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소비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방법

2019-01-31     그레그와르 샤마유 l 작가

1971년. 누군가가 자동차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봉투를 갓길에 던진다. 입구가 벌어지면서 내용물이 쏟아지고, 깃털장식을 쓴 엄숙한 인디언의 발밑에 어지럽게 흩어진다. 화면 속 클로즈업된 인디언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깊게 팬 볼에 흐르는 눈물 줌인. 내레이션이 나온다. “환경오염, 시작도 끝도 당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막이 뜬다. “미국을 아름답게(Keep America Beautiful).”

인디언은 자연이고 당신은 문명이다. 이건 당신의 죄의식이다. 힘없는 자가 입을 다물어도 그의 두 눈이 모든 것을 말한다. 순결했던 미국(원주민)을 짓밟고 학살하고 더럽히더니 여전히 이 땅을 망가뜨리고 있다며, 침묵으로 당신을 비난한다. 그리고 슬로건이 나온다. 환경오염의 주범은 당신이다. 그러므로 당신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당신 손에 달려있다. 그리하면 죄의식을 덜 수 있을 것이다. 단지 행동을 바꾸기만 하면 된다. 

미국을 아름답게. 이 감동적인 광고메시지는 누가 만들었을까? 환경단체? 아니다. 놀랍게도 음료회사와 용기회사가 1953년에 만든 것이다. 코카콜라, 아메리칸 캔 컴퍼니(통조림용기 제조사) 같은 기업들이 모여서 만든 슬로건이다.

오래전 미국에는 빈용기 보증금 제도가 있었다. 소비자가 음료를 마시고 빈용기를 가져오면, 판매가에 포함됐던 용기 값만큼 현금으로 돌려주는 제도다. 용기를 재활용해 쓰레기의 양을 최소화한다는, 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한 제도였다(수거한 병을 녹이는 물질 재활용과는 달리, 내용물을 다시 채워서 재사용하는 것이다).(1)

그런데 1930년대 상황이 바뀌었다. 금주법 시대가 막을 내리고 주류산업이 다시 성행하면서 맥주회사들이 양철캔을 개발했다. 일회용 용기로의 전환은 기업들의 구미를 당기는 제안이었을 것이다. 용기 수거 및 재포장 비용을 아끼고, 중간업자(용기 제조사)를 없애고, 생산 및 유통 확대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빈용기 보증금, 재활용 운동으로 대체

일회용 용기를 보편화하면 쓰레기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은 외면했다. 1950년대 초, 탄산음료 1, 2위를 다투던 펩시와 코카콜라도 맥주업계의 뒤를 따랐다. 

변화는 현저했다. 탄산음료 중 재활용 병의 비율이 1947년 100%에서 1971년 50%로 감소했고, 맥주 역시 동기간 85%에서 25%로 감소했다.(2) 이때부터 거리, 들판, 도랑, 둑길, 피크닉장에 빈 캔과 일회용 병이 나뒹구는 모습이 목격됐다. 사람들은 동요했다. 탄원서에 서명을 하고, 당국에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1953년, 버몬트주 의회는 최초로 빈용기 보증금 제도를 입법화했다. 기업에는 적신호로 다가왔다. “업계 전반에 영향을 미칠 선례”가 되리라는 두려움이 엄습한 것이다.(3) 사회운동을 막고자 ‘미국을 아름답게’라는 슬로건을 만든 것도 이때다. 

1936년 여름, 콘티넨털 캔 컴퍼니는 완전히 새로운 타입의 캔맥주를 선보이기 위해 대대적인 광고를 내보냈다. 맛과 신선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뚜껑을 단번에 딸 수 있는 편리함까지 갖췄다며 새로운 발명품의 장점을 과시했다. 무엇보다 “빈 병을 반환할 필요 없이 그저 마시면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맥주를 일회용 캔에 담아 파는 것은 당연히 1회성 때문이다. 보증금이 쌓일수록 귀찮게 들고 다녀야 하는 빈 병도 많아진다.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작은 배에 웃통을 벗은 어부 두 명이 각자 다른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이 한 장면에 두 행위가 동시에 연출돼 있다. 한 명은 술을 마시고 있고, 다른 한 명은 팔을 들어 빈 캔을 호수에 던지려 하고 있다. “마시고, 버리세요.”

이로부터 30년 뒤, 이런 광고는 이제 내보낼 수 없게 됐다. ‘일회용은 손쉽게 버릴 수 있다’는 인식이 여전히 바뀌지 않았지만, 이를 대놓고 말할 수 없게 됐다. 초반의 광고 메시지를 수정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인디언의 눈물’ 광고가 바뀌었다. 쓰레기를 버리려고 차창 밖으로 손을 내미는 장면까지는 같다. 그런데 다음에 나오는 눈물의 의미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공공연하게 “날 사세요, 얼마나 편한데요. 마시고 취하면 그냥 호수에 버리면 돼요”라고 말했다면, 이제는 은밀하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퍼뜨린다. “난 일회용이지만 조심하세요. 날 아무 데나 버리면(아, 이미 버렸네요) 죄책감이 들 거예요. 예전에 우리가 시켰던 행동이지만, 이제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물론 죄책감도 느껴야 해요.” 말을 재구성하니, 문제의 화살이 개인의 탈선행위로 옮겨갔다. 해결책은 뻔했다. 모든 사람이 친환경적으로 행동하면 환경오염이 해결된다는 논리다. 

반면 환경운동가들은 기업들이 수익성만 보고 여태 잘 굴러가던 빈용기 보증금 제도를 중단하고 일회용 용기를 선택한 것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1970년대 초, 빈용기 보증금 제도로 돌아가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에 따라 1972년, 오리건주는 ‘빈 병 반환법’을 제정했고, 이듬해 버몬트주도 뒤를 이어 동법을 도입했다. 기업들은 분노했다. 논지를 벗어난 주장이 난무할 정도였다. “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자들이 오리건주를 따라 메인주, 매사추세츠주, 미시간주, 콜로라도주에서 빈병 반환법 투표를 추진하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을 동원하자.” 아메리칸 캔 컴퍼니 사장이자 ‘미국을 아름답게’ 협회장이었던 윌리엄 F. 메이는 이렇게 격분했다.(4)

유리용기 제조사 GCMI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1970년에 수백만 달러를 들여 대대적인 광고를 내보냈다. 그해 최초로 시행된 ‘지구의 날’ 이틀 전, GCMI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재활용 프로젝트를 개시했다. 학교, 교회, 관련 단체를 주축으로 지역 주민들을 동원해 빈 병을 회수하는 행사였다. 지정된 장소에 빈 병을 가져오면 500g당 1센트를 줬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매주 25만 개의 병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 기세를 몰아 GCMI는 이듬해 ‘쓰레기 투척 반대 주간’에 재활용 프로젝트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이런 식으로 기업이 주도한 재활용 문화가 빈용기 보증금 제도와 일회용 용기 금지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업계가 로비한 역습의 성공이었다. 결국 재활용은 “문제를 해결할 강제적 정책을 보조하는 역할이 아니라, 유일한 해결책이 되고 말았다.”(5) GCMI는 분리수거 프로젝트도 추진했지만, 가정쓰레기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모두들 윤리적이어야 한다, 나만 빼고

이처럼 기업들은 빈용기 보증금 제도를 폐지해 재처리 비용을 아끼는, 구조적이고 반환경적인 선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들에게 환경적 책임을 묻고 있다. 나만 빼고 남들만 윤리적이길 요구하는 전형적인 이중 잣대다. 자신의 책임을 면제받으려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셈이다. 

기업들은 광고를 적극 활용해서 쓰레기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제품생산과의 연관성을 끊어버리는 데” 성공했다.(6) 애초에 쓰레기 생성을 줄이면 된다는 생각을 차단시켰다. 사람들은 모든 게 당신 어깨에 달려있다는 말을 좋아한다. 하지만 가정에서 아무리 열심히 분리수거를 해도 가시적인 결과가 즉각 나타나지도 않을뿐더러, 정부와 지자체는 기하학적으로 늘어나는 가정쓰레기를 처리할 시설을 짓기 위해 없는 예산도 끌어다 써야 할 지경이었다. 결국 “음료수 기업들이 만들어낸 용기를 재활용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시민들의 선의와 세금으로 마련했고, 덕분에 기업들은 추가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다.”(7)

1970년대, 기업들은 똑같은 술책을 이용해 개인에게 작지만 책임감 있는 행동으로 “싸움을 이어가는 데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인디언의 눈물 광고와 합작으로 “오염을 멈추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71가지 행동”이라는 팸플릿이 제작됐다. 기업의 이익과 되도록 상충하지 않고 양립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의 실천욕구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제안했다. 

이런 심리적 술책의 특징은 사람들이 듣기 좋아할 말만 한다는 것이다. 언뜻 생각해보면 맞는 말 같다. 모든 것이 당신 손에 달려있고, 당신만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니! 지금 바로, 가까운 우리 일상에서부터 변화를 실천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이끌어낸다. 그러다가 결국 비공격적인 행동의 틀에 갇히게 된다. 기업이 재활용을 권장하는 것도 같은 원리다. 소비자를 정치에 무관심한 상태로 만들어서 잠재적 반대자를 구슬리는 술책이다.

이름도 낯선 ‘윤리적 신자유주의’를 내세워, 개인의 작은 실천이 모여 큰 힘을 만든다는 논리로 정치행위에 맞선다. 그러나 말과 행동이 맞지 않는다. 자신들은 환경규제를 막으려고 정치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회와 하나가 되기는커녕, 기업들끼리 똘똘 뭉쳐서 실력을 행사한다.

1960년대 형성된 페미니즘과 마찬가지로 환경운동가들도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일상 깊은 곳까지 뿌리내린 지배관계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개인의 행동을 바꾸는 노력과 제도를 바꾸려는 투쟁은 서로 상충하지 않으며, 분리수거와 투쟁도 서로 상충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기업들은 ‘책임 지우기’ 술법으로 이 둘을 연결하고 상충하게 만들었다. 개인의 작은 행동 변화가 정치행위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고, 미시적 변화와 거시적 변화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논리를 퍼뜨렸다. 비현실적이고 비생산적이라고 판명된 시스템을 바꾸라는 요구에, 기업들은 개인의 행동 변화가 집단행동이나 대립 없이도 상황을 바꾸는 자급력이 있다고 반박했다.

여기에 약간의 모순이 존재한다. 빈용기 보증금 제도는 보증금을 돈으로 돌려주는 시스템이다. 소비자들이 빈 병을 반환하는 이유는 50센트를 돌려받기 위해서다. 고전경제학의 인류학적 논리를 토대로 이해관계를 정확히 파악한 정책이다. 그런데 기업들은 이 정책을 이해관계 없이도 돌아가는 시스템으로 바꾸길 원했다. 사람들은 공익을 위해 분리수거에 임한다. 여기에 이기적인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와 호모 폴리티쿠스(정치적 인간) 사이에 호모 에티쿠스(윤리적 인간)라는 신인류가 생겨났다. 작은 미덕으로 거대한 악덕 시스템에 맞서 싸우는 ‘책임감’ 있는 존재란다.

그렇다고 윤리적 지배시스템이 경제적 지배시스템을 몰아낸 것은 아니다. 전자가 후자를 없앤 게 아니라, 덮어버렸다. 그래서 윤리적 주체라 불리는 개인이 경제적 주체의 역할도 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효율적이면서 환경적 책임도 져야 한다는 상반된 두 명령이 만들어낸 긴장상태에 적절히 대처해야 한다. 

‘책임 지우기’는 이처럼 개인의 심리적 삶에 모순을 전가하는 행위의 또 다른 이름이다. 딜레마를 이용한 지배형태 때문에 생겨난 새로운 형태의 ‘불행’이기도 하다.

 

글·그레그와르 샤마유 Grégoire Chamayou 
『통치 불가능한 사회: 권위주의적 자유주의 계보』의 저자. 

번역·이보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Pour tout ce passage, cf. Joe Greene Conley II, ‘ Environmentalism contained: A history of corporate responses to the new environmentalism’, thèse, Princeton, 2006년, www.thecre.com.
(2) Andrew Boardman Jaeger, ‘Forging hegemony: How recycling became a popular but inadequate response to accumulating waste’, <Social Problems>, vol. 65, n° 3, Oxford, 2018년 8월.
(3) Andrew Boardman Jaeger, ‘Forging hegemony’, op. cit.
(4) ‘Clean-up groups fronting for bottlers, critics say’, <The San Bernardino County Sun>, 1976년 8월 29일.
(5) Bartow J. Elmore, ‘The American beverage industry and the development of curbside recycling programs, 1950-2000’, <Business History Review>, vol. 86, n° 3, Cambridge, 2012년 가을. 
(6) Don Hazen, ‘The hidden life of garbage: An interview with Heather Rogers’, <AlterNet>, 2005년 10월 30일, www.alternet.org
(7) Bartow J. Elmore, ‘The American beverage industry and the development of curbside recycling programs, 1950-2000’, op. c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