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로마> 비극이 지난 후, 드러나는 시간의 얼굴들

2018-12-31     정지혜(영화평론가)

<로마>가 우리 손에 들어왔다. 영화관에 찾아가 예정된 시간의 티켓을 구하여 어둠 속으로 초대되는 제의 없이도 그렇게 되었다. 우리는 간단하게 넷플릭스의 앱을 열어 알폰소 쿠아론의 신작 로마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로마가 손에 들어오고 나면 어쩐지 그 생략했던 제의를 되찾고 싶어진다. 우리는 큰 화면, 그리고 더 큰 화면이 필요하다. 어둠, 완전한 격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최신의 돌비 디지털 사운드가 필요해진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넷플릭스의 전폭적 지지 속에서 각본, 제작, 편집뿐 아니라 손수 촬영까지 했다. 넷플릭스의 자본은 어찌 되었든 상대적으로 작가주의에 손을 들어주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런 기획과 시나리오는 최근의 할리우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영화의 제목 ‘ROMA’ 로마는 멕시코시티의 지명이고 거꾸로 하면 ‘AMOR’ 아모르, 사랑이 된다. 이탈리아 남자들의 단골 멘트인 이 단어의 구조가 영화에서도 보인다. 영화는 구글 지도로 찾을 수 있고 실제로도 존재하는 남 로마지구 떼뻬지가(街) 21번지의 어느 중산층 주택에서 시작된다.

로마는 70년대 멕시코의 중산층 가정과 그곳에서 일하는 가정부 클레오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다. 쓸고 닦고 요리하고 설거지하고 입히고 세탁하고 재우고 깨우는 것이 그녀의 몫이다. 클레오와 함께하는 가족은 백인 가족으로 의사인 남편과 아내, 장모와 네 명의 아이들이 한 가족이고 운전사와 두 명의 입주 가정부가 더해져 중산층 계급의 식구가 이뤄진다.

판이한 외모의 백인 고용주 가족과 인디언계 고용인이 한 프레임에 들어오면 계급의 관계, 자연스러운 분리가 생긴다. 이 계급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 아이들과 개다. 여기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의 설정은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화면과 인물들이 움직이고 소리가 끼어들면서 비로소 이 관계들의 설명이 시작된다. 평화로운 이 21번지 가정은 남편의 외도와 이혼, 클레오의 임신과 결별로 균열이 생긴다.

사실 우리에게 멕시코는 친밀한 영역이 아니다. 영화에서 배경이 되는 71년 유월의 ‘성체축일 대학살’ 같은 사건이나 70년대의 정치경제적 격랑 같은 것도 그렇다. ‘로마’는 멕시코를 거의 알지 못하는 스크린 너머의 관객들에게도 성실하게 조율된 멕시코의 공기 같은 것을 전한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개인적 차원에서 시작해 작가주의의 차원에 이르며 멕시코(혹은 멕시코 사람들)의 정체성을 구현해낸다. 영화는 종종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다.

영화는 리얼리즘과 상징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 사운드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영화 속의 소리, 소리의 움직임은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다. 가깝고 멀리서 나는 소리, 지나가는 소리 등이 켜켜이 쌓여 그 실제의 공간을 구현해 내는 듯하고 때로는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대사처럼 확장된 청각적 은유를 만들어 낸다.

클레오(얄리트사 아파리시오 분)는 감독 유년의 기억에서 소환한 인물이다. 인디언 원주민계의 인물로 시골의 마을에서 비전문 배우를 캐스팅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여러 부분에서 비전문 배우가 등장한다. 70년대를 재현하기 위해 필요했던 다양한 고증들도 있다. 감독은 스텝 대부분을 멕시코 출신으로 구성하기도 했고, 세트에 가족들이 썼던 실제 가구와 물건들을 배치하기도 했다. 반정부 시위대와 극우단체가 충돌한 장면은 실제 사건이 있었던 거리에서 촬영했다.

하지만 영화가 71년의 성체축일 대학살 같은 특정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고 해서 꼭 70년대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풍부한 은유로 카니발의 에너지,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시간의 얼굴을 드러낸다. 이 부활, 혹은 재생의 순환구조를 통해 시간을 바라보는 감독의 철학과 시각도 발견할 수 있다.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과 중첩되는 순환구조, 드러나는 시간의 얼굴들

영화에는 여러 번 느리게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의 모습이 나온다. 이는 멀리서 보아야 궤적이 보이는,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의 은유처럼 느껴진다. 영화가 시간을 포착하는 모습은 흥미롭다. 영화 <로마>의 화면은 느리다 못해 정적이다. 심지어 등장인물이 뛸 때조차 그렇다. 화면은 주로 좌/우, 상/하 단순한 직선으로 움직인다. 카메라는 이 두리번거리는 느린 움직임을 통해 리듬과 시간성을 만들어낸다.

화면의 내부에서 물리적으로는 정적이고 대칭되는 직선적인 구도가 주를 이루지만 영화가 진행되면 이야기 속에서 추상적으로 순환하는 원형의 구조가 드러난다. 에피소드들은 조금씩 중첩되면서 전개된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미지들도 중첩된다. 전경과 중경과 후경은 소실점의 구도를 통해 깊이를 만들기보다 여러 공간의 프레임을 통해 레이어를 시도한다. 여기에 소리의 레이어가 더해지기도 한다.

물의 이미지는 순환의 구조를 강화하거나 때로는 보조한다. 영화는 물의 이미지로 시작된다. 클레오가 바닥청소를 하는 장면이다. 아마도 물청소를 하기 전에 가족이 기르는 검은 개 보라스의 똥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있고 그중 어떤 것은 주인의 포드 갤럭시 자동차 바퀴가 뭉개 놓았을 것이다. 화면은 바닥을 쓸어내는 반복되는 구정물들을 클로즈업한다. 이 파도의 이미지와 물의 이미지는 영화의 전반에 반복된다.

클레오(가정부)와 소피아(아내)의 갈등이 지나가는 과정은 이런 이미지, 상징구조들과 결합한다. 클레오는 문만 열면 뛰쳐나가려는 개의 목줄을 꼭 쥐고 있다. 하지만 검은 개 보라스는 틈만 있으면 골목을 향해 뛰어나가려 한다. 돌발적으로 뛰쳐나가는 것은 사실 보라스만의 특성은 아니다. 아이들도 언제나 충동적으로 튀어 나간다. 이 개와 아이의 상징은 크리스마스의 축제 기간에도 일어난다. 소피아는 남편 없는 크리스마스 연휴를 사촌의 농장에서 아이들과 보내기로 한다. 물론 아이들을 돌봐야 하니 클레오도 동행한다. 여기에서 크리스마스는 어쩌면 연말의 파티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 두 여인에게는 고난과 부활을 암시한다. 아니나 다를까 파티의 끝 무렵에는 겨울을 추방하려는 듯이 숲에 불이 난다.

모든 사람이 뛰어나와 불을 끄는 모습은 재난이라기보다는 축제에 가깝다. 아이와 개들이 소란에 합류한다. 어른들은 혹 인간 띠를 둘러 불을 끄고 아이들은 놀이하듯 불을 끈다. 한쪽에서는 소란을 배경으로 축배를 들고 취한 남자는 성가를 부른다. 물은 물의 속성으로 정화하고 불은 불의 속성으로 정화한다. 가족이 농장에서 돌아오면 비가 온다. 시간이 등을 떠밀면 클레오와 소피아는 자신의 불행을 정면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

소피아는 희망 없는 기대를 내려놓는다. 클레오는 페르민에게 버림받지만 출산을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갑작스럽게 양수가 터진 클레오는 반정부 시위대와 무장한 극우단체의 충돌을 뚫고 가까스로 산부인과 병원에 도착한다. 그리고 수술실에서 일어나는 일, 의사로부터 선고받는 말은 당일 낮에 일어난 학살에 대한 자성의 언어다. 자성은 지성의 성격이 그렇듯이 약간 건조하고 어쩌면 냉담하다. “안타깝습니다. 아기는 죽은 채로 태어났어요.” 필연적으로 영화의 시각은 그 시대를 살아낸 먼 미래, 오늘의 관점이다. 이 먼 거리에는 신파를 걷고 비극을 바라보는 시간의 얼굴이 있다. 

막내아들 페페는 클레오 ‘껌딱지’다. 클레오를 꼭 붙잡고 사랑스럽게 안긴다. 의미심장하게도 전생의 자신에 관해 설명해 줄 때도 있다. 어느 전생에서는 비행사였고 다른 전생에서는 수영하지 못하는 어부였다. 죽음을 기억하는 아이는 생과 사의 순환 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중이다. 우리가 죽음과 부활의 어느 중간에 부유하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시간에 떠밀려 가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를 붙잡아 주는 것은 무엇일까. 역사의 파도에 떠내려가는 개인을 붙잡는 서로의 손이 바로 감독의 유년기 혹은 멕시코를 지탱해준 그래비티(중력)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사소하고 반복적인 노동으로 가득 차 있다. 손빨래한 속옷과 양말을 옥상에 널고 아이의 의미 없는 장난에 맞장구치는 것이나, 반숙한 달걀을 깨트려 아이의 입에 넣어주는 것에서부터 잠든 아이의 귀에 노래를 불러 깨우는 것까지 노동이라면 노동이고 사랑이라면 사랑이다. 살아있음은 파도처럼 반복되고 중첩되고 퍼진다. 이 사소한 반복들이 화면을, 삶을 아모르로 직조한다.

 

글·정지혜 deepplaybook@gmail.com
영화 평론가, SIDFF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