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을 비난하면서 원인을 외면한다면?

2018-12-31     다니엘 자모라 | 사회학자

‘빈익빈 부익부’라는 사실에서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두 개의 해법을 이끌어낼 수 있다. 자본주의 모순의 완화, 그리고 부의 공유. 관련 논쟁이 20세기 내내 이어지다가 ‘월가를 점령하자’는 오큐파이(Occupy: 점령) 운동의 슬로건에 재등장했다. 불평등에 관한 공공 담론 역시 이야깃거리가 많다.  
 

2013년에 출간돼 전 세계에서 2,500만 부가 판매된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의 엄청난 성공 이후, 불평등은 우리 시대의 중대한 윤리적 문제가 됐다. 미국에서는 칼 마르크스가 아마존 내 베스트셀러 저자에 올라있고, 2010년에 선보인 미국의 좌파 잡지, 자코뱅은 현재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같은 유행이 마르크스의 이념 및 사상과 얼마나 일치할까? 사실상, 19세기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던 ‘소득 불평등’ 개념이 공개토론의 핵심주제가 되면서, 사회정의를 바라보는 우리의 사고방식이 상당히 빈곤해졌다.(1)

이런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사회주의 고전 중 하나인 『자본론』을 읽어보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겠지만 독일 철학자의 위대한 걸작에 ‘불평등’이라는 용어는 5번도 채 등장하지 않는다. 19세기 말까지 그 어떤 사상가도 개개인을 한 축에, 총소득을 다른 축에 놓고 분배를 측정한 적이 없다. 그때까지는 개인 간 차이보다는 계층 간 차이, 그리고 생산요인이 중요했었다. 이탈리아의 사회학자 빌프레도 파레토(1848~1923) 덕분에 불평등을 측정하는 근대적인 도구가 탄생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문제는 개인별 소득분배 방법이 아니라 시장에서 자유로운 사회를 고려하는 것이었다.

 

위험도, 자원도 공유한 ‘덩케르크 정신’

그것이 생산, 노동, 혹은 더 일반적으로 인간관계이든, 경제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칼 폴라니가 명명한 ‘시장 사회’는 시장이 사회 질서를 만들도록 허용하는 한(그 반대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됐다. 이런 유형의 사회는 정치적 논쟁에서 자원분배 문제를 제거했으며, 사회적 거래 그 자체로서의 성격도 변화시켰다. 따라서 사회학자 리처드 티트머스는 ‘덩케르크 정신’(1940년 5~6월 프랑스 해안에 고립된 영국육군 병사들을 일반인들의 요트와 어선들까지 나서서 구출한 작전을 기리는 표현으로, 덩케르크 철수 작전은 영국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중대사건)(2)을 복지국가의 목표로 고취하고 보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티트머스는 덩케르크 정신에서 향후 도래할 ‘관대한 사회’의 씨앗을 봤다. 그는 1940년 여름 덩케르크 작전으로 “사람들의 생각이 변화했고, 가치도 변화했다. 위험을 공유해야 했던 만큼, 자원도 공유해야 했다”고 썼다. 그렇지만 이런 새로운 질서는 단지 소득의 재분배에 그치지 않고,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복지국가 이론가인 윌리엄 베버리지가 전쟁이라는 상황을 넘어서서 사회적 연대를 증진하기 위해 1942년에 제출한 그 유명한 베버리지 보고서에서 5대 ‘사회악’(빈곤, 불결, 질병, 무지, 실업)이라고 칭하게 될 문제들을 해결할 민주적 기관 설립을 목표로 했다.

결과적으로 ‘덩케르크 정신’은 특히 국민의 보편적인 사회적 권리(건강, 교육, 노동, 주거 등)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의 역할을 대폭 확대하게 한다. ‘자유방임주의’에 반대되는 국가의 이 같은 혁명적인 변화는 1880년대에 독일(당시 프로이센-역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수상이 시행한 사회법과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소련에서 대규모로 진행된 국유화 사이의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이에 따라 거대한 사회보장제도의 재원 마련을 위해 갹출되는 임금의 비중이 높아졌다. 부유층에게 적용되는 높은 세율은 새로운 ‘공공재산’의 토대를 형성하는 공공서비스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사용된 이 개념은, 지주들이 시민권을 독점했던 사회를 분열시키는 내전의 위협을 피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공공재산은 기존의 사유재산과 달리, 비소유자에게 사유재산 영역에 직접 속하지 않은 유형의 자원, 사회적 목적에 부합하는 공유 재화·용역에 접근할 권리를 부여한다.(3) 

그러므로 복지국가는 개인의 사회적 재생산을 민주적 요청의 연장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시각은 많은 경제학자들이 20세기 초반, 현금지원보다 공공서비스를 중요시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자유방임주의’가 국민의 물질적 재생산 보장에 실패하면 국가가 나서야 한다. 따라서 1950년 영국의 사회학자, 토마스 험프리 마샬은 “기본적인 평등이 경쟁시장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창출되거나 보호받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이 같은 새로운 이해가 세계 전역에서 장려될 것이다. 1944년 국제노동기구(ILO) 필라델피아 총회에서 채택된 ILO의 목적에 관한 필라델피아 선언은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며 ‘사회보장 확대’를 기본 목적으로 제시했다. 그러므로 산업화된 국가들 외에 탈식민지 국가의 지도자들, 즉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총리, 가나의 크와메 응크루마, 세네갈의 레오폴드 세다르 생고르 대통령 등은 “복지국가가 제국주의 세계의 경계를 넘어서게 만들 것”이라고 약속했다. 

 

시급한 문제는 불평등인가, 빈곤인가

오로지 빈곤문제에만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사회정의에 대한 생각을 재구성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미국에서였다. 1962년 3월 사회주의 운동가 마이클 해링턴은 그의 베스트셀러,『또 다른 미국(The other America)』에서 복지국가의 정책들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해링턴은 1930년대 미국 내 빈민층은 사회적 기득권층의 그늘에 가려져 정책적 소외를 겪었다고 기술했다. 사회보장 제도나 최소임금제뿐 아니라 노동법, 노동조합은 빈민들에게 아무런 혜택이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빈민층을 사회에서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봤다. 해링턴은 빈곤 문제를 노동 및 시장 문제와는 분리해 접근해야 할 특수한 문제로 이해했다. 당시의 빈곤은 임금 관계를 중심으로 풀어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19세기의 빈곤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고 봤던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의 접근’은 결국 빈곤을 하나의 특정 사안으로 이해해야 함을 의미했다. <뉴요커>의 드와이트 맥도널드가 1963년 해링턴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밝혔듯, “부의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그 자체로 중대한 사회문제가 아니다. 빈곤이 심각한 사회 문제다.”(4) 이제 사회안전망을 보편화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최저소득을 정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가 될 것이다.

 1970년대 초 ‘빈곤 문제’가 가시화되자 (미국은) 사회적 정의를 화폐의 공급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한편, 그 누구도 일정 한계선 이하의 급여를 받지 않도록 하는 최저임금을 규정하게 되자, 오히려 임금 상한선이나 시장의 불가침 영역에 관한 그동안의 논의가 급격히 식어버리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 시점에 통화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내세운 보편적 사회보장제도 및 부(負)의 소득세(nagative income tax, 또는 음의 소득세)(5)와 같은 제도가 고위 관료들과 정부의 눈길을 끌면서 빈곤 해결의 직접적인 열쇠로 떠오르기에 이른다.

프랑스의 경우, 후일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텡 정부와 프랑수아 미테랑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맡게 되는 리오넬 스톨레뤼 재무부 자문관이 빈곤에 초점을 맞출 경우 자유시장 체제 안에서 유일하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회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프리드먼도 그런 정책이 ‘시장을 통해 운영된다면’ ‘시장을 왜곡시키지도, 그 기능을 방해하지도 않는다’고 밝힌다.(6) 이 새로운 사회정책 구상에서 시장메커니즘과 가격체계 보전이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원치 않는 상황으로 이끌 경우 우선적인 해법은 국가의 개입보다는 현금지원이 돼야 한다.

존 F 케네디,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고 1968년 세계은행 총재가 된 로버트 맥나마라는 이 방법을 국제기관들 사이에 급속히 전파했다. 이제 빈곤 퇴치 전략은 부의 재분배가 아닌 “빈곤층이 가진 성장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됐다.(7) 이에 대해 역사학자 새뮤얼 모인은 “사회정의는 세계화되는 동시에 최저한계선에 맞춰졌다”라고 말하며, 최저한계선은 그 누구도 빈곤의 늪에 빠질 수 없게 하는 동시에 탈식민주의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평등주의 담론’에 단호히 저항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된다고 봤다.(8)

1980년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국제연합(UN)은 맥나마라의 해결방식을 따라 했다. 예전에는 시장에서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구상됐던 사회정의가 이제 모든 사람들이 시장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개입책이 되게 된다. 

공개토론의 지배적 주제였던 불평등의 긴 공백은 2008년 금융위기로 끝났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오큐파이 운동(2011년)과 ‘우리는 99%다’ 슬로건은 수십 년간 진행된 소득과 부의 극단적 양극화 현상에 대한 반발로, 이 문제를 부각시키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역사가인 페드로 라모스 핀토가 지적했듯이, 이 성공이 엄격한 양적, 통화적 정의를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이 주제를 공개 토론에서 다시 다루는 것은 빈곤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개선된 상황임은 틀림없지만, 정치적 범주와 관계보다는 스스로 개인적인 특성에 한정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원인을 찾기보다는 그 결과를 비난하려고’ 애쓴다.(9)

이제 우리는 어떻게 불평등을 바라봐야 하는가? 두 개의 고전적 대답은 두 개의 대립적인 정치적 지평을 열어 준다. 결과에 한정해, 즉 엄밀하게 소득격차에 초점을 맞춘 첫 번째 안은 통화 차원에서 빈부 격차를 감소시키면서 평등으로 이끈다. 결국 경제적 경쟁은 여전히 치열하지만 아무도 물질적 결핍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이 오게 될 것이다. 19세기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자유주의경제에 따르는 문제로서만 불평등을 인식했기 때문에 이런 세상은 상상하지 못했다.

두 번째 구상은 보건, 교육, 교통, 에너지 등 재화·서비스의 민주화와 비상품화를 통해 평등을 이루려는 시도다. 모든 사람이 삶의 필수요소에 접근하는 것을 공유화하고 시장에 대한 의존성, 따라서 불평등의 원인인 메커니즘에 대한 의존성을 줄이는 세상이다.(10) 가장 온건한 개혁파들도 오랫동안 매우 비현실적으로 여겨온 방법이다.

물론 소득불평등의 완화라는, 이 소박한 목표도 성취하기 힘든 시점에, 그 이상의 것을 주장하는 이유가 궁금할 수 있다. 그렇지만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특히 우파에서 다시금 대대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들고 나섰다. 이처럼 중대한 변화 속에서 좌파는 시장의 이상향을 넘어 세계에 대한 과감한 비전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위대한 이상의 힘은 단지 일부 패를 다시 돌리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게임의 법칙을 바꾸려는 데 있다. 보다 덜 개인주의적이고, 보다 더 우애 있는 미래에 대한 이런 비전은 1942년 12월 베버리지 보고서에 공표됐다.

사람들은 이 무미건조하고 전문적인 보고서를 사기 위해 추위 속에서도 줄을 섰고, 결국 63만 5,000부가 팔렸다. 베버리지는 “세계사에서 혁명적인 순간은 땜질을 하는 시기가 아니라 혁신을 위한 시간”이라고 기록했다.  

글·다니엘 자모라 Daniel Zamora
브뤼셀 자유대학교 국립과학연구기금(FNRS) 사회학과 연구 담당. 저서로『푸코와 신자유주의(Foucault et le néolibéralisme)』(Aden, Bruxelles, 2019) 등이 있으며, 마테오 알라뤼프와 『보편적 (복지) 수당에 반대한다(Contre l’allocation universelle)』(Lux, Montréal, 2017)공동 편찬을 주도했다.

번역·조승아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Pedro Ramos Pinto, ‘Inequality by numbers: the making of a global political issue?’, in Christian O. Christiansen and Steven B. Jensen(under the direction of), ‘Histories of Global Inequality’: New Histories, Palgrave, London, 출간 예정.
(2) Antoine Capet, ‘L’esprit de Dunkerque, quand l’élite cède…(덩케르크 정신, 엘리트가…)’, ‘In ‘Royaume-Uni, de l’Empire au Brexit(영국, 제국에서 브렉시트까지)’, <Manière de voir>, n° 153, 2017년 6~7월.
(3) Robert Castel, ‘La propriété sociale: émergence, transformations et remise en cause(공공재산: 출현, 변형, 재검토)’, <Esprit>, no 8-9, Paris, 2008년 8-9월.
(4) Dwight Macdonald, ‘Our invisible poor’, The New Yorker, 1963년 1월 19일.
(5) 1940년대 초반 프리드먼이 제시한 부(負)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NIT)는 보편적 (복지) 수당의 변종이다. 모든 국민에게 동일한 소득세율과 소득세 면제기준, 정부보조금 비율을 적용해 면제기준에 미달한 소득자는 그 차액에 비례해 정부보조금을 받고, 면제기준을 넘으면 세금을 낸다.
(6) Milton Friedman, ‘The distribution of income and the welfare activities of government’, Conference at Wabash College, Crawfordsville(Indiana), 1956년 6월 20일.
(7) Rob Konkel, ‘The monetization of global poverty: the concept of poverty in World Bank history, 1944~90’, <Journal of Global History>, vol. 9, no 2, Cambridge, 2014년 7월.
(8) Samuel Moyn, ‘Not Enough: Human Rights in an Unequal World’, Harvard University Press, 2018년.
(9) Pedro Ramos Pinto, ‘The inequality debate: Why now, why like this?’, Items, Social Science Research Council, 2016년 9월 20일, https://items.ssrc.org
(10) Bernard Friot, ‘En finir avec les luttes défensives 방어적 투쟁을 끝내자 - 기업은 더 이상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7년 11월호․한국어판 2017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