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시민의 참여를 두려워하는가?

2019-02-28     기욤 구르그, 쥘리앙 오미엘

노란조끼 시위대의 시민주도형 국민투표제(Référendum d’initiative citoyenne·RIC) 도입 요구는 국민투표를 둘러싼 논의를 촉발했다. 사실 국민투표제는 여러 국가에서 장려하는 시민발의제도의 다양한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 내에서 확립된 질서를 고수하려는 국가 통치자가 어떤 방식으로 국민과 정보를 공유하고 공적 토론을 끌어내는지다.

 

 

20세기 초부터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장려하는 다양한 발의 제도가 고안됐다. 유권자들은 각종 제도를 활용해 정부 기관 앞으로 토론회 개최, 법안 및 쟁점 사안 검토를 요구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표결을 제안할 수도 있다. 이론상으로 시민들은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정책사안을 가리고, 그 성격을 규정하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미국 콜로라도주(州)의 주민발의 투표와 이탈리아 토스카나주(州)의 참여법처럼 서로 이질적인 사례에서 일반적인 교훈을 도출하기란 어렵겠지만, 적어도 흔히 발생하는 두 가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발의제도가 각종 제약을 받는다는 점이며, 두 번째는 소수의 정치인이 공론화하기를 꺼리는 사안을 발의의 내용으로 삼으면 정치인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제도가 변칙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대의민주주의의 여느 ‘참여적 개혁’과 다를 바 없이 시민발의제와 관련된 원칙을 수립하는 이들 대다수가 국민이 선출한 정치인들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정치인들은 공공의제를 설정하고 결정하는 자신들의 특권을 내려놓게 될까봐 두려운 나머지, 시민발의제의 활성화를 저해하는 장벽을 높이 쌓아 올린다. 그 결과 시민들의 발의권은 유명무실한 권리로 전락한다. “모두들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사실상 아무런 효력이 없음을 잘 알기에 아무도 행사하지 않는, 그저 허울뿐인 권리가 되고 만다.”(1)

프랑스는 2016년 8월 3일에 제정한 조례를 바탕으로 환경민주주의 분야에서 주민발의제를 도입한 바 있다. 개발사업자가 법으로 정하는 요건에 따라 사전에 협의한 의무를 준수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발의권을 행사해 사전 협의를 주도한 단체장 앞으로 관련 의무를 준수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발의 제안 후 2개월 이내에 해당 지역구 주민의 최소 20%(다수의 지역구나 지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일 경우에는 지역별로 최소 10%)로부터 동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아울러 발의권은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특정 사업에만 국한되며, 설령 모든 조건을 만족하더라도 단체장은 발의안을 기각할 수 있다.

유럽연합의 경우, 2007년부터 리스본 조약에 따라 시민들이 직접 유럽연합기구에 입법안을 제출할 수 있도록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시민발의(ICE) 조건을 충족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먼저 7개국의 회원국에 속하는 7명 이상의 시민이 발의자가 돼 시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유럽집행위원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이내에 최소한 유럽연합 회원국 1/4에서 시민 100만 명의 서명을 획득해야 한다. 

정치학자 필립 알드랭과 니콜라 위베는 “이와 같은 과정에는 기술적‧조직적 지원이 수반된다”며, “상당한 관계망과 제도적 자원도 필요하다. 따라서 일반 시민들보다는 로비스트나 전문성을 갖춘 시민단체 위주로 발의가 조직될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2) 이런 사실은 수치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출된 50건의 발의안 중 단 4건만이 검토대상으로 선정됐다. 유럽집행위원회는 식수권, 인간 배아 보호, 동물실험 금지, 글리포세이트 사용 금지에 관한 발의안에 대해서만 검토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단 한 건의 발의도 실질적 입법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시민발의에 소극적인 집행위원회의 태도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적극적이고 조직적이며, 정치화된 시민들이 발의권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충족한다 해도, 정부 당국은 특정 주제가 쟁점화되는 상황을 막고자 할 경우라면 서슴없이 변칙을 적용해 상황을 모면하곤 한다. 2009~2013년 프랑스 경제사회환경위원회(CESE)가 국민 청원제도를 통해 보여준 대응 논리는 평소 정부가 내놓는 수많은 궁여지책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사례로 꼽힌다. 

당초 정부는 이 제도를 통해 시민들이 원하는 주제로 청원에 참여하도록 하고, 일정 조건(무려 50만 명 이상의 서명을 요구함)을 충족하는 사안에 한해 경제사회환경위원회의 검토의견을 제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2013년에 동성혼 반대단체 연합인 ‘모두를 위한 운동(Manif pour tous)’의 활동가들이 동성혼의 합법화(일명 모두를 위한 결혼 법, Mariage pour tous-역주)에 반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청원제도를 활용하면서, 프랑스 정부를 그야말로 공황상태에 몰아넣었다.

경제사회환경위원회는 해당 청원이 모든 조건을 충족함에도 법률 검토 중인 동성혼 법안은 해당 기관의 권한을 벗어나는 사안이라는 이유로 청원을 기각했다. 이후 파리 행정법원이 청원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판결을 한 차례 내놓기는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2017년 프랑스 최고행정재판소가 경제사회환경위원회의 손을 들어주면서 해당 청원을 수리하지 않기로 했다.(3) 이 법정 공방은 시민발의제도를 대하는 정부 당국의 방어적 입장을 여실히 드러내는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경제나 예산 정책을 방어하는 정부의 태도를 살펴보면 이런 판단은 더욱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유럽연합의 차원에서 살펴보면, 2014년 몇몇 유럽 시민들이 범대서양무역 투자동반자협정(미·EU FTA)에 관한 공적 논의를 촉구하고자 유럽시민발의를 통해 발의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유럽집행위원회는 무역협정에 관여하는 것은 적법하지 않다는 이유로 해당 발의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2017년 5월 10일에 유럽사법재판소는 집행위의 처분을 비판하며 해당 발의안이 미국과의 무역협상에 아무런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4)

이번에는 지방 정부의 사례를 살펴보자. 프랑스 그르노블시(市)에 새로 발족한 지역단체(환경·불복종·시민 연대)의 노력으로 발의조건을 대폭 낮춘 제도가 도입됐다. 새로운 제도는 주민 2,000명 서명이라는 조건을 충족할 경우, 안건을 주민표결에 부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2017년에 한 시민단체가 시립 도서관 폐쇄에 반발하는 운동을 벌이자 그르노블시 정부는 국고보조금 축소에 따른 예산부족을 이유로 주민투표 시행을 거부했다.(5)

시민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그르노블시 직원인 에릭 피욜 씨는 “적잖은 노력을 기울였다”라고 답했다. 주차요금을 안건으로 첫 주민투표가 이뤄진 직후인 지난해 5월, 그르노블시가 속한 이세르 지방 정부는 행정 재판을 감행했고 시의 권한을 벗어난다는 이유로 발의 조건을 완화된 제도 도입을 전격 무효화 했다.

하지만 시민발의제도가 갈등 회피주의나 자유주의의 족쇄에 묶여 좌초돼서는 안 된다. 20세기 초에 미국 애리조나주와 콜로라도주, 오리건주의 주민들에 의해 제안된 시민투표는 여성의 투표권 확보, 아동노동의 철폐, 1일 8시간 근무제 도입 등의 새로운 권리 획득과 사회적 발전을 가져왔다. 보다 최근에는 직접투표의 결과로 대마초가 합법화되기도 했다. 시민발의제는 정당 중심으로만 공공담론이 생산되는 기존 관행을 타파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런 맥락에서, 2007년 이탈리아에서는 토스카나주 지역위원회가 2,000여 명 주민들의 참여로 완성된 ‘참여법’을 공포했다. 

이 법은 지역 주민들의 정치 참여를 제도적으로 지원할 뿐 아니라, 시민들의 활동을 돕기 위해 지역위원회의 합의로 선임된 ‘참여 민주주의 전문가’를 투입해 100만 유로 규모의 기관을 운영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또한, 이 법은 시민청원제도 방식을 도입해 최소 2,000명의 서명 조건(인구가 38만에 달하는 피렌체의 규모를 고려하면 매우 적은 인원)을 충족할 경우, 시민들이 채택한 사안을 공론화하는 데 필요한 재원과 물자를 지원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시민의 능동적 참여와 의사결정기구의 독립성을 한데 결합한 독특한 성격의 이 제도는 유럽 참여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수면으로 끌어올려 여론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2011년에는 피렌체의 이슬람교도들이 이탈리아에서 논란이 된 이슬람 사원 건립에 관한 논의를 촉구하고 나섰다.(6) 이 발의안은 서명조건을 쉽사리 충족했고 토스카나주는 해당 단체 앞으로 토론진행에 필요한 보조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피렌체에 거주 중인 리맘 씨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슬람교도들이 원하는 것은 기도를 올릴 마땅한 장소를 마련하는 것뿐이며 “반드시 무슬림 공동체뿐만 아니라 지역 공동체 양쪽의 입장이 최종 결정에 고루 반영되기를 바란다”라고 밝혔다.(7)

일반적인 기대, 무엇보다 정치인들이 바라는 바와는 달리, 관련 토론은 평온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현재 자금 부족으로 이슬람 사원 건립은 여전히 계획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공적 토론을 거치면서 현지의 기대에 부합하는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시민발의제는 사회 주류 집단에 속한 사람들(대부분의 현지 이슬람교도들은 이탈리아 국적이 없기에)의 토론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대중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런 결과를 달성하기 위한 조건으로는 수준 높은 정보, 체계적이고 개방된 토론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공공의 논의가 특정 집단의 도구로 활용되는 상황을 무엇보다 경계해야 한다. 스위스에서는 국민발의의 형태로 ‘미나렛(이슬람 사원의 기도 탑-역주) 건립 금지’를 위한 국민투표 발의안이 제출됐으며, 약 11만 3천 명의 유권자가 참여한 가운데 1년 만에 발의가 승인된 바 있다. 토스카나주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스위스의 국민발의제도는 스위스 중도민주연합(UDC)의 주도 하에 당파적이고 법적인 대립구도를 형성했으며, 이슬람 종교에 오명을 씌우는 데 시의적절하게 활용됐을 뿐 아니라 최소한의 논의만 허용하는 데 그쳤다.(8)

그러나 스위스의 직접 민주주의제도를 단 하나의 예로 단순화해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스위스 주(州) 정부나 연방정부 차원에서, 정부가 맡은 주된 역할은 국민의 결정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스위스의 국민은 의회의 결정에 대해 최종 결정권을 행사하며, 선출직 대표에게 모든 권리를 이임하기에는 너무 중대하다고 판단되는 주요법령이나 법안의 경우 직접적으로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19세기 말 이후 210건 이상의 국민투표가 연방정부 차원에서 실시되기도 했다. 비록 직접민주주의 방식이 국민의 삶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음에도 시민들의 불신과 탈정치를 막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9)

이처럼 다양한 시민들의 진취적인 정치적 참여 방식은 ‘노란조끼’ 운동을 통해 표출된 현재 프랑스에 불어 닥친 위기를 조망하게 해준다. 프랑스 정부는 성급하고 즉흥적인 방식으로 정부가 정한 일부 주제에 한해 공개 토론을 수락했지만, 부유세의 재도입이나 기업들에 혜택이 돌아갔던 경쟁력고용세제(CICE·경쟁력 향상과 고용 촉진을 위한 세액 공제)의 폐지 또는 수정에 대한 가능성을 단번에 일축해버렸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대국민 서한을 통해 “투자를 장려하고 고용을 늘리기 위해 취해온 경제개혁의 핵심 의제에서 물러설 뜻이 없다”고 밝혔다. 국민 대토론(1월 15일, 노르망디 지방 그랑 부르그데룰드의 체육관에서 인근지역 지방정부단체장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됨-역주)은, 그간 노란조끼 운동을 통해 직접 표출된 시민들의 힘을 통제하고 국면을 타개할 목적으로 정부가 마지못해 선택한 궁여지책의 성격이 짙어 보인다.

시민발의제를 판도라의 상자에 비유하는 위정자들이 현재 경험하는 생생한 두려움은, 한편으로는 현상을 완강히 유지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또한, 기술관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이들의 본색을 다시금 확인하게 한다. 의회의 권한마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공공 논의에서 경제적 사안은 종종 제외되는 프랑스의 현 상황에서, 시민발의제란 그저 허울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의사결정의 결실로 이어지지 않고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데 그칠 수 있으며, 정세가 반전될 경우 감쪽같이 청산될지도 모를 일이다. 시민발의제가 자발적 정치 참여 수단으로 작용하려면, 제도의 총체적인 혁신, 그리고 정치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의 역할이 해당 장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글·기욤 구르그 Guillaume Gourgues & 쥘리앙 오미엘 Julien O’Miel
각각 리용 2대학과 릴대학에서 정치학과 전임강사로 재직 중

번역·이푸로라 poorora@daum.net
파리3대학 통번역대학원(ESIT) 번역 특별과정 졸업, 이화여자대학교통번역대학원 졸업


(1) Marie de Cazals, ‘La saisine du Conseil économique, social et environnemental par voie de pétition citoyenne : gage d’une Ve République “plus démocratique”?(프랑스 경제사회환경위원회의 국민 청원제도: 보다 ‘민주적’인 제5공화국의 징표인가?)’, Revue française de droit constitutionnel(프랑스 헌법 리뷰), n° 82, 파리, 2010년 4월.
(2) Philippe Aldrin, Nicolas Hubé, ‘L’Union européenne, une démocratie de stakeholders (유럽 연합, 이해 당사자의 민주주의)’, Gouvernement et action publique(정부와 공소), 제5권, 2호, 파리, 2016년 4월~6월.
(3) 프랑스 최고행정재판소(Conseil d’État), 청원서 제402259호에 관한 판결문, 2017년 12월 15일.
(4) T754/14 사례, 룩셈부르크 유럽사법재판소 판결문, 2017년 5월 10일.
(5) Guillaume Gourgues, Matthieu Houser (dir.), 『Austérité et rigueur dans les finances locales. Une approche comparative et pluridisciplinaire(지방정부의 재정 긴축과 경직성에 관한 비교 및 다원적 분석)』, L’Harmattan, 파리, 2017년.
(6) Julien O’Miel et Julien Talpin, ‘Espace et conflits dans la participation. Luttes symboliques et matérialité d’une controverse autour de la localisation d’une mosquée à Florence(공간과 참여 과정의 충돌. 피렌체의 이슬람사원 건립 논란에 따른 상징적 투쟁과 전개)’, Lien social et Politiques, 제73호, 몬트리올, printemps 2015년.
(7) ‘Moschea si o no? Il percorso partecipativo(이슬람사원 찬성인가 반대인가? 시민참여의 길)’, Nazione, 피렌체, 2011년 9월 22일.
(8) Hervé Rayner et Bernard Voutat, ‘La judiciarisation à l’épreuve de la démocratie directe. L’interdiction de construire des minarets en Suisse(사법화된 정치, 직접 민주주의의 시험대에 오르다. 스위스의 미나렛 건립 금지 사례)’, Revue française de science politique, 제64권, 4호, 파리, 2014년.
(9) Anna Kern, ‘The effect of direct democratic participation on citizens’ political attitudes in Switzerland: the difference between availability and use(직접ㆍ참여민주주의가 스위스인의 정치적 입장에 미치는 영양: 가용성과 활용 간의 차이)’, Politics and Governance, 제5권, 2호, 리스본,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