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지식인들, 비호권을 외치다

2019-01-31     안 마티외 l 로렌 대학교수

1930년대, 실업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던 프랑스에서는 이민을 제한하고 ‘원치 않는’ 외국인들을 쫓아내기 위한 다수의 법이 채택됐다. 이에 프랑스 지식인들은 여러 정당을 비롯해, ‘제노포비아’ 운동을 확대하던 대형 언론사 등에 맞서 펜을 들었다. 그들은 프랑스의 유구한 인권의 전통을 명분으로 앞세워, 스페인, 이탈리아 등 자국의 억압을 피해 도망쳐 온 수많은 난민들에 대한 비호권을 주장했다.

 

1935년, 프랑스의 반유대주의 반대 국제연맹(LICA, 인종차별주의 및 반유대주의 반대 국제연맹(LICRA)의 전신)이 매주 발간하는 기관지 <드루아 드 비브르>(‘살아갈 권리’)에는 ‘비호권을 부활시켜라!’라는 전투적인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그것은 1935년 5월의 일로, 외국인의 프랑스 내 체류와 관련해 체류가능 지역은 신청 지역 1곳으로, 기간은 최대 2년으로 제한한 2월 6일의 법령이 막 발포됐을 때였다. 당시 총리는 자유주의 우파 인사인 피에르 에티엔 플랑댕이었다. 그리고 이 외침은 그로부터 3년 뒤인 1938년, 2차 레옹 블룸 정부의 실각 이후 더욱 거세지게 될 투쟁의 모습을 예고하고 있었다.

 

 “어떤 외국인이 악의를 가졌는지 판단하는 것은, 누구의 몫인가?”

프랑스의 여러 지식인들은 자국 내 외국인들을 위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1935년 8월에는 이주노동자의 지위 보호를 위한 위원회가 결성됐고, 위원회의 사무총장으로는 노동자인터내셔널 프랑스지부(SFIO)와 인권연맹(LDH)에서 활동하며 반인종주의와 반식민주의 분야에서 폭넓은 투쟁을 펼쳐온 기자 마그들렌 파즈가 선출됐다. 그로부터 몇 달 뒤에는 변호사이자 LICA의 주요 책임자 중 한 명인 앙리 레뱅의 주도로 이민자 지위를 위한 위원회 간 연계기관이 설립됐다.

이런 활동들은 1936년 6월 파리 5구 구청에서 열린 ‘비호권을 위한 국제회의’를 통해 하나로 결집됐다. 이 회의의 주최자들은 노동당 대표 조지 랜즈버리, 노동사회주의인터내셔널 대표인 루이 드 브루케르, 센느 지역의 공산당 소속 상원의원인 마르셀 카섕, 그리고 하원부의장이자 국방장관, 전쟁장관 등을 역임한 급진당 대표 에두아르 달라디에도 있었다. 이 회의 이후 이민자 지위를 위한 위원회 간 연계기관의 대표단이 총리실과 내무부를 직접 찾아갔다. “외국인 문제에 대한 정부 구성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지난 6월 21일 비호권을 위한 국제회의에서 채택된 결의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1)

 

반대편에 선 에두아르 달라디에

그러나 이 회의의 주도자였던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반대편에 선다. 1938년 4월 10일 우파 세력과 연합하며 총리직에 올라 인민전선의 붕괴를 이끈 것이다. 그리고 5월 2일 발표된 외국인 대상의 경찰활동에 관한 시행령과 함께 얼마 후인 5월 14일에도 또 한 번의 관련 법령이 공포됐다. 이는 “방향을 잃은 의견을 따른 채,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외국인들을 방목장에 던져 넣는” 처사였다.(2) 

특히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 알베르 사로 내무장관, 폴 레노 법무장관 등이 서명한 5월 2일 시행령 보고서는 서두부터 분명한 논조를 드러내고 있었다. “프랑스 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수가 계속 증가추세이므로, 입법 권한을 부여받은 정부는 몇 가지 조항을 제정하게 됐다. 이는 국가의 안보, 일반경제, 공공질서 수호를 위한 지상 명령이다.” 이 보고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선의를 가진 외국인”과 “환대받을 자격이 없다고 밝혀진 외국인”, “원치 않는 외국인” 사이에 구분을 짓고 있었다. 프랑스 행정부의 기저에 망명자, 난민, 이주노동자의 지극히 현실적인 환경을 바라보는, 일그러진 주관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에 변호사 베티 브랑슈비크는 1938년 5월 사회당의 일간 기관지 <르 포퓔레르>(‘민중’)에서 “어떤 외국인이 악의를 지녔는지 판단하는 것은 누구의 몫인가? 우리는 고민에 찬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실제로 달라디에 정부는 이런 질문들을 줄곧 던져온 여러 지식인들과 충돌해야 했다. 대부분 1930년대 중반 이후 외국인에 대한 억압을 규탄하고 프랑스가 피난의 땅으로서 지켜온 인권 보장에 가해지는 위협을 계속 비판해온 인물들이었다.

 

‘진정한 프랑스’의 상징이 된 ‘추방자들’

“이곳은 냉혹하고 적대적인 회색빛 나라다. 출구도, 공기도, 하늘도, 지평선도, 온기도, 희망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다. 우리 프랑스인들은 알지 못하는, 하지만 프랑스의 안에, 파리 한복판에 위치해 있는 그런 나라다.” 1938년, 마그들렌 파즈는 <르 포퓔레르>를 통해 파리 경시청과 그곳에서 벽에 기댄 채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난민들의 행렬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녀는 <르 포퓔레르>에 7월 31일부터 8월 13일까지 열두 편에 걸친 기획연재를 실었다. ‘프랑스, 피난의 땅’이라는 아이러니한 제목의 이 기획을 통해 환대의 나라인 프랑스 내 외국인들의 상황을 알리려는 목적이었다. 실제로 나치 독일에서 망명한 유대인, 폴란드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건너온 노동자 등 수많은 외국인들은 ‘궁지에 몰린 짐승’과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대학교수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인 에밀 칸 인권연맹 대표 역시도 파리 한복판에 위치한 또 하나의 세상에 대해 그려낸 바 있다. 그는 1938년 5월 인권연맹의 기관지 <레 카이에 데 드루아 드 롬므>(‘인권노트’, 이하 <레 카이에>)를 통해 다른 운동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냉철한 명령을 내렸다. “경시청으로 가라. 강제로 소환된 가련한 이들이 그곳에서 몸을 떨며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이름 모를 공무원들 앞으로 떠밀려가고, 공무원들은 말 한마디로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고 있다.”

<드루아 드 비브르>도 프랑스 정부의 독단적인 처사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더했다. 베르나르 르카슈 LICA 대표는 일부 공무원들에 대해 “무책임할뿐더러 늘 증오와 편협으로 가득 차 있고 민주주의의 힘이기도 한 공정성조차 갖추지 못했다”고 규탄했다. 1938년 6월 1일 발표된 ‘인권연맹 선언’은 “어디서나 하급자들이 과도한 열성을 보인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미 몇 년에 걸쳐 규탄의 대상이 돼왔던 외국인에 대한 ‘배척’과 ‘억압’은 1938년 5월 극에 달했다. 베르나르 르카슈는 “시행령 시행이라는 명분하에 일어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은 추악할 따름이다. 이건 대규모 소탕이나 마찬가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로부터 3개월 전인 1938년 2월에는 이른바 ‘프랑스 노동자와 이주노동자를 연계하는 언론’인 월간지 <프라테르니테>(‘박애’)가 해당 호 전체를 ‘프랑스와 외국인들’이라는 주제에 할애하기도 했다. 

여기서 변호사인 알렉상드르 제바에스는 “우리는 강력하게 요구한다. 오히려 전 세계적 파시즘에 매수된 자들이 억압을 받고, 프랑스 땅에서 추방돼, 프랑스에 해를 끼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기를 바란다고 말이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5월에 발표된 시행령에 대해서도 ‘원치 않는 외국인’의 정의와 관련해 반대하고 나섰으며, 그중 많은 이들은 정부의 인식 결여와 공무원의 비일관성에 대해서도 비난을 쏟아냈다. 제네바에서 국제기구 활동을 하고 있었던 모리스 밀로는 <레 카이에>를 통해 “정부는 이 가련한 이들 중 한 명을 억압하거나 추방할 때, 그 결정이 그에게는 사형판결과도 같은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가?”라면서 “어디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의 감옥”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고위직 인사들을 비롯한 프랑스 정부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앞서 베르나르 르카슈는 이것이 외국인에 대한 ‘증오’라고 표현했지만, 1935~1936년 일부 언론이 외국인 수용에 적대감을 가지고 반외국인 운동을 조직하면서부터 ‘제노포비아(외국인혐오)’라는 표현이 가장 많이 사용됐다. 앙리 레뱅은 1935년 3월 “이는 ‘위에서’ 시킨 일들이다. 어떤 언론이 심은 왜곡된 생각에 빠진 대중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그에 맞는 결과를 알려야만 한다. 이제 외국인 사냥이 시작될 것이다!”라며 격분했다. 마그들렌 파즈도 1936년 5월 평화투사국제연맹(LICP)의 월간 기관지 <르 바라주>(‘댐’)를 통해 “독살범 같은 유력 언론에 의해 널리 퍼진 제노포비아”에 대해 비판했다.

 

연민을 넘어 연대로

수많은 지식인들은 외국인을 낙인찍는 이런 반외국인 운동에 맞서 자기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손가락질당하고 있었던 외국인들이 존엄성을 되찾을 만한 표현을 사용하고자 했다. 이에 이들은 마그들렌 파즈의 글에도 여러 번 등장했듯 ‘국제사회의 파리아(천민)’라는 표현은 불가촉천민의 어감을 주므로, 이를 대신해 ‘추방된 자’라는 표현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레 카이에>, <드루아 드 비브르> 등도 이 표현을 사용했는데, 특히 <드루아 드 비브르>의 경우 1935년에는 ‘추방자들에 손을 대지 말라!’, 1938년에는 ‘범죄가 추방될 것인가?’ 등을 기사 제목으로 싣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939년 5월 인권연맹 센느 지역 연합에서는 ‘추방자들을 구조하라!’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1938년 5월 이후로도 이 취약계층을 여전히 동일하게 지칭하는 법령들이 쏟아졌다. 일례로, 11월에 발표된 내용에는 “원치 않는” 외국인들을 “특수시설”에서 보호수용하겠다는 계획까지 제시돼 있었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드니 페샹스키는 “1차 세계대전 이래 처음으로 자국 인구의 한 계층에 대해 감호조치정책을 부과한 사례”라면서 “게다가 이는 사실상 과거의 반혁명 용의자법이나 다름없는 정책이다. 범죄나 불법 행위의 주모자가 아닌, 공공질서와 국가안보를 해칠 혐의가 있는 자들을 수용소에 보낼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3) 결국 1939년 내전 이후 프랑스로 망명해온 스페인 공화파 인사들은 처음 수용소에 보내진 망명자로서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프랑스는 자국이 인권의 본고장이라는 사실을 잊었던 것일까? 알렉상드르 제바에스는 <프라테르니테>에서 “프랑스 혁명정신에 충실한 자유민주주의 프랑스는 언제나 전 세계의 추방자, 난민, 이민자, 공화파를 위한 피난의 땅이었다”고 주장했으며, 작가인 샤를르 빌드락은 1936년 2월 ‘조합주의 및 인도주의의 월간 간행물’인 <롬므 레엘>(‘실재적 인간’)을 통해 보다 간결하게 “우리는 난민들에게 프랑스에 걸맞은 지위가 주어지길 주장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앙리 레뱅은 1935년 3월 <드루아 드 비브르>에서 다음과 같은 수사적인 질문을 던졌다. “프랑스는 정치적 반란의 정신 속에서도 자유가 뿌리내린 땅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일깨우던 풍요롭고 관대한 국가이지 않았던가?” 여기서 우리는 ‘관대함’이라는 도덕적 가치가 정치적 가치인 ‘자유’와 연결돼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무척 중요한 관계인데, 관대함이 도덕적 굴레 안에 갇히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환대’ 역시 마찬가지다. 1938년 6월 ‘인권연맹 선언’의 결론에서도 “정치 망명자들을 위한” 환대가 언급된다. “인권연맹은 민주국가 프랑스가 여전히 관대한 프랑스이기를 요구한다. 또한 프랑스가 프랑스의 안전과 자유를 침해하고자 공모하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그들을 제거할 권리를 실천하는 한편, 프랑스가 구현하고 있는 이상을 위해 고통받아온 이들과 그 이상을 수호하기 위해 프랑스와 협력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박애적인 환대를 베풀기를 요구하는 바다.” 

그러나 여기 쓰인 ‘이상’과는 정반대인 ‘전통’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1938년 5월 22일 일간지 <뤼마니테>(‘인류’, ‘자비’)에 실린 인민구호(SP)의 성명서에서는 “인간적인 프랑스의 가장 순전한 전통 중 하나, 즉, 추방자와 민주주의의 수호자들을 위한 비호권이 지켜져야 한다는 의지”를 강조하기 위해 ‘전통’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 수많은 인용문 속에서 눈에 띄는 것은 상황이 역전돼 표현된다는 점이다. ‘추방자들’, ‘외국인들’이 오히려 ‘진정한 프랑스’의 상징이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들이 ‘진정한 프랑스’를 보장해주고 있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히틀러 정권 이후 프랑스로 망명한 독일의 작가 겸 언론인인 발터 메링은 1938년 7월 <드루아 드 비브르>의 1면에 이런 도전적인 글을 실었다.

“한 외국인이 자신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국가의 제도를 비판한다는 것은 그 나라의 환대를 남용하는 셈이지만, 인권의 수호를 그만둔다면 인류 전체에 죄를 짓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다. 파시즘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다른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나라를 위협하는 재앙 앞에서 입을 다물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 사람들에게 부당함을 알리고 현대의 종교재판에 맞설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받은 환대를 누릴 유일한 자격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기에 파리 경시청에서 취재를 이어가던 마그들렌 파즈는 당시의 글을 이렇게 맺기도 했다. “그 프랑스인은 살며시 일어났다. 그녀는 일부러 고개를 돌린 채 그 얼굴들 앞을 지나갔다. 그녀는 떠났다. 그녀는 창피함을 느꼈다.” 이 ‘창피함’이 파고들자 파즈는 거의 도망치듯이 자리를 떠야 했다. 파즈로서의 ‘나’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문제에 맞서야 할 한 개인으로서도, 또 프랑스인으로서도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파즈는 인권을 표방하고 인권 침해를 용인하지 않는 또 다른 프랑스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요구하면서도, 하나의 단일체로 묶는 것은 거부했다. 그녀는 1936년 <롬므 레엘>에서 “(외국인에 대한) 보호에 참여할 뜨거운 의지”를 보여주어야 할 넓은 의미에서의 “인민전선의 투사들”이 그저 “이해관계와 원칙적 연민”만을 따라서 반응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그녀는 아직은 인도주의나 구호주의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의 대척점으로 ‘보호’와 ‘연대’ 등의 정치적 개념들을 제시했다. 1938년의 기획연재는 프랑스 국민들을 일깨우기 위한 연설인 동시에, 함께 투쟁하는 동료들에게 진정한 좌파적 양심을 호소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던 것이다. 이와 함께 LICA와 인권연맹의 기관지들도 연대에 대한 호소를 끊임없이 주장했다. 

1936년 9월 <드루아 드 비브르>에서는 앙리 레뱅이 “연대여, 너는 무의미한 말이 아니다!”라며 목소리를 높였으며, 1939년 3월에는 <레 카이에>에 인권연맹 분파들을 향해 “외국인들의 상황”에 대한 호소문을 싣기도 했다. “대규모 반대 운동”이기도 한 이 호소문의 서두에는 “정치적 추방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거만한 동정심의 수단으로 여겨져서는 안 되며, 공화주의 전통에 적합한 연대의 의무로 여겨져야 한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었다.

한편 연대의 길은 때론 위험을 필요로 할 수도 있다. 1938년 6월, 조합주의 및 혁신주의 언론인 <레볼뤼시옹 프롤레타리엔느>(‘프롤레타리안 혁명’)에 실린 탄원서에는 “비호권 존중을 위해! 이제는 항의가 아닌, 맹세가 필요하다”라는 제목이 붙었다. 상대편인 프랑스 정부의 대응에 보다 단호한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 탄원서는 1938년 5월 시행령의 조항들 중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그중 하나인 제4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국인의 불법적 입국, 이동 또는 체류를 직·간접적인 수단을 통해 돕거나 도우려고 시도하는 모든 개인은 앞 조항과 동일한 규정에 따라 처벌한다.” 

여기서의 처벌은 100프랑 이상 1,000프랑 이하의 벌금과 1개월 이상 1년 이하의 징역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조항들에 맞선 탄원서의 전문에는 이탤릭체로 쓰인 “우리는 굽히지 않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어 서명인들의 결의를 더욱 확고히 보여주고 있었다. 서명인들 가운데에는 교사이자 극좌파 운동가인 콜레트 오드리, 반식민주의 및 평화주의 운동가인 펠리시앙 샬레이, 평화론자이자 리옹 고등사범학교 교수인 레옹 에메리, 물리학자이자 전 정부차관인 이렌 졸리오 퀴리, 프롤레타리아 작가이자 무정부주의자인 앙리 풀라이유, 인류박물관 원장이자 반파시즘주의자인 폴 리베 등 다양한 간행물들을 펴낸 장본인들의 이름도 찾아볼 수 있었다. 

탄원서에는 빅토르 위고의 일화도 언급됐는데, 그가 과거 코뮌 정부에 반대해 브뤼셀로 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벨기에가 코뮌 참여자들의 망명을 받아들이지 않자 이에 분개하며 그들에게 자신의 집을 피난처로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일화를 충실히 따르는 서명인들은 이 나라의 고결한 전통에 반대되는 비인간적인 시행령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을 선언하고 있었다. 이상이 시들지 않도록 전통을 살리는 것은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마그들렌 파즈는 알베르 사로 내무장관에게 보내는 공개 서신을 끝으로 한 달 반에 걸친 기획연재 ‘프랑스, 피난의 땅’을 마무리했다. “내무장관님,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의 끝이나 다름없는 법조문의 맨 아래에 장관님의 서명이 있었기에 장관님께 말씀을 올립니다”라고 시작하는 이 서신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저는 난민과 추방자들에게 ‘직·간접적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저의 의지를 막을 수 없습니다. 장관님, 저는 프랑스의 오랜 가문 출신으로서 태어나면서부터 물려받았던 전통을 따르고자 합니다. 만일 추방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이 반역이라면, 저를 반역자 중 하나로 여겨주십시오!”  

 

글·안 마티외 Anne Mathieu
로렌 대학 소속 언론학 및 문학 부교수. 저서로는 『Aden. Paul Nizan et les années trente(아덴. 폴 니장, 그리고 1930년대)』가 있으며, 『Magdeleine Paz, je suis l’étranger: Reportages, suivis de documents sur l’affaire Victor Serge(마그들렌 파즈, 나는 외국인이다: 빅토르 세르주 사건에 대한 취재와 자료들)』(La ThébaÏde, Le Raincy, 2015)를 편집했다.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고려대 불문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파괴적 혁신』 등이 있다.


(1) <르 포퓔레르>, 1936/06/30.
(2) Marianne Amar & Pierre Milza, 『L’immigration en France au XXe siècle(20세기 프랑스 이민)』, Armand Colin, 1990.
(3) Denis Peschanski, 『La France des camps. L’internement 1938-1946(수용소의 프랑스, 1938~1946년의 강제수용)』,Gallimard, 2002, p.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