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 100주년 바우하우스, 형태의 정신

2019-01-31     리오넬 리샤르 l 작가 및 역사학자

 

1919년 1월, 빌헬름 2세가 즉위한 이후 독일에서는 혁명과 반혁명 운동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혼란스러운 베를린에서 회의를 진행하기 어려웠던 국회의원들은 보다 평온했던 튀링겐 주의 작은 마을이자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명성으로 유명한 바이마르로 국회를 이전해, 그해 가을까지 운영했다. 1919년 2월 6일, 극장에 모인 국회의원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근간이 될 헌법 조항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고, 이 무렵 병사들은 도시를 포위하고 있었다. 

36세의 베를린 출신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도 바이마르에 거주하고 있었다. 1917년 솜 전투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제대한 그는 숙원사업이었던 바이마르 공예학교 재건을 위한 정부지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벨기에 건축가 앙리 반 데 벨데가 설계하고 운영했던 이 공예학교는 1916년 이후로 군 병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한편, 공예학교 건너편에 위치한 미술학교에는 교장이 부재한 상황이었다. 미술학교 교사들은 두 학교의 합병을 제안했고, 이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바우하우스다. 그로피우스가 창안한 신조어 바우하우스는 ‘집을 짓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중세시대 때 성당을 건축할 때 건축업자들이 모이던 장소이자 장인조합을 의미하는 바우휘테(Bauhütte)에 착안해 탄생한 용어다. 1919년 3월 20일, 그로피우스가 이 학교를 소개하면서 처음으로 바우하우스란 신조어를 사용했고, 바우하우스는 기존의 의미를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내포하게 됐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독일에서 이미 아방가르드 정신으로 저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1910년부터 독일공작연맹의 멤버로 활발히 활동했는데, 이 공작연맹은 미술, 공업, 수공예가 협업해 더욱 ‘향상된’ 공업제품을 생산해내는 것을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다. 또한 그로피우스는 1911년부터 1913년까지 독일 니더작센 주에 위치한 알펠트에 구두끈을 만드는 파구스 공장을 설립했는데, 공장 벽체를 강철과 유리를 사용해 완성함으로써 오늘날 가히 획기적인 현대건축물로 손꼽히고 있다. 

그로피우스는 1914년 이전까진 사회변화 없이는 거의 불가능했던 ‘형태 설계자’로서의 소신을 지켜낼 수 있었다. “사회문제는 이제 우리 시대의 윤리적 문제가 됐다”고 1911년 자신의 저서에 밝힌 바 있다.(1) ‘통념에 대한 신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긴 그로피우스는 이런 신념은 더 이상 망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1919년 베를린에 ‘예술노동평의회’가 창설되고, 그로피우스는 의장을 맡게 됐다. 그는 “우리는 조화로운 시대에 미래 통합을 준비할 때에만 노동할 것이다”고 서술했다.(2)

바우하우스를 창설하면서 그로피우스는 자신의 유토피아를 실현하고자 했다. 바우하우스의 교육 프로그램은 기본교육을 이수하고 도제(Apprentice)가 된 학생들을 양성하는 방식으로 짜였다. 이들은 회화, 조각, 건축 등의 모든 역량을 요하는 작품제작을 위한 공동작업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결국, 한 건축물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작업의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리오넬 파이닝거의 대성당 목판화 이미지가 이런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상징한다. 

그로피우스의 교육방침 역시 이 프로그램과 일맥상통한다. 바우하우스 입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은 자기소개 내용을 서류 한 장으로 간단하게 작성해 제출하면 된다. 학생 대표자들은 교수평의회에 참석할 수도 있다. 이곳 교수들은 더 이상 ‘교수’가 아닌 ‘마이스터’로 불리며, 파이닝거처럼 검증된 예술가, 명장들이다. 이들은 학생들이 다양한 작업장에서 여러 가지 자재를 가지고 씨름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바우하우스 개교 첫해에, 예비 교수는 기존의 틀에 박힌 교육법을 벗어내고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전공을 선택하게끔 돼 있다. 그로피우스는 이 ‘예비수업’을 표현주의 화가인 요하네스 이텐이 담당하도록 위임했다. 

1919년 독일에서 이토록 혁신적인 학교가 또 설립될 수 있었을까? 사실, 이 당시는 학교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최소한의 조건조차 결여된 상황이었다. 노련하고 의욕도 충만한 인물, 자재, 자금, 쓸 만한 작업실 등이 부족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로피우스는 1919년 말까지 바우하우스 운영을 꽤나 잘한 편이었다. 하지만 10월 이후부터 약 =200명의 학생을 수용한 바우하우스는 “멍청한 속물 집단”과 “진부한 민족주의 패거리”들의 타깃이 됐다.(3) 

바우하우스를 거쳐 간 인물들과 변화

한 달 후, 이전 미술학교 출신 교사들은 바우하우스 교육 프로그램에 적응하지 못해 떠났고, 다시 2개의 교육기관으로 분리됐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그로피우스가 제시한 첫 번째 해결방안은 학생들에게 상품화 가능한 제품을 디자인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지역의 경제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대책이었다. 이를 부정경쟁으로 간주한 지역 수공업자들의 공분을 산 것이다. 이에 따라 바우하우스는 더욱 고립되고 사회로부터 격리됐다. 

결국 바우하우스는 기존 교육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1920~1921년 하반기에만 운영됐다. 그로피우스는 학생들 간의 협심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재미있는 활동이나 파티를 적극 장려했다. 또한 연출가이자 문예·미술 전문지 <슈투름 데어>의 공동제작자 로타르 슈라이어에게 학생들에게 경험을 전수해주고자 작품이나 무대를 보여 주기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피우스와 이들 간의 교육 방향성에 관한 대립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텐과 슈라이어는 학생들이 자유롭게 자기계발을 하는 데 만족했다. 하지만 그로피우스는 이와 반대로 기술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자재에 대한 친숙도와 공예 실무경험이 밑바탕이 돼야 시대의 정신을 담은 새로운 형태를 창조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로피우스는 창작자와 사회가 밀접한 관계를 맺기 원했지만, 바우하우스는 ‘낭만적인 섬’으로 점점 고립되는 듯했다.(4) 작업실에서 생산해 낸 결과물은 전무했고, 그로피우스에게 이텐은 눈엣가시였다. 

그로피우스는 결국 저명한 인사들을 채용했다. 1920년 오스카 슐레머, 1921년 봄 파울 클레, 1922년 6월 바실리 칸딘스키를 각각 영입했다. 하지만 이텐과의 의견 차이는 좁혀지지 않아 한계에 이르렀고, 1922년 10월 그로피우스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튀링겐주(州) 연방정부는 지급된 보조금 사용처를 확인하기 위해, 전시회를 열어 바우하우스의 작품들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학교를 폐쇄하겠다는 조건 하에 내려진 명령이었다. 이텐은 정부의 요구에 순응하거나 교수직을 사임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됐고, 결국 급작스럽게 사임하게 된다. 슈라이어 역시 뒤이어 바우하우스를 떠났다. 

바우하우스의 세 번째 변화가 찾아왔다. 그로피우스가 이텐을 대체할 새로운 인물로 헝가리 출신의 구성주의 작가 라즐로 모홀리 나기를 채용한 것이다. 1923년 봄, 모홀리 나기는 금속공예 작업장 총괄 및 예비 수업을 담당했고, 결국 바우하우스는 활기를 되찾았다. 그는 1923년 8월 15일에 예정돼 있던 전시회 준비에도 투입돼 성공리에 마무리함으로써 바우하우스는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바우하우스 작품을 보기 원하는 대중을 위해 광고지, 포스터, 엽서가 임시로 간행됐다. 200페이지가 넘는 책도 출간했는데, 여기에 모홀리 나기가 조판작업을 수행했다. 화가 게오르그 무헤가 실험주택을 설계해 건축했고, 두 개의 정육면체를 겹쳐서 만든 이 실험주택을 통해 건축이 이번 전시회의 핵심이 됐다. 실험주택은 합리적이고 기능적이며 모던한 안락함마저 느껴졌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한 강연에서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합”을 주장하며 바우하우스의 변화가 시작됐음을 알렸다. 

하지만 아무리 바우하우스의 행보가 순항 중이었다 할지라도, 늘 불안한 상황 속에 놓여 있어야만 했다. 1924년 2월, 우익이 바이마르 의석을 대다수 차지하며 지방선거에서 승리를 거둠에 따라 바우하우스에 대한 압력이 심해졌다. 1924년 말, 바우하우스 존립이 불투명해졌고, 결국 1925년 4월 1일 폐쇄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데사우(Dessau)시로부터 학교 이전에 관한 제안이 왔고, 1925년 4월, 바우하우스는 베를린에서 100여 km 떨어져 한창 산업화가 이뤄지고 있던 인구 7만 명의 도시 데사우로 이전했다. 

몇 달 동안 큰 변화를 겪은 바우하우스는 1926년 그로피우스가 설계하고 빠르게 완공한 3개의 건물을 선보이며 재개를 알렸다. 모든 건물의 옆면은 학생들을 위한 방으로 설계됐고, 유리와 강철, 시멘트를 조합해 모던한 건축물을 구현했다. 

시 보조금을 받은 바우하우스는 이제 ‘형태 디자인 학교’로 거듭나 시각디자인 제품을 제작하는 기관으로 변모했다. 이에 따라 수공예 정신은 사라졌다. 클레, 칸딘스키, 무헤, 모홀리 나기, 슐레어와 같이 바이마르에서 온 교사들은 ‘교수’ 타이틀을 얻음으로써 기존 학생들은 교수의 지휘하에 놓이게 됐다. 요제프 알베르스는 예비 수업을, 헤르베르트 바이어는 광고전단과 타이포그래피를, 마르셀 브로이어는 목공과 기능성 가구 개발을 각각 맡아서 지도했다. 

여세를 몰아, 그로피우스는 건축을 통해 바우하우스 교육 프로그램을 완성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스위스 건축가 하네스 마이어에게 교수직을 제안했는데, 마이어는 제안을 수락하는 대신 조건을 내걸었다. 이론 수업은 반드시 실습과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기존 기술학교들과 차별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조건이었다. 바우하우스가 현실 사회로 진출할 초석이 마련됐다. 건축수업에 재료역학, 응용수학 강의가 개설된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연구실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고, 시제품으로 제작된 작품들이 기업에 판매가 되면서 구체적인 상업 계약서가 작성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발터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 교장 사직을 선언했고 그의 선언에 모두가 놀랐다. 자신의 커리어를 너무 방관했고 시간을 낭비했다는 판단하에 그로피우스는 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1928년 10월, 학교 지배권은 하네스 마이어에게 넘어갔다. 그 후 바이어, 브로이어, 모홀리 나기가 연이어 학교를 떠났다. 

이것이 바우하우스의 다섯 번째 변화다. 한편, 한스 마이어는 건축에서 반드시 인간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던함’이란, 평평한 지붕이나 직선으로 이뤄진 외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건축의 형태가 인간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때 존재한다고 여겼다.(5) 이처럼 새로운 형식의 디자인은 가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바우하우스는 최첨단 기술을 도입하고, 사진 수업도 열었으며, 심리학, 사회학, 영화 관련 강의와 체육수업도 진행했다. 하지만 학교 내 공산주의 학생들의 활동을 지지한 한스 마이어는 1930년 8월, 여름방학 중에 데사우 시로부터 해임통지서를 받게 된다. 

바우하우스는 건축학교? 잘못된 상식들

마이어 반대파 세력은 마이어의 후계자로 건축거장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를 추천했다. 바우하우스의 교장이 된 그는 마이어 지지자들을 쫓아내고, 학생들에게 더욱 엄격한 교칙을 적용했다. 순전히 기술적인 부분에만 치우친 교육은 지양했는데, 이런 그의 교육방침은 그다지 유용하지 않았다. 1930년 국가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집권하게 되면서 바우하우스의 존립이 위협받게 됐다. 이들의 눈에 바우하우스는 그저 ‘문화적 붕괴’를 유발하는 ‘유대-볼셰비즘’ 기관으로, 사라져야 하는 골칫덩어리에 불과했다. 결국 건물지붕이 방수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바우하우스 출입이 금지되고, 데사우 시나 정부 그 누구도 보수비용을 지불해주지 않자 출입금지기한이 1932년 8월 22일까지 연장됐다.  

미스 반 데어 로에 교장은 베를린의 폐쇄된 공장에서 사립기관으로서의 바우하우스 활동을 이어나가고자 했다. 예전에 기업들에 시제품을 판매해 창출한 수익으로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 되면서, 요제프 괴벨스와 학생들 간의 협상은 결렬됐다. 학교 내부 수리 중 경찰이 공산주의 선전물을 발견했다는 트집을 잡아 결국 1933년 4월 11일, 바우하우스는 폐쇄하게 된다. 이어 1933년 4월 20일, 교수평의회 역시 해산이 결정됐다. 

오늘날 바우하우스를 둘러싼 허구가 매우 많다. 공공연하게 떠도는 루머로 인해, 바우하우스가 학교였다는 점과 바우하우스가 겪은 수많은 변화는 역사적 사실과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조차도 잊히고 있다. 한쪽에서는 기능성을 중시한 근대화 운동으로 평가하고, 다른 이들은 주택단지, 규격화된 건물, 고층빌딩이 바우하우스 때문에 생긴 것이라며 책임을 전가하기도 한다. 

이 중에서 가장 큰 상식의 오류는 바우하우스가 건축 학교였다는 것이다. 사실 건축교육은 학교가 건립된 지 8년이 지나서야 이뤄졌으며, 소위 엘리트라 불리는 소수만이 건축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1929년 201명의 학생 중 건축 수업을 수강한 학생은 30명이었고, 1930년에는 166명 중 40명에 불과했다. 

1920년대 탄생한 모스크바 브후테마스(Vkhutemas, 국립예술기술공방) 교육 프로그램은 효율적인 교수법의 시초인 바우하우스와 유사성을 지닌다.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자재 사용법에 있어 전 세계적으로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브로이어의 바실리 의자는 난해하다는 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작되고 있으며, 힌 브레덴딕의 테이블과 데스크 스탠드, 마리안느 브란트의 주전자 역시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또한, 전 세계 기업들은 데사우의 바우하우스에서 탄생한 ‘모던함’을 모방하고 있다. 

이제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창설한 지 100년이 됐다. 2015년에 독일 국회에서는 100주년을 기념해 지원금을 제공하기로 했다. 바우하우스가 “독일 문화 역사상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수출품목 중 하나”로 규정되면서, 2019년 바우하우스 관련 박물관 3곳이 개관할 예정이다. 일부 관광안내소에서는 이미 관광코스도 소개하고 있다. 

바우하우스의 교수법과 작품 외에도, 3개 도시를 전전하고 3명의 교장이 연이어 교체되는 등 14년 동안 많은 변화를 겪는 와중에도, 정치적인 이유로 폐쇄되기 전까지 끊임없이 우수한 결과물을 배출했다는 점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글·리오넬 리샤르 Lionel Richard
작가 및 역사학자, 여러 대학의 명예교수, 『해안가에 표류하는 잔해』(페트라 출판사, 파리, 2018)의 저자 

번역·장혜진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발터 그로피우스, 『건축과 사회』, 랭토출판사, 파리, 1995년
(2) 발터 그로피우스, 『Ja ! Stimmen des Arbeitsrats  für Kunst(공저)』, Photographische Gesellschaft in Charlottenburg, 베를린, 1919년/ Karl-Heinz Hüter, 『Das Bauhaus in Weimar』, Akademie Verlag, 동베를린, 1976년, 제7권
(3) Karl-Heinz Hüter, Das Bauhaus in Weimar, 『Lettre à Max Osborn du 16 décembre 1919(1919년 12월 16일 막스 오스본에게 보내는 편지)』, 제15권 
(4) Karl-Heinz Hüter, Das Bauhaus in Weimar, op. cit., 제43권. Hans M. Wingler에 의해서도 언급됨, 『Das Bauhaus: Weimar, Dessau, Berlin, 1919-1933』, Rasch & Co, 쾰른, 1975년.
(5) Das Werk, 제7권, 취리히, 1926년. Jacques Aron에 의해 언급된 책,『Anthologie du Bauhaus(바우하우스 문집)』, 발행인 Didier Devillez, 브뤼셀, 1995년. 이 저서는 바우하우스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 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