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폭풍 속의 아프리카민족회의

2019-01-31     사빈 세수 l 언론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제이컵 주마 대통령이 수개월에 걸친 논의와 아홉 번의 의회 불신임 투표 끝에, 지난해 2월 14일 결국 사임을 발표했다.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오던 시릴 라마포사가 대통령직에 오르게 됐다. 사실상 일당 체제나 다름없는 집권 여당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내부 긴장감은 높아지고 있으며, 1991년 아파르트헤이트 종식과 함께 이들에게 돌아갔던 헤게모니적 권력 역시 약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2016년 12월 18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 내 최초의 흑인 억만장자, 시릴 라마포사가 집권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당 대표로 선출된 데 이어 18년 초 대통령에 오르게 됐다. 지난해 2월 제이컵 주마 대통령이 부패혐의에 따른 사퇴요구를 받아들이면서, 라마포사는 지난해 2월 15일부터 대통령 대행을 맡아왔다.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맞서 투쟁했던 그가 밟게 될 이 파란만장한 과정은, 남아공의 최고(最古) 정당인 ANC가 지닌 독특한 정치적 문화와 여러 요소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ANC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소속돼 있는 사회민주주의 계열 정당이다.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선(FLN)이나 짐바브웨의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동맹 애국전선(ZANU-PF)과 마찬가지로 ANC 역시 과거 민족해방운동을 펼치던 무장투쟁단체가 정권을 잡게 된 경우에 속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각종 스캔들과 내부 긴장이 고조되고 있고, 실제로 2014년 선거부터는 득표율도 하락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ANC는 여전히 민주주의적 원리를 따르는 수준 높은 기구로서 남아공의 정세를 좌지우지하고 있다.(1)

영국 식민지 시대인 1912년 당시 흑인 소유의 토지를 강탈하는 정책에 반대하고자 처음 결성됐던 ANC는 이후 한 세기에 걸쳐 쇄신을 거듭해왔다. 이들은 최초로 비서구권 출신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데스몬드 투투 주교(1984)나 넬슨 만델라(1993) 이전에 남아공의 부족 중 하나인 줄루족의 수장이자 평화주의자였던 앨버트 루툴리 ANC 대표가 196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 해는 샤프빌 지역에서 시내 통행을 위해 흑인들은 반드시 ‘패스’(통행증)를 지니고 다녀야 한다는 것에 맞선 시위운동이 일어났던 해로, 당시 진압과정에서 경찰의 총기 난사에 의해 시위대 69명이 목숨을 잃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후 본래 합법적·비폭력주의 단체였던 ANC에 범아프리카회의(PAC), 남아프리카공산당(SACP)과 함께 활동 금지령이 내려지자 이들은 1961년 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변경했고 주로 지하운동과 국외망명을 통해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망명가들은 잠비아 루사카에 본부를 세우고 올리버 탐보의 지휘에 따라 투쟁을 조직했다. 일부는 국내에 남아 인종차별주의 정권에 맞서 싸웠는데, 시릴 라마포사를 비롯한 ‘잃어버린 세대’가 그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1976년 6월 16일 소웨토 학생시위 유혈진압 이후 무장분파를 결성해 반 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을 이어갔다.

 

만델라, 라마포사를 후임으로 점찍다

1983년에는 합법적 국내 단체인 연합민주전선(UDF)이 생겨나면서 각종 기관들과 교회, 그리고 금지령을 받지 않은 여러 노조들이 힘을 합쳤다. ANC의 망명 세력은 UDF와 지속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의심을 버리지는 않았다. 이는 지휘권을 유지하고자 함이었는데, 옥중에 있던 넬슨 만델라가 1986년 이후 홀로 백인 민족주의 세력과 협상을 개시할 때에도 그가 대의를 저버리지는 않을까 의심할 정도였다.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마침내 종식되면서 ANC는 오랜 투쟁의 역사와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넬슨 만델라의 명성을 등에 업고 헤게모니적 권력을 잡았다. ANC는 선거마다 승리를 거듭하며 자리매김했다. 한편 ‘만델라 동지’는 결코 공공연히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측근들에게 ANC를 맡겨 왔다. 실제로 1994년 당시 대통령직에 오른 넬슨 만델라는 자신의 첫 임기가 끝나는 1999년, 타보 음베키보다는 당시 42세였던 시릴 라마포사가 후임을 맡게 되기를 원했다.

소웨토에서 경찰의 아들로 태어난 라마포사는 1982년부터 10년간 법조인으로서 경력을 쌓았고, 전국광산노조(NUM)를 노조원 20만 명 이상의 대규모 조직으로 키워낸 인물이기도 하다. 뛰어난 협상가인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직후 전환기에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 전 대통령이 이끄는 국민당과의 까다로운 논의 과정에서도 역량을 발휘한 바 있다. 특히 만델라는 라마포사가 남아공 북부 지역의 소수 부족인 벤다족 출신이라는 점을 그의 또 다른 강점으로 여겼다. 즉, 남아공 내 최대 부족인 줄루족과 코사족(전체 인구의 약 20%씩 차지) 간의 균형을 에둘러 찾아줄 인물로 본 것이다.

ANC가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이 적극적으로 이용했던 부족 간 갈등이라는 카드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문제는 매우 조심스러운 정치적 이슈였다. 실제로 구 정권은 전환기(1990~1994년)에 흑인 국민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줄루족 민족주의 정당인 인카타자유당(IFP)과 ANC 간의 폭력 문제를 강조하기도 했다. 라마포사는 이처럼 ANC의 내막에 은밀하게 나타나 있었던 이른바 ‘코사 노스트라’(Xhosa Nostra)라고 불리는 코사족의 영향력을 위협하는 인물이 됐다.

만델라, 탐보, 월터 시슬루 등의 출신 부족이기도 한 코사족이 전통적으로 당내 주도권을 쥐게 되는 현상은 남아공 유일의 흑인 대학교인 포트하레 대학이 지금의 이스턴케이프, 즉 과거 코사족의 자치국인 트란스케이 지역에 위치한 데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흑인 지식인층 양성을 위해 세워진 영국계 학교인 포트하레 대학은 의도치 않게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잠비아의 케네스 카운다,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 등 남아프리카 지역의 독립 영웅들을 길러낸 곳이었다. 게다가 라마포사는 국내에 남아 인종차별 정권에 정면으로 맞섰던 비 망명파로서 망명파 진영과도 겨루어야 했다.

전제주의를 전적으로 경계했던 만델라는 뒤를 이을 후보자들 간에 경쟁이 펼쳐지는 것에 만족해했다. 그러나 비책을 능숙하게 다루는 뛰어난 책략가인 타보 음베키가 1994년 ANC의 부대표이자 남아공의 부통령 자리에 앉았고, 라마포사는 정계를 떠나 사업가로서의 기량을 발휘했다. 단, ANC의 최고결정기구이자 남녀 동수로 운영되는 국가집행위원회(NEC) 소속 위원 86명 중 한 명으로서, 목소리는 작지만 인기 있는 위원으로서의 입지를 유지했다.

남아공의 대통령 후보는 일련의 단계를 순차적으로 밟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율이 존재한다. 먼저 ANC의 부대표로 선임된 뒤, 자동적으로 남아공 부통령 후보로 이름을 올리고, 다음으로는 1997년부터 5년마다 총선 2년 전에 열리는 전당대회를 통해 당대표로 선출돼야 한다. 그 후, ANC가 1994년 이래로 압도적 다수당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남아공 의회에서 마침내 대통령으로 선임되는 것이다. 만델라 전 대통령부터 이어져 온 이 과정은 지명된 후보에게 넓은 시야와 경험을 동시에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다.(2)

그런데 타보 음베키는 정권 다툼 중 이후 자신에게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줄 결정을 내렸다. 1997년, 신뢰도가 높은 대선주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과거 ANC의 무장분파에서 정보활동을 이끌었던 제이컵 주마를 부대표 자리에 앉힌 것이다. 음베키가 선거에서 연임에 성공하며 두 번째 임기를 맞던 해인 2004년, 2007년 말로 예정돼 있던 전당대회를 3년 앞두고 문제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이컵 주마가 1998년 대규모 무기 계약 협상 당시 뇌물을 수수했다는 혐의로 2005년 기소된 것이다. 2006년에는 가족의 지인으로 알려진 젊은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는데, 주마 측은 이것이 정치적 술책이라고 주장했다.

2007년, 폴로콰네 지역에서 열린 ANC 전당대회는 한껏 고조된 긴장 속에서 진행됐다. 주마 진영과 음베키 진영은 개인적·정치적 문제를 놓고 서로를 물어뜯었다. 주마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던 당시의 투쟁가를 부르며 포퓰리즘적인 색깔을 드러냈다. 일반 대중과의 거리가 멀고 지나치게 정치화됐다는 평가를 받던 음베키와 차별점을 두려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 및 권력과 연관된 흑인 부르주아층의 등장에 당내 좌익 진영이 느낀 환멸과 실망감을 이용하기도 했다.

당시 남아공의 경제는 성장세를 보였으나, 실업률은 경제활동인구의 27%, 빈곤율은 전체 인구의 42%에 달하는 등 여러 문제가 끊이지 않던 상황이었다. 결국 두 진영의 경쟁은 주마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기존의 음베키 정부에 실망한 이들, 사회주의적 이상과 부의 재분배를 추구하는 당내 좌익 세력, 그리고 일자리 50만 개 창출이라는 공약에 환호를 보낸 유권자들이 모여 이른바 ‘제이컵 주마의 친구들’이라는 대규모 지지운동을 펼친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 공약은 지켜지지 않았다. 2008년 말 세계 금융위기가 발발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마 대통령의 국가운영이 부실한 데 그치고 부패문제도 고착화됐기 때문이었다. 결국 각종 국제신용평가기관은 아프리카 대륙의 유일한 신흥 시장으로 손꼽히던 남아공의 등급을 2015년 이후 ‘부정적’ 전망을 이유로 하향 조정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남아공 화폐 ‘랜드(Rand)’의 가치도 지속적인 하락세를 보이며 2017년 남아공 경제의 후퇴는 가속화됐다.

 

‘모두를 위한 더 나은 삶’으로 가는, 아직 머나먼 길

그리고 지난 2017년 12월, 다른 어느 곳도 아닌 ANC 전당대회에서 또다시 남아공의 미래가 화두에 올랐다. 이번 경선에서는 전체 4,708표 중 179표 차로 시릴 라마포사가 은코사자나 들라미니 주마를 꺾고 당대표로 선출됐다. 은코사자나 들라미니 주마는 주마 대통령의 전 부인으로, 그와 측근관계에 있으며 과거 외교부 장관과 아프리카연합(AU) 집행위원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ANC 창립자들이 세웠던 본래의 가치들을 되찾는 것에 정책 방향을 두겠다”고 밝힌 라마포사는 주마 정권이 보여준 부패, 이기주의, 포퓰리즘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그의 당선은 은코사자나 들라미니 주마가 당선될 경우 그녀의 전 남편인 주마 대통령에 대한 처벌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을까 염려했던 국민들의 우려를 잠재울 수 있었다.

특히 라마포사가 강조한 가치들은 1955년 채택된 ‘자유헌장’에 물길을 터줬다. 이 헌장은 원주민 300명과 혼혈인 200명, 백인 100여 명을 포함해 반정부적 대의원 3천 명이 모여 채택한 것으로, 이를 정책화하기 전까지는 ANC도 헌장의 서명인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자유헌장은 보통선거, 기회의 평등, 그리고 ‘다민족 민주주의’ 등의 명확한 이상을 담고 있다. 특히 다민족 민주주의의 경우, 남아공 국민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수많은 희생으로 추구해 온 가치인 만큼 그토록 쉽게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ANC에는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가장 큰 정치 역학이 녹아있다. 오늘날 당원 수 70만 명을 넘어서는 등 1991년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대형 정당으로 거듭난 ANC는 역사적 정당성을 지니는 만큼 아프리카 대륙 내 젊은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안정성을 보장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헤게모니 장악에 따른 약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장관부터 주지사에 이르기까지 고위직을 맡고 있는 ANC의 지도층은 핵심 요직의 임명이나 공공계약 등의 과정에 -심지어 민간 분야에서도- 주도권을 쥐고 있다. 결국 이들이 변질될 경우 나라 전체가 타격을 입게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또한 여러 스캔들과 국가집행위원회에서 발생하는 잡음에도 불구하고 주마 대통령은 그가 이끌어 온 ANC의 집행부와 그의 고향인 콰줄루나탈 주의 지지를 계속해서 받아왔다. ANC의 정치 문화에서는 운동가들이 ‘조직’이라고 부르는 힘이 개인보다 우위에 있기 마련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의 억압을 버티기 위해 절대 없어서는 안 됐던 이런 조직 우선적인 문화 덕분에 ANC는 누가 대표로 당선되든 관계없이 다수의 ‘분파’(사회주의의 ‘지부’, 공산주의의 ‘세포단체’와 같은 개념)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지도자들을 세워 생존을 지속할 수 있었다. 전당대회가 개최될 때마다 패를 다시 뽑아 온 셈이다.

남아공의 정치학자 윌리엄 구메데의 설명처럼, 라마포사가 지난 전당 대회에서 각 분파를 대표하는 대의원들에 의해 적은 표차로 당 대표에 오른 것도 “그나마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살리려는 안간힘”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ANC는 지난 음베키 정권과 주마 정권으로부터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이 사실이다. 주마 대통령의 사임도 2015년부터 아홉 번에 걸친 불신임 투표 끝에야 얻어낸 결과였다. ANC의 득표율은 2009년 65.9%에서 2014년 62.15%로 이미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다. 급기야 2016년 8월 총선에서는 54%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고, 그 결과 요하네스버그, 프리토리아, 포트엘리자베스 등의 대도시에서도 패배를 맛봐야 했다.

한편 야권의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주로 백인 및 혼혈인의 지지를 받아온 중도우파 정당 민주동맹(DA. 2014년 득표율 22.23%, 2016년 26.9%)은 최근 급진화의 길을 걷고 있으며 2014년부터는 젊은 흑인 대표 음무시 마이마네가 당을 이끌고 있다. 이들은 특히 ANC가 실패한 부분들을 이뤄내겠다고 약속하면서 ‘불평등 철폐와 부의 재분배’를 내세우고 있다. 실제로 남아공의 흑인 가정 수입(남아공 통계청 조사 결과 평균 연 소득 6,600유로)은 백인 가정(평균 연 소득 3만 6,500유로)에 비해 1/6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좌파 진영에서는 2013년 ANC를 떠난 줄리우스 말레마가 창립한 경제자유투사당(EEF, 2014년 득표율 6.35%, 2016년 8.19%)이 부상하고 있다. 이들은 짐바브웨의 무가베 정부가 그러했듯이 광산을 국유화(광산업은 남아공 GDP의 9%를 차지하고 있다)하고 백인 소유의 5만여 개 농장(농업은 GDP의 2.5%를 차지하고 있다)의 토지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ANC 내부적으로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ANC와 유서 깊은 동맹 관계에 있는 남아공노동조합총연맹(COSATU)이 2014년 당시 정부에 대한 비난을 이유로 연맹에서 제명시킨 바 있는 금속노조(NUMSA)가 새로운 노동자당 창당을 준비하며 ANC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주마 대통령이 집권당의 요구 끝에 사임을 결정함에 따라 과거 노조 대표였지만 남아공 맥도날드의 핵심 주주로 자리매김한 시릴 라마포사가 대통령 대행을 맡아오다가 18년 초에 대통령에 오르게 됐다. 약간은 공허하게 들리는 ‘모두를 위한 더 나은 삶’이라는 오래된 슬로건을 내세워 결집을 이끌게 된 것이다. 그는 연 소득 2만 2,800유로 미만인 가정에 대해 무상교육을 제공하고, 실질적인 토지 재분배, 부패조사위원회 신설, 투자유인 및 성장회복을 위한 자유주의적 경제정책 등을 실시하겠다는 약속을 내놓았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아직까지 지난 10년간의 주마 정부와 ANC가 완전히 단절되지 못한 탓에 미래는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다. 실제로 현재 ANC의 부대표를 맡고 있는 57세의 데이빗 마부자는 2009년 주마 대통령을 지지한 대가로 음푸말랑가 지역 주지사로 임명됐던 인물이다. 그 역시도 부패 혐의로 기소됐으며 정치 암살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만큼 아직은 가야할 길이 멀다.

 

글·사빈 세수 Sabine Cessou

언론인

번역·김보희

고려대 불문학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미래 대예측』 등이 있다.

 

(1) Sabine Cessou, ‘L’Afrique du Sud lassée de ses libérateurs(해방 영웅에 싫증난 남아프리카공화국)’,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프랑스어판 2017년 6월호.

(2) Raphaël Porteilla, Judith Hayem, Marianne Séverin et Pierre-Paul Dika (sous la dir. de), 『Afrique du Sud. 20 ans de démocratie contrastée(남아프리카공화국, 대조적인 민주주의의 20년)』, L’Harmattan, coll. 『Etudes africaines』, Paris,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