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새로 쓰는 ‘비판경제 교과서’ (2)- 생산 증대, 언제나 더 많이!

『비판경제 교과서』연재순서 (1) 경제학은 과학인가? (2) 생산 증대, 무조건 더 많이! (3) 노사관계(다리와 버팀목의 관계) (4) 부의 분배 희망과 난관 (5) 고용,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 하나? (6) 장을 따를 것인가 명증된 법칙을 세울 것인가? (7) 세계화 국민 간의 경쟁 (8) 화폐, 금전과 현찰의 불가사의 (9) 부채 협박 (10) 금융 지속 가능하지 않은 약속

2019-01-31     르디플로

지질학적 힘은 지구를 변화시키고, 경제의 힘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을 바꿔놓는다. 2015년 기준으로 1년이면 창출해낼 수 있는 부의 규모를 달성하려면, 1950년에는 6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현재와 1950년 사이의 경제성장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그동안의 경제성장이 모든 기대를 충족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과거 ‘진보’와 동의어였던 경제성장은 오늘날 생산제일주의와 오염, 환경재앙을 규탄하는 사회와 그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한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경제성장은 과연 개발의 필수적인 단계였을까? 선진국에서의 경제성장은 여전히 바람직한가? 그리고 과연 우리는 ‘자연친화적 자본주의’를 상상할 수 있을까?

 

성장은 번영을 보장할까?  

성장률 수치가 발표될 때면 언론과 정치계는 일단 숨을 죽이고 그 결과에 이목을 집중하기 마련이다. 국내총생산(GDP)은 한 국가가 1년 동안 축적한 부의 총량을 보여주는 지표지만 국민의 삶의 질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다. 국내총생산은 한 나라의 경제수준을 나타내기 위해 흔히 쓰이는 지표지만 부의 분배문제나 생산제일주의가 초래한 생태계 훼손 문제는 뒷전에 슬며시 감춰두고 있다.

과연 성장을 발전의 전제조건인 동시에 척도로 봐야 할까? 이런 성장에 대한 맹신은 사뭇 단순해 보이는 다음의 4가지 사실을 통해 그 허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만다. 

첫 번째 예로는 성장을 논할 때 가장 흔히 제시되는 경제성장 지표, 국내총생산(GDP)을 들 수 있다. 국내총생산은 화폐경제 전 분야에 걸쳐 창출되는 부의 총합을 나타내는 지표로, 비(非)화폐경제(가사노동, 개인과 개인 사이의 자발적 협동, 가내수공 등)는 포함하지 않는다. 로버트 케네디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이 1968년에 했던 농담을 빌리자면, “국내총생산은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측정한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2008~2009년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주도하에 프랑스가 주관한 ‘경제성과와 사회발전 측정에 관한 고위전문가그룹 회의’에서도 이와 같은 의견이 제기됐다. 

국내총생산은 불평등의 심화(성장의 혜택이 1%의 부유층에게만 돌아가는 경우)나 사회적 안녕의 필수요소인 가사, 자원봉사와 같은 활동을 측정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성장으로 인해 발생하는 환경파괴 같은 심각한 부작용조차 반영하지 못한다는 데 전문가들이 의견을 모은 것이다. 심지어 유전자 조작 콩이나 농업 연료용 작물을 재배를 위한 열대 우림의 파괴는 ‘국내총생산의 증가에 기여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국내총생산으로는 환경파괴로 인류가 잃어버리는 비화폐적 부의 가치를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예로 과거 높은 성장의 산물인 1인당 국민총소득(GNI)을 꼽을 수 있다. 과연 1인당 국민총소득이 높은 국가의 국민은 그만큼 더 잘 살고, 그 사회는 더 바람직한 모습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 기대수명, 교육 접근성, 빈곤율, 소득 불평등, 성 불평등, 폭력과 살인 등 다양한 변수를 대입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수많은 변수도 우리가 기대하는 답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빈곤국에서는 각 변수와 1인당 국민총소득 혹은 국민총생산(GNP) 간의 ‘양의 상관관계’를 찾아볼 수 있더라도, 일정한 경제수준을 넘어선 단계(프랑스의 경우 1970년대 이후)에서는 이와 같은 상관관계가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의 발전’과 ‘사회적 진보’는 경제적 풍요와 성장이 아닌 다른 어떤 요인이나 정책의 영향을 받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세 번째로, 생태학적 기준을 적용하면 성장과 ‘진보’는 서로 불일치를 넘어 모순관계에 있음이 드러난다. 1960~1970년대 미국에서 활동한 저명한 경제학자 겸 철학자인 케네스 볼딩의 다음과 같은 결론을 예로 들 수 있다. “유한한 세계에서 기하급수적 무한성장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 바보거나 경제학자다.”

  

성장보다, ‘성장 없는 번영’이 절실한 때

이 모순관계를 설명하는 사례로 먼저 성장의 필수요소인 천연자원의 고갈을 꼽을 수 있다. 광석이나 화석연료처럼 재생이 불가능한 천연자원은 언젠가는 고갈되고 말 한정된 자원이다. 물, 나무, 경작지, 해양자원은 재생가능 자원으로 분류되지만,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이 자원들은 자연의 법칙과 고유한 리듬에 따라 재생산이 이뤄지므로, 인류가 충분한 회복기간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태 발자국’ 지표를 보면, 인류의 생태자원 소비는 자연의 재생능력을 훨씬 넘어섰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성장은 필연적으로 대기와 해양에 수많은 공해를 유발할 뿐만 아니라, 지구온난화의 요인이 되는 온실가스를 늘린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모순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눈에 띄게 성장이 둔화한 프랑스의 사례(그래프 참조)와 같이, 앞으로 선진국의 성장은 불가항력적으로 매우 낮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 분명하다. ‘성장 없는 번영’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는 이유다.

 

개발도상국 경제는 뒤처진 게 아니라 억눌린 것

주류 경제학을 비판하는 여러 의견 중에는 노동현장에서 발생하는 기업가와 임금노동자 간의 착취-피착취 관계를 밝혀내고자 하는 부류가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특징인 권력의 불균형이 국가 간 관계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세계의 지배 구조가 중심부 국가(북반구에 주로 위치한 부국들)와 주변부 국가로 양분돼 있다는 견해다.

‘저개발 상태’라는 개념은 1949년에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1945~1953년 재임)이 처음 사용했다. 그는 당시 빈곤으로 ‘저개발 상태’에 놓인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중남미 국가들이 공산주의 진영으로 넘어가는 것은 아닐지 우려하고 있었다. 이 개념은 경제개발을 시간에 비례해 선형으로 증가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선진국은 다른 국가보다 먼저 발전의 과정에 뛰어든 것이며, 격차를 줄이는 것은 개발도상국의 몫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격차를 어떻게 좁힐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생각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세계 경제체제 안으로 더욱 깊숙이 편승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흔히 불합리한 것으로 평가되는 경제 분야에서의 주권 행사 의지는 내려놓고, 현대화의 바람을 타고 밀려오는 국제 자본에 경제를 개방하면 만사형통이란 것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경제학자 라울 프레비쉬(1901~1986)는 이와 같은 선형발전 모델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1940년대 당시의 세계를 중심부(본질적으로 근대화된 자본주의 국가)와 주변부(그 외 국가)로 구분했다. 1957년 초, 일부 학자들은 저개발과 개발이 차례로 이어지는 단계가 아닌 공존하는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의 전개과정에서 발생하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 개발격차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서로 맞닿아 있으며, 자본주의를 통해 선진국에 부의 축적이 집중된다는 견해이다. 16세기 초를 전후해 서구사회와 나머지 세계 인구의 95% 사이의 빈부격차는 최대 2:1에 지나지 않았다(유럽 국가들이 어느 시기에나 우위를 점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5세기에 걸쳐 자본주의가 전개된 결과, 격차는 30:1로 벌어졌다. 이것은 인류역사상 유례가 없는 변화에 해당한다. 개발도상국들의 자원을 무분별하게 개발한 결과, 중심부에서의 발전은 자연스레 주변부의 저개발을 초래했다. 따라서 아프리카 국가들이 식민시대를 거치며 지배국가의 자본주의 체제에 편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개발의 측면에서 서구와의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식민지배국들은 자신들이 설계한 경쟁구도 안에서 자국의 힘을 강화하기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국제 금융기구는 국제자본에 대한 경제개방만을 촉구할 뿐, 결코 생산수단의 현대화를 도모하지 않는다. 그 결과 개발도상국은 천연자원을 수탈당하거나 국가재정에 타격을 입게 된다. 물론 두 가지 비운이 잇따라 닥치기도 한다.

    

사회적 진보의 요건은 개발도상국간 연대

개발도상국은 불평등의 함정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일부 아시아 국가들은 국제분업에 참여함으로써 자국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개발 측면에서의 발전은 미흡한 면이 없지 않다. 발전에 ‘뒤처졌다’라는 개념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진영에서는 ‘자본주의 모델에 대해 다각적으로 강경한 입장과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산업화와 농업혁신에 기초한 자주적 생산체계 구축을 목표삼아, 자국 중심의 발전을 이룩하는 것을 해결방안으로 제시했다. 이렇게 하면 경제적 측면에서 중심부-주변부 관계의 불평등을 줄일 수 있고 국제 정치 무대에서 힘의 균형을 찾을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1955년 반둥회의를 이끈 기조의 핵심이다. 반둥회의에 모인 이른바 ‘비동맹 운동(Non-Aligned Movement, NAM)’의 회원국들은 개발도상국 간의 적극적 연대, 민주화와 사회발전의 조건을 논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행해야 할 각종 조치는 오늘날에 이르러 보호주의, 환율 통제, 국가의 시장 개입이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그러나 이 조치들은 사실 선진국들이 과거 발전의 도구로 썼던 수많은 수단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오늘날의 개발도상국들이 그 수단을 똑같이 적용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자연은 시장경제의 새로운 엘도라도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과 달리 자연은 경제의 생산요소에 포함되지 않는다. 인류는 자연이 주는 자원을 이용하기만 할 뿐, 보상할 줄 모른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자연 파괴의 근원이 아낌없이 내어주는 자연의 성격에 있다고 본다. 일부가 자연을 살리기 위해 제시하는 ‘자연에 값을 매기는 방법’은 초점이 빗나간 무의미한 처방에 지나지 않는다. 

셔츠 한 벌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전통적으로 생산은 두 가지 핵심자원의 결합으로 이뤄진다고 본다(흔히 이를 생산의 ‘요소’라고 칭한다). 생산물을 생산하려면 먼저 인간의 노동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디자이너가 직물, 실, 단추와 같은 재료를 가지고 세련된 셔츠로 탈바꿈시키는 데는 디자이너 자신의 에너지와 재능이 들어간다. 노동을 통해 새롭게 창출된 가치가 중간투입물에 더해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최종 생산물인 셔츠의 가치에는 재봉틀이나 컴퓨터와 같은 자본의 가치도 일정 부분 투영된다. 그런데 이렇게 생산에 투입된 도구 역시 과거 시점의 최종 생산물이기 때문에 해당 중간투입물의 생산에 쓰인 노동시간만큼을 셔츠의 가치에서 제외하게 된다.

이 개념을 가장 명확히 설명한 것은 리카르도의 『노동 가치론』이다. 고전 정치경제학을 확립한 영국의 경제학자인 리카르도(1772~1823)는 자연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노동만이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다고 봤다. 리카르도의 뒤를 이은 경제학은 오랜 기간 인간중심주의 기독교적 세계관의 전통을 따랐으며, 자연을 인간의 유익을 위해 창조된 것, 인간의 통치 대상으로 이해했다.

 

자연의 노동에 대한 착취

이런 관점에서 보면, 천연자원은 자연이 점진적으로 행한 노동의 결실인 셈이다. 예컨대 죽은 플랑크톤이 수백만 년이 지나 석유가 되는 과정을 ‘자연의 선물’로 보는 것이다. 천연자원이 아무리 주요하고 필수 불가결한 요소에 해당하더라도 재화의 가격형성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목수가 옷장을 만들기 위해 목재를 구매할 경우, 목수가 지불하는 목재의 가격에는 벌목공의 노동과 숲의 토지자본만 포함될 뿐, 자연 앞으로 돌아갈 몫은 전혀 없다. 자연을 결코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관대한 공급자쯤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오히려 천연자원의 보호와 보존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해서 자연의 몫을 셈에서 제함으로써 부의 창출이라는 경제적 접근방식에 치중하게 되고, 생태와 환경에 관한 문제는 간과하는 결과를 자초한 것은 아닐까?

자연유산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괴되는 현상은 ‘대가성’이 없는 데에 기인한다는 발상에 따라, 일부 경제학자들은 자연보전에 가격을 책정하자고 제안했다. 예를 들어, 브라질 맹그로브에 서식하는 새우를 남획하는 행위는 심각한 환경파괴를 초래한다. 환경 피해로 발생하는 비용을 새우의 가격에 포함시키면, ‘이론적’으로는 자연 유산 복원에 필요한 재원을 공급하고 새우의 남획을 막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경제학계에서는, 이와 같은 일련의 조치가 ‘외부효과를 바로잡는다’라고 말한다. 즉, 특정 경제 활동이 제3자에게 비용을 발생시켰으나, 활동 당사자가 그에 따르는 비용을 치르지 않아 시장에 비효율을 초래한 경우, 활동의 결과에 값을 매기는 (가격 체계에 반영하는) 조치다. 언뜻 보기에는 기발해 보일 수 있는 발상이지만, 실상은 자연에 두 번 가격을 매기는 결과를 가져온다. 산업생산을 위해 자연이용에 대한 비용이 발생했는데, 자연보전에 또 한 번 값을 매긴다면 그 자체가 또 다른 재화가 돼 수익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탄소배출권 거래시장의 예를 살펴보자. 이는 탄소를 배출하는 기업들이 거래소 내에서 탄소배출권을 서로 사고팔 수 있도록 하는 제도지만, 제도적 비효율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마치 과열된 투기시장처럼,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끝을 모르고 치솟기만 하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새로운 금융 파생상품이 개발돼, 특정 생물 종의 소멸이나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의 가능성에 대해 투자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영국의 지리학자 닐 스미스는 자본주의 체제의 초점이 환경에 맞춰지면서 자연이 ‘자본축적 전략’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평가하며, 항상 더 많은 천연자원을 소비하기를 갈망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상품시장의 경계를 끝없이 확장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녹색으로 치장한 자본주의

풍력발전 시장의 활성화, ‘환경친화적’ 공정 확산, ‘유기농’ 라벨 상품 생산 증대, 이 모든 노력은 기업이 환경에 친화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임이 틀림없지만, 기업의 이윤추구 논리와 자연의 흐름은 상반된 성향을 드러낸다. 기업계에서는 별로 달갑지 않겠지만, 자연을 살리려면 기업의 활동을 제한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경제인연합회(MEDEF) 피에르 가타즈 회장은, 2013년 9월 18일 자 <르몽드>지에 ‘프랑스 경제를 탈성장으로 이끌어선 안 된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경제와 기업 활동을 환경과 대립시켜서는 안 된다! 생산 및 서비스 산업은 이미 오래전부터 친환경 활동을 추구해왔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독단주의와 공세적 태도에서 벗어나 실용적이고 이성적”인 선택을 한다면 환경친화적인 ‘녹색 자본주의’가 가능하다고 말했는데, 이는 주요 다국적 기업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결국 기업의 ‘국제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세금과 기업 활동을 방해하는 규제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가타즈 회장의 이런 논리는 설득력이 다소 부족해 보인다.

 

공해의 해외이전

상당수의 서구 국가가 서비스 위주의 경제로 전환됐다지만, 기업 경영진이 주장하는 긍정 논리에 빠져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천연자원 사용량은 1980년과 2007년 사이 65% 늘어나 지속적인 증가세를 기록해왔다. 역사 이래 오늘날과 같이 압도적으로 많은 자원을 소비하고 공해물질을 배출한 시대가 없었다. 으레 회자되는 것처럼 자원의 소비와 공해의 근본 원인은 빈곤한 국가의 성장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서구 국가들은 생산시설의 해외이전을 통해 일자리뿐 아니라 공해와 천연자원의 개발까지 국외로 이전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을 언제까지나 유지할 수는 없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지구 정상회담(World Summit on Sustainable Development: WSSD)을 통해 도입된 지표인 ‘생태 발자국’이 이를 증명한다. 이 지표는 인간이 자원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토지 면적으로 환산해 지구에 얼마만큼의 흔적을 남기는지를 보여준다. 2001년 전 세계 생태 발자국은 생태계가 자원을 재생할 수 있는 생물생산 능력의 138%를 기록했고, 2010년대 초에는 150%를 넘어섰다. 만약 지구의 모든 사람이 평균적인 미국인의 생활방식대로 산다면, 인류는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5개의 지구가 필요할 것이다.

 

지구를 지키려면 이윤 보다는 자연의 순환을 중시해야!

지난 15년 동안 수많은 풍력발전소와 태양광 발전 패널이 새로 지어졌다는 것이 곧 ‘녹색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자본주의는 환경에 더 많은 해를 가하고 있다. 경제는 늘 더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하므로, 재생에너지는 공해를 유발하는 기존의 에너지를 대체하지 못하고 보조하는 데 그치고 있다. 

가전제품, 전화기와 컴퓨터, 식료품과 같은 소비재의 나날이 줄어드는 수명만큼 교체주기는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 그 결과, 더욱 많은 제품을 생산하게 된다.

과연 이런 과잉소비가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칠 것인가? 더 적은 소비로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는 자본주의를 꿈꾸는 것은 그저 순진한 발상일 뿐일까? 이미 1970년대에 미국 환경학자 베리 코모너(1917~2012)는 자본주의의 특성상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증명한 바 있다. 자본주의는 최대의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자본이동의 완전한 자유화라는 기본원칙을 전제한다. 그러나 지구를 보호하려면 이윤이 아닌 자연의 순환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 이는 즉, 생물 종이 자연적인 재생산을 통해 유지될 수 있도록 어획량을 줄이고, 생태계가 재생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하는 오염물질을 배출하지 않으며, 재생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에너지를 소비하는 방식을 우선해야 한다는 뜻이다. 탈성장의 패러다임으로 볼 수 있는 이런 일련의 조치를 자본주의에 적용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인다.

 

유럽판 뉴딜 정책은 어디로?

최근 실업해소 대책으로 대두되는 방안은 기업경영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사회보장기여금 인하, 세금 면제, 쉬운 해고와 같이 기업의 혜택을 늘리는 ‘공급중심의 정책’이 정부 주도의 경기부양 정책의 입지를 좁히고 있다. 이제 정부 주도 정책은 실효성을 잃은 것일까?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요행이 따르지 않는 한, 실업은 시장경제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봤다. 따라서 경제가 숨을 허덕이고 구직자가 넘쳐나는 상황에서는 정부가 직접 개입해서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 개입의 가장 효과적인 예로는 미국의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대통령이 1933~1938년 ‘뉴딜(New deal; 새로운 합의)’ 정책의 하나로 시행한 대형 건설사업을 들 수 있다. 

2016년에 당시의 정책을 적용한다면 아마 신규철도 건설, 고단열주택 시공, 초고속 인터넷망 구축 사업이 적용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원리는 무엇일까? 정부투자의 즉각적 효과는 고용창출로 나타날 것이다. 과거에 실업자였던 사람은 직업을 구해 얻은 소득으로 각종 지출과 주거를 해결하고, 책을 사고, 휴가도 떠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시장에 투입된 돈은 여러 차례의 순환을 거듭한다. 그의 지갑에서 나온 100유로는 정육점과 서점, 빵집 주인, 치과 의사의 수중으로 들어갈 것이다. 판매량의 증가, 영수증 수의 증가, 고용량의 증가, 이것이 바로 정부의 공공지출이 가져오는 ‘승수효과’다.

 

원금 회수

재정지출을 세수로 다시 메운다면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정부가 10억 유로를 투자해 대학을 건설한다고 가정하면 국내총생산(GDP)이 50억 유로 증가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고, 여기에 다시 세금을 부과하면 정부는 투자금을 다시 회수할 수 있다.

그러나 승수효과는 두 가지 큰 한계를 보인다. 첫째는 가계가 소득 일부를 지출하지 않고 저축하기로 결정하는 경우로, 투입된 돈의 흐름이 중간에서 끊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둘째로 소비자들이 수입된 외국제품을 구매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관세나 환율통제와 같은 내수시장 보호 장치가 없는 경우라면, 경제 활성화 효과를 수출국에서 가져가 버리게 된다. 프랑스 정부가 1981년에 마지막으로 시행한 대대적인 경기부양책이 이에 해당하는데, 당시 독일과 일본의 공산품 수입이 늘어나 무역수지 악화로 이어지고 말았다. 

최근에는 국제통화기금(IMF)의 분석결과와 같이 재정지출의 승수효과가 높게 나타나기 때문에 정부의 경기부양 효과는 유지하면서 재정적자나 무역적자의 위험은 피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특히 유럽연합의 경우 회원국 간 교역이 60%에 이르는 만큼 유럽연합 차원에서 경기부양책을 시행한다면 보다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또한 비회원국과의 교역을 관계를 악화시킬 우려도 적다는 이점도 있기 때문에 추진을 적극 고려해볼 만하다.

 

자발적 민간투자를 대체하는 정부지원

이런 제안의 실현을 막는 장애 요인으로는 다음의 세 가지 요인을 꼽을 수 있다. 첫째는 유럽연합 회원국 간의 무역적자를 꼽을 수 있다. 예컨대, 만약 소비자들이 독일 제품을 선호한다면 유럽연합 차원의 재정투자 혜택은 독일 경제에 편중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둘째는 이념적 요인을 들 수 있다. 1970년대 이래, 유럽연합 내에서 케인스식 경제정책의 효과를 인정하는 정부가 없다시피 한 실정이다. 

셋째는 제도적 요인이다. 유럽연합의 평균 부채 비율은 2015년을 기준으로 GDP의 86%에 달한다.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을 통해 정한 60%를 훨씬 상회하는 결과다. 아울러 유럽연합은 2013년 1월 1일부로 발효된 ‘안정, 조정 및 거버넌스에 관한 조약(the Treaty on Stability, Coordination and Governance)’에 따라 각 회원국이 과잉 재정적자에 대한 대응을 우선순위로 정하고 구조적 재정적자를 연간 GDP의 0.5% 이하 수준으로 유지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한편 유럽연합은 2015년에 210억 유로 규모의 공공부문 투자를 결정했다. 이 재원으로 향후 3년간 15배의 승수효과를 발생시켜 약 3,150억 유로의 투자 창출을 기대하는 만큼, 올바른 선택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레버리지 효과로, 정부지원이 사업의 수익성을 높여 더 큰 규모의 민간 투자를 유인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현실에서는 정부의 지원이 자발적 민간 투자를 대체해 오히려 민간의 영역을 축소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한편, 브뤼겔연구소는 추정치를 통해 유럽연합의 목표가 실현된다고 해도 1970~2014년 유럽연합 연평균 투자지연액(2,600억 유로)의 40%를 해소하는 데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쇠퇴인가 한계인가?

사람들은 흔히 탈성장이 국가경기 쇠퇴를 옹호하는 운동이라고 오해하고 비난을 쏟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탈성장 옹호론자들은 악화일로의 경제상황에 개탄을 금치 못한다.

이 운동의 핵심은 결코 경기침체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며, 자기 파괴적인 경제정책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는 데 있다. 탈성장 운동은 다른 수식어가 붙은 성장(이를테면 녹색성장)이나 발전(지속가능한 성장이나 사회적 발전, 인류 연대적 발전 등)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탈성장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회, 즉 검소하지만 풍요롭고, 성장 없는 번영을 누리는 사회를 지향한다. 

그렇다고 해서 탈성장을 즉각 구현가능한 일종의 경제 프로젝트로 보면 곤란하다. 그보다는 현실에서 괴리된 정책을 양산하는 오늘날의 경제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회적 어젠다로 이해해야 한다.

결국, 탈성장의 본연의 의미를 왜곡해 ‘지속가능한 성장’의 변형으로 보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그 과정에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탈성장’이라는 용어가 현재와 같은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94년이다. 루마니아 태생 미국 경제학자 니콜라스 제오르제스쿠 로에젠이 저술한 글을 책으로 묶어 프랑스어판으로 출간할 때 그 책의 제목에 탈성장을 언급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후 탈성장을 특집으로 다룬 환경운동 잡지 <실랑스>의 2002년 2월호가 큰 인기를 끌면서 우연에 가까운 계기로 탈성장이라는 개념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초기에는 일종의 슬로건처럼 사용됐다. 이후,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임기: 1979~1990년)가 애용했던 강령 TINA(대안은 없다는 의미의 ‘There Is No Alternative’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단어)에 대항이라도 하듯, 너무 보편적으로 쓰여 의미가 퇴색한 ‘지속가능한 성장’을 대체하는 개념으로 ‘탈성장’이 새로운 주목받게 됐던 것이다. 

‘탈성장’은 이내 정치 생태학, 경제성장에 대한 문화 비평 등 분야와 분파를 불문하고 널리 쓰이는 하나의 표어가 돼버렸다. 결국, 성장 옹호론자들이 즐겨 쓰는 모순어법인 셈이다.

 

‘무신론’의 예처럼, 성장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의미로 ‘무성장’이라는  단어를 쓴다면? 

이는 결국,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단어에만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탈성장을 위한 탈성장’은 ‘성장을 위한 성장’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허한 말의 연속일 뿐이다. 본래 의미의 탈성장은 삶의 질이나 공기, 물 그리고 그동안 ‘성장을 위한 성장’이 파괴해온 수많은 것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유신론에 대치되는 개념이 무신론인 것처럼, 성장 앞에 부정과 결여의 의미를 나타내는 접두사를 사용한 ‘무성장(Acroissance)’이라는 단어의 새로운 조합으로 의미를 강조하는 노력이 필요할 수도 있다. 실제로 무신론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신앙을 거부하는 것처럼, 탈성장의 핵심은 발전을 부정하고 성장을 거부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탈성장은 성장이 둔화하는 경기 침체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경제불황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케인스 경제학의 경우처럼 신고전주의의 정통성에 반기를 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탈성장을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그런 길을 택한 일부 옹호론자도 있다. 그 밖의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이해타산적이라고 여기는 개인의 사고에 인간의 선택을 한정하는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생태학적으로 지속가능하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오늘날의 선진국처럼 ‘성장이 없는 성장중심의 사회’에서는 현실과 괴리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이제 더는 답이 되지 못한다. 그저 환경파괴를 부추길 뿐이다.

 

맹목적 신뢰

앞서 논의한 지표의 타당성 문제를 통해 우리는 성장중심 사회에서 맹목적인 신뢰를 받는 지표인 국내총생산(GDP)의 허점과 삶의 질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를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앞서 문제의 핵심이 경제의 특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충분히 논의하지 못했다. 문제의 근원은 사실 경제 그 자체다. 경제학에 대한 정의는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변화했다. 고전 경제학자들이 어떻게 부가 창출되고, 분배되며, 소비되는지를 밝히는 학문으로 경제학을 정의했다면, 그 뒤를 이은 신자유주의자들은 희소한 자원의 최적배분을 연구하는 학문이 경제학이라고 주장했다. 경제학의 이런 일반적이고 모호한 정의는 범죄, 사랑, 건강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욕망을 경제의 돈주머니 안으로 쓸어 담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상만사가 경제로 귀결되며, 여기에 ‘예외는 없다’는 억지주장이 아니겠는가?

탈성장 운동이 권하는 바와 같이, 경제를 다시 사회의 틀 안으로 가져오고, 그동안의 한계를 시인하는 것이야말로 성장 없는 번영에 이르는 길이며, 인류의 파멸을 피하는 방법이다.  

 

 

 

글·<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부

번역‧이푸로라 poorora@daum.net

연세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KDI 국제정책대학원 석사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