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칼레도니아의 실패한 ‘독립’ 시도

2018-12-31     장 미쉘 뒤메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남태평양에 위치한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프랑스명 누벨칼레도니)가 독립 주민투표를 통해 그냥 프랑스령으로 남기로 했다. 뉴칼레도니아 유권자 17만4000여 명이 참여한 지난해 11월 4일 독립 찬반 투표 결과 투표자 56%가 독립에 반대했다. 호주 동부 해안에서 1500㎞ 떨어진 작고 잠잠해 보이는 섬 뉴칼레도니아에서 왜 독립투표가 실시됐을까.

 

“뉴칼레도니아가 완전한 주권을 가지고 독립적인 국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2018년 11월 4일, 누메아 조약에 따라 첫 번째로 시행된 독립찬반 주민투표의 질문이었으나 주민들은 현상유지를 원했다(1998년에 체결된 누메아 조약은 2018년 말까지 독립을 위한 주민투표를 시행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역주). 뉴칼레도니아의 주민들은 30년째 보류 중인 독립문제보다 훨씬 시급한 것은, 정치권이 해결하지 못한 각종 사회악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로열티제도에서 가장 큰 섬인 리푸 섬. 대형 여객선들이 상탈 만에 닻을 내리자, 백여 명의 관광객들이 쏟아져 나온다. 대부분은 호주인들로, 한 여행사에서 이들을 바로 데려간다. 코코넛 워터, 번려지(석가) 주스, 수공예 체험, 가이드 투어, 카나크 전통춤 등이 이어진다. 독립 찬반투표가 3주 남은 시점이지만, 주민들 간에 긴장감이나 설렘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관심이 많은 것도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지방 원주민 구역 웨트르의 개발 위원회에서 일하는 베티 코드르가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는 이미 독립적으로 잘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11월 4일은 그저 또 다른 하루일뿐입니다.”

그러나 마을 대표인 36세의 장-밥티스트 위케이네소 시아즈는 조심스럽지만 강한 어조로 말했다. “독립은 당연히 중요합니다. 투표는 반드시 해야 합니다. 수많은 선조들이 학살당했던 과거의 기억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뉴칼레도니아의 경우 부족 내의 합의를 중요시하는 문화가 남아 있어, 국가 전체의 대표보다 마을 대표가 오히려 영향력이 더 크다.

몇 개월 전 여론조사에서도 ‘반대’가 우세하게 나타났고, 찬성과 반대 간의 격차는 예상보다 훨씬 더 컸다. 뉴칼레도니아의 원주민 카나크인들은 현재 총 주민 26만 8,000명 중 39%로, 절반에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독립찬성론자들이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현상이다. 불과 30년 전, 많은 주민들이 독립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불사했었다. 그런데, 이런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선, 1988년에 마티뇽-우디노 조약, 1998년에 누메아 조약이 체결된 이후 지난 30년간 셀 수 없이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면서 뉴칼레도니아의 사회적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프랑스는 뉴칼레도니아에 포괄적인 자치권을 보장해줬으며, 북부 주와 섬들, 주로 카나크인이 거주하는 지역들을 개발하기 시작했다.(1) 도로, 수도, 전기시설들이 마련되고 고등학교와 병원이 세워졌다. 대졸자의 비율은 5배로 늘었고, 특별 교육프로그램 덕분에 1,700여 명의 주민들이 한층 나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혼란스럽다. 독립반대 정당들이 주장하는 자치권 보장과, 독립을 지지하는 사회주의민족해방전선(FLNKS)이 내세우는 독립-연합의 개념은 언뜻 보기에 별 차이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4년에 FLNKS는 누메아 조약의 파기를 ‘주요 가능성 중 하나’로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2) 독립 반대론자들은 주민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준다. “독립을 하면 바누아투처럼 될지도 모릅니다.” 바누아투는 1980년 독립 이후 물가가 치솟고 구매력이 하락했다. 반면 독립에 찬성하는 이들은 에밀 쿠에의 자기암시법을 통해 주민들을 안심시키려 노력한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입니다.”

 

“독립 찬성론자들은 현실을 모르는 부르주아”

유럽 혈통이거나 혼혈인 백인들(Caldoche)의 의견은 달랐다. 본섬의 중부에 위치한 부라이에서 공사현장 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제라르 베르니에르는 자문했다. “사람들은 왜 다른 것을 원하는 걸까요?” 그의 딸인 오렐리는 32세의 교사로 프랑스에서 유학 중인데, 고향을 방문할 때마다 너무나 발전돼 ‘예전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음을 아쉬워한다’고 했다. “우리는 굉장히 운이 좋은 겁니다. 다만 그 과정이 길고 지루할 뿐이지요.” 카나크인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보 지역에서 티에타 부족의 교사이자 시인으로 활동 중인 레오폴드 흐나시팡은, 많은 이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이곳 사람들은 계산적이고 주도면밀한 카나크인들입니다.” 마음속으로는 당연히 뉴칼레도니아의 독립을 원하지만, 겉으로는 뉴칼레도니아가 독립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UN에 따르면, 구매력 평가 기준 1인당 GDP는 뉴칼레도니아가 본국인 프랑스에 비하면 29% 적지만, 바누아투의 11배, 피지의 3배, 파푸아뉴기니의 8배나 된다.

주민투표일에 ‘낚시나 하러 가자’고 제안하는 극좌 성향의 노동당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정당들은 ‘공동 운명’을 토대로 작성된 누메아 조약의 과정들을 준수하자는 입장이다. ‘공동 운명’이란, 국적보다 더 중요한 뉴칼레도니아의 시민권을 위해서는 어두운 과거를 잊고 모든 부족들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 일종의 주문과도 같은 문구다. 오늘날 뉴칼레도니아 인구의 절반은 완곡하게 ‘사건’이라고만 언급되는 1980년대의 내란 상황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나라가 조용하고 평온하기만을 바랄 뿐이며, 이런 현상유지에 대한 바람이 뉴칼레도니아의 독립에 소극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든다.

과거에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을 신봉했고 현재는 강력하게 독립을 주장하고 있는 카나크자유당(Palika)의 창당 멤버 엘리 푸아군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난 30여 년 동안 백인들, 카나크인들, 그 밖의 공동체들은 뉴칼레도니아가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좀 더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공동의 입장을 유지해 왔습니다.” 1998년부터 인권동맹(LDH)의 지역 책임자로 있는 푸아군은 최근 학교와 방송국들을 오가면서 주민투표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그는 카나크인들 중 1960년대에 대학에 입학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푸아군은 젊은 시절 교사로 일할 당시 ‘원숭이(문맹률이 높은 카나크인들을 비하한 표현-역주)가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는 낙서를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뉴칼레도니아의 가치들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푸아곤은 당연히 독립에 ‘찬성’ 표를 던질 예정이지만, 만약에 ‘반대’ 측이 승리한다 할지라도 그리 슬프지는 않을 것 같다고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누메아 조약이 끝나기 전까지 주민투표는 2020년과 2022년에 두 번 더 치러지게 된다. 푸아군은 덧붙였다. “프랑스와의 관계를 단번에 끊을 수는 없습니다. 지도를 보면, 뉴칼레도니아는 다른 큰 국가들과 비교하면 먼지만큼이나 작습니다. 우리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경쟁력이 있습니다. 프랑스 정부도 우베아 학살 사건(1988년 5월에 뉴칼레도니아의 독립을 주장하던 19명과 경찰 6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 이후에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푸아군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 투표가 부결될 것으로 예상한 이유들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제도적 문제에 대한 무능력함과 나태함이 30년째 정치권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주민투표를 시행하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결정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 주민투표를 20년 전에 해야 했습니다.” 칼레도니아 연합(Union Calédonienne) 정당의 로쉬 와미탕이 지역 선거 회의를 끝내고 나오면서 말했다. 그는 과거 FLNKS의 수장이었을 당시 1998년 누메아 조약에 서명했다. “그때도 투표는 부결됐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누메아 조약의 협상은 그대로 진행됐을 겁니다.”

일부는 주민투표에 참여하라는 캠페인이 의미가 없다고 불평한다. 풍자적 성향이 강한 지방신문 <Le Chien Bleu>는 뉴칼레도니아의 정치인들이 너무 나이가 많고 ‘사건’이 발생한 이후로 전혀 개혁의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며 비꼬았다. 우리가 만난 수많은 유권자들도 정치인들의 연령과 극도로 분열된 정치권 상황을 꼬집었다. 독립 찬성론자들에 대해서는 너무 부르주아적이고 현실을 잘 모른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개혁은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자동차를 사고,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본국인 프랑스를 무료로 여행할 수 있게 됐다. 비종교적활동연맹(FOL)의 대표를 지낸 파스칼 에베르는 이를 ‘투쟁으로 얻어낸 연금’이라고 표현했다.(3) 카나크인 출신의 연출가 피에르 고프는 자신의 최신작인 『저는 백지 투표를 합니다』를 통해 이런 모습들을 그려내면서 투표 참여를 독려했다. 그는 아직 어느 쪽에 투표할 것인지를 정하지 못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정책은 약합니다. 앞으로 나서려는 지도자도 없습니다. 정치인들은 너무 늙었고, 그나마 정치적 활동을 이어가는 이들은 프랑스 의원들뿐입니다.” 이 작품에서 고프는 카나크인들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 예이베네 예이베네를 등장시켰다. 그는 FLNKS를 이끌었던 장-마리 티바우의 오른팔이었으며, 1989년 티바우와 함께 암살됐다.

 

식료품 가격은 73% 높고, 임금은 20% 낮아
 
“우리는 독립 문제에만 너무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지긋지긋합니다.” 동쪽 연안에 위치한 쿠아우아의 시장(프랑스칼레도니아연대-공화당)인 알시드 퐁가는 카나크인이다. 그는 설명했다. “나이가 든 것은 정치인들이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는 정치적 문제들입니다.” 누메아 북쪽의 시지엠 킬로메트르 구역에 살고 있는 30세의 케빈 롤랑은 현재 마트의 캐셔로 일하고 있다. 단기 계약직을 전전하고 있는 그에게 생계 이외의 것을 고민할 여유는 없다. 배고픈 예술가인 키담은 시인이자 래퍼로, 친구들과 만든 영상에서 ‘Demain(내일)’을 노래하며 혼혈인과 상부상조 정신이 인정받는 미래를 꿈꾼다. “당신과 함께, 우리와 함께….” 그는 투표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투표에 관심이 없습니다. 투표 결과에 따라 ‘우리의 일상과 현실이 어떻게 달라질지’를 궁금해할 뿐입니다.”

이 현실은 라디오 아침방송의 단골 소재다. 뉴칼레도니아의 물가는 프랑스보다 평균 33% 비싸고 특히 식료품의 가격은 73%나 높지만, 평균 최저임금은 20% 낮다.(4) 게다가 10월 초부터 징수하기 시작한, 부가가치세와 유사한 일반소득세 때문에 물가는 더욱더 올랐다. 일부 상인들이 다른 세금들을 일반소득세로 대체하는 대신 기존 가격에 일반소득세를 더해서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육의 실패와 높은 문맹률도 문제다. 인구의 33%가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5) 뿐만 아니라 집을 구하고, 교통수단을 이용하고, 전문직 종사자가 되기도 쉽지 않다. 누메아 변호사 100명 중 3명, 대학교수 100명 중 3명만이 카나크인이다. 그밖에도 원주민들을 향한 무례한 언행이나 불안한 치안 등도 문제로 지적된다.

그러나 오후에 열리는 경범죄 재판에 참석하면, 판결을 내리는 쪽은 대부분 백인이고, 판결을 받는 쪽은 대부분 흑인임을 눈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직접 확인하고 나면, 원주민들과 도시빈민 구역 거주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왜 형성됐는지를 알 수 있다(오늘날 카나크인들의 40%가 본섬의 누메아에 살고 있으며, 이는 누메아 인구의 1/4에 해당한다). 여성들에 대한 범죄, 경찰차에 돌을 던지는 행동, 만취한 상태로 무기를 휘두르는 행위 등 뉴칼레도니아에서는 음주와 관련된 사건 사고로 작성되는 조서가 매년 5천 건 이상이며, 이는 프랑스 전체 조서의 20%를 차지한다. 마트의 주류 판매대도 어떤 날 어떤 시간에 방문하면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있다. 

경범죄는 언론을 통해 거의 매일 보도되고, 대화의 단골 주제가 된다. 1인당 차량침입과 자동차 절도사건의 수는 프랑스의 2배에 달한다. 누빌 반도 소재의 동부교도소는 과밀상태로, 수감자들의 95% 이상이 카나크인이다. 게다가, 미성년자 비율이 상당히 높다. 보건소, 공공기관, 상점의 침입과 절도는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한밤중에 차량을 향해 총탄이 발사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점들 때문에, 독립반대론자들은 “주민투표로 독립이 결정되면 범죄가 더 늘고 치안은 더 나빠질 것”이라 우려한다.

사회복지사들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실업률은 높고(2017년 기준 11.6%), 청년취업을 돕는 사회적 장치도 없다. 그리고 사회연대보조금(RSA) 등 최소한의 사회보장제도는 장애인들과 노령자들에게만 적용된다. 사회 불평등은 민족 갈등으로 이어진다. 뉴칼레도니아의 소득격차는 본국인 프랑스의 2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뉴칼레도니아의 경우 상위 10%의 소득은 하위 10%의 소득의 약 7.9배나 된다.(6) 뮈리엘 기유는 설명했다. “소득격차가 이렇게 커지면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빈곤층은 자신들이 배려받지 못하고 차별받는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기 어려워집니다.” 누메아에서 샌들을 신고 고속도로 갓길을 걸어 빈민촌으로 들어가는 이들을 보면 피부색이 비슷비슷하다. 이에 푸아군은 말했다. “혁명이 또 한 번 일어난다면, 그것은 독립을 위한 혁명이 아니라 사회적 혁명일 것입니다.”

“만약 학교가 사회적 계급을 고착화하는 기계로 전락해버린다면, 카나크인들은 앞으로도 평등을 요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경제학자인 사뮈엘 고로우나는 단언했다. 올해 31세인 고로우나는 뉴칼레도니아 대학교의 몇 안 되는 카나크인 교수다. 그는 북부 주의 주도인 코네의 포인다 부족 출신으로, 현재 고로우나의 고향에는 도시화를 위한 공사가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고 2019년에는 뉴칼레도니아 대학 분교가 들어설 예정이다. 그는 어린 시절 형제들과 살았던, 벽토나 철로 된 가건물의 흔적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소년시절을 회상했다. 책상은 당연히 없었고, 손전등으로 불을 밝혔다. 1990년 전에는 수도시설도 없었고, 1994년 월드컵 때 처음으로 TV를 봤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페이스북과 3G 서비스까지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종종 잊어버리는 사실이 있습니다. 뉴칼레도니아가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한 세대 만에 식민지의 후유증이 모두 치유될 수는 없습니다.” 니콜라 퀴르토비치는 말했다. 누메아의 도카모 기독교 사립 고등학교의 교장을 지낸 후, 현재 작가로 활동 중인 그가 말했다. “도시에는 점점 혼혈인들이 늘고 있고, 사회적 변화는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큽니다. 우리는 분명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퀴르토비치는 거리, 학교, 영화관에서 사회적 통합의 현주소를 가늠해볼 것을 제안했다. “도카모의 경우 1989년에는 카나크인 교사가 단 한 명이었지만, 이제는 50명 중 15명이 카나크인입니다.” 그러나 고등법무관에 가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국가 전체적으로 ‘사회적 통합’이 이뤄졌다고 말하기는 아직 어렵다. 인종차별주의는 소셜네트워크상에서도 나타난다. 공동체 간의 갈등도 언제든지 재발할 여지가 있다. 10월 초 그랑드 테르의 북부에 위치한 우에고아에서는 백인들(Caldoches)의 반대로 FLNKS의 집회가 무산되기도 했다.

 

차별은 피부색이 아닌 구매력에서 온다

퀴르토비치는 이어 말했다. “오늘날 식민지 문제는 사회적 문제로 대체됐습니다. 이제는 피부색이 아니라 구매력이 차별의 원인입니다.” 카나크인 신부이자 누메아 교구의 보좌주교인 로쉬 아피카우나도 이런 의견에 동의했다. “지난 30년간 많은 것들이 바뀌었습니다. 그렇지만 자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우리가 먹는 방식, 입는 방식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스템 내에서 결정됩니다. 우리가 현 상황에 충분이 만족하고 있는데 굳이 바꿀 필요가 있을까요? 식민지 시스템은 이미 지나갔고, 이제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누메아의 르메르디앙 호텔 앞에서, 카나크인들도 책임자 직위에 오를 수 있게 해달라고 시위하던 카나크 노동자 조합(USTKE)의 활동가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난 50년 동안 뉴칼레도니아의 상황을 가까이서 지켜본 프랑스의 고위 공무원 미쉘 르발루아는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누메아 조약에 명시된 ‘공동 운명’을 실천하기 위해 자치권 강화 정책이 도입됐지만, 완전한 주권에 접근하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만, 비(非)카나크인들을 중심으로 식민지적 상황이 굳어졌을 뿐이다.”(7) 누메아 조약으로 자치권을 얻게 된 데 크게 만족한 나머지, 주민들의 3/4이 거주하고 있으며 대부분 백인들로 구성된 남부 주가 사실상 뉴칼레도니아를 장악하게 됐다는 것이다. 

니켈 가격이 계속해서 오르락내리락하다가 2007년 금융 위기로 폭락해버리면서, FLNKS의 ‘니켈 전략’은 설득력을 잃어버렸다. 현재 뉴칼레도니아의 니켈 생산량은 전 세계 생산량의 10% 정도이며, 매장량으로 따지면 전 세계 총 매장량의 10~30%에 달한다. 독립 찬성론자들은 뉴칼레도니아 국내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 등 해외에 금속 제련 공장을 세워 독립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뉴칼레도니아 GDP의 5~10%, 고용의 14%를 담당하고 있는 광산업과 금속 제련 분야가 건설 및 공공사업 분야를 발전시키고 북부 주의 경제를 활성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백단유 채취 산업을 제외하고는 부가가치가 높고 지속적으로 수출이 가능한 산업을 육성시키는 데는 실패했으며, 프랑스가 뉴칼레도니아에 제공하는 지원금(Net public transfer)은 GDP의 13%에 달한다.(8) 현재 6,700명의 공무원들이 프랑스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고 있으며, 이들의 대부분은 교육 공무원이다. 고등 법무관에 따르면, 독립 이후에도 현재의 서비스 수준을 유지하려면 지방세를 2배 인상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들은 주민들의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경범죄보다도 빈도수가 떨어진다. 예를 들어, 상업경제가 10여 개의 재벌가문에 집중된 현상, 마진을 부풀리는 소수의 기업들, 정경 유착 등이다. 최근에 독립 기관으로 신설된 경쟁관리당국이 투명성을 높여 줄 것이라 기대해본다. 또한 수입쿼터제는 빈곤문제의 해결을 막고 물가 상승을 부추기고 있으며, 정부 공무원과 지방 공무원에 대한 과도한 보수는 불평등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누메아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의 보수는 1.73배, 지방 공무원들의 보수는 1.94배로 높아졌다).(9) 세금의 경우에도 점진적이 아니라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빈곤층에게 부담을 지우고 있다. 누메아의 검찰청에 가보면, 지방 당국으로부터 고발된 탈세 건이 단 한 건도 없다는 사실에 놀란다.

“오늘날 독립의 의미는 상징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에서 보았을 때 예전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인류학자인 브누아 트레피에가 분석했다.(10) “백인들은 뉴칼레도니아를 떠나지 않을 것이므로, 식민지 문제는 계속해서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백인들이 주체가 되는 독립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독립에 대해 회의적이다. 독립될 경우 우리는 지금보다 무엇을 더 얻을 수 있을까? ‘원주민들’의 정체성과 지위를 어떤 식으로 더 잘 보호할 수 있을까?

누메아 조약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동 운명’의 개념을 세우고 관습법 자문 기관의 설립을 약속했다. FLNKS 측은 ‘역사의 희생자들’을 ‘원주민’이 주도하는 독립 추진 프로젝트에 동참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뉴칼레도니아로 유배된 죄수들의 자손들이나, 식민 시대에 뉴칼레도니아로 건너온 아시아와 태평양 섬의 민족들 등이다. 그러나 이는 오산이었다. 오늘날 떠오르고 있는 정당은 바로 ‘칼레도니 다함께(Calédonie ensemble: 독립에 반대하는 중도 우파 정당)’로, 정당소개 책자에서부터 다양함을 강조하는 정당이다. ‘칼레도니 다함께’는 다문화적이고, 백인들이 주도하되, 혼혈인들에게 열려 있고, 공동체 간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또 다른 형태의 사회를 지향한다.(11)

 

“식민지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기서 실망감이 몰려온다. 피에르 고프는 한탄했다. “우리는 온전한 인정을 받지 못한 겁니다. 카나크인들이야말로 중심이 돼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뜻이지요. 땅, 광산 개발 등 그 어떤 것도 카나크인에게 이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특히 세금문제가 주민들이 독립에 적극적이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습니다.” 카나크문화개발청의 수장이자 장-마리 티바우의 아들인 에마뉘엘 티바우는 자기 민족과 가족에게 가해진 폭력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의 할아버지가 10세가 되던 1917년, 봉기로 인해 카나크 부족의 마을이 불타고 주민들이 기관총에 맞아 죽어 나갔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아들, 즉 티바우의 아버지가 10세가 되자, 원주민들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박탈했던 원주민 통치법이 폐지됐다. 에마뉘엘 티바우는 말했다.

“우리는 프랑스인들의 언어, 그 후손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봅시다. 오늘날 그들은 우리의 문화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요?” 뉴칼레도니아의 초등학생들은 학교에서 모국어로 수업을 듣지 않는다. 역사책에는 아직도 ‘사건’에 관한 내용이 빠져있다. “우리의 역사를 책을 통해서도 알 수가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흙과의 관계와 이냠(참마) 재배가 신성한 가치를 지니는 민족에게, 프랑스 또는 서구의 기준은 언제나 논란의 대상이다. 의회와 심의회를 거쳐 채택되는 ‘국가법’은 대부분 프랑스의 법을 그대로 베껴온 것이다. 철학자이자 교사양성기관의 강사인 아미드 모카뎀은 지적했다. “시간, 공간, 인간관계에 있어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에게 맞는 교수법을 적용하기 위해 고민하는 교사들은 드뭅니다. 일례로, 카나크인들은 성공을 위해 경쟁해야 하는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문화는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학생을 학업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교 상담사에게 보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푸앙부에 위치한 미쉘-로카르 고등학교의 기술 및 전문 교육 부대표인 베르나르 뷔지도 이에 동의한다. “현재 우리의 교육 모델은 카나크인들의 문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식민지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후아일루 시의 시장이 된 카스칼 사와(칼레도니아 연합 정당)는 주장했다. 후아일루 시는 동쪽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수많은 카나크 깃발과 상징기들이 나무와 다리 위에서 휘날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프랑스가 언제나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단 한 번도 진정한 ‘공동 운명’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어엿한 하나의 민족으로서, 우리는 스스로를 통치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은 모두 치열한 정치적 투쟁으로 얻어낸 결과입니다. 그리고 우파는 언제나 그 투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카나크 정치인들은 카나크인들이 주도하는 독립이 정확히 어떤 형태이고, 카나크인들의 정체성부터 정의해야 할 것입니다.” 1989년부터 1998년까지 카나크자유당의 대변인이었던 라파엘 마푸는 말했다. 독립 찬성론자인 그는 ‘사회를 변화시키고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급 투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이미 오래전에 버렸다. 그 대신 그는 ‘토착성(Indigenousness)’, 즉 지역고유성에 집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수정했다. 즉, 캐나다의 이누이트 족처럼 원주민의 법을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프랑스도 서명한, 2007년 UN 총회에서 채택된 원주민 권리 선언에는 원주민의 민족자결권, 해당 영토에서 나는 천연자원에 대한 권리, 자신의 거주 지역에서 추방되지 않을 권리, 경제 및 사회 발전을 자발적으로 결정할 권리 등이 명시돼 있다.

법학박사의 자격으로 2018년 9월까지 관습법 자문기관의 특별고문으로 일했던 마푸는, 프랑스의 법학자들과 함께 이 기관의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노력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2014년, 8개 원주민 지역의 책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심한 결과이자 새로운 헌법의 초안이 될 수도 있었던 카나크 민족 헌장이 발표됐다. 그러나 의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독립에 찬성하는 정당들을 비롯해 모든 정당들은 그보다는 칼레도니아 가치 헌장을 우선시했다.(12) “정치인들은 프랑스의 정당과 기관을 통해서만 식민지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가 주인이 아닌 나라에 어떻게 애정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뉴칼레도니아의 유명 페미니스트인 프랑수아즈 파라 카이야르가 자문했다. “지금 같아서는 저항의 도구로 토착성을 이용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토착성을 중시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지역 위원회들은 광산업이 자연을 훼손시키는 등 많은 폐해를 빚으면서도, 정작 지역주민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올해 여름 쿠아우아에서는 고무나무가 무성하고 희귀 오일이 매장돼 있는 ‘금기구역’의 개발 프로젝트가 한 단체의 반대로 무산된 일이 있었다. 그 프로젝트의 당사자들을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들은 일단 광산 출입구를 막아 놓고, 프로젝트 허가를 내줬던 의원들과 지역 당국들에 사정을 호소하러 다니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지역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광산에 들어가지 못한지 이미 오래됐습니다.”

도시에서는 ‘지금, 우리(Maintenant, c'est nous)’ 단체의 젊은이들이 ‘한층 공정하고 한층 결속된’ 사회를 꿈꾼다(23면 박스 기사 참조). 뉴칼레도니아에는 타파해야 할 뿌리 깊은 악습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글·장 미쉘 뒤메 Jean-Michel Dumay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Alban Bensa & Eric Wittersheim, ‘En Nouvelle-Calédonie, société en ébullition, décolonisation en suspens 뉴-칼레도니아의 더딘 탈식민지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4년 7월호‧한국어판 2014년 9월호.
(2) Jean Courtial & Ferdinand Mélin-Soucramanien, ‘Réflexions sur l’avenir institutionnel de la Nouvelle-Calédonie(뉴칼레도니아의 제도적 미래에 관한 고찰)’, 총리 보고서, La Documentation française, 파리, 2013년 10월.
(3) Pascal Hébert & Ulysse Rabaté, ‘Référendum en Kanaky Nouvelle-Calédonie: déjà le goût amer d’un rendez-vous manqué(뉴칼레도니아 카나키의 독립찬반 주민투표: 부결의 조짐)’, <AOC>, 2018년 10월 16일, https://aoc.media
(4) Institut d’émission d’outre-mer(해외 통화발행 연구소), 파리.
(5) Observatoire de la réussite éducative de Nouvelle-Calédonie(뉴칼레도니아 교육적 성취도 연구소).
(6) Institut de la statistique et des études économiques Nouvelle-Calédonie(뉴칼레도니아 통계 및 경제 연구소)(Isee), 누메아, 2008년.
(7) Michel Levallois, ‘De la Nouvelle-Calédonie à Kanaky. Au cœur d’une décolonisation inachevée(뉴칼레도니아에서 카나키까지. 완성되지 못한 식민지 해방)’, Vents d’ailleurs, 라 로크 당테롱, 2018년.
(8) Étienne Wasmer, Alain Trannoy, Catherine Ris, ‘L’économie néo-calédonienne au delà du nickel(니켈 산업 이외의 뉴칼레도니아 경제)’, Note du Conseil d’analyse économique(경제분석회의 보고서), n° 39, 파리, 2017년 3월.
(9) Jean-Christophe Gay, ‘La Nouvelle-Calédonie, un destin peu commun(뉴칼레도니아. 공동이 아닌 운명)’, IRD Editions, coll. ‘Focus’, 마르세유, 2014년. Séverine Bouard, Jean-Michel Sourisseau, Vincent Géronimi, Séverine Blaise, Laïsa Roi(지도), ‘La Nouvelle-Calédonie face à son destin. Quel bilan à la veille de la consultation sur la pleine souveraineté?(운명을 마주한 뉴칼레도니아. 완전한 자치권의 획득 여부를 결정하는 주민투표를 앞두고)’, Karthala, coll. ‘Hommes et sociétés’, 파리, 2016년.
(10) Christine Demmer & Benoît Trépied(지도), ‘La Coutume kanak dans l’État. Perspectives coloniales et postcoloniales sur la Nouvelle-Calédonie(뉴칼레도니아 내 카나크인들의 관습. 뉴칼레도니아의 식민지 시대와 식민지 이후 시대)’, L’Harmattan, coll. ‘Cahiers du Pacifique Sud contemporain’, 특별호 n° 3, 파리, 2017년.
(11) Catherine Laurent, ‘Calédoniens(뉴칼레도니아 주민들)’, Ateliers Henry Dougier, coll. ‘Lignes de vie d’un peuple’, 파리, 2017년.
(12) Christine Demmer, ‘Un peuple calédonien? Le référendum d’autodétermination en Nouvelle-Calédonie(뉴칼레도니아 민족? 뉴칼레도니아의 민족자결권 결정 주민투표)’, La Vie des idées, 2018년 5월 29일, https://laviedesidees.fr. François Féral,  ‘L’adoption de la charte du peuple kanak de Nouvelle-Calédonie(뉴칼레도니아 카나크 민족 헌장의 채택)’, www.legitimus.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