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하는 관객성, 친밀한 관음증
<슈퍼스타 K>의 오묘함

2010-10-08     김성윤/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슈퍼스타 K 2>는 우리 감각을 어떻게 지배하는가.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불편부당한 질문일 수 있겠다. 고작 시청률 15%대의 케이블 방송 프로그램이 현대인의 감각을 지배한다니, 이는 일종의 판단착오가 아닌가. 그러나 ‘리얼리티 탤런트 쇼’라는 프로그램 형식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고, 이제 막 두 번째 시즌 중인 이 프로그램이 파생 텍스트들을 양산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분명 중요한 함의가 담겨 있다.

미국의 <아메리칸 아이돌>과 영국의 <브리튼즈 갓 탤런트>를 모방한 <슈퍼스타 K>라는 대중문화 텍스트는 지금 한국 방송계 지각변동의 중요한 진원지가 되고 있다. 첫 번째 시즌은 주로 10대와 20대 초반이 시청했다면, 지금 두 번째 시즌은 20대와 30대, 나아가 40대에까지 저변을 확대하고 있다. 회를 거듭할수록 케이블 TV로서는 이례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고, 심지어 공중파인 문화방송에서 <위대한 탄생>이라는 유사한 포맷의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확실히, 지금 우리는 ‘탤런트 쇼’라는 형식에 대해 캐묻고 답할 단계에 와 있다.

다수의 사람들이 <슈퍼스타 K>를 보면서 기뻐하고 화내며 슬퍼하고 즐거워한다.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렇게 될 것이다. 대체 어떤 프로그램이기에 이렇게 화제가 되는 것인가. 때때로 중요한 매듭이란 텍스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구설과 논란 자체에 있을 수 있다. 일상적 대화와 미디어의 외설적 담론 속에 은폐돼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함의를 밝혀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의문에 빠지거나, 아니면 다른 이들과 토론한다. 대략적인 형식은 다음과 같다.

<슈퍼스타 K>는 <아메리칸 아이돌>의 모방에 불과한 것 아닌가, 콘테스트의 우승 기준은 가창력인가 대중성인가. 이때 시청자는 관람하는 것인가 참여하는 것인가. 참가자의 가족사 고백은 끈끈한 가족애의 발현인가 아니면 미디어의 사생활 관음증인가. 이 프로그램의 최종 승자는 결국 엠넷 미디어이거나 코카콜라인 것은 아닌가. 왜 상대적으로 존 박은 20대 여성에게 인기가 많고, 강승윤은 10대 여성에게, 그리고 장재인은 남성에게 더 인기가 있는가. 도전자들은 순수하게 꿈을 좇는 것인가 아니면 세속적 성공을 위해 경쟁하는 것인가. 김그림은 탈락해 마땅한 것인가 아니면 마녀사냥을 당한 것인가 등등.

시청자는 이러저러한 논란 속에서 판단을 내리기 마련인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판단이 어떻게 분포해 있는지가 아니라 왜 이런 논란이 산출되는지에 있다. 요컨대 응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질문 자체가 중요하다. 이런 논란에 주목한다면 그중에서도 대중성, 참여, 사생활, 가족애 같은 (유사) 언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그 외의 모방, 섹슈얼리티 등의 논점은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 단적으로 말해, 시청자나 언론이 <슈퍼스타 K>를 보면서 이런 (명시적이거나 함축적인) 언어를 연상한다면,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슈퍼스타 K>라는 텍스트가 바로 그런 쟁점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슈퍼스타 K 2>가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우리는 이 콘테스트의 우승자 선별 기준이 가창력에 있는지 대중성에 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게 된다. 슈퍼위크에 올 동안 10명 내지 11명을 뽑는 과정에선 심사위원들의 심사로만 판정하니까 그런 질문이 생기지 않지만, 시청자가 생방송 중에 ‘문자 투표’를 하는 동안에는 사정이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시청자는 존 박에게서 성적 혹은 포스트식민적 매력을 느낄 수 있고, 또 어떤 시청자는 장재인에게서 동정적 혹은 성적 매력을 느낄 수도 있다. 실제로 노래 실력 외의 다른 요소가 개입하기 시작하면, 이른바 ‘대국민 문자투표’의 실체가 결국엔 인기투표가 아닌지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특히 콘테스트 참가자들의 사생활이 인터뷰나 가족 출연의 형태로 영상화될 때면 시청자로선 가창력에 대한 심사보다는 주관적인 감정 몰입에 호흡을 빼앗기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 강승윤이 단체생활 속에서 빨래나 설거지를 성실하게 하는지, 김지수나 장재인이 숙소 생활 중에 규칙을 성실히 행하는지, 허각과 존 박 혹은 허각과 박보람 사이에는 우애가 돈독한지, 또 누구와 누구는 얼마나 애틋한 감정을 갖고 있는지 등 사생활 장면은 시청자가 참가자들과 맺게 되는 주관적 관계의 연결고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전문성이 아닌 대중성, 그리고 공적 생활이 아닌 사생활이라는 강조점은 역으로 <슈퍼스타 K>가 시청자에게 민주성과 친밀성을 제공해주는 측면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경제적인 것이 세상을 지배하는 유일한 원리가 되고 있기에, 대중의 생활 조건은 정치적 참여로부터는 소외되고 사회적 관계에서는 파탄을 맞는 것이 당면한 현실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슈퍼스타 K>라는 문제적 텍스트는 ‘전문성 대 대중성’뿐 아니라, ‘관객성 대 참여성’, ‘관음증 대 가족애’, ‘세속성 대 순수성’, ‘성공 대 꿈’ 등 대칭적 문제 설정을 대중에게 던져준다. 달리 말해, 참여와 친밀이 보장된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갈망이 이 프로그램의 특정한 코드들과 조응하는 것이다.

<슈퍼스타 K>의 실체를 민주주의나 친밀성 등의 덕목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이 오늘날 대중에게 특정한 갈등적 상황을 동기화하는 것은 분명하다. 아니, 역으로 오늘날 대중이 양자택일적인 선택지 사이에서 항상 갈등하고 고민하고 있기에 이 프로그램은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는 셈이다. 실제로 우리는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혹은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에서 번민하고 있으며, 그 극단 사이 어디쯤을 선택해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 까닭에 오늘날 대표적 유행 형식인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대부분 이런 갈등 구조를 체현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슈퍼스타 K>와 같은 리얼리티 탤런트 쇼를 일컬어 ‘민주주의적 연예산업’(Democratic Entertainment)이라 부를 수도 있다.

물론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왜냐하면 <슈퍼스타 K>가 제공하는 민주주의적이고도 친밀한 감각이 TV 브라운관 앞을 떠난 삶의 나머지 영역에서도 일반화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프로그램이 공공성을 표방하고 시청자 개인에게 공적 담론에 참여할 스펙터클한 장소를 제공해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민주주의적으로 기능할 뿐이지 민주주의 자체와는 구별돼야 한다. 오히려 시청자-참여자를 생산적 행위자라기보다는 여전한 문화 소비자로서 재각인하고 동일화하는 시도임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거의 동일한 원환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슈퍼스타 K>는 참여하는 관객성, 친밀한 관음증, 순수한 세속성, 혹은 허울뿐인 민주주의에 지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질문을 던지는 우리의 감각은 진화하는 지배 논리에 전유되기 쉽다.

글•김성윤 
사회학을 전공하고, 현재 중앙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