자는 그들의 임무가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을 보고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전에 모든 이들에게 제공됐던 보장기능이. 이제는 더 부유한 이들의 이익 독점을 위해 가동되고 있다는 느낌이 확산됐다.

이 반전은 무어가 묘사한 부당한 느낌과는 무관하게, 세금인상에 반대하는 ‘노란 조끼’ 운동의 단면을 일부 설명해준다.(4) 다만, 정부의 주요 대표자들은 이제 중재자로서의 지위를 잃었고, 경제 분야의 엘리트들은 “기생충 같은 존재”로 전락했다. 시위대로 가득 찬 샹젤리제 원형교차로에선 지난 몇 년간 비즈니스 세계에서 눈감아 준 의원들과 장관들의 (실제이든 추정이든) 생활방식, 즉 추문들, 탈세 및 배임 스캔들에 대한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12면 피에르 수숑 기사 참조).

일부 위정자들의 말은 ‘일반인’과의 사회적 괴리를 더 확인시켜주는 것만 같다. 마크롱 대통령이 2017년 7월 3일에 “기차역은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마주치는 곳”이라 말했을 때, 또는 그의 전임자가 사적인 자리에서 “치아 없는 노인”이라고 조롱했을 때,(5) 그들은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대표성을 의심의 여지없이 배반한다. 그들은 많은 국민이 깊이 느꼈을 모멸감을 격화시켰고, 국민들의 분노가 “마크롱 꺼져(Macron dégage!)”라는 슬로건으로 분출하는 데 일조했다.

모든 정치적 형성물은 신뢰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 대체할 대상도 ‘시스템’의 등에 업혀 간신히 존재한다. 이것이야말로 그 누구도 ‘노란조끼’ 운동을 제대로 규정할 수 없는 이유와 새로운 선거를 촉구하는 것 외에는 다른 출구를 제시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 불가능성은 자기조직화 및 직접 행동에 의지하는 ‘노란조끼’ 운동을 이해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시위대는 조직적, 정치적 또는 노동조합의 중재를 구하지 않으며 관습적인 항의 절차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권력의 대표자에게 직접 말을 걸기를 바란다. 시위자의 일부는 엘리제궁과 도청 주위를 직접 둘러싸는 데 동원된다. 우선 시내 요충지들을 막고, 그 다음은 원형 교차로, 출구나 고속도로 톨게이트, 연료저장소나 국경을 통제한다.

집단적 목소리에 시달린다는 이유로 중재도 없이, 이들을 직접 저지하기 위해 경찰(공권력)을 배치하는 행위는 이 시위의 폭력성을 설명한다. 특히 파리에서는 단련된 군사들이 경찰과 함께 시위를 진압하고 건물 파손에 가담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언론은 정부와 마찬가지로 “자치적 무정부주의자”와 극우파 집단을 동시에 강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시위의 규모나 정의를 따랐던 사람들만 보아도 이번 시위가 그 두 집단에 국한돼 발생한 사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르퓌앙블레에서의 큰 화재, 라 시오타 지역 또는 나르본 지역의 통행료, 또는 작은 마을을 포함한 프랑스 전역에서 일어난 폭력적인 논쟁의 탓을 그들에게 돌리는 것 역시 어려워 보인다.

몇 년 전, 한 고위 관리자는 폭력의 성격에 대한 인터뷰를 하면서 “초기 폭력의 수준을 설정하는 것은 우리 기관이며, 우리가 수위를 높일수록 시위자 역시 수위를 높인다”고 말했다. 우리는 최근 몇 주 동안 채택된 전략들, 즉 대규모 체포(12월 8일 하루에만 1,723명), 물대포, 장갑차, 헬리콥터, 심지어 기마병까지 동원하거나 최루가스 수류탄 사용한 것(12월 1일에 1만 명 이상의 파리 시민에게), 고무총의 반복적 사용 등이 긴장상태를 조금도 진정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전술적 선택은 프랑스 경찰과 헌병대의 “찬란한 고립”에서 유래한 것으로,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단계적 긴장완화를 추구해 개발한 기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선택으로 보인다.(6) 20년간의 공공안보 정책은 권력과 자치권을 상당 수준 성장시켰다. 테러리즘, 사소한 범죄 또는 작은 도시 폭동을 막기 위한 그들의 전문성을 확신하고 때로는 “자연스럽게” 다른 맥락과 목표를 향해 기술을 배치할 수도 있다. 망트라졸리에서 수십 명의 고등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손을 머리 뒤로 한 채, 무릎 꿇고 있는 사진들은 우리에게 충격을 줬다. 그러나 이는 일부 인구가 많은 도시에서 상대적으로 쉽게 볼 수 있는 관행이다.

이런 강력한 전략과 장치들은, 정치적으로 선호되는 “단호함, 결단력”을 증명해낼 기회로 여기는 대부분의 선출직 공무원들이 적극 이용한다. 그러나 곧 그들은 폭력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기 위해 떠나고, 언제나 파괴와 대결의 이미지를 열렬히 좋아하는 미디어의 탐욕스러운 보도로 폭력의 책임은 “파괴자”에게만 전가된다.

위정자들은 아마도 이런 행동이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재앙적인 영향을 미칠지 측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경찰의 방패와 곤봉, 그리고 즉시 출두 명령을 내릴 법정에 의해 그들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들의 권력이 ‘불멸의 힘’이라고 굳게 믿는다. 바로 이 부분이, 무어 이론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글·로랑 보넬리 Laurent Bonelli
파리-낭테르 대학교 정치학 전임강사

번역·문보배
한국외국어대 불문학과, 동 대학원 정치외교학 석사 졸업.

(1) Barrington Moore Jr, Injustice: The Social Bases of Obedience and Revolt(불의, 복종과 저항의 사회적 기반), M. E. Sharpe, 뉴욕, 1978년.
(2) Robert Castel, Les Métamorphoses de la question sociale. Une chronique du salariat(사회적 의문의 변환, 임금노동자의 연대기), Fayard, coll. L’espace du politique, 파리, 1999년.
(3) Laurent Bonelli et Willy Pelletier, ‘De l’État-providence à l’État manager(민영화를 위한 군국주의 방식의 역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09년 12월호; L’État démantelé. Enquête sur une révolution silencieuse(침묵의 혁명에 관한 조사), La Découverte, 파리, 2010년 자료를 참고하라.
(4) Alexis Spire, ‘Aux sources de la colère contre l’impôt(그들이 세금에 분노하는 이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8년 12월호.
(5) Valérie Trierweiler, ‘Merci pour ce moment(이 순간을 감사하라)’, Les Arènes, 파리, 2014년에서 인용.
(6) Olivier Fillieule et Fabien Jobard, ‘Un splendide isolement. Les politiques françaises du maintien de l’ordre(찬란한 격리, 프랑스 정치 정책)‘, <La Vie des Idées>, 2016년 5월 24일, https://laviedesidees.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