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조끼, ‘계급투쟁’의 재구성

2019-02-28     세르주 알리미, 피에르 랭베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국민 대토론’으로 ‘노란조끼’ 운동의 위기를 타개하려 한다. 이는 현재의 사회적 갈등이 근본적으로 정부와 정부 반대세력의 대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지 않고, 단순한 소통의 문제로 본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위험한 시각이다.  

 

프랑스 집권층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선거 패배나 개혁 실패 혹은 주가 폭락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봉기나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쫓겨나지는 않을까 떨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프랑스 엘리트들은 이런 공포심을 느낀 적이 없다. 2018년 12월 1일 토요일에 발생한 대규모 ‘노란조끼’ 시위는 사람들을 얼어붙게 했다. BFM TV의 스타 기자 루트 엘크리프는 “거리가 위험하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놀란 목소리로 허둥댔고, TV 화면에서는 안락한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려는 노란조끼의 폭력 시위가 계속 비쳤다. 

며칠 뒤에는 친기업 성향의 일간지 <로피니옹>의 기자가 TV에 나와 다시 한번 공포의 광풍을 증언했다. “지금 대기업들은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머리가 날아가 말뚝에 박히지 않을까 공포에 떨고 있다. 대규모 토요일 시위가 있던 날 대기업 총수들은 MEDEF(Mouvement des Entreprises DE France, Medef: 프랑스 경제인연합)의 조프루아 루 드 베지유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풀어야 한다. 안 그랬다가는 큰일 난다’고 했다고 한다. 기업은 지금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로피니옹> 기자 옆에 앉아있던 여론조사기관의 대표 역시 같은 말을 했다. “대기업 총수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현재 분위기가 글로 읽었던 1936년 총파업 때나 1968년 학생운동 때와 비슷하다. 어느 순간부터 기업들이 중요한 것을 잃지 않으려면 큰돈을 뿌려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1) 과거 인민전선이 정권을 잡았던 때에 공장 점거를 비롯해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가 폭발적으로 번지자 총리 공관인 마티뇽궁에서 가진 노사정 협상에서 사측이 ‘전적으로 양보’했다고 프랑스노동총연맹(CGT)의 총서기 브누아 프라숑이 회고한 적이 있다.  

유산계급이 이런 식으로 심각하게 흔들리는 일은 드물지만 이를 통해 역사적으로 검증된 하나의 교훈을 읽을 수 있다. 두려움을 경험한 자는, 자신을 두려움에 떨게 한 자도, 자신이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목격했던 자도 용서하지 않는다.(2) 그렇기에 부르주아 계급이, 한 마디로 규정하기도 힘들고, 리더도 없고, 제도권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고 탄압에도 불구하고 수그러들지 않고, 폭력 시위라고 미디어가 악의적으로 공격해도 계속 지지를 받는 노란조끼 운동에 격렬히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선례는 많다. 사회 계급이 고착화되고 계급투쟁이 본격화되면 모두 자신의 진영을 선택하게 된다. 매우 리버럴하고 교양 높고 고매한 사람들조차도 ‘함께하는 삶’이라는 입바른 소리마저 하는 것을 잊게 된다. 

이 고매한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히면 이성을 잃는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저서 『회상록』에서 1848년 6월 봉기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보자. 빈곤을 견디다 못해 일어난 파리 노동자들을, 부르주아지가 ‘대포만이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3)는 생각으로 군대를 보내 학살한 사건이 6월 봉기다. 토크빌은 사회주의 혁명가 오귀스트 블랑키를 가차 없이 묘사했다. “병자 같은 안색, 고약하고, 지저분하고, 백지장처럼 창백하고 몸에는 곰팡이가 피고 (…) 하수구에서 살다가 걸어 나온 사람 같았다. 나는 그를 보고 뱀 꼬리를 밟은 듯 흠칫했다.”

파리 코뮌 때도 교양이 높은 부르주아지는 분노했다. 이번에는 수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목소리를 냈다. 이들 중에는 진보 인사들도 있었는데 사실 이들은 평화로운 시절에만 진보적이었다. 시인 르콩트 드 릴은 “낙오자들, 무지한 자들, 사기꾼들, 살인자들, 강도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고 화를 냈고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유일한 해결책은 보통선거를 폐지하는 것이다. 보통선거는 인간 정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했다. 크나큰 대가(사망 2만 명, 체포 4만 명)에 말문이 막힌 에밀 졸라는 파리 시민들에게 위로가 될 만한 교훈을 찾아냈다. “파리 시민이 경험한 피바다는 자신들이 앓고 있는 열병을 식히는 데 필요한 악이었을 지도 모른다.”(4)

철학 교수이며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던 뤽 페리도 지난 1월 7일 라디오에 나와 경찰의 대처가 안이하다고 분노하는 인사들, 적어도 자신처럼 학식이 높은 인사들의 분노에 공감을 표했다. “불량배들, 극우‧극좌 폭력배들, 경찰과 한판 붙으러 나온 한심한 자들에게 이번에는 경찰이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 페리 장관은 이렇게 민중의 지팡이를 향해 지상명령을 내리고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일반적으로 권력은 서로 확실히 구분되고 때로는 경쟁관계에 있는 프랑스나 EU 고위 공무원, 지식인, 기업인, 언론인, 보수우파, 중도좌파가 나눠가지고 있다. 이들은 민주적 절차를 거쳐(선거를 치른 직후에는 잠시 동면에 들어간다) 권력을 돌아가며 같은 영역 안에서 나눠가진다. 이미 1900년 11월 26일 릴에서 사회주의자 쥘 게드는 ‘자본가 계급’의 장기집권을 가능케 한 이 같은 비열한 정치게임을 분석한 바 있다. 

“그들은 진보 부르주아와 공화주의 부르주아, 성직자 부르주아와 자유사상가 부르주아로 나뉘어 있다. 그래서 한쪽이 지더라도 같은 계급의 다른 쪽이 원수지간이기는 하지만 권력을 잡게 된다. 이는 방수가 잘 된 배와 같다. 한쪽에 물이 들어와도 배는 가라앉지 않는다.” 그래도 바다가 심하게 요동쳐 배가 뒤집힐 위험에 처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이들은 싸움을 잠시 뒤로하고 공동 전선을 구축한다. 

 

“극단주의 불량배들”, “불만에 찬 무뢰한 폭도들” 

노란조끼 운동에 대해서도 부르주아지는 유사한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부르주아지의 대변자들은 평상시에는 다양성을 지지하는 ‘착한 목소리’를 내는 데 신경을 쓰면서 인종차별, 반유대주의, 동성애 혐오, 선동, 음모론에 대해 한목소리로 비난한다. 무식한 사람들 역시 비난의 대상이다. 시사 주간지 르푸엥의 세바스티앙 르 폴 기자는 “노란조끼 운동, 과연 무지가 승리할 것인가?”라고 질문했고(2019년 1월 10일), 평론가 브뤼노 즈디는 “노란조끼는 어떤 고민도, 생각도 없이 무작정 싸우고 있다”고 비난했다(BFM TV, 12월 8일). 뱅상 트레몰레 드 빌리에 기자는 “가장 기본적인 예의도 무시한 채 저급한 본능적으로만 움직이고 있다”라고 썼다.(<르피가로>, 12월 4일) 

언론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노란조끼 운동은 “증오에 찬 소수”(드니 올리벤, 기업인)의 선동으로 “무식한 극단주의 불량배들”(장 카트르메르, 언론인)이 일으킨 것이고, “불만에 찬 무뢰한 폭도들”이(프란츠 올리비에 지즈베르, 언론인) “분노와 증오심에 못 이겨”(<르몽드> 사설)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있기”(에르베 가테뇨, 언론인) 때문이다. 자크 쥐야르(언론인)는 “이 무지한 자들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일 작정인가”라고 두려움을 표출하기도 했다.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 역시 ‘시위대의 맹목적인 증오심’에 우려를 표명하고 일간지 <르파리지앵>에 실린 ‘분노를 접고 토론의 테이블에 앉으라’고 노란조끼 운동가들 측에 제안하는 청원서에 서명했다. 시릴 아누나(TV 사회자), 제롬 클레망(아르테 TV 대표), 티에리 레르미트(영화배우)도 청원서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이 청원은 성공하지 못했다. 소설가 파스칼 브뤼크네에 의하면, ‘야만적이고 복면을 쓴 폭도들로부터 프랑스를 구한 사람들은 냉철한 경찰이었다.’(5)    

유럽생태녹색당(EELV)에서부터 사회당의 잔당까지, 프랑스 민주노동연맹(CFDT)에서부터 (방송국 대표의 말을 빌리자면 ‘지성인의 동반자’인) 프랑스앵테르 라디오의 아침방송 사회자들까지 다양한 사회 계층이 한목소리로 노란조끼 운동에 연대를 표명한 정치인들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들의 죄목은,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자신들의 두려움에 공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방해자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오래된 술책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부르주아들이 노란조끼의 요구사항 중에 극우세력이 언젠가 주장하거나 차용할 만한 것을 찾아내어 노란조끼를 극우세력과 연결시키는 일이다. 이런 식의 논리대로라면 언론에 대한 노란조끼의 폭력을 부각시켜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극우정당 국민연합(RN)의 대표 마린 르펜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언론에 대한 노란조끼의 공격과 관련해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타인을 존중하지 않으면 건설적인 토론도, 민주주의도, 개인의 삶도 불가능하다”고(1월 17일) 비판하며 노란조끼와의 관련성을 부정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표밭인 부르주아들은 노란조끼 시위에 참여한 아르노와 제시카 부부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묘사한 <르몽드> 기사(11월 16일 자)에 놀라울 정도로 부정적으로 반응했다.(6) 신문사 홈페이지에 분노에 찬 댓글이 수천 개가 쏟아졌다. ‘머리가 좋은 부부는 아닌 듯…. 진정한 빈곤은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교양이 없는 것은 아닐까?’, ‘수입 이상으로 지출하는 것이 가난한 자들의 고질병이다.’, ‘이들 부부의 4명의 아이들이 연구원이나 공학자, 예술가가 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 아이들은 부모처럼 사회의 짐이 될 것이다.’, ‘대통령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대통령이 매일 부부의 집에 가서 부인이 피임약을 챙겨 먹는지 확인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기사를 쓴 기자는 ‘거의 사생활 침해에 가까운 비판이 쏟아진 것’에 적잖이 당황했다고 한다.(7) 정말 사생활 침해일까? 온건하다고 여겨지는 르몽드의 독자들은 지금 한 가족의 문제에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란조끼 운동에서 나온) 계급투쟁에 경고음을 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하위계층이 이끈 ‘노란조끼’ 운동은 1980년대 말부터 (사민주의적) ‘사회자유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전파한 ‘중도주의’의 실패를 보여주었다. 중도주의는 정치주체로서의 하위계층을 정치 논의에서 배제하면서 이념대립을 끝내자는 주장이다.(8) 그러나 하위계층은 수적으로는 다수이지만 ‘중구난방’인 탓에 많은 분야에서 부르주아 계층으로부터 권리를 박탈당해왔다.

미테랑 정권이 채택한 ‘긴축정책으로의 전환’(1983년), 뉴질랜드 노동당이 실시한 ‘자유주의 반혁명 정책’(1984년) 그리고 1990년대 말 블레어 총리, 클린턴 대통령, 슈뢰더 총리가 주창한 ‘제3의 길’은 중도주의가 성공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사민주의 계열 인사들은 정부 기관 여기저기에 자리를 꿰차고 언론과 편하게 지내고 대기업 이사회까지 진출하면서 과거 자신들의 정치기반이었던 계층을 정치게임의 가장자리로 몰아냈다. 미국에서는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후원금 기부자들 앞에서 경쟁 후보의 지지자들을 ‘딱한 사람들’로 취급하기까지 했다. 

 

1789년의 베르사유를 닮은 2019년의 파리

놀랄 일은 아니다. 프랑스라고 별다를 것은 없다. 현재 마크롱 대통령 측근들의 스승격인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은 이미 17년 전에 쓴 정치전략서에서, “사회당은 이제부터 식견이 높고 정보를 많이 가진 직장인, 고등교육을 받은 우리 사회의 뼈대인 중도층을 우리 지지기반으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중도층이 시장 경제에 애착을 가지고 있어 안정을 추구하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반면, ‘식견이 높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평가했다. “안타깝게도 불만을 때로는 폭력으로 표출하는 이들이, 항상 의회 민주주의에 안정적으로 참여하리라고 기대하기 어렵다.”(9) 그래서 하위계층은 사회의 관심 밖으로 사라지는 운명을 겪게 된다. 5년에 한 번 극우정당 득표에 기여했다고 비난받을 때만 잠시 소환됐다가 선거가 끝나면 다시 존재감은 없어지고 투명인간이 된다. 

전략은 성공해서 하위계층을 대변하는 정치적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대도시에서는 목소리뿐 아니라 그 모습도 사라졌다. 예를 들어 파리에서는 노동자(자영과 고용 모두)의 수가 연간 4% 증가에 그쳐 2019년의 파리의 상황은 1789년의 베르사유 궁전 당시와 너무 닮게 됐다. TV 화면에서도 하위계층의 얼굴은 찾을 수 없다. 뉴스에 나오는 사람들의 60%가 경제활동 인구 중 교육수준 상위 9%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10) 대통령의 눈에도 하위계층은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이 보는 유럽은 ‘물질적 안정과 보호를 받는 프티 부르주아의 세계’가 전부다.(11) 

그런데 문제는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사회에 나와서도 새로운 것 배우기를 게을리 한, 그래서 현재의 처지가 순전히 자신 탓인 걸로 생각해온 사람들이 갑자기 개선문과 샹젤리제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보고 당황한 참사원 위원인 장 에릭 쇼에틀은 <르피가로>의 사이트에 ‘원시적 형태의 계급투쟁이 다시 시작됐다’고 진단했다.(2019년 1월 11일) 

대다수를 차지하는 국민을 정치영역에서 사라지게 하려는 계획이 실패로 끝났다면 사회 지도층의 또 다른 계획, 즉 좌와 우의 기준을 모호하게 하려는 계획은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만나게 된다. 베를린 장벽 해체 후 떠오르기 시작한 이 개념은 자유주의 성격의 ‘지성인 클럽(Cercle de la raison, 1982년 작가 알렝 맹크가 만든 용어. 고위공직자, 기업인, 자유주의 사상가 등으로 구성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일종의 싱크탱크인 셍시몽 재단을 일컬음-역주)’에 반하는 견해는 무엇이든지 ‘극단’으로 몰아 신뢰성을 잃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치 이념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즉 자본주의/사회주의, 민족주의/국제주의, 보수주의/해방주의, 전제주의/민주주의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주의/급진주의, 개방/폐쇄, 진보/포퓰리즘이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하게 된다(특히 본인들을 합리‧개방‧진보라고 자칭한다). 하지만 만약 이렇게 노란조끼 운동이 좌와 우의 구분을 거부하게 되면 부르주아지 세력이 지난 수십 년간 시도했던 이념 모호화 정책이 하위계층 내에서 실현되는 꼴이 되고 만다. 

올겨울 노란조끼 운동은 조세 정의, 삶의 질 향상, 권위적인 정부 거부를 전면에 내세웠지만 노동 착취 반대와 생산 수단의 공적 소유에 대한 요구는 없다. 부유세를 재도입하고 선출의원들의 비용 영수증을 철저히 검증하고 국민투표 청원제도까지 도입하자고 하면서도 회사와 직원의 종속관계, 소득 분배, 유럽연합 내에서 그리고 세계화 과정에서 말뿐인 시민 주권에 대한 문제 제기는 없다. 

물론 어느 운동이든 시위를 하면서 발전한다. 예상하지 못했던 장애를 만나거나 기대하지 않았던 기회가 생기면 새로운 목표가 세워진다. 1789년 삼부회가 소집됐을 때 프랑스에서 공화주의자는 매우 드물었다. 우리가 노란조끼 운동에 연대를 표명하는 것은 노란조끼 운동이 제대로 갈 수 있도록, 정의롭고 해방된 사회를 향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노란조끼 운동이 반대방향으로 가는 것을 원하는 세력도 있다. 사회적 분노가 오는 5월에 있을 유럽의회선거에서 극우정당이 득표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는 세력이다.  

권력과 언론이 노란조끼 운동이 터무니없고 수준 이하의 주장을 한다고 과장하고, 그래서 상대하기 불가능한 세력으로 몰아 노란조끼 운동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면 그들의 기대는 손쉽게 실현될 것이다. 노란조끼 운동을 깎아내리려는 시도가 성공하면 마크롱 대통령이 2017년부터 추진했던 전략, 즉 정치를 자유주의와 포퓰리즘의 대립으로 단순화시키려는 전략이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12) 

자유주의 대 포퓰리즘 개념이 확고해지면, 마크롱 대통령은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은 좌파나 우파나 상관없이 한 바구니에 몰아넣고 모든 내부 비판을 ‘포퓰리즘 국제 연대’의 투쟁의 일환이라 치부하면 된다. 마크롱 대통령이 생각하는 포퓰리즘 국제연대에는 헝가리 빅토르 오르반 총리, 이탈리아의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와 함께 폴란드 보수주의자, 영국 사회주의자, 프랑스 굴복하지 않는 자, 독일 민족주의자들이 섞여 있다.   

그런데 마크롱 대통령은 한 가지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 지지층이 넓지 않은 관계로 실업보험, 은퇴연금, 공무원 수 감축 등 여러 개혁 정책을 추진하려면 권위주의적 통치, 경찰 진압, ‘난민 문제에 관한 대토론’이라는 값을 지불해야 한다. 전 세계의 ‘반자유주의’ 정부들을 비난하면서도 동시에 그 같은 정부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그의 태도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미국 버클리대 정치학 박사 출신으로 파리 8대학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1992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합류한 뒤 2008년 이그나시오 라모네의 뒤를 이어 발행인 겸 편집인 자리에 올랐다. 신자유주의 문제, 특히 경제와 사회,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 신자유주의가 미치는 영향과 그 폐해를 집중 조명해 왔다.

피에르 랭베르 Pierre Rim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미디어비평 행동단체 ‘Acrimed’에서 활동 중이며, 대안언론 <르플랑베(Le Plan B)>를 발행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Libération, de Sartre à Rothschild 해방, 사르트르에서 로스차일드까지』(Raisons d'agir, 2005) 등이 있다.

번역‧임명주 mydogtulip156@daum.net
서울대학교 불문학과 석사 졸업.

 

(1) ‘L’Info du vrai’, <Canal Plus>, 2018. 12. 13 
(2) Louis Bodin, Jean Touchard, 『Front populaire: 1936(인민전선: 1936년)』, Armand Colin, Paris, 1961.
(3) Auguste Romieu, 『Le Spectre rouge de 1852(1852년의 붉은 망령)』, Ledoyen, Paris, 1851 / Christophe Ippolito, ‘La Fabrique du discours politique sur 1848 dans L’Éducation sentimentale(『감성교육』에 나타난 1848년 혁명에 대한 정치적 담론)’, Op. Cit., n° 17, Pau, 2017.
(4) Paul Lidsky, 『Les Écrivains contre la Commune(파리코뮌에 반대하는 작가들)』, La Découverte, Paris, 1999년(초판: 1970년).
(5) 차례로 <트위터> 2018년 12월 29일자, <Marianne> Paris, 2019년 1월 9일자, 2018년 12월 4일자, <Le Point> Paris, 2018년 12월 13일자, 2019년 1월 10일자, <Le Journal du dimanche> Paris, 2018년 12월 9일자, <Le Figaro> Paris, 2019년 1월 7일자, <Le Point> 2018년 12월 13일자, <Le Parisien> 2018년 12월 7일자, <Le Figaro> 2018년. 12월. 10일자.
(6) Bruno Amable, ‘Majorité sociale, minorité politique(사회적 다수, 정치적 소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7년 3월호(한국어판 2017년 4월호에서는 ‘정치진영을 X레이로 분석한다면’이라는 제목으로 게재)/ Bruno Amable, Stefano Palombarini, 『L’Illusion du bloc bourgeois. Alliances sociales et avenir du modèle français(부르주아지의 환상. 사회적 동맹과 프랑스 모델의 미래)』, Raisons d’agir, Paris, 2017.
(7) Faustine Vincent, ‘Pourquoi le quotidien d’un couple de “gilets jaunes” dérange des lecteurs(르몽드의 독자들은 왜 노란조끼 부부를 거북해하는가’, <르몽드>, 2018년 12월 20일.
(8) Laurent Bonelli, ‘Les architectes du social-libéralisme(사회자유주의 건설자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8년 9월호.
(9) Dominique Strauss-Kahn, 『La Flamme et la Cendre(불꽃과 재)』, Grasset, Paris, 2002년./ Serge Halimi, ‘Flamme bourgeoise, cendre prolétarienne(부르주아의 불꽃, 프롤레타리아의 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2년 3월호.
(10) ‘Baromètre de la diversité de la société française(프랑스 사회의 다양성의 척도’, vague 2017, Conseil supérieur de l’audiovisuel, Paris, 2017년 12월.
(11) ‘Emmanuel Macron-Alexandre Duval-Stalla-Michel Crépu, l’histoire redevient tragique(une rencontre)(에마뉘엘 마크롱, 알렉상드르 뒤발 스탈라, 미셸 크레퓌: 다시 비극이 된 역사’, <La Nouvelle Revue française>, n° 630, Paris, 2018. 5.
(12) Serge Halimi & Pierre Rimbert, ‘Libéraux contre populistes, un clivage trompeur(자유주의와 포퓰리즘, 거짓 진영 분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8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