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연재] 대중서사와 로맨스(2) - 포르노그래피 읽는 여자들, 19금 로맨스의 전성시대

2018-12-31     이주라 | 한림대 한림과학원 HK연구교수

 

로맨스 서사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되고 익숙한 장르이면서 가장 뛰어난 매체 적응력을 가진 장르다. 그것은 노래로 시작돼 활자가 됐고, 무대와 스크린을 누비고, 브라운관을 달구며, 이제 손 안의 컴퓨터라 불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럼에도 학술장에서 그것은, 오랜 시간 존재하되 평가되지 않는 일종의 괄호로 남겨졌다. 대중서사학회의 로맨스연구팀은 바로 이런 로맨스 서사를 적극적인 비평의 장에 세우고자 조직됐다. 젠더적 관점을 바탕으로 다양한 매체 연구자들이 모여, ‘연애’에서 시작돼 ‘순정’, ‘로맨스’ 등의 여러 이름으로 규정돼온 애정서사에 제 몫의 비평을 부여하고자 함께 연구하고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지면을 통해 이런 학술적 지향과 성과를 개진할 수 있게 돼 반갑고 감사하다. 2018년 12월호에 문학평론가인 인하대 교수 류수연이 ‘로맨스, 취향에 맞춘 커밍아웃’을 게재했고, 한림대 한림과학원 HK연구교수인 이주라의 ‘포르노그래피 읽는 여자들, 19금 로맨스의 전성시대’가 이번 1월호에 게재된다. 2월호부터는 연세대 젠더연구소 연구원인 허윤, 영화평론가인 세종대 겸임교수 서곡숙, 대중음악평론가 송화숙, 방송극연구자 문선영, 만화연구자인 경기대 교수 이승진의 글이 이어질 예정이다. -편집자 주
 

 

‘남자는 포르노, 여자는 로맨스’라고요?

흔히 남·녀의 성(性) 인식 차이를 ‘남자는 포르노, 여자는 로맨스’라는 말로 많이 표현한다. 남자는 성기 중심의 육체적 쾌락에 집중하고, 여성은 관계 중심의 정신적 교감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의미다. 남자는 성적 쾌락을 자유롭게 향유해야 진짜 남자이며, 여자는 성적 쾌락을 몰라야 진정한 여자인 것이다. 이 표현은 은연중에 남성의 본능적 성욕은 인정하면서, 성에 대한 여성의 욕망은 외면하는, 낡은 젠더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한국 대중문화의 전형적 서사가 가능해진다. 비는 오고 밤은 깊었는데, 방은 하나밖에 없어서, 남녀는 한 방에 머문다. 남자는 욕망을 참지 못해 여자를 덮치고, 여자는 안 된다고 거부하지만, 남자의 힘에 굴복당한다. 성욕을 참을 수 없는 남자와 순결을 지켜야 하는 여자 사이의 긴장감은, 과장해서 말하면 한국 근대 연애소설 100여 년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된 구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는 남자, 정신적 교감에 관심을 기울이는 여자라는 담론이 여지없이 반복, 재생산된다.
솔직히 위에 정리된 서사는 촌스럽기 그지없다. 21세기에 접어든 현재, 저런 작품은 아무도 즐기지 않을 것이다. 여자에 큰 관심 없는 초식남이 등장하고, 사랑과 성을 주도하는 알파걸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시 ‘남자는 포르노, 여자는 로맨스’라는 표현 또한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여자는 본능적으로 성적 쾌락을 즐기지 못하는가? 이은정은 ‘여자도 포르노를 할 수 있을까?’에서, 여자가 포르노를 즐기지 못한다는 인식은 여자의 성적 쾌락에 대한 사회적 억압 때문에 생긴 결과일 뿐이라고 답한다. 가부장제 사회하에서 여성의 성에 대한 통제가 여성을 성을 모르는 존재인 것처럼 만들었을 뿐이다.
여자들도 포르노와 같은 것을 즐긴다. 물론 남성 중심의 포르노 산업을 즐긴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는 여자도 성적 쾌락을 관능적으로 즐기는 존재라는 의미다. 남성 중심의 젠더 담론 속에서는 여성의 성적 욕망을 담론화하거나 형상화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여성은 대상화되기만 했다. 하지만 최근 로맨스 장르를 중심으로 여성의 성과 사랑 그리고 섹스에 대한 관심이 표현되기 시작했다. 로맨스 소설이 가장 많이 유통되고 있는 웹소설 플랫폼만 살펴보더라도, 월간베스트 10위 안에 올라 있는 작품은 모두 19금 딱지를 붙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네이버 웹소설에 올라오는 로맨스 작품 밑에 달리는 작가의 말이나 댓글에는, 연령제한이 없는 플랫폼의 특성상, 더욱 진한 장면을 올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난무한다. 로맨스를 읽는 독자들은 사랑의 표현이 조금 더 육체적이고 관능적이기를 원한다. 이제 로맨스는 여성의 성적 판타지를 공유하는 여성들의 포르노그래피가 됐다.


당신의 사랑을 섹스로 고백해 봐요

최근 로맨스 소설 속에서 사랑은 두 사람의 육체적 교감을 통해 형상화된다. 물론 여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상당하다. 로맨스의 첫날밤은 남녀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여자가 상대에 대한 신뢰를 구축해야만 가능하다. 로맨스에서 섹스는 단순한 육체적 쾌락이 아니라,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관계는 빨리,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상대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에 대한 수많은 불안과 의혹의 시간이 지나간 후에, 서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생긴 후에, 두 사람은 육체적 사랑을 나눈다. 사랑의 절정은 언어의 고백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고백으로 표현된다. 남자가 여자에게 남기는 키스 마크는, 이성적인 남자의 절제를 잃게 할 정도로 여자가 매력적이라는 증거이며, 그만큼 남자가 여자에게 빠져 있다는 확증이다. 두 사람의 행복한 사랑은 키스 마크와 같이 몸에 새겨진다.
사랑의 육체적 표현 속에서 로맨스 여주인공은 꽤나 적극적이다. 두 사람이 첫날밤을 보내기까지는 서사의 시간이 계속 지연된다. 하지만 일단 한 번 밤을 보내고 나면 두 사람은 이제 떨어질 수가 없다. 미성년 독자층이 제한 없이 유입될 수 있는 네이버의 경우에도, 플랫폼의 특성상 성적 표현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사랑의 열정은 남녀의 육체적 교감으로 표현된다. 최근에 완결된 ‘반드시 해피엔딩’에서, 절제력이 강한 남주인공이 일을 하고 싶어 섹스를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얌전하던 여주인공도 남자를 유혹할 수 있는 란제리 및 성인용품을 사서 남자와의 성관계를 다채롭게 즐기려고 한다.
남녀에게 이중적이고 차별적인 성인식을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여성의 성적 욕망이 자유롭게 표현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남성 또한 건강하게 성욕을 풀어낼 수 없다. 현실적으로는 남성에게 끊임없이 본능적 성욕은 참을 수 없으니 발산하라고 명령하지만, 사회의 도덕은 모범적인 남성상을 여성의 순결을 지켜주는 점잖은 남성으로 설정하며 참으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적 요구를 손쉽게 해결하기 위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문화는, 식민지시기 신문연재소설에 나타나는 ‘탕부(蕩婦)’나 1960년대 대중잡지 <명랑>의 하이틴소설에 나오는 ‘음란 소녀’와 같은, 팜므파탈 형 인물을 계발했다. 여성의 성욕을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팜므파탈 또한 남성의 시선으로 대상화된 인물일 뿐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그녀들은 언제나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로맨스에 표현되는 육체적 사랑은 상호 간의 소통을 형상화한다. 섹스는 사랑의 대화라는 말의 가장 이상적인 구현 방식이다. 나의 나신을 상대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모든 사회적 의장을 벗어버리고 상대에게 다가간다는 의미다. 내가 너에게 숨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상호 간 믿음을 상징한다. 몸의 대화는 가식 없는 내면의 소통이다. 스킨십을 통해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회복한다.
남성 중심의 문화 속에서, 성적 욕망을 표현하는 여성이 매력적이지만 두려운 대상으로 그려졌다. ‘팜므파탈’은 남성의 성욕을 채워주고 버려지는 대상일 뿐이었다. 로맨스 속에서, 성적 욕망을 표현하는 여성은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친밀한 관계를 구축하는 존재다. 그들은 마녀가 아닌 인간으로 그려진다. 로맨스 속에서 여성의 욕망은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계기를 얻었다.

 

그리고 섹스라이프의 계발

로맨스의 독자들은 실천적이다. 앤서니 기든스는 로맨스 독서가 여성들이 친밀한 인간관계의 주도적 실천자로 만들었다고 한다.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서 여성들은 사적인 관계를 지속시켜 나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를 알게 된다. 일과 사랑을 병행하고 싶은 현재 여성들은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서, 사회적 성공을 거두면서 사랑을 유지해 나가는 방법을 배운다. 더 나아가 에로틱 로맨스는 슬기로운 성생활 교과서로 기능한다.
에바 일루즈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성공 요인 중 하나로, 그 작품이 섹스를 위한 자기계발서의 역할을 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에리카 레너드 제임스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영국 여성 작가가 쓴 3부작 소설인 이 작품은, 2010년에 호주 출판사에서 전자책으로 출간한 이후, ‘엄마 포르노 Mommy Porno’라 불리며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다.
포르노 수준에 가까운 ‘BDSM(Bondage and Discipline, Domination and Submission, Sadism and Masochism, 구속과 순종 그리고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뒤섞인 성생활)’을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더군다나 이 책에 소개된 성인용품은 매출이 급상승했다고 한다. 이 소설은 SM이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BDSM 관계를 맺는 구체적인 절차를 기초부터 상세히 알려준다. 에바 일루즈는 이 책에 나오는 성생활 묘사가 오랜 기간 동안 반복적인 패턴으로 성관계를 맺어오던 커플들에게 새로운 실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분석했다. 이 소설은 정체된 자신의 성생활을 개선시킬 수 있는 교재로 기능했다.
에로틱 로맨스는 사랑의 행위 속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알려준다. 특히 남성의 시선에 맞춰진 포르노의 여주인공처럼 행동하지 않고도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상상하게 한다. 가끔, 포르노를 통해 성생활을 짐작하다 보면, 그 여주인공처럼 노골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낄 때가 있다. 자신의 분위기와 맞지 않은 옷을 입었을 때처럼. 여성 스스로의 욕망이 자연스럽게 표현된 것이 아니라, 남성의 욕망에 맞춰 만들어진 여성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로맨스는 여성이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풀어나가며, 자신의 몸을 긍정하며 육체적 욕망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모든 과정을 여성의 시선에서 풀어나갈 수 있게 한다.

 

주체여, 나의 몸을 긍정하라

물론 로맨스 소설은 이 모든 문제를 낭만적 사랑의 환상 속에서 풀어낸다. 두 사람의 사랑은 완전한 합일이 가능하다는 낭만적 환상 말이다. 그래서 그들의 육체적 궁합은 하늘이 선사한 것처럼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한편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로맨스의 주인공은 언제나 부족하다. 아무리 주체적인 여성상이라도 상처받은 남성을 치유하는 역할을 통해 특별함이 부여될 때, 여성은 감성적이고 남성은 이성적이라는 고정적 젠더 구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로맨스를 읽는다. 단순한 쾌락만을 느끼고 덮을 수도, 자투리 시간만 보내다 덮을 수도 있지만, 모든 예술 향유 행위는 예상치 못한 사유의 시간을 던져 준다. 로맨스 또한 상업성의 포장, 선정성의 유혹 속에서 깨달음의 순간을 준다. 최근 대두하고 있는 에로틱 로맨스는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육체와 쾌락 속에서 재구축할 수 있게 해 준다. 에로틱 로맨스는 여성의 몸을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그것의 주체적 향유가 가능함을 상상하게 한다. 이런 상상의 가능성이 고정적 젠더 인식에 조그마한 균열이라도 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글·이주라
한림대 한림과학원 HK연구교수. 한국 근대 초기 대중문학 연구자.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1-멜로드라마』, 『순결과 음란-에로티시즘의 작동 방식』 등의 공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