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 패권, 다극 체제로 향하다

미·유럽·일본에 동아시아·중국·인도 도전… 분권화된 시스템 형성

2008-12-01     필립 S. 골륌 | 파리8대학 교수

 신흥개발진영, 내생적 성장동력 활발
사실 양자 간엔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점들이 있다. 19세기 전반 미국의 경제성장 및 영토 확장과 남북전쟁(1860-1865)에 이은 눈부신 산업화 이면에는 자본 형성, 교통 인프라 확충, 식민지 개척 및 영토 개발, 통합된 대륙시장 창설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국제투자자본이 있었다.2) 당시의 국제투자자본은 대부분 영국 자본이었지만 그렇다고 영국 자본이 전부는 아니었다. 어쨌든 이 같은 초국적 투자자본이 없었다면, 미국은 신속하고 강력한 발전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우리는 이상한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글로벌 시스템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본의 논리는 국민국가별 세계 분할을 뛰어넘는다. 동시에 특정 지역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결국 강대국의 등장을 낳고, 때로는 헤게모니 주도국을 출현시킨다. 그러나 20세기 말 신흥개발국가들의 점진적인 세계경제 편입은 현대 국제 시스템의 지속적인 불평등과 남북 격차 심화를 초래했던 강제적인 편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늘날, 신흥개발국가들이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 내에 통합되면서 내생적 성장 요소들의 동원이 가능해졌다. 물론 중국, 인도, 브라질 같은 국가들이 미국-유럽-일본으로 이어지는 삼각동맹 국가들에 대해 경제적 의존 상태에 놓여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국가는 점차 자립도를 높여가고 있다. 예컨대 동아시아에서 역내무역의 비중은 1980년 40%에서 1995년 50%로, 오늘날에는 60%까지 증가했다. 이러한 교역의 지역화는 1980년대와 1990년대 미국시장 일변도의 단일시장 의존도가 점차 줄어들고 있음을 반증한다.

중심·주변부 구분없는 '다중심' 질서
"유럽은 역사의 종착점이고 아시아는 출발점이다. 고로 세계의 역사는 동에서 서로 이동한다." 헤겔의 1831년 저서, <역사철학강의>에 등장하는 이 유명한 문장은 19세기 이후 전면에 등장했던 목적론적 표상 체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회과학은 '서양의 독특한 특성'가설을 주창했다.3) 서양은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 덕분에 발전하고, 부상하고, 확대될 수 있었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양의 관점에선 19세기 아시아 및 비유럽 세계의 '정체'는 '근대성'의 도구적 합리성을 거부하는 종교적 세계에 갇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되거나, 아니면 이른바 '아시아적 생산양식' 같은 전(前)자본주의적 원시생산 양식의 존재로 설명되었다.
이 같은 표상체계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다. 1820년 이전까지만 해도, 서양과 동양의 생활수준, 지식, 시장제도와 경제활동 양식은 상이하기보다는 유사했다. 또한 단순히 인구 요소만을 놓고 판단해도 비유럽권의 '세계 경제'들이 유럽권 국가들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중국, 인도, 오스만제국은 촘촘한 지역교역 네트워크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었다.4) 지배적 중심부와 종속적 주변부로 세계를 분열시킨 국제 위계질서는 서양의 경제 및 영토 확장이 강압적으로 진행되던 시기에 비로소 탄생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동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남아시아라는 '신흥' 개발지역을 둘러싼 균형 재편 현상의 역사적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프랑수와 페루는 '적극적 경제단위'라는 개념을 설정, "단순히 자신의 프로그램을 주변 환경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환경 자체를 자신의 프로그램에 맞춰 나가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5) 과거에 주변부에 머물러 있던 이 지역들이 바로 이런 개념에 해당하거나, 이를 지향하고 있는 셈이다. 이 현상은 19세기 초 유럽의 산업혁명 이후 가장 중요한 변화다. 서양의 경제 및 영토 확장에서 탄생한 위계질서를 뒤흔들고 있으며, 1820년 이전에 우세했던 다중심 국제질서가 새로운 역사적 조건을 통해 복귀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일본 이어 동아시아, 중국·인도 부상
이러한 변화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아시아 급부상의 반복이다.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했던 일본과, 단 2세대 만에 '제3세계' 탈출에 성공한 동북 및 동남아시아의 신흥공업국들에 뒤이어 이번에는 중국과 인도가 놀라운 성장 동력을 보여주고 있다. 1980년에서 2006년 까지 중국의 구매력 평가(PPP) 기준 1인당 GDP는 16배나 증가했고, 인도의 1인당 PPP-GDP는 5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국과 인도의 세계경제 기여도는 각각 세계 GDP의 3.2%에서 13.9%로, 3.3%에서 6.17%로 상승했고, 오늘날 세계 GDP의 34%에 달하는 아시아 전체의 기여도는 2020년이면 거의 45%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6)
이 같은 신흥개발지역의 부상은 세계경제의 작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국제노동분업의 구조가 변하고, 점점 더 다양한 상품군이 등장하고, 제조업 상품 가격이 하락하고,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엄청난 잉여자본을 축적한 이 지역들에 유리하도록 금융 재분배가 발생하고 있다. 사실 2000년 8천억 달러에 달했던 이들 국가의 달러 보유고는 오늘날 3조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전 세계 달러보유고의 70%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아래 도표 참조>
그야말로 1919년 이후 세계금융의 중심이었던 미국의 외부로 금융 권력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7) 반면에 미국의 금융 모델은 위기를 겪고 있다. 시티그룹, 모건 스탠리 등 월스트리트 금융기관, 바클레이즈 등 영국 은행, UBS 등 스위스 은행들은 살아남기 위해 중국, 싱가포르, 중동 국가의 국부 펀드에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됐다. 실제로 아시아 국부 펀드는 2007년 6월과 2008년 6월 사이 서양의 금융기관 및 은행에 460억 달러를 투자했는데, 이는 문제가 된 금융기관 증자액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였다.8)

 패권의 분산, 충격·무리없이 진행
역사적으로 구조의 변화는 매우 드물다. 따라서 세계 최고 인구밀집 지역의 사상 유례가 없는 신속한 발전과 현대화가 초래한 내적, 외적 도전의 규모와 다양함을 고려할 때, 현재의 변화가 아무런 문제없이 완성될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내생적 또는 외생적 대규모 충격이 없다면, 현재의 변화는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러한 대규모 충격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물론 과거에 발생했던 시스템의 중심 이동은 일반적으로 국제 위기를 수반했다. '팍스 브리타니카'는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물이었으며, 미국이 영국에 뒤이어 세계경제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도 2차례의 세계대전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국이 이번 만큼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1815년이나 1914년과는 반대로, 권력은 하나의 중심에서 또 하나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중심으로 분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적 차원, 심지어 아시아나 유럽 같은 지역적 차원에서도 해결할 수 없는 글로벌한 문제에 직면한 상호의존적 세계에서, 이 다수의 중심들은 강화된 협력을 지향하게 될 것이다. 이는 적어도 규범적 차원에서 이뤄지리라는 기대다. 현 금융위기 맥락에서 중국이 국부 펀드를 통해 월스트리트를 돕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은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즉, 중국이 미국 권력의 핵심 구성요소 중 하나와 상호의존 관계를 맺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제 공은 서양으로 넘어갔다. 중심의 자리에 익숙한 서양이 다수 중심의 새로운 세계를 수용해야 한다.

 번역|박수현 domyosie@ilemonde.co.kr *

 


 

* 유럽연구소 연구원 및 파리 8대학 교수

 

1) 호안강, 왕립국제문제연구소 연설, 채텀 하우스, 런던, 2007년 4월 18일.
2) 데이비드 & 컬 , <국제자본시장과 미국의 경제성장: 1820~1914>, 캠브리지대학출판사, 1994년.
3) 잭 구디, <서양속의 동양>, 르 쉐이유, 파리, 1999년.
4) '중국과 인도가 세계를 지배할 때,  <마니에르 드 부와>(Maniere de Voir) '중국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 파리, n°85, 2006년 2월~3월호. 케네스 포메란츠, <그레이트 디버전스>, 프린스턴 대학 출판사, 뉴저지, 2000년.
5) 프랑수와 페루, <권력과 일반화된 경제>, PUF, 파리, 1994년, p.236.
6) 세계은행 및 IMF의 자료은행에 기초한 추정치.
http://www.econstats.com
7) 맥킨지 글로벌 연구소, <제 4차 글로벌 자본시장 연례 보고서>, 2008년 1월, p.7.
8) 로랑 키뇽, '금융위기, 미드스트림 은행', <콩종크튀르>(Conjoncture), BNP-Parisbas, 2008년 5월, 조지 소로스, '60년 만의 최악의 시장 위기', <파이낸셜 타임즈>, 런던, 2008년 1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