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공과 투쟁신문 <스 수아>
프랑스공산당은 1936년 말, 인민전선의 승리를 지키고 파시스트의 위협에 맞설 연합 세력을 구축하고자 일간지를 발간하기로 한다. 이 일간지는 기존의 프랑스공산당 기관지 <뤼마니테>와 노선도 다르고 크게 관련을 맺지 않았다. 루이 아라공이 공동 발행한 이 새로운 일간지 <스 수아>는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참여하는 위대한 대중 신문으로 기억됐다.
1937년 3월 1일, 과감성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석간신문의 창간호가 세상에 나왔다. 대중성을 표방한다는 포부를 앞세운 이 신문은 루이 아라공, 장-리샤르 블로크 두 작가가 맡았으며, 예술가, 시인 등 지식인들의 발언대 역할을 했다. 프랑스공산당(PCF) 서기장인 모리스 토레즈가 이 신문의 발행자금을 지원했으나, 후에 이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신문의 제호는 ‘오늘 저녁’이라는 뜻의 <스 수아(Ce Soir)>로 결정됐고, 9월부터 12만 부를 찍었다. 그리고 1939년 8월, 프랑스 언론사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스 수아>의 발행이 금지된 것이다. 발행이 금지됐던 당시, 이 신문은 24만 6,000부를 찍었다.
1936년 말 프랑스에서는 두 개의 굵직한 투쟁이 벌어졌다. 신생 인민전선(Front populaire)에 대한 지지와 반파시즘의 발전이 그것이다. 한편 스페인공화국에서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에 힘입어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군사반란이 일어났고, 다른 유럽 국가들이 내정 불간섭주의를 견지하며 방관하는 사이 스페인공화국은 위태로워졌다. 30만 부를 발행하는 <뤼마니테(L’Humanité: ‘인류’ 혹은 ‘인간성’이라는 뜻)>도 이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나 프랑스공산당은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우파신문(판매량 1위였던 <파리-수아(Paris-Soir)>지는 발행 부수가 200만 부를 넘었다)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공산당은 중앙 기관지와 뚜렷이 구별되는, 독립적인 간행물을 출간하기로 했다. 아라공은 <스 수아>의 지휘를 수락하며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만일 이 새로운 신문의 지휘를 내게 맡긴다면, 나는 내가 속한 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내 판단에 따라야 할 것이다.”(1)
한편 수필가이며 기자인 장-리샤르 블로크는 <유럽>지의 창간에 이어, 1935년에는 문화수호를 위한 ‘국제작가회의’ 창설에 참여했다. 블로크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블로크와 아라공은 신문발간이 돈벌이도 되지 못하면서 시간을 빼앗고, 다른 일들에 지장을 주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2) 그럼에도 그들은 그 일을 하기로 했다.
편집과 경영을 완전히 분리한 <스 수아>
시간이 촉박했다. 일명 ‘어둠의 조력자’로 불리는 가스통 벵수상(혹은 벵상)이 <뤼마니테>에서 옮겨와 경영을 맡았다. 그는 파리 중심가인 ‘카트르 셉탕부르(Quatre-Septembre, 프랑스 제3공화국이 시작된 ‘9월 4일’을 뜻하는 말-역주)’ 거리에 있는 한 건물을 물색했고, 모리스 토레즈로부터 신문발간 비용을 현금으로 지원받았다. 클레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오이겐 프리드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 파리 지부 책임자로 <스 수아>의 탄생을 은밀히 지켜봤을 것이며, 부분적으로라도 초기 자금을 제공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블로크와 아라공 전문가 장 알베르티니의 설명에 의하면, 이 신문은 든든한 자금책인 벵상 덕택에 큰 어려움 없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
<스 수아>지는 편집과 경영을 완전히 분리했다. 두 편집국장은 편집 기사를 결정하고 필자들을 물색했다. 필자들 중 상당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아라공은 훗날 “당 차원에서 실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가 일어났다”고 술회했다.(4) 공산당 정치국의 결정에 따른 이런 변화는 바로 파시즘에 맞서 프랑스인들의 단합에 호소하는 정책이었다. 신문은 풍부한 삽화를 곁들여 10~12면으로 구성됐으며, 마지막 면에는 정치 관련 사진들만 게재할 예정이었다.
대형사건들을 다룬 르포 기사들을 비롯해 다양한 사건들, 연재소설, 범죄사건, 유명 배우들 이야기, 일상 속 소소한 사건들, 트렌드, 스포츠에 관한 내용들도 게재됐다. 기사란은 <파리-수아>의 방식을 답습했다. 그 이유는, 알베르티니의 말을 인용하면 “모든 상황이, 이 신문을 통해 대중에게 뭔가 다른 내용과 다른 형식을 제공하기 위해, 마치 신문 책임자들이 대중의 성향과 주요 관심사를 옭아매는 식으로 흘러갔기” 때문이었다.(5)
주필인 엘리 리샤르는 <파리-수아>에서 전향한 인물이었다. 『아뎅 아라비아(Aden Arabie)』와『집 지키는 개들』을 출간한 바 있고, 소설 『앙투안 블루아예(Antoine Bloyé)』를 발표한 폴 니장이 대외관계를 담당했다. 프랑스 여성들이 아직 투표권을 가지지 못했던 시절, 에디트 토마, 시몬 테리, 앙드레 비올리 등은 주로 스페인에서 대형 탐사보도를 맡았다. 소설 『민중의 집』과 『검은 피』로 큰 명성을 얻은 작가 루이 기유는 문학 부문을 담당했다. 그리고 피에르 아브라함은 극작품을, 다리우스 밀로는 음악을, 시인 로베르 데스노스는 음반제작 현황을, 화가 앙드레 로트는 예술을, 엘자 트리올레는 패션을 담당했다.
이 신문에 정기적으로 등장한 유명인사들 중에는 이베트 길베르(아, 그녀가 노래한 ‘마담 아르튀르’…!), 영화인 장 르누아르, 훗날 서커스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긴 트리스탕 레미, 그리고 장 콕토(1938년 11월까지) 등이 있었다. 직선적이고 열정적인 쥘리앵 방다(『성직자의 배임』), 앞으로 영화 역사가가 될 조르주 사둘도 있었다. 르누아르와 작업한 바 있으며 특히 쥘리앵 뒤비비에를 위한 영화음악을 작곡한 장 바이너, 그리고 후에 혁명의 역사를 기록한 조르주 소리아 등 다수의 인물들도 빼놓을 수 없다.
젊은 사진작가들 중에는 일명 ‘침(Chim)’이라 불린 데이비드 시모어, 테루엘 전투 사진으로 여전히 명성이 자자한 로버트 카파와 그의 연인 게르다 타로(1937년 7월 스페인에서 사망했다)가 있었다. 앙드레 말로의 『희망(L’Espoir)』은 서적으로 출간되기 전에 연재소설로 발표됐다. 다른 연재소설로는 토마스 만의 형, 독일인 작가 하인리히 만의 작품이 발표됐는데, 그의 소설 『운라트 교수(Professeur Unrat)』는 프랑스에서 <푸른 천사(L’Ange bleu)>라는 제목을 달고 영화로 각색됐다. 또한 H. G. 웰스의 작품과, 『정글』의 작가이자 정치활동가인 미국인 업톤 싱클레어의 작품도 실렸는데, 업톤 싱클레어는 한때 자신이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멕시코 만세!>를 제작하려 마음먹었던 일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라공의 첫 기사들은 1937년 8월에 실렸다. 그는 1938년 9월 22일부터 신문발행이 금지될 때까지 거의 매일 1인칭 시점으로 장문의 정치기사를 썼다. 1935년에 막심 고리키는 모든 작가들에게 매년 같은 날, 각자가 그날을 겪은 방식에 대해 써달라고 요청했는데, 아라공은 이러한 고리키의 제안에 대한 응답으로 자신의 시평에 ‘세상의 어느 날’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1938년 3월, 독일군이 오스트리아를 침략했다. 일명 ‘안쇼스(Anschuss)’라고 하는,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강제 합병을 일컫는 사건이다.
그리고 이탈리아 전투기가 바르셀로나에 폭격을 퍼부었다. 1938년 4월에는 급진당 출신의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총리직에서 사임한 레옹 블룸의 뒤를 이었다.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달라디에는 ‘프랑스를 다시 일하게 한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인민전선의 성과들을 공격했다. 즉 주40시간 노동 제도를 폐지하고 공무원, 빈곤층, 노조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1938년 9월 22일과 23일에 아돌프 히틀러와 영국의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바트-고데스베르크에서 2차 회동을 가졌고, 1938년 9월 29일과 30일 뮌헨에서 회담을 마친 뒤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및 프랑스의 달라디에와 더불어 협정에 서명했음을 공표했다. 이들의 동맹으로 인해 배신당한 체코슬로바키아의 국토는 분단되고 말았다(뮌헨협정은 독일의 요구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인 거주지역인 주데텐란트를 독일이 합병하도록 승인했다-역주).
“그들에게는 타인의 목숨이 아닌 돈이 필요하다”
이 사건으로 아라공은 펜을 들었다. 그는 공산당 의원들만이 규탄의 목소리를 냈던 스페인 내전의 결과들과 뮌헨의 배신을 분석하며, 인민전선의 정권 장악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들을 무력화하는 글을 날마다 썼다. 아라공은 뮌헨협정의 결과가 불을 보듯 뻔하다고 경고하면서, 이에 저항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한 프랑스, 영국, 소련이 맺은 군사동맹의 절실함을 매일같이 옹호했다. 또한 그는 체코 난민들과 스페인 공화주의자들을 위한 재정지원을 조직했다. “누군가는 돈이 더 필요하다고 할지 모른다. (…) 당신이 재정지원보다 투사가 되어 목숨을 던지는 편을 택한다 해도 막지 않겠지만, 스페인 공화주의자들은 자신들 때문에 누군가의 목숨이 더 이상 희생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소용없는 일이다.”
아라공은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가 노벨 문학상을 받을 수 있도록 캠페인을 벌였다. 카렐 차페크는 풍자적인 작품인 『도롱뇽과의 전쟁』을 썼으며, 체포되기 직전인 1938년 12월 갑자기 사망했다. 아라공은, 달라디에와 그의 정부가 ‘단기성 보험들’과 ‘거짓말’을 남발한다고 비난했다. 아라공은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내 글은 남녀 모두가 읽는다. 그들은 소설을 읽을 때 항상 설렘을 가지고 소설 속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라디오를 듣거나 아바스 통신사의 ‘출판물’ 속 비밀을 간파해내면서, 독자들은 나를 그들 자신과 비슷한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열성을 다해 명료하고 치밀하게 이 문제들을 설명했고, 정권을 둘러싼 ‘2월 6일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6)를 간파할 수 있었으며,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독일 및 이탈리아 정치요원들의 역할을 지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스페인 통일노동당(POUM) 소속 활동가들이 게슈타포의 대리인이라고 고발하는 데 열을 올렸고, 앙드레 지드가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와 내린 결론(공산주의자였던 앙드레 지드는 이상국가라고 생각했던 소련에서 위선과 가식으로 가득 찬 실상을 경험하고 공산주의에 회의를 보였다-역주)을 고수했던 루이 기유와 결별했다.
1939년 8월 23일과 24일 밤사이 모스크바에서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됐다. 23일에 아라공은 다시 한번 이렇게 썼다. “그대들은 이렇게 5개월이란 시간을 허비했다. 소련과 조약을 맺지 않을 구실을 꾸며내느라 5개월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아직 시간이 있다. (…) 조약에 서명한다면, 그것도 빨리 서명한다면 아직 가능성은 있다.”(7) 프랑스 정부는 <뤼마니테>와 <스 수아>에 발행금지 명령을 내렸다.
독일은 9월 1일에 폴란드를 침공했고, 3일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9월 26일, 달라디에 정부는 프랑스공산당의 활동을 금지했으며, 10월 8일에는 43명의 공산당 의원들이 ‘노동자 단체 및 프랑스 농민’이라는 이름으로 체포됐다. 이 ‘기괴한 전쟁’은 1940년 6월 22일에 프랑스와 독일이 휴전협정을 맺음으로써 막을 내렸다. 아라공, 블로크, 그리고 <스 수아>의 기고자들 대다수는 망명을 하거나 지하운동, 즉 레지스탕스로서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1942년에 프랑스 작가 위원회의 기관지인 <레 레트르 프랑세즈(Les Lettres française)>가 비밀리에 탄생한다. 이 신문은 자크 드쿠르, 장 폴랑이 창간한 지식인 레지스탕스 신문으로, 루이 아라공과 <스 수아>의 저자들이 참여했다.
1944년에 프랑스공산당은 프랑스의 제1당이 됐으며, 20여 개의 신문을 소유했다. <스 수아>는 먼저 폴 엘뤼아르의 친구인 루이 파로가 책임편집을 맡았다가, 1945년에 아라공과 소련에서 돌아온 블로크가 자리를 이어받았다. 블로크는 전쟁 동안 라디오 모스크바에서 ‘프랑스의 소리’를 담당했다. <스 수아>는 전성기 때 40만 부 이상을 발행한 프랑스 제1의 일간지였다. 또한 대중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사이클 경기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런 도취감도 1947년에 막을 내리고 말았으니, 블로크가 3월 15일에 돌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스 수아>는 <뤼마니테>와 경영을 함께하고 있었고, 두 신문사는 같은 건물에 있었기 때문에 신문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모리스 토레즈는 다른 4명의 공산당 출신 장관들과 함께 폴 라마디에의 사회당 정부에서 밀려났다. 코민테른을 대체한 코민포름(국제공산당 정보기관)은 프랑스공산당의 개방정책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이는 모든 면에서 규율에 따라 이전 체제로 복귀하는 것이자 냉전의 시작을 의미했다. 1952년에 <스 수아>의 인쇄부수는 <프랑스-수아>의 성공에 밀려 10만 부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스 수아>는 정확히 창간 6년 만이자, 이오시프 스탈린 사망 사흘 전인 1953년 3월 2일에 폐간됐다. 같은 해 아라공은 <레 레트르 프랑세즈>의 책임을 맡았다. 이후 이 신문은 사상과 예술의 삶을 영위하는 고귀한 장소로서 길이 그 입지를 확고하게 다져나갔다.
글·마리-노엘 리오 Marie-Noëlle Rio
작가
번역·조민영
서울대학교 불문학과 석사 졸업.
(1) Louis Aragon, 『L’Œuvre poétique(시집)』, tome VII, Livre-Club Diderot, 1977년, 파리.
(2) 아라공은 당시 『제국의 여행자들(Les Voyageurs de l’impériale) 』(Gallimard, Paris, 1942)의 집필을 모색 중이었다.
(3) Jean Albertini, ‘Ce soir’, <Les Annales de la société des amis de Louis Aragon et Elsa Triolet(루이 아라공과 엘자 트리올레 협회 연보)>, n° 1, Paris, 1999.
(4) Louis Aragon, ‘Retour en France(프랑스로의 귀환)’, 『L’Œuvre poétique(시집)』, <Les Annales de la sociétédes amis de Louis Aragon et Elsa Triolet>에서 인용, n° 7, 2005년.
(5) Jean Albertini, ‘Ce soir’, op. cit.
(6) 1934년 2월 6일에는 파리에서 특히 극우파 단체들의 선동으로 의회에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
(7) Pierre Juquin, 『Aragon, un destin français(아라공, 프랑스의 운명)』, tome 1(1897-1939), éditions de La Martinière, Paris, 2012년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