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을 만들다?

2019-01-31     세르주 알리미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포퓰리즘’이라는 단어의 무분별한 사용이 경제적·문화적 체제에 대한 논쟁들을 무가치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이런 논쟁의 사안이 고유의 논조, 이를테면 각종 토론과 포럼, 참여형 플랫폼 등에서 표현된 것이 아니거나 ‘대중의 재발견’, ‘함께하는 삶’, ‘관계 재정립에 대한 촉구’ 등이 아닌 경우 더욱 그렇다. 샹탈 무페가 포퓰리즘을 설명하는 데 있어 조금 과격하고 투박한 논조, 즉 ‘그들’과 ‘우리’의 대립 구도를 선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1)

여기서부터 여러 난관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좌파 포퓰리즘이 직면하게 되는 가장 명백한 문제는, 과거 보수진영이 사용했던 대립 구도를 사용하면서 민족주의 우파나 극우파가 인기를 끄는 방식을 따라간다는 점이다.(2) 지금의 정치계가 점점 이미지, 기호 중심으로만 흘러가 정책들(발표되더라도 곧 틀림없이 버려지게 될)로는 전혀 표현되고 있지 않은 만큼 좌파 포퓰리즘이 그들과 뒤섞이게 될 위험은 매우 높다. 게다가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이런 위험을 가중할수록, 우파진영에서는 이 단어를 계속 무절제하게 사용할 것이다.(3)

그런데 샹탈 무페는 이들이 ‘헤게모니의 위기’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앞으로는 “정치싸움의 중심축이 곧 우파 포퓰리즘과 좌파 포퓰리즘 간 대립이 될 것”이라고 봤다. 외국인혐오증과 권위주의를 내세운 우파 포퓰리즘과, 평등주의와 민주주의를 내세운 좌파 포퓰리즘(샹탈 무페의 표현에 의하면)이 맞서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적 대립구도의 양극단 모두가 포퓰리즘을 표방하고 있는 만큼,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내포하는 부정적 의미도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자유주의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에(왕성할 정도는 아닐지라도) 그다음을 생각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샹탈 무페는 대립관계에 있는 우파의 포퓰리즘과 혼동될 위험을 철저히 피하기 위해 자신이 주장하는 포퓰리즘은 “좌파의 것”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명확히 하자면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신자유주의로 전환”함에 따라 좌파의 본질이 변질됐기 때문에, 보다 큰 동원력을 가진 대체재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포퓰리즘이 그 역할을 대신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두 용어를 함께 사용할 때 각 용어의 정당성을 일일이 증명하라는 것은, 이미 민감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는 너무 엄격한 잣대일지도 모른다.

넘어야 할 난관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샹탈 무페가 제시하는 포퓰리즘은 이데올로기도, 정책도, 정치체제도 아닌 “정치를 행하는 방식”이다. 달리 말하자면 “집단의지를 드러내기 위한” 전략이며, 엘리트들의 “과두정치”에 공세를 가하고 그들의 헤게모니를 뒤집을 각오를 지닌 대중을 전제로 한다. 좋다, 하지만 어떤 지속가능한 기반을 바탕으로 삼아야 한단 말인가? 자신들의 투쟁에서 서로를 묶어주는 끈끈한 ‘감정(Affects)’에 집중할 때 폭발적으로 ‘생겨나는’ 집단이 대중이라고 한다면, 갑자기 생겨난 만큼, 또 갑자기 흩어지는(또는 찢어지는) 상황은 어떻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샹탈 무페가 가정한 이 ‘집단주체’는 사회학적 범주로는 파악될 수 없다. 사회학적 범주에서는 대중을 여러 이해관계에 결부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의 정체는 농민봉기나 갑작스러운 폭동 등 때로는 미디어를 통해 확산되기도 하는 ‘서로 다른 다양한 투쟁들’의 맥락 안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중은 조직해야 할 대상인가? 이미 정권장악을 위한 전략으로 쓰일 때부터 문제가 되는 이런 불확실성은 그렇게 얻은 정권이 시작되는 그 순간, 즉 골라내고 잘라내야 하는 순간부터 곧바로 위험 요소가 된다. 더구나 엘리트층에 의한 과두정치는 잘 무너지지도 않을뿐더러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에 있어서는 불확실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과두정치의 핵심은 늘 변함없이 계급 의식과 이익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어쩌면 이 때문에 ‘민주주의의 급진화’라는 유일한 공통의 계획-자극적이면서 모호한-을 가지고 있는 좌우 포퓰리즘 연합의 공격으로도 엘리트주의를 무너뜨릴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샹탈 무페는 이상에만 젖어있지는 않다. 그녀는 그 어떤 제도정치와의 연계도 거부하는 ‘수평적 운동’은 ‘제한적 효과’만을 보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다원적 자유민주주의와 철저히 단절한 채 완전히 새로운 정치질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또한 지식인층과 ‘극우인사들’이 내세우는 ‘추상적 목표’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대중의 실제 요구에는 무관심하므로 한계적 위치를 결코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적 주장은 1971~1983년 나타났던 프랑수아 미테랑의 급진적 사회민주주의(좌파)와 페론주의가 보여줬던 계급연합(포퓰리즘)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케인스주의와의 단절이다. 샹탈 무페가 말하는 지금의 시급한 생태주의적 투쟁은, 경제 활성화나 성장 전략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감정’의 역할을 탐색하면서 프로이트를 기반으로 삼는 등 프로이트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는 점도 다르다. 이 모든 주장은 매우 흥미로우며, 전반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하나의 전략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고려대 불문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미래 대예측』 등이 있다.

 

(1) Chantal Mouffe, 『Pour un populisme de gauche(좌파 포퓰리즘을 위해)』, Paris, 2018.

(2) 갈등과 대립을 일으킨다는 의미다.

(3) 특히 프랑스의 정치학자 도미니크 레미니에가 여기에 해당한다. 베르트랑 바디·도미니크 비달이 공동감수한 『2019 세계상황, 포퓰리즘의 귀환(L'Etat du monde 2019, Le retour des populismes)』(La Découverte, Paris, 2018)에 공저로 참여한 파스칼 페리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