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비극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 <쿠르스크>

2019-01-31     정재형 l 영화평론가, 동국대교수

역사적 진실과 영화적 진실

비극은 왜 중요한가? 희랍시대에 유행했던 비극은 곧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 『시학』을 통해 비극이 오랫동안 인간의 삶 속에서 존재해야 함을 역설하지 않았나. 비극은 왜 철학인가? 인간의 본질을 알려주는 가장 근본적인 성찰의 대상이 비극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비극적 존재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불행은 원초적이며 근원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비극과 희극은 얼굴이 다른 쌍둥이에 다름 아니다. 비극이 존재하기에 인간은 비참하고, 삶이 고통스럽다. 그래서 그 고통스러운 삶을 극복하기 위해, 긍정의 에너지를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바로 희극 아닌가. 웃음은 울음의 반대편 얼굴이고 페르소나이며, 위선인 것이다. 웃음을 통해 인간은 고통을 피하고, 진실을 마주하지 않아도 돌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인간의 삶은 이렇듯 정공법인 비극과 우회법인 희극으로 점철되어 있다. 삶의 본질은 다 같다. 직선으로 가든 곡선으로 가든 슬픔과 고통은 항상 인간의 본질이다. 

영화의 기능은 인간의 고통스런 삶을 노래한다. 비극적이든 희극적이든 고통은 되새김질 되며 의미화된다. 영화가 오락인 동시에 철학인 이유가 그곳에 있다. 영화는 단지 관객을 즐겁게만 하는 매체가 아니다. 영화는 극의 형식을 통해 고통을 도려내어 관객한테 내놓으며 사는 것의 진실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진지하게 토론한다. 영화 <쿠르스크>는 푸틴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시점에 발생한 러시아의 비극적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진실이 존재한다.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진실인 쿠르스크호 대참사다. 인간에게 고통과 비극은 떠나지 않는다는 추상적인 역사적 교훈이다. 영화적 진실은 무엇인가. 고통과 비극보다도 그것을 마주하는 인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들이다. 영화는 현실이 못다 한 이야기의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진실을 관객에게 설득시킨다. 

 

러시아 관료주의와 애국자의 희생

영화의 주인공은 미하일이다. 그는 아들과, 둘째를 임신한 아내를 두고 승선한 책임감 있는 수병이다. 낙후된 잠수함 쿠르스크호가 항해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어처구니없는 폭발사고가 일어난다. 사고로 상당수 수병이 사망하고, 몇몇 수병들이 생존해 구조를 기다린다. 이때 침착하게 부하들을 다독이며 인내심을 잃지 않고 잠수함을 지휘했든 상관이 미하일이다. 그의 애국심과 전우애는 상부에서 움직이는 러시아 정치권 및 군 수뇌부의 냉혹한 정치체제와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영화는 미하일의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생존 병사들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구조에 실패해 전원 사망할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비극의 역사를 강조한다. 그 비극을 초래한 장본인은 러시아군 수뇌부와 정치가들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이 정치의 희생물이 되는 비인간주의를 고발하는 주제를 가진다.

소재나 내용 전개의 과정을 보면, 쿠르스크호 사건이 세월호 사건과 흡사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쿠르스크호나 세월호 사건의 공통점은 충분히 구조할 수 있음에도 구출하지 못했던, 억울하고 원통한 사건이라는 점이다. ‘억울함과 원통함’이라는 정서가 이들 역사적 사건을 관통하는 주제의 한 측면이다. 인간의 삶이 비극적이라는 것은, 억울함과 원통함이란 개념이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키워드라는 점에서 철학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비극이 인간이 어쩌지 못하는 불가항력의 초자연적 기원을 갖고 있다면 수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충분히 막을 수 있고, 인간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었던 일임에도 그것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이라면 인간은 그 상태를 견딜 수 없다. 인간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극화 가능한 비극이란 단지 운명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초월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자초해낸 인재(人災)이기에 더욱 비극적인 것이다. 

 

액자식 구조속의 숨겨진 텍스트 주인공

미하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활한 정치권의 판단으로 희생되고 만 수병들, 부패한 러시아 정치권과 미하일의 위대한 정신이 이 영화의 주제라면 영화는 단지 한 면만을 부각시킨 것이다. <쿠르스크>의 영화적 구조는 좀 더 내밀하고 섬세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다른 일반적인 고전적 할리우드 양식과는 구별되는 다른 텍스트 구성을 보여준다. 영화는 수중에서 호흡하지 않고 견디는 미하일의 아들을 비추며 시작된다. 이어 미하일과 그의 아내가 등장하며 가족의 모습이 소개된다. 미하일 중심으로 영화는 전개되지만 최초의 프롤로그 장면의 인물이 이후 마지막을 장식하는 독특한 구조를 지닌다. 

최초와 마지막을 구성하는 또 다른 주인공은 그런 점에서 미하일의 아들이다. 그렇게 보면 영화는 두 명의 주인공, 두 명의 화자를 설정한 텍스트다. 영화를 시종 내내 끌어가는 주인공 화자는 내적 화자다. 그가 미하일이라면 또 다른 주인공 화자 즉, 외적 화자는 그의 아들이다. 주인공 격이었던 미하일은 사망하고, 그의 빈 자리를 아들이 이어 영화를 마무리한다. 주인공이 죽는 영화는 흔히 고전적인 구성이 아니다.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두 명의 주인공을 화자로 해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구성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첫 장면인 아들의 모습은 중요하다. 아들이 물속에서 숨을 쉬지 못하고 견디는 것은 그대로 아버지의 운명이 된다. 아들과 아버지는 그렇게 교감이 된다. 극도의 절망 속에서 한때 아버지 미하일은 물에서 아들의 환영을 만난다. 그는 자신에게 헤엄쳐 오는 아들을 보면서 안도감을 느낀다. 왜 아내가 아니고 아들이어야만 할까. 여기에 바로 이 영화가 강조하려는 다른 주제가 숨어 있다. 아버지가 아들과의 재회를 즐기는 그 안락함에 계속 빠져 있었다면 그는 아마 물속에서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영화는 그가 숨을 내쉬며 물속에서 빠져나오는 장면을 뒤이어 보여준다. 아버지와 아들의 교감 장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아내가 아닌 아들이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의도적 설정들은 이 영화의 주제를 암시하는 장치다. 

아들은 다음 세대. 아버지는 그 전 세대다.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넘어가는 역사적 전언, 그래서 아버지 미하일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죽어야만 한다. 그건 역사적 메시지다. 아버지 미하일은 훌륭한 군인이고 정의로운 시민이고 진정한 애국자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동양의 지혜는 그를 가리켜 이렇게 표현한다. 개인이 운명을 이기지 못한다. 이 영화는 그대로 현대의 비극이다. 아서 밀러는 현대의 비극은 사회시스템이 개인을 억압하는 데서 온다고 봤으며, 그 생각을 희곡 <세일스맨의 죽음>을 통해 보여 줬다. 열심히 노력하고 성실하게 살아간 주인공 윌리 로먼이 비극적 상황이 되는 이유는 그에게서 찾을 수 없다. 변해가는 세상과 그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비극인 것이다. 날로 산업화되고 물질화되어가는 세상에서 한때 유능했던 인간이 설 자리는 없다. <쿠르스크>는 그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인간 미하일의 정신보다도 더 중요한 진리는 그다음 세대가 그 정신을 어떻게 계승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인 것이다. 

 

미하일이 죽고 난 이후 그의 장례식에서 보인 아들의 행동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제인 것이다. 그는 러시아군 장성의 악수를 무시하고 그를 증오의 눈으로 직시한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많은 유가족 어린이들이 그를 따라 같은 행동으로 일관한다. 이는 ‘신세대는 구세대의 악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암시한다. ‘신세대는 구악을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 운명처럼 지배하는 체제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기능이 단지 역사적 사실을 극화하고 재현하는 단순한 차원을 뛰어넘어, 관객으로 하여금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과 성찰을 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그리고 관객 또한 영화를 단순히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를 통해 철학적 성찰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 영화다.  

 

 

 

글·정재형
동국대 연극영화과교수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을 역임했다. 『영화이해의 길잡이』, 『영화영상스토리텔링100』 등의 역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