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 맞선 베트남 농민들의 저항

2019-02-28     피에르 돔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성장에 목마른 베트남은 3차 산업의 부흥과 부동산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환경과 농지에 미칠 영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아, 많은 농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2017년 4월, 하노이 외곽에 위치한 동 탐 마을은 해외 토픽 기사의 무대가 됐다. 부동산 건설계획 차원에서 이뤄지던 농지 수용에 반대하며 몇 달 전부터 농성을 벌인 농민들 수백 명이 시위대를 진압하러 온 경찰관 38명을 일주일 이상 감금하는 대범함을 보인 것이다. 당국은 무력을 동원해 인질을 구출하기보다는, 하노이 인민위원장 응우옌 죽 중을 파견해 농민들과의 협상을 시도했다. 결국 농민들은 더 나은 보상을 약속받은 후 경찰들을 풀어줬다. 

이뿐만이 아니다.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남 오는 원래 양질의 ‘느억 맘’ 소스로 유명한 연안마을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대규모 관광단지가 들어서자 이곳 어민들은 이주해야 하는 상황이 됐는데, 이주 거부 의사를 밝힌 집이 한둘이 아니다. 여기에 관광단지가 조성되면 해변이 모두 관광용도로 변경되고, 그에 따라 어민들은 작은 생선을 발효시켜 만드는 저 유명한 ‘느억 맘’ 소스 생산에 필수적인 조업활동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다. 

베트남 남부의 경제수도 호치민 시에 있는 투 티엠 지구는 도처에 콘크리트가 깔리는 호치민 도심에서 20년 넘게 굳건히 버티고 있는 마지막 초목지대다. 초목을 가꾸는 소수의 농민들은 적법한 토지수용 절차가 지켜지지 않았다며 정부의 퇴거 명령에 반대해 다수의 소송으로 맞서는 상황이다. 베트남에서 토지수용 절차는 보통 복잡한 게 아닌데, 토지 관련법이 계속해서 중첩돼 왔기 때문이다. 

다소 놀랍기는 하나, 베트남에서 산업·관광·부동산개발 사업을 위한 농지수용에 대해 이렇듯 국민들이 반기를 들고 나서는 사례는 굉장히 많다. 관련 문제를 연구하는 마리 지베르와 쥘리에트 스갸르에 따르면 베트남의 농지수용 문제는 “오늘날의 베트남 사회에서 가장 큰 갈등의 원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1) 이는 또한 공산당 고위층이 집권한 이 나라에서 국민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정치적 반발의 형태이기도 하다. 

당국의 밀착감시를 받는 언론에서는 이 같은 반대운동 가운데 일부만을 보도한다. 그것도 당 책임자가 시위대와의 의견 조율을 위해 현장에 방문한 경우를 중심으로 언론보도가 나간다. 그러나 (‘베트남 미식가’ 페이지를 비롯해) 페이스북에서는 이와 다른 여러 가지 뉴스들이 매일같이 올라온다. 참고로 전체 인구 9,500만 가운데 베트남의 페이스북 사용자 수는 3,000만 명에 달한다. 

국영방송 베트남 텔레비전(VTV)의 리 기자도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은 여전히 실제상황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무수한 농민들의 반대운동이 벌어진다”고 논평했다. 사실 취재환경은 여전히 위험한 상황이다. 본지 기사를 위한 취재 중에도 수많은 학자와 기자들이 “그런 마을엔 가지 않는 편이 좋다”며 주의를 줬다. “갈등이 극에 달해있는 데다 경찰에 잡혀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와의 인터뷰를 거절한 이들도 있었다. 

 

3년 만에 식량 기근 사라져

이 같은 농지수용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공산주의 담론에 대해 정면으로 배치되는 만큼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다. 15년 전부터 이 문제를 연구해온 몬트리올 대학의 도시화 연구소 다니엘 라베 연구원은 “수치화된 자료를 얻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연구원은 “당국도 사태가 더 커지지 못하도록 자제하는 눈치인데, 문제의 심각성이 드러날까 두려워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평했다.

오늘날 베트남에서 농지수용 문제는 더 이상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다. 30년 전부터 이 나라가 선택해온 개발방식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과거 베트남은 1950년대 북부지역을 시작으로 1976년 통일 이후에는 남부 지역에 이르기까지 소비에트식 중앙 계획경제를 실시해왔으나, 1986년 이런 경제 방식의 실패를 확신한 베트남 지도부가 대대적인 ‘도이 모이(쇄신)’ 경제개혁 계획을 시행했다. 농협조합을 점진적으로 없애고, 공기업을 민영화하며, 민간기업의 창설을 허용하고, 외국 투자자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이 ‘도이 모이’ 계획의 주된 골자였다.(2)

국민들의 생계를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시행된 초창기 조치들은 협동농장의 해체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에 따라 농장의 토지는 농민이 대다수인 국민들에게 고루 분배됐는데,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에서 경제학자로 활동했던 트란 응옥 빅은 “곧바로 긍정적인 효과가 나타났다”고 기술한다. “3년 만에 식량기근이 사라졌고, 쌀 소비량보다 생산량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시장경제로의 개방과정에서 토지의 공동소유권 같은 일부 기본원칙들에 대한 문제제기가 일절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토지와 관련한 모든 법령에서 국가가 “국민의 이름으로” 토지 일체의 소유권을 가지게 됐다. 덕분에 정부는 훨씬 더 쉽게 토지를 ‘회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스스로가 농지의 소유주인 것처럼 느껴도 사실상 붉은 대장에 등록된 (농업용으로만 부여된) 이용권만을 가진 셈이다. 다만 각 농민이 자신의 이용권 전체 혹은 일부를 판매하거나 자식에게 물려줄 수는 있다. 토지 할당에 대한 수정 권한도 정부가 독점적으로 보유하고 있고, 토지의 용도를 농업용에서 산업용이나 부동산용으로 수정할 수 있는 것도 오직 정부뿐이다. 물론 이를 위해 정부가 준수해야 할 절차가 있긴 하다. 하지만 계획 승인에 대한 거의 절대적인 권력은 법에 따라 고위직 공무원이 가진 셈이다.

게다가 베트남이 시장경제 체제로 개방됨에 따라 1994년에는 미국의 금수조치도 해제됐고, 2007년에는 세계무역기구(WTO)의 회원국이 되기도 했다. 하노이 농대 석좌교수 부 딘 통은 이로써 베트남이 “국민들 대다수가 종사하던 생계형 농업체제에서 공업 경제 및 3차 산업경제 체제로 이행”했다고 설명한다. 1995년에는 경제활동 인구의 80%가 농업에 종사했지만 지금은 그 비율이 40%에 불과하고, 1988년 농업부문이 차지하던 GDP는 46%에 달했으나 2017년에는 약 15%에 그쳤다.

베트남 지도부는 조국의 ‘근대화’와 ‘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부 딘 통은 “그에 따라 지리적 문제가 대두됐다”고 지적했다. 베트남은 전체 국토의 2/3가 고원과 산지이기 때문에 사실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쓸 수 있는 토지 비중이 그리 크지 않다. 인구밀도도 높을뿐더러, 대부분의 땅이 이미 농업용으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정부는 대규모 농지를 도심개발과 산업, 관광 용도로 전환하도록 결정한다. 도심 외곽지역에 도심개발 지대를 조성하고(3) 도시 주변과 거점도로를 따라 산업단지를 구축하며 3,000km에 달하는 연안지대를 따라 관광지구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에 따라 전통농업을 유지해오던 수백만 농가가 고스란히 그 피해를 안게 됐다. 다니엘 라베는 “지도부의 머릿속에서 농업 부문은 과거에 속한 세계”라고 강조한다. 베트남의 토지 관련법에 따라 (국영이든 민간이든 해외든) 기업들은 20여 년 전부터 당국에 개발계획을 제안하도록 권유받았고, 당국은 필요한 경우 이들 기업에 토지사용권을 내줬다. 개발연구소(IRD) 소속 지리학자 겸 베트남 전문가인 실비 팡셰트에 의하면, “그 대신 기업은 수용된 토지에서 일을 하던 농민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기로 약속했고, 아울러 가난한 정부가 재정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던 교량, 도로, 진료소, 학교 등의 기간시설을 세워주기로 했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 연구부장 겸 경제학자인 응우옌 반 푸는 “이 같은 정책이 문서상으로는 타당해 보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 토지를 수용당한 일부 농민들은 이득을 보기도 했다. 당 반 비엔 씨가 이득을 본 경우인데, 우리는 비엠 동에 위치한 그의 화려한 새집에서 그를 만나볼 수 있었다. 과거에 비엠 동(Viem Dong)은 베트남 중부 대도시 다낭과 호이안 관광 지구를 따라 이어진 해변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농촌 마을이었다. 이곳 해변은 현재 완전히 콘크리트로 뒤덮인 상태이며, 포 시즌 호텔이나 하얏트 호텔, 풀먼 호텔, 쉐라톤 호텔 등 세계 유수의 고급 호텔들이 사유화한 상태다.

월남전에도 참전한 이 노장은 “15년 전에 정부가 우리 논을 가져가 골프장으로 바꾸려 했을 때는 우리도 반대했었다”고 회고한다.(4) “정부가 1㎡당 20만 동(약 7유로)이라는 턱없이 적은 액수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에 양보해야 했던 주민들은 그래도 작은 토지구획 일부는 지킬 수 있었다고 했다. 이 땅을 건축용으로 용도 변경할 수도 있었다. “내가 갖고 있던 4,000㎡ 중에서 2사오(720㎡)(5) 정도만 내게 남았고, 나는 이 땅을 적당한 가격에 하나하나 팔아나갔다. 그리고 다른 땅에다 돈을 들여서 내 집을 지은 것이다.”

당 반 비엔 씨의 아들 하나는 현지 행정 당국에서 근무하며, 둘째는 그곳 부지에서 몇 km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독일계 스위스 브랜드 리커 공장에서 일한다. 1만 6,000명의 직원이 있는 회사였다. “아들은 한 달에 500만 동(185유로)가량을 받으며, 보수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다. 농사지을 때보다 벌이도 나을뿐더러 힘도 덜 든다.” 당 반 비엔 씨 본인도 매월 450만 동(165유로)의 공무원 연금을 받고 있으며, 여기에 국가유공자 연금 200만 동(75유로)이 추가된다. “마을 사람들은 결국 다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젊은 친구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도시에 가서 놀 수 있고, 우리 같은 늙은이들도 더는 밭에서 일할 필요가 없어졌다. 진창 속에서 뒹굴지 않아도 되고, 거머리에게 피를 뜯기는 일도 없이 카페에서 카드놀이나 하면 된다.”

비엠 동 마을 주위의 풍경은 상전벽해라 해도 될 만큼 많이 달라졌다. 끝도 없이 펼쳐지던 아름다운 논밭은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고, 거대한 공터만이 신규건설 공사를 기다리듯 보였다. 100m 간격으로 늘어선 부동산 가건물들은 꿈의 빌라를 팔겠다며 설계도를 들이밀었는데, 땅값은 ㎡당 2,000만 동(750유로)이었다. 그렇다면 공사는 언제 시작되는 걸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며 그의 가족 가운데 누군가 말했다. “사람들이 토지 구획을 사들인 건 대개 값이 뛸 때 되팔기 위해서다. 앞에 보고 계신 이 땅 가격이 ㎡당 1000만 동(375유로)인데, 10년 전보다 값이 두 배나 뛰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수선한 건설정책이 가져온 문제를 직감했다. 투기가 일고 있는 것이었다. 땅이 귀한 만큼 투자자들은 당국에 약속한 사업을 실행하지 않거나 혹은 일부만 실행하면서 토지를 구획별로 잘라서 되파는 편이 더 이득이 된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을 것이다. 물론 사전에 농업용에서 건축용으로 용도변경을 허용한 귀중한 문서를 받아두는 건 필수다. 

‘눙’이란 이름의 한 여성은 “이건 말도 안 된다”며 분개했다. “정부가 우리에게는 농지라고 설명하면서 눈곱만큼 보상금을 주고 땅을 가져가더니 그 용도를 바꾸어 100배 더 비싼 값에 판 것이다. 이건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눙 씨의 집에서 그를 만났는데, 집은 하노이 중심가에서 전동자전거를 타고 한 시간쯤 가면 나오는 두옹 노이 마을에 있었다. 하노이에서 멀리 떨어진 이 주변 지역에도 점점 콘크리트가 깔리고 있었다. 이 마을은 8년 전부터 정부의 대규모 건설계획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는데, 고급 아파트와 빌라로 구성된 대규모 주거 단지를 세운다는 계획이었다. 원칙적으로는 학교와 병원 시설도 포함돼 있었다. “우리가 제안받은 금액은 ㎡당 27만 동(10유로)이었다. 현재 신 도심지구의 주요 구획들은 이미 ㎡당 3천만 동(1,100유로)에 팔린다.”

기존 주민들은 이제 보상금도 거부하고 소송과 청원을 준비하고 있으며, 수도 중심부에까지 가서 가두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인민위원회 건물 앞에서 연좌데모도 한다. 착공을 막기 위해 적재기 앞에 운집하는 경우도 있고, 페이스북을 통해 메시지도 보낸다. 두옹 노이 주민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외부에 알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자 이번에는 정부도 지극히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인터넷에 올라온 동영상에서 수백 명의 경찰이 마을을 포위하고 곤봉으로 시위대를 구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적재기가 시위대를 공격해 여성 시위대 한 명이 심한 부상을 입고 며칠간 입원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안에서부터 썩어 들어간 정부

눙 씨의 부친은 집회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붙잡혀간 적이 있다. 약 60세의 부친은 “공공질서를 침해한 혐의로 18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했다. 1979년 중월 전쟁(6) 참전 용사였던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내가 젊었을 때에는 무기를 드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외국의 적과 싸워서 조국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은 그때보다 끔찍하다. 안에서부터 썩어 들어간 내 조국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국가 내부는 심각하게 썩어있다. 농민이든 교수든 단순한 근로자든 상관없이 우리가 만나본 모든 사람들은 베트남의 집약적인 도시화사업에서도 썩은내가 난다고 한결 같이 주장했다. 공장 예정지에 고급 빌라가 들어서는 등 모든 탈선도 이로부터 시작됐다. 이런 탈선이 아니면 어떻게 투자자들이 기존에 약속한 기간시설 건설도 하지 않은 채 환경보전에 대한 의무사항도 도외시하며 사업 내용을 바꿀 수 있었겠는가?  


중산층의 지지를 등에 업은 정부

마구잡이식으로 인가를 내줬다가 호되게 그 값을 치르고 있는 고위 공무원들의 이 같은 부패는 구조적인 양상을 띤다. 부동산 시장을 움직이는 여러 주체들은 ‘주식회사화’한 국영 기업들이다. 주식 보유자는 당내 고위 책임자이거나 공산당 고위층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국내외 민간 주체들과 관련해서는 일단 돈 봉투나 고가의 선물 등 고전적인 형태의 부패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입증하기가 매우 힘들다. 

하지만 시카고 대학의 연구원 킴벌리 케이 호앙은 그중 100여 명으로부터 비밀 녹취를 수집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들 자료의 분석 결과는 가히 놀라웠는데, 이로 미뤄볼 때 부패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7) 이 자료에 의하면 “베트남에서는 모든 게 연줄로 돌아간다. (부동산 시장에서) 수익을 본 사람들은 손을 맞출 사람이 있는 이들이다. 손을 맞추려면 돈을 줘야 하고, 뇌물을 주면 땅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공사장 감찰을 나올 때마다 이들에게 돈을 주면 된다.” 또 다른 사람은 “베트남에서는 아무도 법을 지키지 않는다. 돈을 버는 유일한 방법은 괜찮은 연줄을 얻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어떤 사람은 “공무원에게 돈을 주는 게 나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일상적인 일이다. 생각해보라. 고위 공무원 월급이 200~300달러(175~260유로)다. 그 돈으로 어떻게 살겠나? 우리는 그저 이 사람들이 일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돈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제 투명성 기구에서 매긴 부패지수 등급에서 베트남은 (전체 180개국 중) 117위다. 

부패한 공무원과 정치인들에게 땅을 빼앗긴 농민들은, 자신의 자녀들마저 일자리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분노를 더욱 내비쳤다. 이들에게 일자리가 확보되지 못한 이유는 공장이나 호텔에서 직무능력이 더 뛰어난 직원들을 원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고용창출 프로젝트가 투기의 현장으로 변질된 탓도 있다. 베트남 농학 아카데미의 농경제학자 다오 더 안은 “어쨌든 베트남은 산업기반이 취약하며, 일자리가 없는 이 수많은 농민들을 다 흡수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도 불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농민들이 분노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바로 환경오염 문제다. 북부 연안의 관광지 삼손 마을 어민들은 300m 규모의 해변을 지켜내기 위해 오랜 기간 투쟁해왔다. 어민들은 원래 이곳에 배를 대고 있었는데, 국내 굴지의 대기업 FLC 사에서 바다에 면한 5성급 호텔과 빌라촌, 골프장을 포함한 대규모 관광단지를 조성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지 오픈은 2년 전에 이뤄졌지만, 해변에서 만난 어부들 무리의 설명에 의하면 어민들은 “인민위원회 앞에서 계속 시위를 벌이고 있다. 저들이 바다로 직접 하수를 방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물고기도 별로 없고, 그나마 남은 물고기들도 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다. 

계약서상에서는 기업들이 환경보전 의무를 지키도록 규정돼 있지만, 국내에서는 수많은 오염사례들이 발견되고 있다. 킴벌리 케이 호앙이 수집한 증언록에 따르면 현장을 보러 온 감독관에게 돈 봉투만 찔러주거나 고위층 인사의 아내에게 에르메스 핸드백 하나만 쥐여줘도 충분히 적합 판정 증명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16년에는 후에 연안에서 폐사한 물고기 수천 마리가 발견됐는데, 대만 제강소 포모사에서 배출한 폐기물이 원인이었다. 그 결과 베트남 전역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대만 기업 측에 상당히 유리한 조항을 제공해준 정부는 이 사태의 책임자를 엄중히 벌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독립된 언론이 없는 상황에서 각종 루머가 양산됐다. 대학에서 은퇴하고 페이스북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리엔은 “뇌물을 받는 지역 지도부 인사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중국 자본이 밀려오는 것이다. 베트남 대기업 뒤에는 중국 자본이 숨어 있다. 이들은 연안 곳곳을 사들이고 있는데, 이들 지역은 베트남의 국방에 있어서도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다. 이에 대해 정부가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정부 역시 막대한 뇌물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진위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이 같은 발언들은 SNS 상이나 사적인 대화 사이에서 넘쳐나고 있다. 

부패가 난무해 탈선적 양상까지 보이는 무분별한 도시화에 근거한 이 같은 개발정책의 결과는 비단 농민들의 저항이나 ‘침략자 중국’에 대한 불안심리의 유발 정도에 국한되지 않는다. 실비 팡셰트의 지적에 의하면, “베트남의 촌락 지역은 모두 해수면과 매우 가까운 편”이다. “간혹 하노이 홍강이 평야 지대로 범람할 때가 있다. 이렇게 지면을 다 콘크리트로 포장하려면 그만큼 배수 작업에 상당한 품이 들어가게 마련인데, 이 작업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강도가 센 열대 계절풍이 조금만 불어도 엄청난 대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 비정부기구 게르만 워치에 따르면 베트남 생태계가 점점 더 취약해지는 까닭에 베트남은 현재 기후 변화 취약 지역 가운데 세계 5위에 올라 있다.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의 분노 앞에서 당국은 대화 창구를 열어놓기 시작했다. 관련 지역 주민들은 당 관계자를 만나 면담을 갖게 되는데, 당 관계자들도 대개는 늘 같은 말만 반복하며 반론을 잠재우려 애쓴다. “이성을 찾으셔야 한다. 국익과 기업의 이익, 그리고 주민들의 이익이 조화를 이뤄야 하지 않겠나. 우리는 모두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러니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지역 당국에서는 주민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이다.(8) 

이런 말이 시위대를 달래기는 어렵다. 정부가 믿는 구석은 사실 따로 있다. 계속 높아지는 중산층의 지지다. 현재 상황에서 이득을 보고 있는 중산층 비율은 현재 전체인구의 13%를 차지하며, 이 비율은 향후 5년 안에 20%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하노이의 신흥부촌 에코파크다. 에코파크 역시 원주민들이 수년간 저항하다가 결국 경찰의 곤봉에 맞아 내몰린 뒤 구축된 지역이다. 

작은 플라워 샵 체인을 운영하고 있는 젊은 중산층 인사 푸옹 씨는 “언젠가 우리 집 가정부가 말하길 우리 집 빌라가 들어선 이 자리가 과거에는 이분이 농사짓다가 추방된 작은 밭이었다고 했다”며 얼굴을 붉혔다. 2년 전 그녀가 이사 온 이곳 에코파크의 집은 정원이 딸린 190㎡ 규모의 단독주택이다.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딱히 없지 않은가.” 커뮤니케이션 회사를 맡고 있는 탄 씨는 “이 농민들이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우리가 더 발전하고 싶다면 부수적인 피해는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지 않겠나”며 목소리를 높인다.

20년째 연평균 6~7%의 성장률을 기록 중인 베트남은 서방 민주국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나라다.(9) 빈곤문제도 성공적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세계은행에 의하면, 베트남에서 (하루 소득 3.50 달러 정도의) 빈곤층 인구의 비중은 1990년 60%에서 현재 10%로 감소했다. 그러니 정부의 토지수용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지역 엘리트 계층이 빠르게 부를 축적하도록 도와주는 이런 토지개발 계획은 직무능력이 없는 젊은 농촌청년 수십만 명을 고용시장에 쏟아붓는다. 오로지 인건비를 절감하고자 베트남에 진출한 (섬유, 전자, 자동차 부문의)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게 됐다는 사실에 베트남 청년들은 그저 행복해한다.(10) 

 

정부의 진압 앞에 무력한 시위대

아무리 그 규모가 크더라도 농민들의 저항은 늘 실패로 귀결된다. 이들의 투쟁은 기껏해야 일부 사업의 시행을 늦추는 결과만을 가져온다. 본격적인 시민운동을 조직할 법적인 근거가 없어 나라 도처에 흩어진 저항 세력은 강압적인 정부 권력 앞에서 너무도 미약하다. 언론은 모두 엄격히 통제를 받고 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혹은 지역적 차원에서나마 저항 세력을 규합할 유일한 방법은 현재로선 페이스북을 통해서 뿐이다. 정부 역시 이런 사실을 익히 알고 있으며, 인터넷상에서 반정부 활동을 벌였다는 이유만으로 시민들을 강압적으로 체포해가고 있다. 

2018년 4월,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에서는 “최소 97명의 양심수”를 집계했고, 이 수치가 “실제보다 훨씬 더 낮은 수치일 것”으로 보고 있다. 2019년 1월 1일 이후부터는 새 법이 발효돼 이제 웹 플랫폼상에서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간주되는 모든 발언들은 24시간 내내 임의로 삭제할 수 있게 됐다.  

 

자본주의의 유입과 공산주의의 선전

베트남에서는 현재 급격한 자본주의화가 이뤄지고 있다. 게다가 이는 지금까지도 유효한 공산주의 담론과도 그럭저럭 잘 어우러지고 있다. 건물과 거리, 도로변에서는 여전히 낫과 망치 모양이 그려진 붉은 깃발이 펄럭이고, 간혹 호치민 얼굴이 들어간 깃발도 눈에 띈다. 이런 깃발 위에는 당이 결정한 도시화 정책을 옹호하는 듯한 내용의 슬로건이 담겨 있다. “혁명 정신 발전시켜 조국의 산업화와 근대화, 국제사회로의 편입 목표를 성공적으로 실현하자”라거나 “부유한 인민, 부강한 조국, 민주적이고 교양적이며 공평한 사회의 목표에 이르기 위해 다 같이 함께하자”라는 식의 문구가 적혀 있는 것이다.

일부 단어는 무조건적으로 사용이 배제되기도 한다. 호치민 시립 공대에서 강의 중인 젊은 도시 계획 전문가 팜 둑 탕은 “여전히 ‘자본주의’라는 단어에는 매우 부정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이 단어의 사용은 금지되며, 대신 당에서는 ‘개발’, ‘근대화’, ‘국제 사회로의 편입’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교양’이란 단어도 배제되긴 마찬가지다. 경제학자 응우옌 반 푸는 “이 단어가 싱가포르나 일본 모델을 잠재적으로 내포하고 있다”고 짚어준다. “공손하게 행동하고, 잠옷 바람으로 거리에 나가지 않아야 하며, 바닥에 침을 뱉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교양스럽지 못한 이 행동들이, 우리가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과거 농민 사회에서 이뤄지던 행동들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러니 길거리의 노점상 같은 미천하고 불안정한 생계방식은 ‘교양 있는’ 도시화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연구원 다니엘 라베는 “비록 토지 수용 문제라는 고충을 겪고 있더라도 대다수 농민들은 도처에서 생겨나고 있는 이 콘크리트 세계를 동경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농민들에게 있어 논과 토지는 낭만적이지도, 매력적이지도 않다. 그저 진창과 거머리, 피로, 빈곤을 연상시킬 뿐이다.”

베트남 국민들 다수는 이런 공산주의 구호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으며, 젊은 세대일수록 그런 경향은 더 심하다. 패션 업계에 종사하는 28세의 사이공 출신 여성 리는 “반면 우리 부모님 세대는 여전히 이 슬로건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인정한다. “이분들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경로가 오직 국영 매체뿐이다. 그 때문에 서로 간에 말싸움이 자주 빚어지기도 한다.” 

450만 당원을 거느린 공산당은 이런 당의 메시지를 확산하기 위해 경찰(120만 명), 군대(예비역 500만 명), (여성 협회, 참전용사 협회, 노동자 협회, 청년 협회 등을 규합한) 조국 전선 등 대규모 조직과 기관 네트워크를 활용하기도 한다.(1) 반대로 농지를 잃은 농민들은 지도부가 하는 말과 행동 사이의 모순을 바로바로 지적하고 나선다. 호치민 시에 사는 ‘투 티엠’이란 이름의 한 여성은 “원칙적으로 공산주의란 인민의 안위를 위한 게 아니던가?”라며 자문한다. 

두옹 노이(Duong Noi)의 적재기 앞에서 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4년간 복역한 어머니를 둔 미엔 씨는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호치민은 가난한 농민들을 끌어들이면서, 식민지 치하에서 빼앗겼던 땅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공산당이 우리에게서 이 땅을 빼앗아가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1) Benoît de Tréglodé(책임 집필), 『베트남 역사: 식민지에서 현대까지Histoire du Vietnam de la colonisation à nos jours』, 소르본 대학 출판사, ‘Libres cours’ 컬렉션, Paris, 2018.

 

글‧피에르 돔 Pierre Daum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졸업. 『22세기 세계』 등의 역서가 있다.


(1) Marie Gibert & Juliette Segard, ‘L’aménagement urbain au Vietnam, vecteur d’un autoritarisme négocié(베트남 도심정비 사업, 협의된 전제주의의 매개수단)’, <Justice spatiale>, 2015년 7월, www.jssj.org
(2) Martine Bulard, ‘Le Vietnam se rêve en atelier de la planète 베트남, 세계 제2의 공장이 된 이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7년 2월호.
(3) Xavier Monthéard, ‘A Hanoï, les gratte-ciel dévorent les rizières 공산주의 유산 지우고 마천루 솟는 도시, 하노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0년 4월호.
(4) 비엠 동 주민들의 저항운동은 2009년 <누가 땅의 주인인가?>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됐으며, 프랑스에서는 영상교육원 ‘아틀리에 바랑 Ateliers Varan’을 통해 상영된 바 있다.
(5) ‘사오 sao’는 베트남에서 땅의 넓이를 세던 옛 단위다. 
(6) 1979년 2월 17일 베트남 북부로 침투한 중공군이 일으킨 이 전쟁은 한 달 후인 3월 16일에 끝났다.
(7) Kimberly Kay Hoang, ‘Risky investments: How local and foreign investors finesse corruption-rife emerging markets’,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vol. 83, no 4, Los Angeles, 2018년 8월.
(8) 도안 홍 감독의 영화 <누가 땅의 주인인가?>에서 발췌. 비엠 동 부구청장 또한 같은 발언을 한 바 있다.
(9) Jean-Claude Pomonti, ‘베트남에서 배척당한 사람들의 상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09년 8월호.
(10) 베트남은 세계 2위의 휴대폰 수출국이며, 삼성의 스마트폰 중 절반 이상은 베트남에서 조립된다. ‘Why Samsung of South Korea is the biggest firm in Vietnam’, <The Economist>, London, 2018년 4월 12일자 기사 참조.