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 vs.흐루쇼프, 어제의 혁명주의자들과 라이벌들

2019-01-31     세르주 알리미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최고의 전문가들도 실수를 한다. 기자 출신인 프랑수아 페토의 저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1961년 10월 17일. 역사가들은 훗날 이날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날이 역사가들에 의해 기억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예상했던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에서였다. ‘공산주의 대분열’을 다룬 책에서 페토는 이날을 중국과 소련 간의 관계 측면에서 주목했지만, 오늘날 이날은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진 알제리 독립 시위에서 유혈 진압으로 10여 명이 목숨을 잃은 날로 더 강하게 기억되고 있다. 

1964년 출간된 『패권의 종말』에서 페토는 이날을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서 소련이 패권을 상실한 날”로 기록했다.(1) 당시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가 공산당 제22차 당대회에서 서방 언론들이 참석한 상황을 의식해 친중 세력인 알바니아의 공산주의자들을 격렬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1969년에는 두 국가 간에 무력 충돌까지 야기했던 이 심각한 대립과 관련해서 두 가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첫 번째는, 망각이다. 사람들은 중국과 소련이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겪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갈등으로 공산주의 운동은 와해됐고, 지난 사반세기 동안 국제 정세도 완전히 뒤바뀌었다. 두 번째는 은폐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두 공산당 간의 관계, 그리고 그 두 공산당이 속해 있는 두 국가 간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1956년부터였다. 

그러나 불화의 면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였다. 페토에 따르면, 1961년 10월 17일 이전까지는 “양 측이 자신들의 불화 사실을 숨기려고 했다. 비판, 불평, 불만은 은밀한 방식으로 표출돼, 관련된 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수준으로만 외부에 공개됐다.”(2)

그 이후 중국이 유고슬라비아 지도자들의 ‘수정주의’를 어찌나 심하게 비판했던지, 소련 및 친소련 세력들과 티토와의 관계는 더욱더 돈독해졌다. 그리고 소련은 알바니아가 중국 쪽에 선 것을 알고 알바니아를 겨냥해 비난을 쏟아냈다. 그러나 집단규율 덕분인지 (그리고 트위터도 없었던 시절이므로), 흐루쇼프가 1956년 2월 자신의 전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이 저지른 범죄를 낱낱이 고발해 공산당원들을 아연실색하게 한 사건은 몇 주 동안이나 비밀에 부쳐졌다.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연설을 직접 들었거나 회의록을 통해 접한 이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한 이들 가운데서는 흐루쇼프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흐루쇼프가 스탈린주의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사건은 중국과 소련 간의 갈등이 본격화되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마오는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미칠 여파가 뻔히 보이는, 그토록 중요한 결정을 소련 공산당이 단독으로 내렸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중국의 경우 ‘인물 우상화’에 대한 비판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터라, 마오는 스탈린보다 오래 산 거의 모든 이들이라고 해도 좋을, 스탈린을 지지했던 모든 공산당 지도자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발언에 숨어있지 않을까 의심했다. 

그러나 마오는 소련 동지들의 조언, 전반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 조언들을 당분간 그대로 따랐다. 스탈린은 자신의 권력에 대항하는 것을 대부분 참지 못했지만, 1948년 중국 공산당에게 “봉기를 일으킨다 해도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따라서 장제스와 함께 타협안을 모색하고 그의 정부 내부로 들어가 그의 군대를 해체하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했”지만 중국이 이를 따르지 않았을 때는 그냥 웃어넘겼다.(3)

1963년 9월 13일 중국 공산당은 ‘스탈린 문제’라는 제목으로 소련 공산당과의 의견 대립을 다룬 기사를 발표하기도 했지만,(4) 사실 가장 큰 불화의 원인은 평화적 공존 문제였다. 중국 공산당은 소련의 지도자들이 1956년 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도 “제국주의, 전쟁, 평화에 대해 잘못된 시각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어떻게 잘못된 시각이었나? 극도로 폐쇄적이었던 스탈린 시대가 지난 뒤, 소련은 자국의 사회주의 모델을 내세우면 제국주의와의 대립 없이 신생국들을 손쉽게 포섭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또한 소련은 ‘계급의 구분 없이 무차별 살상이 가능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서 미국과 함께 세계평화에 대한 공동책임자로 떠올랐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그 증거였다.

마오는 이와 같은 소련의 행보를 ‘수정주의’라며 비난했다. 그는 사회주의 국가가 늘어난 것은 그저 “사회주의가 제국주의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으로 여겼다. 그러나 흐루쇼프가 미국의 ‘종이호랑이’를 두려워하게 되고 또한 서방세계 지도자들과 결탁했다는 의혹을 받으면서, 제3세계의 혁명운동은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다. 핵전쟁 공포의 경우 마오는 1957년부터 이 문제를 상대화하기 시작했다. 

“핵전쟁이 일어나 인류의 절반이 사라진다 해도 여전히 나머지 절반은 살아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며, 종국에는 지구상에 오로지 사회주의만이 남을 것이다. 50년 후 또는 100년 후가 되면 인구는 다시금 증가할 것이고, 어쩌면 핵전쟁으로 줄어든 인구보다 더 많이 늘어날지도 모른다.”

마오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들을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대상으로 생각하기를 바랐던 것일까? 어쨌거나 지금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러시아와 중국이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종국에는 지구상에 오로지 사회주의만이 남을 것’이라는 예측은 이미 한참 빗나갔기 때문이다.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François Fejtö, 『Chine-URSS. La fin d’une hégémonie. Les origines du grand schisme communiste, 1950-1957(패권의 종말. 공산주의 대분열의 시작, 1950-1957)』, Plon, Paris, 1964.
(2) François Fejtö, 『Chine-URSS. Le conflit. Le développement du grand schisme communiste, 1958-1965(갈등. 공산주의 대분열의 전개, 1958-1965)』, Plon, 1966.
(3) Vladimir Dedijer, 『Tito parle…(티토가 말하길...)』, Gallimard, Paris, 1953.
(4) ’Les divergences entre la direction du PCUS et nous – leur origine et leur évolution(소련 공산당 지도부와 우리 사이의 의견 대립 - 그 원인과 변화 양상)‘, Renmin Ribao(인민일보), Hongqi(훙치 :중국 공산당 중앙 위원회 기관지), 베이징 출판사, 1963년 9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