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노동자 뒤랑을 미치게 했나

2010-10-08     토마 델통브/언론인

1910년 11월, 르아브르 노조의 노조원 쥘 뒤랑은 고용주의 음모와 사법부의 실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100년 가까이 잊혀졌던 이 사건이 오늘 정부를 지지하는 ‘변절자들’과 사회투쟁을 지지하는 사람들, 즉 갈팡질팡하는 좌파 안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910년 9월 9일 안개 낀 프랑스 북부 항구도시 르아브르항 부둣가에서 한 무리의 성난 사람들이 한 남성을 살해했다. 술꾼들의 드잡이 정도로 여겼던 사건의 양상은 희생자인 석탄업자 루이 동제가  당시 사람들이 “여우”라 부르던 파업을 깨는 ‘황색 노조원’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급선회했다. 르아브르 석탄노조위원장 쥘 뒤랑이 체포됐고, 그가 3주 전부터 주도하던 파업은 갑자기 중단됐다.

이렇게 뒤랑 사건은 시작됐다.(1) 지금은 잊혔지만, 그때 이 사건은 ‘노동자의 드레퓌스 사건’으로 부를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건이 일어나기 몇 해 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그랬던 것처럼, 쥘 뒤랑도 당대의 공포를 먹고사는 사법부의 실수로 희생될 처지였다. 프랑스와 독일의 경쟁 속에서 프랑스 민족주의자는 알자스 출신 유대계인 드레퓌스를 이상적인 범인으로 만들었다. 10년 뒤, 프랑스의 혼란스러운 사회투쟁 분위기 속에서 프롤레타리아·노조원·무정부주의자인 뒤랑에게 시련이 닥쳤다. 

끄나풀의 죽음을 노조 파괴 기회로

그의 운명은 대서양횡단선 ‘제너럴 트랜스애틀랜틱 컴퍼니’와 같이했다. ‘벨 에포크’(Belle Epoque·19세기 말~20세기 초 풍요로운 프랑스 파리의 아름다운 시절을 지칭하는 말-역자)의 부르주아들은 황금과 프랑스 자본주의의 상징인 꽃으로 장식된 트랜스애틀랜틱호를 타고 대륙횡단 크루즈 여행을 하는 게 꿈이었다. 석탄업자들은 1910년 7월 르아브르 항구의 절대강자인 트랜스아트의 석탄 수송 기계화 정책에 항의해 노조를 결성하고, 8월 중순 파업에 들어갔다. 루이 동제처럼  두둑한 보너스에 회유돼 파업에 불참한 채 트랜스아트를 위해 일하는 노동자가 몇몇 있었다. 트랜스아트는 9월 9일 루이 살인사건을 ‘노조의 범죄’로 조작했다.

그것은 파렴치한 음모였다. 동제의 죽음이 알려진 직후, 트랜스아트의 현지 책임자들은 일부 황색 노조원에게 노조를 깨부수는 진술을 하게 했다. 황당무계한 스토리를 꾸며냈다. 이들은 노조회의에서 “동제의 살해를 거수로 투표했으며, 이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안다”고 했다. 심지어 “노조 집행위원들이 이 끔찍한 임무를 띤 장정들을 수백 명의 파업자들에게 소개했다”고 했다.

사건 담당자는 뜻밖의 이야기에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여러 해째 상류층 지역의 주민들은 날로 격해지는 노조운동에 우려를 표명해오던 터였다. 프랑스노동총동맹(CGT)은 프랑스의 모든 도시에서 끊임없이 계급투쟁을 설파하며 권세가에게 겁을 줬다. 모든 노동거래소(Bourses du Travail)에서 사람들은 ‘부르주아 공화국’을 무너뜨릴 무기인 총파업·시위·사보타주에 대해 이야기했다.(2)

1910년 새로 구성된 의회의 시작과 함께 사회는 흥분으로 들끓었다. CGT의 주간지 <민중의 소리>가 “부르주아 세상을 깨부수기” 위해 “메스 날을 세우자”고 호소하며, 사방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심지어 철도노조가 10월에 총파업을 예고해, 전국이 마비될 상황에 처했다.

이 사건이 트랜스아트의 확실한 조작극임을 보여주는 근거는 이 조작극이 당대의 논쟁거리와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고용주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황색 노조원을 반노조 투쟁의 선봉으로 삼았다. 좌파 혁명 지지자들은 여전히 사냥의 한계를 명확히 정하지 않은 채 ‘여우 사냥’을 요구했다. 극좌파는 부자에게 겁주는 글을 쓰며 신나했다.좌파신문 <사회전쟁>은 “만약 경찰이 계속 황색 노조원에게 힘을 실어준다면, 빨갱이들은 여우 사냥을 갈 때 주머니에 ‘시민 브라우닝(권총)’을 챙기기 바란다. 여우는 무장한 손에 저항하는 순간, 허리춤에 총알이 박히게 될 것”이라며 협박했다.

사람들은 수만 부씩 팔리는 신문에서 이런 격렬한 글을 읽으면서, 르아브르 사건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한편 파업이 큰 성공을 거두자, 트랜스아트는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트랜스아트는 부두에 화재 포스터를 내걸고, 황색 노조원들로 구성된 ‘반혁명 노동조합 연합’을 동원하는 한편, ‘노동의 자유’를 보호해달라고 경찰에 강력히 요구했다. 초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경찰과 충돌, 야밤 사보타주, 드잡이질 등 사고가 잦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이유조차 알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사람들은 동제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트랜스아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유족 거짓 진술 거부, 그럼에도 사형 선고

정부와 고용주 편에 선 파리의 언론은 즉시 동제를 순교자의 반열에 올려놨다. 언론은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애도하는 ‘악어의 눈물’을 흘린 뒤, “야만시대의 회귀”를 성토하며 “범죄 노조”에 대해 초강력 처벌을 요구했다. 정부는 더 이상 측은지심을 보이지 않고 철도노조의 파업을 무산시켰다. 11월 24일 루앙의 중죄 재판소에서 동제 사건 재판이 열렸을 때, 법정 분위기는 이상할 정도로 불공정했다.

쥘 뒤랑의 변론을 맡은 르네 코티는  법정에서 뜻밖의 지원군을 만났다. 노조원 안에 많은 끄나풀을 두고 관리하던 르아브르 경찰서장은 노조 차원에서 결코 암살계획을 세운 적이 없다고 했다. 동제의 아내 역시 노조에 불리한 진술을 거부한 채, 트랜스아트와 르아브르 시청이 남편을 잘 보호해주지 못해 일어난 일이라며 보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극보수층 출신인 재판관들은 제너럴 트랜스애틀랜틱 컴퍼니 쪽 ‘증인’들이 꾸며낸 이야기에 설득되고, 뒤랑이 설파한 무정부주의에 위협을 느껴 뒤랑에게 ‘도덕적 연루’ 책임을 물어 사형을 언도했다.

좌파는 이 판결이 자신들을 뒤랑의 배후로 지목한다는 것을 깨닫고 거세게 항의했다. 프랑스 좌파가 총집결하면서, 동제 사건은 뒤랑 사건이 되었다. 군중은 프랑스 전역에서 몇 주 동안 ‘사법부의 범죄’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사람들은 뒤랑의 이미지를 담은 수천 통의 엽서를 대통령에게 보내 그의 사면을 요구했다. 심지어 리버풀, 로마, 멜버른, 시카고 등 해외에서까지 뒤랑을 구하기 위해 파업과 시위가 벌어졌다.

사람들은 이런 거대한 움직임 속에서, 어쨌거나 프랑스 좌파의 여러 전략을 간파했다. 좌파에 충직한 반정부 소수세력이 총력투쟁에 나섰다. 좌파 신문 <사회전쟁>은 “법관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린치 법률을 적용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야 합리적·인간적인 법관이 될 것”이라며 총력투쟁을 지지했다. 반면에, 좌파 일간지 <뤼마니테>의 발행인 장 조레스는 정당한 법률 적용을 요구했다. 재판 서류를 충분히 검토하며, 이 사건이 트랜스아트의 음모란 것을 발견한 그는 “뒤랑에게 내린 사형만 범죄인 것이 아니라, 그를 감옥에 가둔 것 또한 범죄다. 그는 결백하다. 전적으로 결백하다”고 항변했다. 

좌파 총집결, 전국서 규탄 시위

<뤼마니테>는 독자에게 진상을 알리기 위해, 갓 서른이 된 뒤랑이 체포 직후 며칠 동안 부모에게 쓴 편지들을 신문에 실었다. 사람들은 친절과 공평무사로 가득한 그의 편지에서 섬세한 인간성을 지닌 투사의 모델을 발견했다. 뒤랑은 동료들에게 노조 활동에 방해가 되는 술을 못 마시게 하고, 폭력과 백해무익한 오락이 노동계급을 분열시킨다며 이 또한 말린 금주운동가이자 인권연맹 회원이었다.

곧 뒤랑의 결백이 확실시되자, 뒤랑 사건은 ‘새로운 드레퓌스’ 사건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드레퓌스 대위처럼 뒤랑을 복권하라고 했다. 좌파는 두 사건을 비교하며, 르아브르 출신 노조원을 구하고, 동시에 지식인과 공화당 정부에 도전장을 내민 셈이다. 무정부주의자인 기자 빅토르 메릭은 “부르주아들이 사형수 뒤랑에게 지속적으로 증오감을 표출한다면 뒤랑 사건은 여파가 더욱 거세져, 드레퓌스 사건에 비하면 마치 인형놀이처럼 보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3)    

지식인들이 청원서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결국 상당수의 의원이 급진사회당 의원 폴 뫼니에의 뒤를 따라 서명을 지지했다. 강성 노조원은 1911년 1월 1일 엘리제궁에서 거리행진을 벌이며 행동에 나섰다. 압박에 시달리던 아르망 팔리에르 대통령은 뒤랑의 형을 7년으로 감형했다. 시위대는 “무고한 사람에게 7년형이라니!”라며 코웃음을 쳤다. 시위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뒤랑은 결국 2월 16일 석방됐다.

지식인·의원들도 청원 서명

모두가 이 석방에 환호했지만, 좌파의 분열은 막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뒤랑의 석방을 의회의 승리로 봤고, 또 다른 이들은 노동자의 단결이 이룬 쾌거라고 했다. 이에 장 조레스는 뒤랑이 석방되던 날, “승리를 쟁취한 것은 모두가 하나로 뭉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프롤레타리아에 환멸을 느껴 오랜 기간 공화주의 이념을 복원하는 데 정진한 사회주의 지도자 장 조레스는 이 사건을, 대중이 종종 단순 ‘부르주아 사건’으로 인식하는 드레퓌스 사건을 다시 부각시킬 기회로 삼았다. 조레스는 과거 우리가  “군사주의 국가의 이성이 저지른 범죄를 타도하기 위해 봉기”했기 때문에 오늘날 공화국으로부터 “자본주의 국가의 이성”에 희생당한 노동자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받아낼 수 있다고 봤다.

석방됐다, 그런데 미쳤다

하지만 고상한 이념은 이따금 잔인한 현실과 충돌한다. 쥘 뒤랑은 수감생활 동안 미쳐버렸다. 체포 후 충격을 받은 그는 사형선고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고, 수감생활로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져 피해 의식에 시달리다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착란 증세가 심해져서 가족도 더 이상 분간하지 못했고, 벽에 머리를 찧어대며 자신을 ‘예수’라 칭했다. 불치의 정신병에 걸린 뒤랑은 결국 1911년 4월 정신요양소에 보내져 평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법률과 공정성의 문제가 다시 대두됐다. 먼저 법률 문제가 떠올랐다. 당시 법률에는 이런 재판을 재심에 청구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1917년 폴 뫼니에 의원이 법률 개정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끝에, 1918년 뒤랑은 마침내 복권됐다. 한편 모든 ‘공정성’의 문제는 견해상의 문제였다. 이를테면 사법부의 조작된 판결 오류로 얻은 병인데다 사회적 불의와 맞서 싸우던 중에 걸린 불치병인데, 피해자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주지 않을까 하는 견해상의 문제가 대두됐다. 하지만 뒤랑이 사망한 이튿날인 1926년 2월 20일자 <뤼마니테>는 “우리 법관들이 알고 있듯, 이런 죽음은 꼭 보복을 한다. 부르주아에게 운명의 순간이 닥칠 때, 프롤레타리아도 역시 가차 없는 보복을 할 것”이라며, 보상보다는 보복을 주장하는 회의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글•토마 델통브 Thomas Deltombe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각주>
(1) 알랭 스코프, <일명 뒤랑>(장클로드 라테스·1984), 파트릭 랑누, <뒤랑 사건>(CNT·2010) 참조.
(2) 미구엘 추에카, <부자들을 털어라>, <‘영웅적인 시대’의 혁명적인 노조의 총파업>, Agone, 마르세유, 2008 참조.
(3) ‘뒤랑 사건’, 소책자 <오늘의 인물>, 1910년 12월 17일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